295화. 암사자 - (9)
‘이제 더는 안 속는다.’
1회 초 알 디즌의 홈런으로 선취점을 낸 보스턴은 브루스터를 계속 몰아붙였다.
브루스터의 구위는 분명 위력적이다.
평균 95마일의 빠른 볼과 슬라이더처럼 휘어지는 커브, 이런 투수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문제는 아직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것, 가장 큰 문제는 패스트볼을 받쳐주는 커브가 가만두면 볼로 판정받는 경우가 많다는 거다.
그래도 구위는 좋아서 많은 삼진을 잡아내고 있지만 최근 타자들이 커브는 볼이라는 걸 알아채면서 볼넷도 많아지고 있다.
당연히 패스트볼 구위에 문제가 생기면 약점을 보일 수밖에 없는 타입, 빠른 볼이 맞아 나가면서 브루스터는 급격히 흔들렸다.
‘안 속는다고’
3회 초 보스턴의 공격, 고메즈는 초구를 골라냈다.
이제야 조금씩 보이는 브루스터의 약점, 커브를 골라낸 뒤 빠른 볼을 받아쳐 안타를 만들어냈다.
사소한 약점을 보여도 바로 반격당하는 살벌한 세계, 시즌 초반 6연승을 달렸던 브루스터는 메이저리그의 가혹함을 깨달았다.
“볼, 골라냅니다. 존 포르투나가 볼넷으로 출루하면서 1사 주자 1 - 2루가 되는군요.”
“브루스터가 지금까지 삼진 3개를 잡아내고 있지만 볼넷도 3개거든요. 투구 수도 벌써 58개, 관리가 전혀 안 되고 있습니다.”
이제 타석에는 알 디즌, 첫 타석에서 거한 한 방을 쏘아 올렸던 선수라 뉴욕 배터리는 바짝 긴장했다.
‘역시 넌 다카기보다 한 수 아래다.’
초구를 지켜본 디즌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구가 받쳐주는 투수라면 여기서 낮은 공을 던지거나, 체인지업을 구사해 땅볼을 유도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의 브루스터는 어느 쪽에도 해당이 되지 않는다. 커브는 거의 다 볼이고 지금 노려 쳐야 하는 공은 뭔가, 처음부터 답은 정해져 있었다.
‘괜찮아. 아직 여유 있다고’
예상외로 스트라이크 콜을 받은 커브, 하지만 디즌은 흔들리지 않고 빠른 볼만 노렸다.
‘저거 노리고 있는데’
한편, 사인을 받은 브루스터는 고개를 저었다. 누가 봐도 지금 타자는 빠른 볼을 노리고 있다. 그걸 알고도 들어가야 하나, 오늘 빠른 볼 구위가 평소 같지 않다는 건 브루스터 본인이 더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좌타자 상대 효율성이 떨어지는 커브를 또 던지나, 사인 교환이 길어지자 주심은 양손을 들어 경기를 중단시켰다.
“또 시간 끌면 경고야.”
한 번 더 경고를 받으면 볼 카운트 하나가 추가되는 상황, 브루스터는 빠른 볼을 집어넣었다.
“음 … 볼입니다. 카운트는 투 볼 원 스트라이크”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브루스터의 빠른 볼 구위는 좋은 편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죠. 올 시즌 메이저리그 빠른 볼 피안타율을 보면 가운데로 들어온 공이 0.316, 스트라이크 존 외곽에 걸치는 공의 피안타율은 0.247에 불과했습니다. 가장 좋은 구위는 제구라는 게 다시 한 번 증명된 거죠. 브루스터는 지금 스트라이크와 볼의 구분이 너무 뚜렷합니다.”
최근 메이저리그는 무브먼트보다 제구가 각광을 받고 있다.
스트라이크 바깥쪽을 찌를 수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게 증명되면서 포심을 버리고 투심에만 집중하는 투수도 나타났다.
볼넷을 주더라도 철저하게 스트라이크 존 사이드를 노리겠다는 것, 물론 이런 극단적인 피칭이 효율적이라고 볼 순 없지만, 적어도 타자에게 불쾌감은 줄 수 있다.
타자 입장에서 집중력을 유지하며 볼을 보는 건 피곤한 일, 빠른 승부와 밀당, 어느 쪽이 더 투수에게 유리한 볼 배합일까.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메이저리그지만 해답을 찾기 위한 선수들의 도전과 실험은 반복됐다.
“후우 ~ ”
브루스터는 여기서 낮은 빠른 볼로 땅볼을 유도하고 한숨을 돌렸다.
병살타로 이어지며 겨우 마무리한 이닝, 구위면 다 될 줄 알았는데 역시 낮게 던져야 하는 건가.
이번 이닝에 너무 많은 공을 던진 탓인지 생각을 하는 것도 귀찮았다.
‘답은 나도 모른다. 아직도 찾고 있는 중,’
이제 뉴욕의 3회 말 공격, 다카기는 평소처럼 투구를 이어갔다.
마운드에서 8년을 버텼지만 생각해보면 패턴은 몇 번이나 바뀌었다.
어느 때는 빠른 볼 슬라이더 조합, 어느 날은 빠른 볼 체인지업 조합, 그러다 뜬금없이 투심 패스트볼을 앞세우며 땅볼 유도, 작년 시즌은 투구 수를 줄이기 위해 스트라이크 존 가운데를 적극 공략했다.
그러다 올 시즌은 다시 좌우 제구에 신경 쓰는 타입으로 변신, 정립된 투구 스타일이 없다.
다만 중요한 건 타자를 잡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한다는 것, 그것이 오늘의 다카기를 만들었다.
오늘도 내일도 살아남기 위해 연구할 뿐, 생존을 위한 투쟁은 계속됐다.
“바깥쪽!! 들어왔다는 판정입니다!! 삼진!! 오늘 경기 10번째 탈삼진을 기록합니다!!”
“다키가 오늘로 통산 16번째 뉴욕과 맞대결을 벌이고 있거든요(포스트 시즌 제외). 그런데 두 자릿수 탈삼진을 잡은 게 13경기나 됩니다. 역대 어느 선수도 뉴욕을 상대로 이런 투구를 한 적이 없어요.
“그만큼 대단한 선수라는 걸 증명하는 거죠. 그리고 지금 뉴욕이 약한 것도 아닙니다. 현재 AL 동부지구 1위를 달리고 있는 팀이에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카기는 다음 타자를 땅볼로 처리하고 마운드를 내려갔다.
6회까지 2피안타 무실점 투구, 어린 딸을 조롱했던 외침도 이제는 찾아보기 어렵다.
역시 적의 입을 다물게 하는 건 실력으로 눌러버리는 것뿐, 하지만 다카기는 그 정도로 만족하지 않았다.
‘내 딸을 웃음거리로 만들었지? 너희들에게도 굴욕을 선사해주마.’
7회에 이어 8회까지 점령한 철벽의 에이스, 다카기는 9회에도 마운드에 올랐다.
현재 투구 수는 109개, 탈삼진은 15개, 뉴욕의 또 다른 흑역사를 만들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이번에는 떨어집니다!! 삼진!! 오늘 16번째 탈삼진입니다!!”
“제가 기록을 찾아봤는데 뉴욕 타선이 역대 한 경기에서 가장 많은 삼진을 당한 게 17개입니다. 지난 1975년, 필라델피아와의 원정경기였는데 연장 10회까지 가면서 3명의 투수를 상대로 당한 굴욕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아니에요. 한 선수에게 농락당하고 있습니다.”
다카기는 선두 타자 모리슨을 4구만에 헛스윙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오늘 안타는 없고 삼진만 2개 헌납, 늘 당하던 일이지만 모리슨은 씁쓸한 얼굴로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아직 멀었다.’
다카기는 다음 타자 제레미 브라운을 좌익수 플라이로 처리했다.
삼진을 하나라도 더 잡아야 되는데 겨우 플라이로 허비하다니, 다음 타자 숀 스팸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넌 도대체 정체가 뭐냐.’
초구를 지켜본 스팸은 전광판에 찍힌 숫자를 보고 경악했다.
9회에도 99마일을 뿌려대는 괴물, 난 저런 자식을 상대로 지난 경기에서 홈런을 때려낸 건가. 영광이라고 해야 할지,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들썩거렸다.
“다시 떨어집니다!! 볼 카운트는 노 볼 투 스트라이크!!”
“떨어지는 궤적을 보세요. 마치 지면이 볼을 끌어당기는 것 같지 않습니까? 저기만 중력이 더 작용하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죠.”
“치는 순간 눈에 보이지도 않을 겁니다. 스팸이 이런 스윙을 하는 건 정말 오랜만에 보네요.”
빠른 볼에 타이밍을 맞추고 있던 스팸은 꼴사나운 스윙을 돌렸다.
도무지 답이 안 보이는 구위, 다시 빠른 볼에 초점을 맞췄지만 몸 쪽을 찌르는 궤적에 얼어붙었다.
이렇게 경기 종료, 9이닝 2피안타 17탈삼진 게임을 펼친 다카기는 엄지손가락을 입에 무는 세리머니를 했다.
얼마 전 태어난 딸의 축복을 기원하는 아빠의 마음, 공을 받아낸 포르투나 포수도 다시 한 번 축하의 말을 건넸다.
그리고 이어지는 인터뷰, 라커룸에 몰려든 기자들은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왕이시여, 브루스터의 반란을 완벽히 진압하셨는데 만족하십니까?”
한 기자는 오늘 경기를 진압작전에 비유했다.
지난 8년 동안 절대왕좌로 군림한 다카기, 그런데 올 시즌 브루스터가 좋은 투구를 펼치며 다카기를 꺾자 뉴욕 여론은 다카기의 시대가 끝났다며 반란을 일으켰다.
보스턴 기자들에겐 오늘 투구가 반란 진압처럼 보였겠지, 다카기는 오묘한 미소를 지었다.
“반란은 오늘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제 목을 노리는 선수들은 앞으로도 계속 나타나겠죠. 반란은 초기 진압이 중요합니다. 앞으로도 불순한 말을 하는 자들이 있다면 언제든 말씀해주시길 바랍니다.”
“그건 저희도 바라던 일입니다. 당신이 알현을 외면하지 않는다면 언제든 정보를 제공하겠습니다.”
기자들에게 인터뷰 잘해주는 것만큼 좋은 선수도 없다.
어린 선수들 중에도 인터뷰를 거절하는 건방진 놈들이 있는데, 그에 비하면 다카기는 품격을 갖춘 사람, 왕을 대하는 자세는 더욱 공손해졌다.
“얼마 전에 공주님이 태어났는데, 불순한 말을 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투구는 그에 대한 감정도 실려 있었던 겁니까?”
“당연하죠. 가족이 놀림거리가 됐는데 화가 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그리고 자꾸 제 딸이 못생겼다고 하는데, 절대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제 얼굴을 보면 답이 나오지 않습니까?”
은근 잘난 얼굴까지 어필, 기자들을 즐겁게 해 준 다카기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보스턴으로 돌아갔다.
[she looks so cute, You don't have the right to tell me other words]
= 내 딸은 너무 귀여워, 다른 말 할 권리는 너희들에게 없어
그런데 이때 키리코가 또 일을 저질렀다.
딸이 못생겼다는 댓글이 그렇게 가슴에 박혔던 건가. 하지만 음식이 맛이 없다면 그걸 고객에게 설명시킬 이유는 없다.
사람 외모도 마찬가지, 누군가에게는 잘 생겨 보일 수도 있지만 그저 그럴 수도 있다.
우리 눈에 귀여우면 됐지, 그걸 왜 다른 사람들에게 납득시키려고 하는 건가. 다카기는 제발 그만하라며 아내를 말렸다.
“속상하단 말이야. 이렇게 귀여운데 왜 못생겼다고 하는 건데?”
“그걸 나한테 물어봤자 소용없어. 그러니까 내가 사진 찍지 말자고 했잖아.”
딸이 태어났을 때 다카기는 아내에게 사진은 절대 찍지 말자고 했다.
이제 막 태어난 아기는 피부가 쭈글쭈글하고 못생긴 게 당연하다.
그런데 그걸 굳이 찍어서 SNS에 올렸으니, 거기다 뉴욕 팬들이 날 조롱하는 도구로 이용당하기까지 했다.
아내를 탓하는 건 아니지만 속이 상한 건 아빠도 마찬가지, 남편의 질책에 토라진 키리코는 딸을 품고 구석으로 기어들어 갔다.
8년 동안 같이 살면서 부부싸움은 이게 처음, 마음이 약해진 다카기는 아내를 다독였다.
“나 화낸 거 아니야. 자기가 그러면 내가 무안해지잖아.”
“흥 ~ 몰라”
오늘따라 어린애처럼 구는 아내, 그제야 다카기는 내가 딸 2명 키우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알았어 알았어 내 계정에도 올릴게.”
“정말이야?”
“그래, 우리 딸 귀여운지 아닌지 세계적으로 투표 한 번 받아보자.”
다카기는 딸의 최근 사진을 SNS에 올렸다.
그 사이 주름도 많이 펴지고 미모가 많이 올라온 아기, 팬들은 너무 귀엽다며 압도적인 지지를 표했다.
“흥 ~ 그럼 그렇지, 우리 딸이 못생겼을 리가 없잖아?”
그제야 만족한 표정을 짓는 아내, 다카기는 어이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원래 저렇게 집요한 성격이었나. 하긴 학창시절부터 원하는 건 반드시 이뤄냈던 사람, 그 끈기에 넘어간 게 나 아닌가.
겉은 순해 보이지만 한 번 자극하면 끝장을 보는 성격, 앞으로 또 무슨 사고 터지는 건 아닌지 괜히 염려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