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294화 (294/361)

294화. 암사자 - (8)

‘드디어 나오는구나.’

6월, 다카기는 어느 때보다 긴장된 얼굴로 병원을 찾았다.

첫째와 둘째는 상황이 완료됐을 때 품에 안았지만 이번에는 예외, 병상에 누워 힘들어하는 아내의 손을 꼭 잡아줬다.

“아이 머리가 보여요!! 얼른 보세요!!”

간호사의 처절한 외침, 정말 봐도 되는 건가. 머뭇거리던 다카기는 문제의 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내가 살면서 이렇게까지 놀랐던 적이 있었던가, 그런데 나올 듯 말 듯 걸쳐 있는 아기 머리와 힘들어하는 아내를 번갈아 보다 보니 징그럽거나 속이 거북해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가 없는 사이 아내는 이런 험난한 과정을 2번이나 거쳐냈다니, 괜히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으에에엥 ~ ”

“축하합니다!! 공주님이네요!!”

드디어 끝난 사투, 아내에게 집중하고 있던 다카기는 핏덩이가 채 가시지 않은 아이를 품에 안았다.

많이 눌린 머리, 나중에 원 상태로 돌아온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아이가 엄마 뱃속을 나오면서 겪은 고통이 그대로 가슴에 박혔다.

“여보 이것 봐. 공주님이네.”

“으응 … ”

키리코는 남편이 품에 안겨 준 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조금 지쳐있지만 아이를 품에 안을 힘은 남은 엄마, 엄마를 알아보는지 힘차게 울어대던 아이는 금세 울음을 그쳤다.

“자기야, 왜 그래?”

“아니야.”

다카기는 아내의 질문에 얼른 고개를 돌렸다.

시 할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덤덤하게 받아들였던 남편이 눈물을 보이다니, 내가 괜한 말을 한 건가. 괜히 미안해진 키리코는 남편을 다독였다.

‘이제야 부모가 된 것 같네.’

다카기는 마음속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돈도 벌고 가족들도 부양하고 있지만 부모의 책임이라는 걸 오늘에야 제대로 이해한 기분, 자식은 부모를 선택하지 않는다.

남녀가 부모가 되길 선택할 뿐, 아이를 양육하는 게 힘들고 귀찮다면 왜 부모가 되길 선택한 건가. 그런 무책임의 대가는 자식이 짊어질 뿐, 다카기는 자신이 선택한 것은 확실하게 책임을 지는 성격이다.

그래서 야구도 남편, 아빠 노릇도 열심히 하고 있지 않은가.

특히 다카기는 가족이라면 열일 제쳐두고 달려들었던 할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은 편, 나와 아내의 선택으로 태어난 아이들을 잘 키워야겠다는 책임감은 더욱 굳건해 졌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다카기는 동생을 빤히 바라보는 둘째를 지켜봤다.

막내라 그동안 엄마 아빠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살았는데 동생이 태어나서 서운한 건 아닌지, 일단 품에 안고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동생 보니까 어떤 생각 들어? 응?”

“ …… ”

몇 번이나 물어봤지만 반응이 없는 녀석, 동생을 품고 있는 엄마를 쳐다보는 걸 보니 질투심을 느끼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건 자연스러운 일, 다카기도 어렸을 땐 누나가 엄마 곁에 있는 게 그냥 싫었다. 이런 때는 아이에게 관심을 주는 것도 방법, 다카기는 아들에게 오빠의 책임감을 부여했다.

“이제 너도 오빠네”

“오빠요?”

“그래, 엄마 아빠처럼 누군가를 보살펴줘야 할 때가 온 거야.”

아빠와 눈을 마주친 나가요시는 다시 동생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나는 앞으로도 엄마 아빠의 귀여움을 받을 줄 알았는데 이젠 내가 그 역할을 해야 한다니, 받아들이긴 어려웠지만 낑낑거리는 동생을 보니 마음이 살짝 움직였다.

“쟤 왜 울어요?”

“아기는 원래 그런 거야. 너무 어려서 엄마 아빠가 보살펴 주지 않으면 안 돼. 도와 달라고 우는 거야. 너도 당황했을 때 엄마 찾고 그랬지? 쟤도 똑같은 거야.”

“아 ~ ”

기특하게도 단번에 이해한 아들, 엄마 품을 내준 게 조금 속상했지만 도움을 받아야 하는 동생의 입장을 배려해줬다.

“그럼 제가 보살펴 주면 앞으로 저도 귀여움받는 거죠?”

“하하 ~ 그럼, 훌륭한 오빠니까 이전보다 더 귀여워해 줘야지.”

아빠의 관심에 나가요시는 배시시 웃었다.

역시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라나는 법, 책임감이라는 것이 생겼는지 아이는 목이 마르다는 엄마의 심부름꾼을 자처했다.

우당탕!!

“앗!!”

그런데 여기서 작은 실수가 나왔다.

물컵을 가지고 오다가 떨어트린 것, 얼마나 놀라고 당황했는지 나가요시는 아빠의 눈치를 살폈다.

“이잉 ~ ”

“아이고 … 괜찮아? 안 다쳤어?”

다카기는 잉잉거리는 아들을 얼른 품에 안았다.

누군가를 책임지기엔 어린 아들, 내가 너무 어려운 미션을 부여한 건가. 반면 재미있다며 킥킥거리는 아내, 다카기도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사진 찍어둘까?”

“안 돼, 우리 공주님 인생에 굴욕을 남길 순 없어.”

키리코는 딸 사진을 찍어두고 싶었지만 다카기는 완강히 거부했다

며칠만 기다리면 쭈글쭈글한 얼굴이 펴지고 귀여움도 추가되겠지, 사진을 찍는 건 그 다음도 늦지 않다며 버텼다.

“나는 이 추억을 평생 남기고 싶단 말이야.”

“안 돼, 절대 안 돼”

끝까지 거부하는 남편, 그 고집을 누가 꺾으랴 결국 남편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몰래 사진을 찍었다.

‘하아 ~ 이제 얻을 건 다 얻었다.’

육아 휴가를 마친 다카기는 뉴욕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남자로 태어나 얻을 건 다 얻었는데 딸이 하나 없었던 게 늘 마음에 걸렸다. 마지막 남은 퍼즐조각이 완성된 기분이랄까.

한껏 부푼 가슴으로 동료들과 얼굴을 마주했다.

“어이 ~ 인생의 재미가 하나 줄어서 어쩌나?”

“시끄러워. 너 같은 인생의 애송이하고는 말 섞고 싶지 않아. 멍청아”

다카기는 하버스태드와 신경전을 벌였다.

나이가 30대 중반을 넘어 후반으로 가고 있는데 아직도 정착을 못한 바람둥이, 그에 비하면 나는 일찍 결혼하고 아이를 셋이나 두면서 정신적으로 성숙해진 사람이다. 나이는 저쪽이 나보다 훨씬 많아도 인생경험은 내 쪽이 선배, 한 방 먹은 하버스태드는 싱거운 미소를 지었다.

[못생겼다]

[징그럽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아내 SNS 계정에 눈에 거슬리는 댓글이 올라왔다.

남들은 몰라도 내 눈에는 귀여워 보이는 딸, 보스턴 팬들은 공주님의 탄생을 축하한다는 댓글을 달았지만 일부는 인신공격을 퍼부었다.

‘누군지 대략 알겠다.’

다카기는 범인의 정체를 대략 눈치챘다.

몇 달 전 SNS에서 뉴욕 팬들과 신경전을 벌였던 아내, 뉴욕 여론이 앤드류 부르스터의 시대가 왔다고 난리를 쳤을 때, 키리코는 그래봤자 최후의 승자는 우리 남편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뉴욕 입장에선 그런 소리를 하는 아내가 마음에 안 들었겠지.

그렇다고 해도 이제 막 태어난 아이에게 인신공격을 하는 건 아빠로서 참을 수가 없었다.

‘어 그래, 7월 4일, 두고 보자.’

마침 7월에 잡힌 뉴욕 원정 등판, 지난 경기에서 당한 패배도 갚아줘야 하는데 마침 잘 됐다며 이를 갈았다.

[This is what your daughter looks like]

= 네 딸은 이렇게 생겼어

아니나 다를까 몇몇 쓰레기들이 정체를 드러냈다.

아내가 글을 삭제했지만 그 사이 딸 사진을 캡처한 놈들, 대문짝만하게 인쇄해서 흔들어 대고 있는데 하는 짓이 너무 천박해 눈길도 주지 않았다.

‘오늘 지면 우리는 다 죽는다.’

‘알아서 잘 하자고’

보스턴 선수들도 나름대로 각오를 다졌다.

오늘 아침부터 심기가 불편해 보였던 에이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전쟁터에 나가는 전사처럼 투지가 흘러넘쳤다.

클럽하우스에서 한마디도 하진 않았지만 그게 더 무서워 보였던 게 사실, 오늘 지면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거라는 건 누구나 이해했다.

“자, 오늘 뉴욕은 앤드류 브루스터를 선발로 앞세웁니다. 올 시즌 15경기 등판 10승 3패, 평균자책점 2.37, 91이닝 동안 볼넷 31개, 탈삼진은 117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평균 95마일의 빠른 볼, 투심, 커브를 던지는데요. 커브의 횡적 변화가 크고 구속도 빠르기 때문에 굳이 따지자면 슬러브에 가깝습니다.

브루스터는 포심 비율이 55%, 커브 비율이 32%인 투 피치 투수, 하지만 커브 비율이 높아 볼 배합이 뻔하지 않다.

뭣보다 커브의 구위가 위력적, 구위만으로 타자를 압도하고 있다.

다만 약점이 있다면 좌타자 상대로 조금 약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 커브가 슬라이더처럼 휘어나가기 때문에 우타자 상대로는 쓸 만하지만 좌타자 입장에서 그다지 위력적이지 않다.

가끔 체인지업이나 투심을 던지지만 다카기처럼 완성도가 높지 않다는 것도 단점, 이 부분을 개선하지 못하면 다카기의 시대를 밀어내는 건 어려웠다.

따악 ~ !!

첫 타자 고메즈(우타)는 잡아냈지만 다음 타자 포르투나(좌타)에게 좌익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를 허용,

여기서 좌타인 알 디즌이 타석에 들어섰다.

알 디즌은 작년 시즌 40홈런, 140타점을 넘기며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그런데 올 시즌은 반환점을 앞두고 14홈런, 57타점에 그치고 있다. 작년의 활약은 우연이었던 건가. 하지만 올해도 20홈런 후반에 100타점 이상은 기대해 볼 수 있는 활약, 위험한 타자라는 건 분명했다.

따아악 ~ !!

“우측으로!! 높게 떠오른 타구!!!! 그대로 담장 위를 넘어갑니다!!!! 알 디즌의 선제 투 런 홈런!! 보스턴이 2대 0으로 앞서나갑니다!!”

“바로 이거죠. 커브가 옆으로 꺾여야 되는데 가운데로 몰리고 말았습니다.”

“지난 맞대결에선 투심을 잘 활용하면서 보스턴의 좌타 라인을 봉쇄했는데, 요즘은 투심 제구가 잘 안 되고 있네요. 그러면서 평균자책점도 오르고 있습니다.”

타구를 확인한 브루스터는 펄쩍 뛰며 분노를 표출했다.

브루스터는 홈런이나 장타를 맞았을 때 액션이 큰 편, 일각에선 정신력이 약한 거 아니냐는 핀잔을 주는데, 사람마다 감정을 다스리는 방법은 다른 거 아닌가.

화를 뿜어낸 브루스터는 언제 그랬냐는 듯 침착하게 후속 타자들을 처리했다.

“우우우 ~ 우 ~ ”

“네 딸은 못 생겼어!!”

이어지는 뉴욕의 1회 말 공격, 다카기는 순간 움찔했지만 이런 경험이 한두 번도 아니라 화를 억눌렀다.

‘오늘따라 힘이 넘치는데’

초구를 받아낸 포르투나 포수는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육아 휴가로 며칠 쉰 탓도 있겠지만 미트에 박히는 공의 무게가 평소와는 분명 다르다. 이런 걸 사람이 맞으면 어떻게 될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진짜, 어지간하면 가족은 건드리지 말자.’

타석에 들어선 모리슨은 홈팬들을 보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모리슨도 어머니 때문에 보스턴 팬들에게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분명 제작사와 합의를 하고 찍은 성인 비디오인데 나중에 그 책임을 제작사에게 떠넘긴 일로 이미지가 나락으로 떨어진 엄마,

모리슨도 그런 엄마가 창피하고 미웠지만 이제는 이해하고 화해했다.

야유를 하더라도 지켜야 할 선이 있는데 팬이라는 이유로 저런 행동이 용납될 수 있을까.

물론 모리슨은 몇 번이나 위협구를 던진 다카기를 좋게 보지 않았지만, 팬들의 행동을 변호할 생각도 없었다.

딱 ~ !

“유격수 정면!! 잡아서 1루에 송구합니다!! 원 아웃!! 다카기가 첫 타자를 공 하나로 잡아냅니다.”

“초구부터 휘둘러봤는데 힘이 부족했네요. 오늘 다카기의 컨디션은 최고조입니다.”

제대로 달아오른 다카기는 세 타자를 가볍게 범타처리하고 마운드를 내려갔다.

그럴수록 더 높아지는 딸을 향한 조롱과 야유, 이때 구장관리인이 문제의 팬에게 접근했다.

“그 사진 이리 내놔요.”

“아니 왜요?!!”

“당신은 구단의 품위를 떨어트리고 있다고, 당장 내놓지 않으면 퇴장조치 하겠습니다.”

메이저리그 최다 우승을 기록한 명문 팀이 태아 사진을 들고 조롱하는 팬을 그냥 놔둔다는 것도 웃긴 일, 문제의 팬은 절대 줄 수 없다고 버텼지만 고집을 부리다 퇴장조치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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