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화. 암사자 - (7)
‘이렇게 된 이상 즐기자.’
시즌 중반이 되도록 경기력이 올라오지 않자 보스턴 팬들은 이상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
보스턴은 2031년까지 지역 방송으로 30억 달러의 중계권이 걸려 있다. 그만큼 많은 팬들이 지켜보는 방송, 그런데 한 팬이 표어를 들고 그라운드에 난입하면서 큰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The state government need to get people who are unemployed back into work and ensure that people who leave school get opportunities for work]
= 주정부는 실직자가 일자리를 얻고 졸업생들이 직장을 구할 기회를 줘야 한다.
최근 경기가 어려워지면서 높아지고 있는 실업률, 졸업 후 2년이 지나도록 직장을 잡지 못한 학생은 그라운드 난입을 통해 자신의 뜻을 보스턴 일대에 전파했다.
관중난입은 분명 잘못된 것이지만 사회적 문제를 어필한 팬은 많은 박수를 받았고, 이게 어긋난 방향으로 진행되면서 팬들이 하나둘 그라운드에 난입하기 시작했다.
“거기 서!! 서라고!!”
“뭐 어때?!! 어차피 지는 게임이잖아!! 우리는 즐길 권리가 있어!!”
다카기는 엉망이 된 그라운드에 깊은 한숨을 뿜어냈다.
예능 무대가 된 신성한 장소, 차라리 관중석에서 욕을 할 것이지 이건 아니지 않은가. 이런 상황이 반복되자 선수들도 경기에 집중하질 못했다.
“경계를 더 강화하게.”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건 수더랜드 단장도 마찬가지, 단장의 지시대로 평소보다 많은 요원이 배치됐지만 며칠 후 또 문제가 터졌다.
“여러분!! 우리 모두 함께 즐겨요!!”
이번엔 여성 팬의 난입, 누가 나갈지 눈치를 살피던 요원들은 하나둘 그라운드로 향했다.
“아가씨, 손대고 싶지 않으니까 얌전히 협조해주세요.”
“대보려면 대보시던가!!”
여성 팬은 웃옷을 벗더니 그대로 요원 얼굴에 집어던졌다. 그래도 지금은 그럭저럭 봐줄 만한 편, 그런데 노출 강도가 조금씩 올라가자 다카기는 눈을 돌려 버렸다.
내가 이런 추태를 보자고 경기장에 출근한 건가.
팀 성적이 부진하니 최고연봉자로서 할 말은 없지만, 이런 걸 재미있다고 해주는 팬들의 수준에 할 말을 잃었다.
정말 야구보다 저런 게 더 재미있단 말인가,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몰락해버린 건지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하버스태드, 난입한 여성과 은밀한 하루?]
한 기자가 하버스태드가 난입한 여성과 하룻밤을 보냈다는 기사, 하지만 하버스태드는 절대 그런 일 없었다는 입장을 내놨다.
“모두들 알겠지만 내 취향은 확고하다.”
하버스태드는 본의 아니게 커밍아웃을 해버렸다.
그동안 내가 만난 여성은 대부분 흑인, 정확하게 말하면 갈색머리에 구릿빛 피부를 가진 여성을 선호한다. 파파라치에 찍힌 사진을 봐도 확인할 수 있는 사실, 그런데 문제의 여성은 백인이다.
거기다 특별히 매력적이라고 할 순 없는 사람, 조금 어이없는 전개지만 팬들은 그럴 수도 있겠다며 납득해버렸다.
“소설을 쓰려면 최소한 내 취향은 알아보기 바란다. 이번 기사는 개연성이 없어서 못 봐주겠다.”
확인사살까지 확실한 인터뷰, 그렇게 논란은 잦아들었지만 다카기는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시즌 13번째 등판에 나섰다.
시즌 성적은 6승 2패, 평균자책점 2.24, 나쁘지 않은 성적이지만 작년 시즌이 워낙 대단했던 탓인지 상대적으로 조금 초라해보였다.
하지만 이게 초라해 보인다는 건 그 선수의 위상을 증명하는 지표일 뿐, 피트 오어는 다카기는 여전히 메이저리그 최고의 선발이라는 믿음을 드러냈다.
‘후우 ~ 잘 할 수 있을까.’
1회 초 원정 팀 탬파베이의 공격, 포수 마스크를 쓴 존 포르투나(Fortuna)는 깊은숨을 들이쉬었다.
주전 포수는 호프만이지만 전 경기를 소화할 순 없는 일, 거기다 호프만은 기본적으로 방망이가 떨어지는 선수다.
수비에서 만회를 해준다고 해도 아쉬운 건 아쉬운 일, 반면 최근 콜 업된 포르투나는 3경기에서 타율 0.333, 1홈런, 3타점, 좋은 활약을 보여줬다.
보스턴의 주전 포수 호프만은 3년 전 보스턴과 4년 계약을 맺었고 내년에는 계약이 끝난다.
보스턴 입장에선 재계약보다 후계자를 찾는 게 우선, 포르투나에겐 기회지만 메이저리그 콜 업 후 포수 마스크를 쓴 건 오늘이 처음이다.
거기다 파트너는 메이저리그 최고의 선발 투수, 다카기는 경기 전 포르투나의 긴장감을 풀어주기 위해 미끼를 던졌다.
“오늘 퍼펙트게임 하고 선물 받아라.”
메이저리그에는 투수가 퍼펙트게임을 달성하면 포수 마스크를 썼던 포수에게 고급 시계를 선물하는 전통이 있다.
그중에서도 값비싼 롤렉스를 선물하는 게 관례, 다카기는 일본에서 퍼펙트게임을 달성했을 때 호프만에게 2천 4백만 원짜리 시계를 선물했다.
이제 막 콜 업 된 선수에겐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지만 다카기는 그 정도 선물을 할 수 있는 재력을 갖춘 선수, 팀 분위기도 그렇겠다 여기서 내가 뭔가 기록을 달성하면 분위기가 달라지지 않을까.
다카기는 많은 것을 어깨에 짊어지고 투구에 나섰다.
‘대우는 확실히 해 줘야지.’
주심을 맡은 폴 젠킨스는 바깥쪽에 걸친 공을 잡아줬다.
다카기는 이제 메이저리그 8년 차에 접어든 베테랑, 그 실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200이닝을 넘게 던져도 볼넷은 20 ~ 30개 밖에 주지 않는 제구의 대가, 내가 주심이라도 이런 선수에게 예우를 표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너무한 거 아냐?’
물론 탬파베이 선수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바깥쪽 꽉 차는 공을 계속 잡아주면 이쪽은 난감할 뿐, 몇 번 항의를 해 봤지만 돌아온 답은 단호했다.
“마운드에 누가 있는지 모르나? 자네만 못 치는 거 아니야.”
그렇다는데 뭘 어쩌겠나. 다카기가 한 경기에 내주는 볼넷 수를 알고 있는 탬파베이 선수들은 현실을 받아들였다.
“바깥쪽!! 따라 나옵니다. 삼진!! 빠른 볼로 스윙을 유도합니다.”
“빠른 볼을 결정구로 쓸 수 있다는 게 이 선수의 무서움이죠. 올 시즌 빠른 볼 헛 스윙률은 33%입니다. 작년과 큰 차이는 없어요.”
다카기는 예전처럼 바깥쪽 높은 코스를 활용했다.
타자 입장에선 빠른 볼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눈에서 멀어지며 들어오기 때문에 급하게 배트를 돌릴 수밖에 없다.
중심이 무너질 위험이 높아지는 건 당연, 그럼 골라내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카운트가 몰린 상황에선 어지간한 공은 휘둘러야 된다.
공도 위력적이지만 타자의 입장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는 뜻, 공을 받는 프로투나도 마음속으로 감탄사를 연발했다.
‘와 ~ 어떻게 이런 공만 골라서 던지지?’
야수인 내가 봐도 답이 없는 공들, 거기다 오늘 주심은 다카기에게 매우 친절하다.
콧대 높은 주심이 이런 판정을 한다는 건 이 투구에 그만큼 존경을 표하고 있다는 뜻, 이런 명품 투구를 내가 망치면 되겠나. 포르투나는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떨어트렸고!! 포수가 잡아 1루로 송구합니다!! 투 아웃!! 오늘 경기 9번째 탈삼진입니다.”
“수비가 생각보다 괜찮네요. 방망이도 제법 쓸 만한 것 같고, 착실히 성장하면 좋은 포수가 될 것 같습니다.”
피트 오일 위원은 포르투나에게 기대를 걸었다.
보스턴은 최근 10년 동안 포수 때문에 고민한 적은 거의 없다.
데이비드 크로스 - 도날드 울반스키 - 스탠리 호프만, 이 세 선수가 지난 12년 동안 월드시리즈 우승 9회를 함께했다.
다만 순수한 보스턴 혈통은 크로스와 호프만 뿐, 두 선수는 수비는 확실하지만 공격력이 다소 아쉽다.
반면 포르투나는 작년 시즌 마이너리그에서 27홈런 시즌을 달성, 올해도 5월 말까지 15홈런을 쳐내며 장타력을 인정받았다.
최근 나사가 빠진 어린 선수들에 비하면 정신력도 성숙한 편, 기대가 되는 건 당연했다.
따아악 ~ !!
“자!! 이 타구는 높게!! 날아올라 ~ !! 담장 밖으로 넘어갑니다!!!! 존 포르투나의 투런 홈런!! 메이저리그 통산 2번 째 홈런입니다!!”
“역시 파워가 대단하네요. 또 다른 역사의 등장입니까?”
6회 말, 포르투나는 6대 0으로 달아나는 대형 홈런을 쏘아 올렸다.
스탯 캐스트가 측정한 비거리는 443피트, 너무 쓸데없이 멀리 친 건가. 실력에 비해 겸손한 포르투나는 덤덤한 얼굴로 베이스를 돌았다.
이게 얼마만의 압도적인 경기인가, 잇따른 관중난입으로 어수선했던 브라민 파크는 관중의 경건한 환호로 달아올랐다.
“다시 한 번!! 바깥쪽!! 삼진입니다!! 오늘 경기 13번째 탈삼진!! 철벽의 에이스는 올 시즌도 건재합니다!!”
“수비만 조금 받쳐주면 퍼펙트게임도 가능합니다. 역대 어느 선수도 가지 못한 길이에요.”
경기는 어느덧 8회, 피트 오어는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역대 그 어느 선수도 퍼펙트게임 2회는 달성해내지 못했다. 다카기는 이미 1회를 달성했지만 그건 일본에서 치른 퍼포먼스, 이곳에서 역사가 탄생한다면 구단 입장에서도 엄청난 영광 아닐까.
특별석에 앉은 수더랜드 단장도 긴장된 얼굴로 경기를 지켜봤다.
“뭐야?!! 저거 뭐냐고?!!”
그런데 이때 돌발 상황이 터졌다.
또 관중 난입, 수더랜드 단장이 펄펄 뛰는 사이, 경기장에 뛰어든 요원들은 맹렬한 추격에 나섰다.
“나하고 결혼해 줘요!!”
문제의 여성 팬은 곧장 마운드로 돌진했다.
두 팔을 벌려 안아달라고 뛰어들었지만 다카기는 외면하고 더그아웃 쪽으로 피신, 그 사이 요원들에게 검거된 팬은 짐짝처럼 끌려 나갔다.
‘저런 멍청이가 … ’
‘우리가 저런 행동에 환호를 보내고 있었다고?’
그제야 팬들은 자신들이 그동안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퍼펙트게임을 앞둔 이 신성한 자리에 관중난입이라니, 절대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이다.
거기다 리듬이 깨졌는지 다카기는 다음 타자에게 안타를 허용했고, 이렇게 브라민 파크 통산 1호 퍼펙트게임은 물거품이 됐다.
“그 XX는 영원히 아웃이야!!”
경기 후, 화가 머리끝까지 난 수더랜드 단장은 문제의 팬을 영구출입 금지시켰다.
그동안 똑같은 짓에 동조했던 팬들도 입을 싹 닫고 태세전환, 반면 다카기는 덤덤한 얼굴로 기자들 앞에 섰다.
“다카기 선수, 퍼펙트게임을 아깝게 놓치셨는데 역시 문제의 팬 때문에 리듬이 흔들린 겁니까?”
“이유야 어쨌든 안타를 맞은 건 접니다. 변명을 앞세우고 싶진 않습니다.”
생각보다 담담한 반응, 이때 한 기자가 눈치 없는 질문을 던졌다.
“당시 상황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결혼해 달라고 뛰어오더군요. 하는 짓이 너무 징그러워서 도망쳤습니다.”
폭소로 뒤흔들리는 주위, 눈치 없는 기자는 계속 질문을 던졌다.
“제가 보기엔 꽤 미인이던데 못 이기는 척 안겨볼 수도 있지 않았습니까?”
“전 저보다 못난 여자랑 어울릴 사람이 아닙니다. 그 여자가 저보다 잘난 게 뭐가 있습니까?”
다카기는 은근슬쩍 아내를 띄워줬다.
문제의 장면을 보고 흠칫했을 아내, 뱃속에 아이도 있는데 얼마나 놀랐을까.
하지만 난 나보다 잘난 사람과 놀아주는 성격, 아내와 가족 외엔 그 어떤 여자도 가까이 할 생각이 없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