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292화 (292/361)

292화. 암사자 - (6)

“자, 이제 경기는 3회 말 보스턴의 반격으로 이어집니다. 선두 타자는 스탠리 호프만, 올 시즌 타율 0.251, 홈런 1개, 3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방금 전 더그아웃에서 올슨에게 뭔가 과격한 제스처를 했거든요. 자세한 내용은 들어봐야겠지만 뭔가 팀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피트 오어는 더그아웃에서 일어난 사건을 두고 대화를 이어갔다.

올슨이 마운드를 내려가는 다카기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간 장면을 봤지만 그렇게 크게 문제 삼을 장면은 아니라고 봤다.

뭣보다 다카기 본인이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도 아닌데, 다른 선수들이 크게 반응한 사건, 팀 성적이 좋지 않다 보니 사소한 일도 크게 번지는 것 같다는 개인적인 의견을 내놨다.

‘올해는 확실 타선이 문제네.’

한편, 벤치에 앉은 다카기는 말없이 타자들의 활약을 지켜봤다.

선발 투수 앤드류 브루스터가 좋은 투구를 하고 있는 건 사실, 그래도 내가 알고 있는 그 타선이라면 이렇게 쉽게 물러나지 않는다.

공을 많이 보느냐 적게 보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타격에 안 되는 상황, 방망이에 맞추질 못하는데 어떤 투수가 승부를 피하겠나.

선발이 호투를 펼치면서 양 팀은 3회까지 한 점도 내질 못했다.

‘진짜 한번은 이겨 보자.’

4회 초 뉴욕의 공격, 선두 타자 모리슨이 타석에 들어섰다.

다카기를 만나면 지기만 했던 뉴욕, 반격의 선봉장이 돼야 할 모리슨도 통산 다카기를 상대로 0.214, 삼진만 15개를 헌납할 정도로 약점을 보였다.

2년 전부터 몸 쪽에 약점을 보이면서 타격 부진에 시달린 모리슨, 반등을 위해 앞발을 뻗는 거리를 조금 줄였다.

모리슨의 나이는 올해 31살, 벌써부터 노쇠화를 걱정할 수준은 아니다. 하지만 앞발을 뻗는 과정에서 불필요한 동작이 나온다는 코치의 말을 듣고 폼을 수정, 레그 킥을 약간 변형한 폼으로 바꿨다.

효과가 있었는지 올 시즌은 타율 0.353를 기록하며 예전의 성적을 회복, 지난 2년 동안 부진했다고 해도 통산 1554안타를 기록한 뉴욕의 간판선수다.

방심은 금물, 다카기는 호프만의 사인대로 몸 쪽을 공략했다.

딱 ~ !

“파울입니다. 역시 몸 쪽은 공략하지 못하는군요.”

“올 시즌 모리슨의 타구 비율을 보면 약한 타구 비율이 36%입니다. 지난 2년 동안 이 선수가 부진에 빠진 이유가 몸 쪽 공을 제대로 공략하지 못했기 때문인데, 올해 타율은 높지만 타구질만 봤을 때 작년과 큰 차이가 없다는 거죠. 또 던질 수 있다면 던져도 괜찮습니다.”

다카기는 2구도 몸 쪽으로 넣었지만 모리슨은 커트해 냈다.

모리슨은 성격이 불같아서 병살을 치거나 중요한 상황에서 아웃을 당하면 방망이를 패대기치는 선수, 전사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승부욕이 강한 선수다.

저런 승부근성이 클럽하우스에 좋은 분위기를 주는 것도 사실, 최근 2년 동안 부진했지만 저런 화끈한 성격 덕분에 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다.

실력은 있지만 어리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보스턴 선수들에 비해 전체적으로 무르익은 뉴욕선수단, 다카기는 내가 여기서 흔들리면 팀이 무너진다는 각오로 투구를 이어갔다.

딱 ~ !

“빗맞은 타구, 3루수가 … 아!! 여기서 공을 놓치는군요!! 포구를 하지 못하면서 출루를 허용합니다.”

“이건 좀 실망스러운데요. 물론 달려오면서 잡아야 했기 때문에 쉽지 않은 플레이였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처리해 줬어야죠.”

오늘 허용한 첫 출루, 3루수 실책으로 기록됐지만 다카기는 별거 아니라는 반응을 보였다.

다음 타자는 제레미 브라운, 위기 상황에서 매번 잡아냈던 선수지만 다카기는 방심이라는 어설픈 허세를 부리진 않았다.

“이게 볼이나요? 갑자기 스트라이크 존이 좁아진 것 같습니다.”

“뭐, 주심도 가끔 실수를 하긴 하는데, 이건 아니죠. 이건 호프만이 한 번 찔러줘야 됩니다.”

볼이 선언 됐지만 호프만은 입을 다물었다.

작년에 볼을 피해 주심을 맞춘 사건 때문에 한동안 논란에 시달린 적도 있고, 뭣보다 포수가 판정에 화를 내 봤자 좋은 결과 기대하기 어렵다.

그걸 알고 있는 다카기도 침묵을 유지, 왕이 가만히 있는데 내가 날뛰어서 뭐 하나. 배터리가 다음 사인을 주고받는 사이 보스턴 벤치는 내야진의 위치를 재정비했다.

제레미 브라운은 극단적으로 당겨 치는 선수, 2루수 제임스 올슨을 우측 깊숙한 곳에 배치했다.

사인을 내기 전에 본인이 알아서 움직였다면 이런 사인을 낼 필요도 없었는데, 동료들에게 집단 괴롭힘을 당한 충격 때문인지 반응이 한 박자 늦었다.

‘내가 그렇게 잘못한 거야?’

올슨은 마음속으로 계속 불만을 중얼거렸다.

다카기가 잘 던지기에 내 몫도 남겨두라며 가볍게 어깨를 친 것뿐이다. 그런데 약속이라도 한 듯 벌떼처럼 달려드는 녀석들, 다카기는 가만히 있었지만 그냥 다 서운했다.

악역을 자처했으니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텐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서운한 건지, 모든 게 다 미웠다.

‘나만 잘하면 돼’

다른 선수들이 잘하든 말든 내가 무슨 상관인가. 성적만 내면 날 쓸 수밖에 없는 구단, 마이 웨이를 선언한 올슨은 때맞춰 날아오는 타구에 몸을 날렸다.

“잡았고!! 아!! 공을 한 번에 빼내질 못합니다!! 그 사이 1루 주자는 2루까지!! 타자 주자만 1루에서 잡아내는군요!! 1사 주자 2루가 됩니다.”

“연속해서 이런 실책이 나오네요. 뭔가 다들 나사가 하나 빠진 것 같습니다.”

올슨은 글러브에 주먹을 박아 넣으며 아쉬움을 표했다.

수비 범위가 넓은 유격수는 넓은 글러브를 쓰고 2루수는 그보다 더 작은 글러브를 쓴다고 생각하는 선수들이 있는데, 실제로 그렇긴 하다.

하지만 예외의 경우도 있는 법, 야구엔 우타자가 많다보니 유격수가 좀 더 큰 글러브를 쓰지만 올슨은 유격수와 비슷한 크기의 글러브를 사용한다.

그만큼 수비범위가 넓은 선수, 하지만 글러브가 큰 만큼 볼이 글러브 안에서 뒹굴 위험도 커진다.

이번이 그런 경우, 딱히 본인 잘못은 아니지만 팬들이 보기에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이제 타석에는 숀 스팸, 작년 시즌 트리플 크라운에 근접한 활약을 보여줬고 올 시즌도 타율 0.278, 홈런 9개를 기록하고 있다.

작년만큼 고타율을 보여주진 못하고 있지만 OPS는 0.954로 수준급, 일단 바깥쪽 코스를 찔렀다.

따아악 ~ !!

“자!! 밀어 친 타구가 … 좌측으로!! 높게!! 담장을 넘어갑니다. 숀 스팸의 선제 투런 홈런, 0의 균형이 여기서 깨지는군요.”

“글쎄요. 지금은 바깥쪽을 노린 것 같은데, 작년 시즌 스팸이 밀어친 홈런이 3개밖에 안 됐거든요. 올 시즌은 이게 첫 번째인데, 다카기 선수가 의외의 일격을 맞았습니다.”

계속되는 악재에 가라앉은 관중석 분위기, 다카기는 덤덤한 얼굴로 주심에게 새로운 볼을 요구했다.

3회까지 무결점 투구를 했으니 본인도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이런 때일수록 침착한 게 에이스의 품격, 나라가 외적의 침입을 받았으면 나가서 싸워야지 도망치는 게 왕의 품격인가.

다음 타자 에밀 손더스를 삼진으로 처리하고 마운드를 내려갔다.

하지만 이날 보스턴은 다카기를 지원사격 해주지 못했다. 6회까지 3안타를 때려냈을 뿐, 앤드류 브루스터의 호투에 막혀 2루도 밟지 못했다.

결국 경기는 3대 0 뉴욕의 승리로 종료, 8년 만에 처음으로 다카기를 무너뜨린 뉴욕은 드디어 복수에 성공했다며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이제는 앤드류 브루스터의 시대다]

뉴욕 여론은 이에 그치지 않고 다카기를 자극하는 기사를 내보냈다.

끝없이 솟아나오는 뉴욕의 선발 유망주, 브루스터는 올 시즌 7경기에서 6승 무패, 평균자책점 1.27을 기록하고 있다.

거기다 최대 난적인 다카기를 꺾으며 거둔 시즌 6승, 그동안 보스턴에게 억눌려 지냈던 뉴욕은 왕좌를 되찾을 때가 왔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봤자 최종승자는 우리 남편이다.]

이때, 키리코가 SNS에 올린 글이 여론의 관심을 끌었다.

고작 1경기 이겼다고 이 난리라니, 그리고 지금이 포스트 시즌인가? 그런데 무슨 잘난 척을 그렇게 하는지, 지금 실컷 웃어두라는 비웃음까지 날렸다.

[그 사람은 어느 자리에서도 최고의 역할을 한다. 가정에서는 좋은 아빠이자 좋은 남편이고, 마운드에서는 누구보다 뛰어난 투구를 한다. 나는 남편을 존경한다. 그리고 그만한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지난 8년 동안 우승 한 번 못한 뉴욕에게 그런 비아냥거림을 받을 이유는 없다. 두고 봐라 최후의 승자는 우리 남편이다.]

아내의 지원 사격에 다카기는 당황했다.

평소 조용했던 아내가 SNS로 여론전을 벌이다니, 그러지 말라고 말렸지만 키리코는 막무가내였다.

“난 자기가 놀림거리 되는 거 싫어. 다음에도 이러면 가만 안 둘 거야.”

“쓰읍 ~ 그래도 이건 아니지. 그런 거에 일일이 대응하면 제 명에 못 살아. 그리고 뱃속에 있는 아기도 생각해야지. 엄마가 화내면 아기한테도 안 좋아.”

그제야 키리코는 약간 누그러진 태도를 보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남편 말은 참 잘 듣는 편, 사자처럼 으르렁거리더니 이내 토끼 같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당신은 정말 내가 최후의 승자가 될 거라고 생각해?”

“당연하지.”

“그런데 지금 팀이 개판이야. 수습이 안 된다고”

다카기는 아내를 옆에 앉혀두고 약한 말을 늘어놨다.

지금 보스턴은 14승 17패로 5할 승률에 못 미친다. 시즌 개막도 안 됐는데 감독이 섹스 스캔들에 휘말리더니, 이제는 선수들이 내란을 일으키면서 자폭 중, 무너져가는 왕조를 내가 다시 세울 수 있을까.

그런데 키리코의 답은 의외였다.

“팀 성적 가지고 그런 말한 거 아니야.”

“그럼 뭔데?”

“자기가 만테냐 어워드 수상 하는 거”

키리코는 남편의 만테냐 어워드 8연패를 장담했다.

앤드류 부루스터라는 꼬맹이가 초반에 잘난 척을 떨고 있지만, 그 기세가 언제까지 갈지 누구도 장담 못한다.

그에 비해 남편은 검증된 투수, 작년에 포스트 시즌 포함 300이닝을 넘긴 남편이 올해도 그 짓을 해야 하나.

가끔은 쉬어가는 시즌도 있어야겠지, 키리코에게 부진한 팀 성적은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래도 남편이 최고의 투수라는 증표는 양보할 수 없는 일, 올해는 그것만 생각하라며 남편을 부추겼다.

“나 왕인데? 팀이고 뭐고 나만 잘나가도 되는 거야?”

“응, 올해는 그렇게 해”

다카기는 헛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말하면 본인도 그런 마음으로 시즌에 임하고 있다. 캡틴의 자리도 버렸고 베테랑이 나 혼자만 있는 것도 아닌데, 언제까지 내가 팀 분위기를 주도해야 하나.

단, 임신한 아내가 여론전을 벌이는 것만은 사양하고 싶었다.

“그렇게 할 테니까. 다시는 SNS 하지 마. 나도 앞으로는 입 닫고 살 거니까.”

“알았어. 안 할게.”

키리코는 고집을 쉽게 꺾었다.

의사로 가는 엘리트 코스도 포기하고 선택한 남자, 이 사람이라면 내 인생을 걸만한 가치가 있겠지, 뭣보다 날 위해서 이런 말을 하는 거라 안 따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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