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화. 암사자 - (5)
“자, 이제 베논 리퍼드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시즌 타율 0.253, 홈런 3개, 8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방망이는 어느 정도 돌아왔는데 병살이 너무 많아요. 내부에서도 고민을 좀 해 봐야겠습니다.”
새로운 시즌도 어느덧 4월 막바지, 보스턴의 신임 감독 다니엘 보드킨 은 리퍼드의 타격을 지켜봤다.
리퍼드는 시즌 초만 해도 답이 없는 부진에 빠졌다. 첫 10경기 성적은 타율 0.150, 홈런이나 타점은 하나도 없었다.
최근 들어 타격을 회복하긴 했지만 문제는 병살타 머신이 됐다는 것, 22경기 만에 병살을 9개나 쳐버렸다.
사실 2번 자리가 병살을 치기 쉬운 위치는 맞다. 다른 타자들보다 주자 1루 상황이 15% 정도 많은 자리, 당연히 땅볼 타구가 많으면 팀에 도움이 될 게 없다.
리퍼드는 작년에 20홈런 2루타 40개를 때려낸 만큼 장타력은 있는 편이다. 문제는 타구 각도가 높지 않아 땅볼도 의외로 많았다는 것, 밀어치는 타격으로 어느 정도 극복했지만 지금은 그것도 통하지 않았다.
딱 ~ !
“유격수 정면!! 2루에 송구!! 다시 1루에서 ~ !! 아웃입니다. 더블 플레이 … 음? 이게 뭐죠?”
“설마 부상입니까?”
그런데 여기서 예상치 못한 악재가 일어났다.
리퍼드는 살기 위해 전력질주, 1루 베이스를 잘못 밟아 발목이 꺾여버렸다. 잠시 걷는 척하다가 이내 쓰러져 버리는 선수, 보드킨 감독은 트레이너와 함께 사건 현장으로 달려갔다.
끝내 일어나지 못한 리퍼드, 병살보다 주전 좌익수를 잃었다는 충격에 홈팬들은 침묵을 지켰다.
‘올해는 좀 힘든 시즌이 될 것 같군.’
한편, 아웃에 앉아 있던 다카기는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상황이 좋지 않아도 나쁜 생각을 하면 될 것도 안 된다.
다카기도 내가 하는 행동과 말이 팀원들에게 영향을 준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부정적인 말은 거의 하지 않는 편, 하지만 오랜 경험으로 쌓은 직감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팀의 기둥이자 유순한 리더십으로 인심을 얻었던 브라이스 감독의 이탈, 스캔들이고 뭐고 떠나서 그 사람의 부재는 팀에 악재로 작용한다.
위기상황에서 더욱 두드러지는 문제점, 이건 팀 기량과는 상관없는 문제다.
월드시리즈 우승도 해 본 팀이 감독 하나 빠졌다고 흔들린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문제점은 바로 드러났다.
“자!! 여기서 공이 튀었고!! 2루 주자는 3루로!! 아 ~ 송구가 빨랐군요. 득점 기회가 이렇게 무산됩니다.”
“지금은 뛰면 안 되는 상황이죠. 이건 무모한 겁니다.”
3회 말 공격, 2루까지 진출했던 제임스 올슨은 무리하게 3루로 파고들다 아웃 당했다.
바운드 된 볼이 포수 기준으로 오른쪽으로 튀었다면 3루로 가도 된다. 하지만 왼쪽이라면 포수는 아무 어려움 없이 3루로 송구를 한다.
뭣보다 베이스를 하나 더 가는 플레이가 공격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게 통계로 증명됐는데 무리하게 득점을 만들려고 했던 올슨, 브라이스 감독이 추구하던 야구와는 정반대가 아닌가.
브라이스 감독이 사라졌다고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행동하다니, 다카기는 이걸 용납하지 않았다.
“너 왜 뛰었냐? 그게 뛸 상황이었다고 생각해?”
고참의 핀잔에 올슨은 입을 다물었다.
분명 브라이스 감독이 있었다면 절대 지시하지 않았을 플레이, 하지만 올슨은 그런 소극적인 플레이와 처음부터 맞지 않았다.
좀 더 적극적으로 한 베이스라도 더 가는 게 내 스타일, 우리가 언제까지 사라진 망령에 매달려야 하는가.
다카기의 의견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자신의 야구도 일리는 있다고 생각했다.
“뛸 만해서 뛴 거야.”
“그래, 그렇게 생각한다면 앞으로도 그렇게 해라.”
더 싸워봤자 먹힐 것 같지도 않고, 다카기는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다.
그동안은 내 리더십이 통한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브라이스 감독의 부드러운 리더십이 있었기 때문에 가끔 이렇게 찔러주는 과격한 충고가 통했던 것, 하지만 이것도 이젠 약빨이 다 됐다.
효과가 없는 충고는 팀원 간의 불화를 야기할 뿐, 이날을 기점으로 뭐가 잘못돼도 선수들끼리 서로 지적해주는 일은 없었다.
다들 제멋대로 날뛰면서 무너지기 시작한 협동 플레이, 수더랜드 단장은 문제점을 알고 있었고, 다카기를 따로 만났다.
“자네가 좀 더 확실하게 말해주는 게 좋지 않겠나?”
“지금 하시는 말씀은 싸우라고 부추기는 겁니다.”
수더랜드 단장은 분명 유능한 사람이다.
아니, 세상에 이렇게 똑똑한 사람이 어디에 있나. 하지만 이 사람은 팀의 전체적인 판을 짜는 사람일 뿐, 선수들 간의 감정 교류나 친분까지 컨트롤 할 수 없다.
“나는 그 자식하고 같이 못 있겠음. 트레이드 시켜줘요.”
그래서 아무리 판을 잘 짜도 누군가는 쳐내야 하는 상황이 온다.
그렇다고 다카기를 쳐낼 건가. 그동안 다카기를 중심으로 삼고 선수들이 여기에 맞춰주면서 돌아간 팀, 그게 보스턴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게 안 되는 상황, 베논 리퍼드 - 주앙 고메즈 - 제임스 올슨, 모두 작년 시즌까지만 해도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가 없었던 선수들이다.
하지만 이제는 우승반지도 생겼겠다. 자신의 이상을 펴겠다고 하는데 내가 뭘 어쩌겠나? 다카기는 개인플레이를 선언했다.
“메이저리그에 자리 잡을 정도면 알아서 잘 들 하겠죠. 저도 이제 신경 쓰기 싫습니다.”
“으음 … ”
수더랜드 단장은 생각에 잠겼다.
팀 기강이 그렇게까지 개판이 됐다는 건가, 하긴 브라이스 감독이 지르고 간 불을 이 선수가 끄라고 요구하는 것도 불공평한 일.
내부 단속에 나섰다.
‘그래, 그동안 너무 풀어주긴 했지.’
미국은 의외로 위계질서가 강한 나라다.
그건 스포츠 세계도 마찬가지, 친분이 쌓이면 20대 선수와 60대 감독도 친구를 할 수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선수의 경력이 쌓였을 때 가능한 일이다.
겨우 1 ~ 2년 짜리가 베테랑에게 덤비는 건 그냥 죽자고 하는 짓, 하지만 보스턴은 한동안 이런 엄숙한 분위기와 거리가 멀었다.
젊은 선수 중심으로 팀을 짜다보니, 몇몇 선수들 외엔 베테랑이라고 고개 들고 다니기 어려운 상황, 그리고 최근 루키를 괴롭히지 않고 잘 대해주는 게 메이저리그 문화다.
그런데 이게 어린 선수 버릇을 잘못 가르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어? 잘하니까 문제없네? 나는 역시 최고야.’
문제아는 그냥 생기는 게 아니다.
아무리 평등한 문화가 중요하다고 해도 평등이란 상대를 존중할 줄 알고 사회를 유지할 수 있는 품격을 갖춘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다.
그런데 실력만 있으면 내가 뭐든 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있는 법, 특히 젊은 나이에 성공하기 쉬운 스포츠 무대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걸 잡아주는 게 베테랑의 역할, 오냐오냐해주는 게 옳은 문화일까. 수더랜드 단장은 몇몇 베테랑에게 비밀 지령을 내렸다. 그동안 너무 수고해준 다카기는 이번 지령에서 제외, 그렇게 게임이 시작됐다.
“자, 다카기 하루요시가 시즌 7번째 선발 등판에 나섭니다. 올 시즌 3승 1패 평균자책점 2.14, 42이닝 동안 볼넷 6개, 탈삼진은 58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작년과 비교하면 투구 스타일이 또 달라졌어요.”
“그렇습니다. 작년에는 땅볼 비율을 높이면서 투구 수를 낮췄는데 올 시즌은 다시 삼진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카기는 올 시즌부터 커브를 개량한 떨어지는 슬라이더를 주력으로 앞세웠다.
예전부터 던졌던 구질이지만 고속 슬라이더라는 확실한 무기가 있었기에 비주류로 밀려 있던 무기, 하지만 제대로 던진다면 헛스윙은 보장된 무기다.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슬라이더는 홈런을 피할 수 있지만, 투구 패턴이 좌우로 치중되기 때문에 타자 눈에 익을 위험이 크다.
그걸 보완해 준 게 떨어지는 체인지업, 하지만 슬라이더와 체인지업은 상반되는 구종이라 완벽하게 구분해 컨트롤 하는 건 어렵다.
다카기는 그동안 그걸 잘 해냈지만 도전을 택했다.
‘나도 야구 편하게 해보자.’
지금 던지는 슬라이더는 체인지업에 비해 구속은 조금 떨어지는 편이다. 확실하게 떨어뜨리지 않으면 내가 당할 뿐, 그래도 고속 슬라이더와 비슷한 그립이라 던지기는 편하다.
손날을 제대로 세워준다면 문제될 게 없겠지, 호프만 포수와 합의한 볼 배합을 밀고 나갔다.
“스윙!! 떨어집니다!! 삼진!! 첫 타자부터 삼진을 잡아내고 있습니다!!”
“지금은 83마일인데 타자가 왜 이걸 휘두르냐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저 자리에 서면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프로 선수들이 바보도 아니고 알고도 당하겠습니까? 말 그대로 마구입니다.”
피트 오어는 다카기의 신무기에 찬사를 표했다.
체인지업은 아무리 빨라도 공에 회전을 덜 줘서 떨어지는 궤적을 만들어 내는 구종이다.
그에 비해 슬라이더는 회전을 줘서 휘어지게 하는 구종, 지금 다카기는 슬라이더는 손날을 세워서 옆으로 흘러나가는 궤적을 최소화했다.
체인지업처럼 떨어지는데 회전이 많이 걸려 빠른 볼과 구별하는 것도 어렵고, 타자 입장에선 카운트가 몰리면 알고도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각자 갈 길 가자. 나도 너희들 도움 안 받는다.’
다카기는 오로지 포수 사인에만 집중했다.
내가 저 자식들 덕 보겠다고 지금까지 이런저런 도움을 줬나? 그저 팀 전력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했던 조언, 이제 다 컸다고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면 잔소리할 이유도 없었다.
“와아아 ~ !!”
다카기는 1회를 삼진 3개로 틀어막았다.
작년 시즌 많은 이닝을 소화해줬지만 살짝 아쉬웠던 탈삼진율, 홈팬들은 돌아온 에이스를 향해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높은 공!! 따라 나옵니다!! 삼진!! 5타자를 연속해서 삼진으로 돌려세웁니다!!”
“떨어지는 공이 있으니까 따라 나오는 거죠. 97마일, 타이밍은 완전히 늦었습니다.”
“지금 던지는 구질은 빠른 볼, 슬라이더, 이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아직 초반이라 중반으로 접어들면 패턴을 조금 바꿔줄 수도 있는데, 그렇다고 쳐도 역시 다카기 선수의 구위는 최강입니다. 다른 선수와 비교하는 게 실례죠.”
야수들을 병풍으로 만들어 버리는 탈삼진 쇼, 다카기는 6번 타자까지 삼진 처리하고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이봐, 내가 눈에 띌 기회도 좀 주라고”
이때 제임스 올슨이 미끼를 물었다.
에이스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고 지나간 것,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짓에 카메라맨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미쳤어 이 XX야?!!”
아니나 다를까 호프만은 불같이 화를 냈다.
올슨은 내가 뭘 잘못했느냐고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평소부터 올슨은 좋게 보지 않던 선수들은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투수 어깨를 건드려? 너 야구 어디서 배웠냐?”
“이 멍청아!!”
경기를 앞둔 에이스에게 말을 거는 것도 조심스러운데, 경기 중에 투수 어깨를 치다니, 넌 근본도 없는 자식이냐며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다.
올슨도 평소 동료들이 자신을 두고 뒷담화를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면전에서 대놓고 욕을 하는 건 처음이라 당황했다.
“너 나한테 오늘 죽어 볼래?!! 이게 정말 그냥 놔두니까!!”
심지어 알 디즌은 주먹까지 들이대며 위협을 가했다.
다카기 그 다음의 위상을 가진 선수, 퇴로가 막힌 올슨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짜고 치는 연극이네.’
하지만 다카기는 그러려니 하는 얼굴로 물만 들이켰다.
단장과 면담을 나눈 그날부터 뭔가 조치가 내려질 거라는 예상은 했다. 그런데 그게 집단 괴롭힘일 줄이야.
그리고 올슨이 너무 나간 것도 사실, 그렇다고 내 주먹을 쓸 순 없는 일 아닌가. 동료들이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