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화. 암사자 - (2)
“야, 이게 얼마 만이냐.”
“그러게요.”
이곳은 오사카 시내의 요정(料亭), 다이이치 파이브로 불리는 야구 선수 5명과 가족이 한자리에 모였다.
일본이 아무리 야구부가 많다고 해도 한 팀에서 프로 선수 한 명 배출하기 어렵다.
그런데 다이이치 야구부는 최근 10년 동안 배출한 굵직한 이름만 해도, 일본 야구를 상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단 다카기 하루요시는 메이저리그를 제패하며 7년 연속 만테냐 어워드 수상이라는 업적을 쌓았다.
여기에 메이저리그에 진출해 선발로 자리를 잡은 이시다 토모카츠, 일본 프로야구 스타로 성장한 타키야마 요이치, 키타지마 소스케, 아사노 아키히토까지 모두 일본을 대표할 수 있는 선수들이다.
이런 대단한 선수들이 단기간에 한 팀에서 쏟아져 나왔으니 다이이치 야구부의 명성이 높아진 건 당연, 한자리에 모인 것만으로도 존재감을 드러냈다.
“우리가 한 팀에서 야구를 할 기회가 있을까요?”
“그게 무슨 소리냐?”
“왠지 그때가 그리워서요.”
이런저런 대화가 오가던 중, 타키야마가 슬쩍 속마음을 드러냈다.
힘들긴 했지만 그 시절이 재미있긴 했다.
그 날의 고생이 없었다면 오늘의 영광이 있었겠나. 하지만 지금은 각자 다른 팀에서 선수생활을 하고 있으니, 한자리에 모여 야구를 하는 건 어려웠다.
“가능한 일 아니야?”
“가능하다고?”
“대표 팀으로 나가면 되잖아.”
이때 키타지마 소스케가 타키야마의 말에 맞장구를 쳐줬다.
2029년 WBC, 앞으로 2년이나 더 있어야 하지만 그렇게 먼 일도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때까지 기량을 유지하고 있느냐 인데, 이 자리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이시다 토모카츠에게 시선이 쏠렸다.
“왜 날 그렇게 보냐?”
“아니 …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선배님은 조금 걱정돼요.”
“뭐가 어째?!!”
이시다는 발끈했다.
내가 이 중 나이가 제일 많다고 해도 겨우 30살이다. 2년 뒤라고 해 봤자 32살인데, 이것들은 지금 날 어떻게 보는 건가.
가만히 있는 다카기를 건드렸다.
“저 자식도 곧 서른이야. 나만 노장 취급하지 말라고”
“그럼 그때 노장 취급하세요. 노장 선배님”
괜히 건드렸다가 본전도 못 찾은 노장, 하지만 장난도 그때뿐 진지한 말이 오고 갔다.
“야, 진짜 우리 한 번 뭉칠까?”
“그럴까요?”
“그래, 우리가 뭉치면 못할 게 뭐가 있겠냐?”
이시다는 10년 동안 선수생활을 했지만 우승과는 인연을 맺지 못했다.
6년 동안 몸담은 미요시 호크스는 예전부터 약체로 유명했지만, 그래도 이시다는 에이스로서 6년 동안 79승 63패, 평균자책점 2.73으로 활약했다.
특히 일본에서 보낸 마지막 시즌 성적은 17승 9패, 평균자책점 1.87, 조정자책점은 무려 213에 WAR는 8.3, 말 그대로 마운드를 지배하는 활약을 보여줬다.
하지만 1점대 평균자책점을 찍고도 9패를 당했을 정도로 타선의 지원을 못 받았던 시즌, 메이저리그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유일하게 해 본 우승이라면 고교 3학년 때 이룬 고시엔, 추억 보정 덕분인지 타키야마 말대로 그 시절이 그립기도 했다.
이 녀석들과 함께라면 우승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정말 대표 팀에 모일 수 있을까.
이때 다카기가 찬물을 끼얹었다.
“선배는 우승보다 결혼이 먼저 아닌가요?”
“야, 너는 심각한 얘기하고 있는데 … ”
“저도 심각하게 얘기 드리는 거예요. 여기 애까지 가진 후배가 둘이나 있습니다.”
보란 듯이 딸을 품에 안는 타키야마, 건방진 후배들의 협공에 이시다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빠아 ~ ”
“왜?”
“저 아저씨 누구야?”
이때 타키야마의 품에 안긴 꼬마 아가씨가 다카기를 지목했다. 어린아이의 눈은 솔직한 법, 여기서도 월드스타의 존재감은 여전했다.
“잘생겼다.”
타키야마는 뜨끔했다. 딸이 아빠를 두고 다른 사람을 잘 생겼다고 한 건 처음, 바로 견제에 나섰다.
“아빠보다는 조금 못하잖아.”
“ … 응??”
자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냐는 눈빛, 제대로 한 방 맞은 타키야마는 비웃음에 휩싸였다.
“그럼 아저씨한테 올래?”
“네에 ~ ”
바로 쌩하고 달려오는 꼬마 아가씨,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스즈에는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한때 좋아했던 남자가 내 딸을 품에 안고 있으니 정말 묘한 기분, 그런데 다카기 옆에 있던 키리코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키리코는 남편을 두고 스즈에와 한 번 맞붙었던 관계, 전쟁은 나의 승리로 끝났지만 한때 라이벌이었던 여자의 딸이 남편의 품에 안긴 게 기분 좋을 리 없었다.
하지만 상대는 어린애 아닌가. 월드스타 와이프의 체면이 있지 쓸데없는 질투심은 사절, 일단 남편의 반응을 지켜봤다.
“아저씨 좋아?”
“네”
“그럼 나중에 아저씨 며느리 할래? 아저씨도 너만 한 아들 있어.”
“잘생겼어요?”
“그럼, 아저씨를 닮았는데 당연하지, 그러니까 착하고 예쁘게 커야 된다. 알았지?”
“네에 ~ ”
벌써부터 정략결혼을 계획하는 남편, 첫째 아들이 8살, 둘째 아들이 3살이 되긴 했는데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다카기는 솔직하고 귀여운 꼬마 아가씨가 마음에 들었다.
아내 뱃속에 내 씨앗이 자라고 있지만 그게 딸이라는 보장은 없지 않은가. 딸이 없다면 외부에서 영입할 뿐, 나중에 내 며느리로 들어오라며 포섭에 나섰다.
“자기 농담으로 한 말이지?”
“뭐가?”
“아까 며느리 어쩌고 했잖아.”
자리를 파하고 집으로 가는 길, 키리코는 남편을 슬쩍 찔러봤다.
그 아이를 며느리로 삼겠다는 건 농담이었겠지, 하지만 다카기는 진심이라며 진지한 태도를 보였다.
“솔직히 자기가 걔 품에 안았을 때 조금 질투 났어.”
“왜??”
“그냥 … 좀 그랬어.”
키리코는 그동안 비밀로 했던 사실을 털어놨다.
남편을 두고 벌였던 치열한 쟁탈전의 나날, 남편과 정식으로 연인 관계가 된 후에도 교내에서 ‘걔가?’, ‘안 어울리지 않아?’라는 소문에 시달렸다.
거기다 스즈에는 대놓고 날 남편과 떼어놓으려 했던 전적이 있으니, 그 기집애의 딸이 남편 품에 안겼을 때 속이 많이 쓰렸다.
‘그런 일이 있었어?’
다카기는 그제야 아내의 심기를 눈치챘다.
뭐 그런 거로 질투를 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래도 아내 입장에선 그게 아니었던 것, 다음에는 조심하겠다고 사과했다.
“아니야, 그냥 좀 … 나도 모르게 어른스럽지 못했어.”
“아니야, 앞으로 내가 조심할게.”
별로 잘못한 것도 없는데 미안하다고 하는 남편, 역시 내가 괜한 소리를 한 건가.
키리코는 이번 일로 남편 앞에서 쓸데없는 질투는 부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 * *
[보스턴, 대형 스캔들 터졌다]
시간은 흘러 해가 지난 2월, 미국 일대는 소란에 휩싸였다.
느닷없이 섹스 스캔들에 휘말린 보스턴의 짐 브라이스 감독, 혈기 왕성한 선수도 아니고 올해 63살에 손녀까지 있는 사람이 그런 일을 벌였다? 다들 믿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였다.
[수위가 너무 높아 어디까지 써야 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기자의 인터뷰는 심상치 않았다.
뭔가 확신이 있으니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거겠지, 그래도 월드시리즈 9회 우승을 달성한 브라이스 감독의 입장을 생각해 기자는 세부적인 내용은 빼고 사실 보도만 하기로 했다.
[브라이스 감독은 문제의 여성과 3년 전부터 관계를 맺은 것으로 확인 됐다. 둘 사이에 아이는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그래도 믿기 어려운 사실이라는 건 분명, 브라이스 감독은 변호사를 통해 이건 모함이라며 적극 반박했다.
“저는 짐과 10년 넘게 함께 했지만, 커피 한 잔 얻어 마시지 못했습니다. 그는 훌륭한 감독이지만 매우 인색한 사람이죠. 그런 사람이 여자와 하룻밤 자겠다고 3000달러를 썼다고요? 그것도 3년 동안? 믿기 어렵습니다.”
보스턴의 불펜 투수 하버스태드도 반박에 나섰다.
얼핏 욕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브라이스는 검소한 생활로 유명하다.
12년 동안 매일 같은 옷을 입고 출근, 선수들이 너무 촌스럽다고 놀려도 나는 이게 좋다며 웃어넘겼던 감독이다.
이런 사람이 정말 여자와의 하룻밤을 위해 3000달러라는 거금을 썼을까?
뭣보다 정말 여자가 마음을 먹었다면, 감독이 아니라 선수를 낚아챘을 거다.
보스턴은 현재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잘 나가는 구단, 얼마 전 기사를 통해 다카기의 수입이 공개되기도 했지만 그만큼 선수들이 받는 수입도 일반인은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그런데 굳이 감독을 노리고 접근했다?
물론 브라이스 감독도 다른 팀 감독에 비하면 많은 연봉을 받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선수들에 비하면 적다.
여자가 왜 이런 스캔들을 폭로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선수들은 브라이스 감독을 믿는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그동안 선수들에게 쌓은 신뢰 덕분에 가능한 전개, 다카기도 SNS를 통해 브라이스 감독을 응원한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야, 너는 왜 그런 소리를 해?”
“뭐가? 난 잘못한 거 없어.”
2월 말에 시작된 스프링 캠프, 한 자리에 모인 선수들은 하버스태드에게 집중포화를 날렸다.
브라이스 감독을 변호하려고 했던 마음은 알겠는데, ‘커피 한 잔 못 얻어 마셨다.’, ‘보기보다 인색한 사람이다.’라는 말을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변호를 하려다 오히려 감독 얼굴에 먹칠을 한 꼴, 하지만 하버스태드는 잘못한 거 없다며 손을 저었다.
“너도 조심해 인마.”
“뭐가?”
“그걸 몰라서 물어?”
이때 다카기가 한 소리 하고 나섰다.
하버스태드는 30대 중반을 넘어 후반으로 달려가는 노장, 그런데 아직 가정을 이루진 않았다. 나는 자유가 좋다고 하는데, 이제 메이저리거 8년 차에 접어든 다카기는 선수들의 사생활을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걸 내가 터치 할 이유는 없지만, 문제가 생겼을 때의 파장은 상상 이상, 하지만 하버스태드는 문제될 거 없다며 여유를 부렸다.
“괜찮아. 난 여자들이 노릴 만큼 돈을 많이 버는 게 아니니까.”
특급 불펜이라고 해 봤자 다카기가 받는 돈에 비하면 1/3 수준, 조심해야 할 놈은 오히려 너라며 맞불을 놨다.
“저 자식이 미쳤나. 내가 왜?”
“너 수익 다 공개된 거 몰라?? 한 해 순수익이 5천만 달러라니, 없던 여자도 꼬이겠다.”
다카기는 개소리 하지 말라며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고액 연봉을 받는 게 하루 이틀 전인가, 7년 동안 아무 일도 없었고 앞으로 태어날 자식까지 포함해 자식이 셋이나 있는 몸이다.
토끼처럼 귀여운 아내도 있는데, 이런 내가 뭐가 부족해서 다른 여자와 스캔들을 일으키나. 아랫도리 잘못 놀리는 너나 조심하라며 핀잔을 줬다.
“후우 ~ ”
이때 한숨을 쉬며 클럽하우스에 들어서는 짐 브라이스 감독, 왁자지껄 떠들던 선수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응원의 메시지를 던졌다.
하지만 그동안의 마음고생 때문에 반쪽이 된 얼굴, 문제가 생각보다 심각한 건가. 브라이스 감독은 별 반응 없이 감독실로 향했다.
“진짜 뭔가 있는 거 아냐?”
“헛소리하지 말라고 했다.”
“아니, 본인이 떳떳하면 저럴 이유가 없잖아. 아닌가?”
제임스 올슨은 다카기 옆에서 계속 부채질을 했다.
이 자식은 내부분열을 노리는 스파이인가, 다카기는 그런 말 다시는 하지 말라며 주의를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