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286화 (286/361)

286화. 무책임 - (6)

“자, 하버스태드가 마운드에 오릅니다. 이번 포스트 시즌 성적은 7경기 등판, 승패 없이 평균자책점 1.28, 7이닝 동안 볼넷 1개, 탈삼진은 8개를 잡아내고 있습니다.”

“3대 1이지만 안심할 수가 없습니다. 주자가 1루에 있거든요.”

보스턴 배터리는 삼진을 잡는 볼 배합을 택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는 하버스태드, 하지만 이 작전은 초구부터 어긋났다.

따악 ~ !!

“와아아아 ~ !!”

다시 안타가 나오면서 이제 1사에 주자는 1 - 3루, 위기에 몰린 보스턴 벤치는 긴장감에 휩싸였다.

플라이 하나만 나와도 3대 2, 거기다 주자가 3루에 있으니 투수와 포수가 감당해야 할 부담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도 스탠리 호프만의 블로킹 능력은 메이저리그에서 손에 꼽을 정도, 애틀랜타 입장에서도 섣부른 홈 대시는 금물이다.

억지로 득점을 내려고 하면 멸망, 안타나 희생 플라이로 차근차근 점수를 내는 게 현명했다.

따악 ~ !!

‘엇?’

마침 외야로 날아오는 타구, 지금은 밤 경기라 조명 아래에서는 낮보다 타구가 더 빨라 보인다.

외야 수비 경험이 풍부한 중견수 알 디즌은 잡기 어렵다고 판단했지만, 잡을 수 있는 것처럼 연기를 하는 모험을 택했다.

3루 주자는 어쩔 수 없지만 1루 주자는 어떻게든 할 수 있지 않을까.

예상대로 움찔하는 1루 주자, 알 디즌은 펜스를 원 바운드로 직격한 타구를 잡아 내야로 보냈다. 주춤주춤 하느라 3루까지 가지 못한 1루 주자, 알 디즌의 수비에 보스턴은 한숨을 돌렸다.

“자 … 이제 1사 주자 2루가 되는군요.”

“보스턴이 이번 이닝에만 4안타, 3연속 안타를 내주고 있거든요. 여기서 끊어야 됩니다.”

보스턴 배터리는 작전을 바꿨다.

삼진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에 카운트를 잡으러 들어갔는데, 이게 공략당했다는 건 문제가 있다.

하지만 하버스태드의 빠른 볼 수직 무브먼트는 평균 3.7인치로 최상급, 안타 2개 맞았다고 지나치게 위축될 이유도 없었다.

‘Ok, 됐어’

초구가 스트라이크가 되자 스탠리 호프만 포수는 슬라이더를 요구했다.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많은 아웃카운트와 삼진을 잡아내는 구종, 빠른 볼에 부담을 느끼고 있던 타자는 빠르고 낮게 떨어지는 궤적에 헛스윙을 돌렸다.

슬라이더를 던지기 전에 공략했어야 했는데 초구를 놓친 건 두고두고 아쉬운 일,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진 않았다.

“다시 떨어집니다!! 삼진!! 보스턴이 위기를 넘어갑니다!!”

“자, 여기서 대타를 쓰네요. 존 힐던브랜드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애틀랜타 팬들의 간절한 환호를 받으며 백전노장이 타석에 들어섰다.

힐던브랜드는 13년 동안 6개 팀을 전전한 저니 맨, 그래도 통산 대타 홈런이 14개나 될 정도로 극적인 장면을 많이 만들어 냈다.

홈런이 아니더라도 안타 하나면 동점, 여기서 거르면 1번 타자부터 시작이라 보스턴도 승부를 피할 입장은 못 됐다.

‘얌전히 기어들어 가라고’

하버스태드는 100마일 빠른 볼로 타자를 위협했다.

하버스태드는 올해 프로 11년 차에 접어든 베테랑이지만, 철저한 관리와 타고난 내구성으로 지금까지 기량을 유지하고 있다.

나이만 먹었지 아직 팔팔한 현역, 그에 비해 힐던브랜드는 기량이 떨어진 전형적인 백업 요원이다. 한때 20홈런도 쳤지만 다 과거의 일, 이런 퇴물에게 현역인 내가 밀릴 수 없다는 각오를 드러냈다.

“스윙, 헛칩니다. 카운트는 노 볼 투 스트라이크”

“빠른 볼을 따라가지 못하네요. 꼭 여기서 힐던브랜드를 기용했어야 했을까요.”

애틀랜타 현지 중계석도 부정적인 분위기,

하지만 헬멧을 눌러 쓴 힐던브랜드는 차분하게 다음 공을 기다렸다.

따악 ~ !!“와아아아 ~ !!”

좌중간에 떨어지는 타구, 중견수 알 디즌은 바로 홈으로 송구했다.

해 볼 만 한 승부, 앞발로 홈 플레이트를 막은 호프만은 뛰어드는 주자 머리에 강력한 태그를 날렸다. 판정은 아웃, 환호로 흔들렸던 관중석은 이내 탄식에 빠져들었다.

“자네가 팀을 살렸어!!”

브라이스 감독은 알 디즌의 플레이에 경의를 표했다.

이번 이닝에서 결정적인 수비만 2개, 왜 디즌이 메이저리그 최고의 중견수라 불리고 있는지 확인한 장면이었다.

‘너희들이 날 왕으로 만들어라.’

한 숨 돌린 다카기는 그제야 웃음을 찾았다.

내가 계속 동료들을 이끌어야 한다는 법은 없지 않은가. 가끔은 묻어가는 날도 있어야 하는 법, 5차전에 등판했으니 특별한 일이 없으면 마운드에 오를 일도 없다.

유능한 왕 밑에는 유능한 신하들이 있는 법, 이번만큼은 동료들을 앞세우고 본인은 뒤로 빠졌다.

따아악 ~ !!

이어지는 보스턴의 7회 초 공격, 6회 말의 대역죄인 주앙 고메즈가 좌중간을 넘어가는 솔로 홈런을 터뜨렸다.

그래 봤자 병 주고 약 주기, 고메즈는 하이파이브를 청했지만 다카기는 저리가라는 손짓을 했다.

“왜 그래?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는 거야?”

“됐고 날 왕으로 만들어. 그 전에는 용서 없다.”

왕의 하명을 접수한 고메즈는 거수경례로 응수, 다음부터는 절대 실수 없을 거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놀랄 일이나 없게 해. 공이 네 쪽으로 갈 때마다 불안해 죽겠다.”

“알았어. 걱정하지 마.”

고메즈는 이후 놀안정적인 수비를 선보였다.

내가 등판할 때만 사고를 치는 녀석, 저 정도면 진짜 의도적 아닐까? 괘씸했지만 다카기는 일단 참고 넘어갔다.

그렇게 경기는 흘러 어느덧 9회 말, 브라이스 감독은 클로저 브랜든 바이어를 올렸다.

“자, 브랜든 바이어가 마운드에 오릅니다. 올 시즌 59경기 등판, 2승 1패, 37세이브, 평균자책점 2.14, 64이닝 동안 볼넷 13개, 탈삼진은 74개를 기록했습니다.”

“보스턴에 와서 재탄생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역시 관리를 해주면 좋은 투구를 할 수 있는 선수에요.”

바이어는 몸 쪽 꽉 차는 빠른 볼로 카운트를 잡아냈다.

구속은 93마일, 빠른 볼 위력은 좋다고 할 수 없다. 평균 회전수는 2100회 정도, 다만 제구력만큼은 원 탑이다.

구위가 투구의 모든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해 낸 시즌,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체인지업으로 파울을 유도했다(노 볼 투 스트라이크).

딱 ~ !!

“깊은 타구!! 유격수가 잡아 러닝 스로우!! 아웃입니다!! 주앙 고메즈의 좋은 수비!! 강력한 어깨를 과시합니다!!”

“지금 어딜 보고 있는 거죠? 웃는 건 이해를 하겠는데 시선이 불안정합니다.”

고메즈는 더그아웃을 쳐다보다 바로 시선을 돌렸다.

왜 다카기가 등판하는 날에만 실수가 나오는 걸까.

본인이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는 징크스, ‘나 잘 했지?’라고 아부를 해보려고 했지만 왕의 시선엔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쨌든 고메즈의 호수비에 힘을 얻은 바이어는 자신만의 투구를 이어갔고, 남은 두 타자마저 깔끔하게 처리해 냈다.

3승 2패로 다시 리드를 점한 보스턴, 한 숨 돌린 브라이스 감독은 코치들과 악수를 나눴다.

아홉 번이나 경험한 월드시리즈, 이제 익숙해 질만도 한데 한순간에 승패가 오가는 전장을 지휘하는 건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짐, 통산 9번째 월드시리즈 우승까지 1승만을 남겨두고 있는데, 지금 소감이 어떠십니까?”

“글쎄요. 너무 정신이 없어서 아무 생각도 안 나는군요.”

경기가 끝난 후, 기자들은 브라이스 감독에게 관심을 보였다.

12년 동안 지휘봉을 잡으면서 통산 1187승을 거둔 명장, 특히 8번 진출한 월드시리즈에서 모두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보스턴은 4년 연속 메이저리그 연봉 최고액을 기록한 공룡 구단, 그것만으로는 브라이스 감독의 업적을 깎아내리기 어려웠다.

왕조 창업도 어렵지만 그걸 지켜나가는 건 더 어려운 일, 브라이스 감독을 제외하고 보스턴 왕조를 논할 수 있는가.

앞으로 1승만 더 하면, 브라이스 삼독은 더글러스 패리를 제치고 역대 월드시리즈 최다 우승 감독으로 이름을 올린다.

150년 메이저리그 역사의 정점에 오르는 것, 정말 아무 생각도 안 드는 걸까.

계속되는 질문에 브라이스 감독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첫 지휘봉을 잡았던 때가 생각나는군요. 그때 제 막내딸은 걷지도 못하는 갓난아기였죠. 그런데 지금은 아빠는 수염이 어울리지 않다며 잔소리를 할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많은 시간이 흐른 거죠.”

웃음으로 대화를 끊은 기자들, 분위기가 다시 잡히자 브라이스 감독은 못 다한 말을 이어갔다.

“저는 이곳에서 수많은 영광을 경험했지만 가족을 챙기질 못했습니다. 선수 시절 때도 그랬는데 지금도 이렇게 집 밖을 떠돌고 있으니 … 어느 때는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원래 왕은 그런 겁니다. 이제 와서 약한 소리 하지 말라고요.”

이때 잠자코 있던 다카기가 강력한 한방을 날렸다.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하지 못하는 건 나도 마찬가지, 하지만 왕이란 원래 고독한 존재다.

여기까지 왔는데 약한 소리를 하면 되겠나. 9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을 앞둔 감독에겐 어울리지 않는 약한 소리였다.

덕분에 기자들의 관심은 다카기 쪽으로 집중, 발언권을 얻은 기자가 입을 열었다.

“오늘 6과 1/3이닝 동안 2실점을 하셨는데, 역시 몸에 이상이 있는 겁니까?”

“그거 제 책임 아닙니다. 정정해주세요.”

다카기는 2실점은 나와 관계없다며 오리발을 내밀었다.

고메즈가 실수만 하지 않았어도 타자 주자가 3루에 들어가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머피의 법칙처럼 이어진 외야 플라이, 그 실점이 정말 내 책임인가?

그리고 1루에 주자를 남겨두고 마운드에서 내려오긴 했지만, 하버스태드가 연속 안타를 내주면서 자책점이 됐다.

그 정도는 가볍게 처리해 줘야지, 왜 내가 책임을 져야 하나. 나는 할 일 다 했다며 우겼다.

“저는 그동안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이제는 다른 선수들이 분발해 줘야 할 때죠. 왕이라고 언제나 전면에 서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남은 경기에선 철저히 묻어가겠습니다.”

폭소로 뒤덮인 기자회견실, 정말 남은 경기에서 등판할 생각이 없는 건가. 1승만 하면 보스턴의 승리로 끝나는 월드시리즈, 정말 그럴 거냐는 질문이 계속됐지만 다카기는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자리 하나 마련해 주세요. 잘 보이는 곳으로”

다시 홈으로 옮긴 무대, 다카기는 수더랜드 단장에게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자리를 요구했다.

가족들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것, 좀 어이가 없었지만 수더랜드 단장은 평소 본인이 애용하던 특별석을 내줬다.

그라운드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테라스와 편의시설을 갖춘 공간, 사복으로 갈아입은 다카기는 가족들과 나란히 앉아 경기를 관람했다.

“자기야, 정말 여기 있어도 돼?”

“괜찮다니까, 날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단장을 쫓아내고 차지한 자리, 그것도 선수라는 양반이 여기서 이러고 있으니 키리코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거 하극상 아냐? 단장이 나중에 앙심 품으면 어떻게 해?”

“하극상이라니, 장담하는데 단장은 잘려도 나는 안 잘려.”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오늘따라 허세가 심한 남편,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일리가 있는 말이다.

단장이란 선수를 사고팔 뿐, 실제로 경기를 하진 않는다.

남편은 경기를 주도하며 승리를 거두는 선수, 구단주가 둘 중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누굴 버리겠나.

포스트 시즌에서 26승을 거둔 투수를 쫓아내는 정신 나간 구단주가 이 세상에 있을까? 남편이 이렇게 위세를 부리는 것도 이해는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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