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화. 무책임 - (5)
‘한 3점만 내면 되겠지?’
보스턴의 선공으로 시작되는 5차전, 보스턴 선수들은 3점만 내자는 생각으로 경기에 임했다.
4점 이상 낸 경기에서 패배한 적이 없는 다카기, 다만 오늘 애틀랜타는 좌완 테리 메시아스를 올렸다.
메이저리그 무대가 아무리 넓다고 해도 좌완 투수가 우완 투수보다 많다고 할 수는 없다. 이런 생소함이 타자들에게 부담이 되는 건 사실, 거기다 토마스 메시아스 특유의 빠른 볼 무브먼트는 우타자들을 당혹스럽게 하는데, 우타자 기준으로 바깥쪽으로 휘어져 나간다.
공에 사이드 스핀을 걸어준다는 뜻, 빠른 볼을 몸 쪽으로 던지면 커터처럼 휘어져 나가 땅볼을 유도하기 좋다.
다카기처럼 구위가 좋은 공을 스트라이크 존에 밀어 넣는 유형은 아니지만 땅볼 유도울이 무려 59%나 되는 투수, 3점을 목표로 잡았지만 이걸 달성한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래도 약점은 있다.’
브라이스 감독은 타자들에게 최대한 공을 많이 볼 것을 주문했다.
테리 메시아스는 섬세한 투구를 할 수 밖에 없는 입장, 조금이라도 제구가 어긋나면 볼넷을 남발하며 많은 이닝을 소화할 수 없게 된다.
컨디션에 따라 온도 차가 뚜렷하다는 뜻, 이런 투수는 단숨에 몰아붙이기보다는 스튜처럼 시간을 들여 요리하는 게 정석이다.
횡 무브먼트가 좋다고 해도 다카기처럼 스트라이크 존을 적극 공략할 수 있는 스타일도 아니고, 바깥쪽 제구로 카운트를 늘려가겠지, 계획대로 포위망을 좁혀나갔다.
“바깥쪽, 들어왔다는 판정입니다.”
“올 시즌 메시아스가 183이닝을 던지면서 볼넷을 40개밖에 주지 않았거든요. 본인이 볼 카운트 승부를 못한다는 걸 알고, 스트라이크를 적극적으로 잡기 시작했는데 이게 통할 때와 안 통할 때가 있습니다. 다음 공은 들어갈 수 있을지 의문이네요.”
선두 타자 주앙 고메즈는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공을 골라냈다.
확실히 무브먼트는 좋지만, 구속이 그렇게 뛰어난 것도 아니고 밀어친다는 생각으로 하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했다.
‘으음 … 감 잡았어.’
3구를 밀어쳤지만 우익수 글러브에 들어갔다.
아웃은 됐지만 타구 질이나 방향은 나쁘지 않았던 편, 고메즈의 타격을 지켜보던 베논 리퍼드는 천천히 타석에 들어섰다.
리퍼드도 우타자, 애틀랜타 배터리는 이번엔 몸 쪽으로 승부를 걸었다.
커터처럼 자연스럽게 몸 쪽으로 휘는 궤적, 예상 밖이라 살짝 당황했지만 리퍼드는 초구를 골라냈다.
‘바깥쪽 던지려고?’
몸 쪽 공은 바깥쪽을 던지기 위한 포석,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다음 공은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커브,
볼넷을 줄이기 위해 올 시즌 스트라이크 존 공략 비율을 높인 테리 메시아스, 투 볼로 몰린 이 상황에서도 제구를 택할까. 리퍼드는 카운트를 잡으러 들어오는 공을 놓치지 않았다.
따아악 ~ !!
“높게 뜬 타구가 좌측!! 높게!! 담장을 넘어갑니다!!!! 베논 리퍼드의 선제 솔로 홈런!!!! 잠들어 있던 장타가 드디어 깨어납니다!!”
“포스트 시즌 들어 부진이 거듭됐는데 오늘 한 건 해주네요. 이 홈런은 의미가 있습니다.”
홈을 밟은 리퍼드는 동료들과 손을 마주치며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앞으로 2점만 더 내주면 다카기가 알아서 하겠지, 후속 타자 알 디즌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이번 대결은 좌타자와 좌투수의 승부, 쉽지 않은 승부지만 디즌은 섬세한 투구에 맞춰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안타는 치지 못했지만 8구까지 승부를 끌었고, 테리 메시아스는 1회에만 22개를 던지며 어려운 하루를 예고했다.
그래도 1실점으로 막아냈다는 게 다행, 애틀랜타는 1회 말 반격에 나섰다.
“자, 다카기 하루요시가 마운드에 오릅니다. 이번 포스트 시즌에서 3경기 등판, 3승 무패, 평균자책점 0.33, 27이닝 동안 볼넷 2개, 탈삼진은 34개를 잡아냈습니다.”
“이게 얼마만의 등판입니까. 사실 어제 등판했어야 했는데 피로 누적으로 하루 더 휴식을 했거든요. 솔직히 지켜보는 입장에선 살짝 불안합니다.”
피트 오어의 염려를 무시하듯 다카기는 초구부터 95마일 빠른 볼을 던졌다.
구속은 평소보다 덜 나왔지만 바깥쪽을 찌르는 제구가 일품, 다음 공은 구속을 더 끌어올려 카운트를 잡아냈다.
순식간에 노 볼 투 스트라이크, 슬라이더를 던져 마무리했다.
‘역시 장난이 아니구나.’
대기 타석에 있던 브라이언 퀸은 생각을 정리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상대는 메이저리그 역대 최고의 투수라 불리는 괴물, 하지만 브라이언 도 초구 타격을 즐길 정도로 타격에는 일가견이 있다.
소설 속의 주인공은 강자와 맞붙이며 성장하는 법, 브라이언은 자신의 이미지를 드래곤과 마주한 소년 검사에 대입시켰다.
다만 지금은 공주님이 아니라 팀을 구해야 하는 상황, 용기 있게 검을 휘둘렀다.
‘이런 … 공격이 안 먹히잖아.’
평타는 안 먹히는 거대한 드래곤, 이런 때는 마법이나 다른 스킬을 이용해야겠지, 평소 잘 쓰지 않는 밀어치기를 시도했다.
딱 ~ !!
“타격!! 파울 라인 벗어납니다. 카운트는 노 볼 투 스트라이크”
“오래 쉰 만큼 구위는 확실하네요. 이런 타격으론 다카기의 공을 공략하기 힘듭니다.”
“공략이 가능하긴 한 겁니까? 평균자책점 0.33만 봐도 답이 없는데요.”
브라이언은 다시 칼을 빼들었지만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슬라이더에 헛스윙을 돌렸다.
생각보다 너무 강한 드래곤, 저 강철의 비늘을 뚫을 방법은 없는 걸까. 그동안 연전연승을 거듭했던 소년 검사는 부러진 칼을 질질 끌며 후퇴했다.
‘너희들 일 안 하냐?’
다카기는 2회에도 주자의 출루를 허용하지 않았다.
문제는 보스턴 타선도 막혔다는 것, 상위 타선은 어떻게든 메시아스를 괴롭혔지만 나머지 선수들은 그렇지 못했다.
게임만 봐도 혼자 스킬을 발동하면 적에게 큰 데미지를 줄 수 없다.
연계 플레이가 중요한 법, 저딴 식이라면 상위 타선이 분발해도 무슨 큰 효과가 있겠나.
안타까운 마음으로 3회 말을 맞이했다.
‘이번엔 이긴다. 이 나쁜 드래곤, 각오해라.’
원 아웃 주자 없는 상황에서 소년 검사가 다시 타석에 들어섰다.
브라이언 퀸은 올 시즌 20홈런, 100타점을 넘긴 강타자지만 키는 178cm로 그리 크지 않다.
다카기보다 무려 17cm나 작은 신장, 마운드 보정까지 거치면 다윗과 골리앗이 따로 없다.
이런 꼬맹이가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강타자로 성장하고 있다니, 재미있지 않은가. 치겠다고 달려드는 꼴도 제법 귀여운 편, 드래곤은 전력을 다해 놀아줬다.
딱 ~ !!
“다시 밀립니다. 파울, 99마일이 찍히는군요.”
“다카기가 올 시즌 빠른 볼 수직 무브먼트가 4.1, 헛스윙률은 무려 34%였거든요. 어지간한 투수들이 던지는 변화구보다 더 치기 어려웠다는 뜻입니다.”
“빠른 볼 하나만으로 타자를 몰아세울 수 있는 선수에요. 홈 팬들도 조금 당황스럽겠네요.”
철저히 밀리는 브라이언의 방망이, 애틀랜타 홈팬들은 당황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올 시즌 브라이언은 홈에서 강했다.
홈 성적은 타율 0.349, 홈런 14개, 63타점, 그렇다고 여기가 타자 친화적인 구장도 아니다.
오히려 투수에게 유리한 구장, 파크 팩터를 일반 구장으로 조정하면 브라이언은 올 시즌 30홈런을 넘겼을 거다.
체격은 크지 않아도 강한 손목 힘과 단단한 체형으로 장타를 양산하는 소년 검사, 강렬한 스윙으로 팀을 승리로 이끌었던 애틀랜타의 영웅에게 이런 모습은 어울리지 않았다.
“스윙!! 삼진입니다!! 브라이언 퀸은 오늘 두 타석 모두 삼진으로 물러나는군요!!”
“지금도 빠른 볼인데, 전혀 타이밍을 못 잡고 있네요. 조금 더 앞에서 쳐야 합니다.”
또 패배하고 들어가는 애송이,
그래도 다음에 두고 보자며 한 번 쳐다보고 가는데, 다카기는 그런 투지가 싫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즐거운 일, 집에서 아들들과 놀아줄 때도 다카기는 아이들의 승부욕을 자극한다.
아이라고 봐주면 자기가 진짜 잘하는 줄 착각하는데, 아이가 귀여울수록 철저하게 밟아 놔야 눈을 부릅뜨고 오기를 부린다.
실력과 승부욕은 그런 과정을 거쳐 성장하는 법, 그라운드라고 다를 건 없다.
‘전력으로 덤벼봐라 꼬맹이, 난 다음에도 이곳에 있을 테니까.’
보란 듯이 꼬맹이들을 농락하는 드래곤, 그래도 애틀랜타는 테리 메시아스가 7회 초까지 3실점 투구를 펼치면서 크게 밀리진 않았다.
‘나는 이제 안 되겠어. 뒤를 부탁한다.’
본진으로 귀환한 메시아스는 너덜너덜해진 방패를 내려놨다.
막는다고 막긴 했는데 보스턴 타선은 역시 상대하기 버거웠다. 이제는 동료들이 해줘야 할 때, 애틀랜타 타선은 7회 말 반격에 나섰다.
‘3대 0인데 어떻게 하지?’
브라이스 감독은 마운드에 오르는 다카기를 빤히 쳐다봤다.
3경기 완투를 하면서 몸에 무리가 온 선수, 오늘 괜찮은 투구를 이어가고 있지만 올해만 쓰고 버릴 선수가 아니지 않은가.
3대 0이면 살짝 불안한 점수 차지만 불펜을 동원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버스태드 - 루카스를 불펜에 대기시켰다.
‘이번에는 이긴다. 반드시!!’
한편, 다시 드래곤에게 덤벼드는 꼬마 검사, 다카기는 건재를 과시하듯 97마일 빠른 볼을 밀어 넣었다.
따악 ~ !!
“어?!! 이 타구는 좌중간에 떨어집니다!! 펜스까지 굴러가는 타구!! 브라이언은 1루를 지나 2루!! 아 ~ !! 여기서 실책이 나오는군요!! 그 사이 3루까지 들어갑니다!! 브라이언의 오늘 경기 첫 안타!! 포스트 시즌 12경기 연속 안타 기록을 이어갑니다!!”
“지금은 고메즈 선수가 중계 플레이를 해줬어야 했는데, 송구를 놓쳤어요. 지금까지 잘 해왔는데 … 잊을 만하면 이렇게 집중력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이네요.”
송구를 뒤로 빠뜨린 고메즈가 허탈한 표정을 짓는 동안, 3루를 점거한 브라이언은 관중석을 향해 손가락 세리머니를 날렸다.
오늘 애틀랜타가 처음으로 밟아본 3루, 아직 득점은 나오지 않았지만 퀸의 활약은 분위기를 확실히 끌어올렸다.
‘쩝’
다카기는 다음 타자에게 우익수 플라이를 허용하며 실점을 내줬다.
위에는 위가 있다는 걸 가르쳐 줬어야 했는데, 다 이긴 것처럼 좋아하는 꼬맹이, 솔직히 기분은 좋지 않았다.
‘이제 그만 하시죠. 아니 … 조금 더 지켜볼까요?”
브라이스 감독은 다카기의 심기를 살폈다.
지금 당장 달려가서 내리고 싶지만, 그랬다간 무슨 반응이 나올지 누가 아나. 2아웃이니 조금 더 지켜보는 것도 좋겠지, 그런데 여기서 내야 안타가 나오면서 애틀랜타의 사기는 더욱 높아졌다.
‘더는 안 되겠습니다.’
브라이스 감독은 바로 마운드로 달려 나갔다.
등을 돌려 버리는 에이스, 역시 심기가 불편한 건가. 실책으로 실점의 빌미를 제공한 고메즈도 눈치를 살피며 마운드로 향했다.
“자네는 오늘도 훌륭했어. 이제 다른 선수들에게 맡기는 게 어떤가?”
“그래, 지금 내려간다고 뭐라고 할 사람 아무도 없다고”
다들 내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은데, 다카기는 그게 오히려 귀에 거슬렸다.
어느 때보다 좋았던 구위, 6과 2/3이닝 동안 탈삼진을 12개나 잡아냈다.
정말 이대로 내려가야 하나, 자존심이 상했지만 하버스태드에게 마운드를 내주고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