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화. 무책임 - (4)
따악 ~ !!
“자!! 여기서 안타가 나오는군요!! 스탠리 호프만이 진루합니다!!”
“이렇게 되면 양쪽 모두 다급해지겠네요.”
피트 오어의 예상대로 양 팀은 다급하게 움직였다.
애틀랜타는 불펜에서 몸을 풀던 매튜 라킨을 투입, 보스턴은 대주자 베니 엘리슨을 투입했다.
8회인 만큼 보스턴은 대량득점보다 동점에 집중할 때, 올 시즌 보스턴에서 가장 많은 도루(17개)를 기록한 베니 엘리슨은 여차하면 뛰라는 사인을 받았다.
‘이거 골치 아픈데’
애틀랜타는 벤치의 신경은 1루에 집중됐다. 누가 봐도 뛰라고 기용한 선수, 그런데 지금 타석에는 좌타자가 들어섰다.
주자가 언제 뛰는지 포수가 볼 수 없기 때문에 벤치에서 주자의 움직임을 보고 사인을 내줘야 하는 입장, 문제는 이것뿐만이 아니다.
포수는 무조건 오른손잡이, 당연히 좌타자가 타석에 들어섰다면 송구를 하기 위해 왼쪽으로 빠져야 하는데, 이 동작이 쉽지 않기 때문에 투수 입장에선 몸 쪽을 던지기도 까다롭다.
타자 입장에선 바깥쪽 볼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 서로 패를 보여주고 하는 게임이지만 긴장감은 어느 때 보다 날카로웠다.
‘지금이 기회다. 뛰어’
현역 시절 명포수로 이름을 날린 브라이스 감독은 사인을 줬다.
이런 상황에서 빠른 볼을 던진다면 투수는 조금 뒤로 빠져 있는 경우가 많다. 반면 변화구라면 조금 전진해 있는 편, 조금 전진해 있는 포수를 보고 지금이 뛸 타이밍이라는 걸 깨달았다.
“자!! 여기서 뛰는군요!! 2루까지 여유 있게 들어갑니다!! 베니 엘리슨의 도루 성공!! 보스턴이 득점권 기회를 맞이합니다!!”
“지금 변화구 타이밍이었거든요.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기가 막힙니다.”
도루에 성공한 베니는 더그아웃을 향해 손가락 세리머니를 날렸다.
역시 전설의 명포수 브라이스 감독, 저 사람이 사인을 줘서 틀렸던 적이 거의 없다. 이번에도 믿고 뛰었는데 기가 막히게 적중한 예언, 이 경기는 잡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제 쫄리는 건 애틀랜타, 브라이스 감독은 선수들에게 침착하라는 주문을 내렸다.
따악 ~ !!
서비스처럼 따라오는 적시타, 투수 가랑이 사이를 지난 타구는 유유히 내야를 빠져나갔다.
설마 3루 도루까지 하겠나, 견제구를 던질 상황도 아니었고, 애틀랜타의 유격수와 2루수는 센터 쪽을 훤히 열어뒀다.
하필이면 그쪽으로 빠져나간 타구, 베니 엘리스는 미끄러지듯 홈으로 파고들었고 그 자리에서 폴짝 뛰어오르며 포효했다.
대주자로 뛰고 있지만 어쨌든 팀에 보탬이 되고 있는 입장, 가슴을 펴고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이곳은 이미 축제 분위기, 방금 전까지 침울해 있던 분위기는 날아가 버렸고 모두들 역전만 바라봤다.
[따악 ~ !!]
“다시 강한 타구!! 좌익수 앞에 떨어집니다!! 보스턴의 계속되는 맹공!! 매튜 라킨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애틀랜타 입장에선 악몽이네요. 지금 불펜에 이 선수보다 믿을 수 있는 투수가 어디에 있습니까.”
애틀랜타는 올 시즌 불펜 때문에 어지간히 속을 썩었다.
그래도 매튜 라킨은 8승 3패, 평균자책점 2.81을 기록하며 선전, 포스트 시즌에서도 14이닝 동안 2실점만 하며 팀을 이끌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웃 카운트 하나도 못 잡고 동점에 역전까지 허용할 위기, 브라이스 감독은 여기서 투수를 좀 더 흔들어야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평소 도루는 거의 지시하지 않는 스타일이지만 오늘만큼은 미친 듯이 뛰어볼 생각, 타석에 들어선 고메즈는 번트 자세를 잡았다.
‘어??’
자세만 잡고 배트를 뺄 생각이었는데 번트 대기 좋게 들어온 공, 고메즈는 1루 쪽으로 느린 땅볼을 굴렸고 그 사이 1루 주자는 2루까지 진루했다.
예상했던 전개는 아니지만 어쨌든 1사 주자 2루, 베논 리퍼드가 타석에 들어섰다.
‘이거 히트 앤 런 나올 분위기인데’
애틀랜타 벤치는 계산기를 두들겼다.
주자가 2루에 있으니 보스턴은 길게 끌 것 없이 여기서 승부를 볼 생각이겠지, 하지만 타석에 들어선 리퍼드는 최근 타격이 좋지 않다.
그렇다면 애틀랜타 입장에서도 여기서 아웃을 잡고 가는 게 유리, 그런데 무슨 망령이 들었는지 애틀랜타의 포수 제임스 핸더슨은 견제를 생각했다.
타자는 여기서 영웅이 되길 바라겠지, 2루 주자도 언제든 홈으로 파고들 기세다. 이 틈을 노린다면 의외로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하지만 2루 견제를 할 상황이라면 내야수가 베이스로 들어가는 타이밍에 포수가 사인을 내는 게 정상, 그런데 제임스 핸더슨은 이 기본을 망각해버렸다.
포수 사인을 본 마운드의 매튜 라킨은 2루로 공을 투척, 하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보스턴은 이 횡재를 넙죽 받아먹을 뿐, 이렇게 애틀랜타는 어이없게 역전까지 헌납하고 말았다.
겉으로만 보면 매튜 라킨이나 내야수의 책임이지만 이건 명백히 포수 책임, 하지만 이런 배경을 알 리 없는 홈 팬들은 매튜 라킨에게 야유를 퍼부었다.
‘잘 하네, 내가 없어도 되겠는데?’
한편, 꾀병을 둘러대고 경기장을 나선 다카기는 호텔에서 경기를 지켜봤다.
이게 6회까지 3대 0으로 끌려가던 팀의 플레이인가. 충격 요법이 효과를 봤으니 다행이지만, 이렇게 할 수 있는데도 그동안 내게 의지한 동료들이 괘씸했다.
‘그냥 내일도 꾀병 부려?’
괘씸해서 책임을 떠넘길까 했지만 그건 조금 무리수, 심드렁한 얼굴로 경기를 지켜봤다.
“됐어!!”
“우리가 이겼다!!”
3차전은 결국 보스턴의 극적인 역전승으로 끝났다.
선수들은 라커룸에서 승리를 자축하며 분위기를 끌어올렸지만, 한편으로는 병원으로 간 다카기의 몸 상태가 걱정됐다.
“진짜 병원 간 거야?”
“통역이랑 같이 나가는 것만 봤네.”
스탠리 호프만은 원정경기에 동행한 클럽하우스 매니저를 붙잡았다.
정말 몸이 좋지 않다면 내일 경기 등판은 불투명, 감독실로 향하던 브라이스 감독도 한쪽 귀를 슬쩍 열어뒀다.
이쯤에서 짜잔 ~ 서프라이즈 ~ 하고 나타날 줄 알았는데 정말 병원으로 갔다니, 일단 단장과 전화 통화를 나눴다.
[지금 병원으로 갔다고 했나?]
“예, 부상은 아닌 것 같고 몸이 조금 안 좋다고 합니다.”
수더랜드 단장은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내일 경기만 잡아내면 고지가 눈앞인데 하필이면 에이스가 병으로 쓰러질 줄이야, 다카기와 동행했다는 트레이너와 연락을 주고받았다.
[의사가 뭐라고 하나?]
“일단 돌아가라고 해서 지금 호텔에 있습니다.”
미국은 환자가 왔다고 바로 봐주지 않는다.
예약을 해도 며칠을 기다려야 하는데 대뜸 나 아프다고 하면 누가 돌봐주나. 심지어 어느 의사는 ‘오늘 날씨 좋죠?’ 이런 말장난이나 하면서 시간을 끈다.
진료를 하고 시간만 채워도 돈을 받기 때문, 급한 건 환자지 의사가 아니다.
진료 체계가 이 모양 이 꼴이니 돈 있는 사람들은 주치의를 두는 것, 메이저리그 구단은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각 지역의 병원과 협력관계를 맺어뒀지만 큰 부상도 아니고 몸이 조금 안 좋다고 찾아온 선수를 돌봐줄 이유가 없었다.
덕분에 다카기의 꾀병은 들통나지 않았고, 보스턴 구단은 끙끙거리며 다음 날 아침을 맞이했다.
‘그냥 확 태업해 버려?’
하루 종일 호텔 안에서 뒹굴거린 다카기는 몸을 긁적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이켜 보면 올 시즌은 정말 열심히 일했다.
정규시즌에서만 271이닝, 포스트 시즌에서 3경기 연속 완투, 도합 무려 298이닝을 소화했다. 그런데 틈만 나면 말썽을 부리는 어린 것들 뒤치다꺼리까지 하고 있으니, 거기다 어제 경기는 생각할수록 괘씸했다.
내가 아프다는 걸 알고 나서야 전투적으로 변한 선수들, 처음부터 그렇게 할 수 있는데 내가 등판하는 4차전을 믿고 3차전을 태업한 건가.
한 경기만 더 지켜보기로 했다.
[저 조금 더 쉬어야겠어요.]
“알았네. 무리하지 말고 푹 쉬게”
일단 브라이스 감독에게 전화로 통보를 했다.
평소 그만 던지라고 해도 더 던졌던 선수, 그런 청개구리가 설마 꾀병을 부릴 거라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다른 선수들도 그러려니 했다.
“그 자식도 인간은 인간이었구나. 난 기계인 줄 알았어.”
“힘들겠지, 올 시즌 298이닝이나 던졌잖아. 다른 투수였으면 벌써 쓰러졌을걸?”
뭔가 아쉽지만 그래도 납득은 되는 상황, 하지만 다카기의 등판을 예상했던 애틀랜타와 현장 관계자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동안 무리를 한 건 사실이지만 오늘 마운드에 올랐다면 5일 만의 등판, 휴식은 충분했다.
그런데 빠졌다는 건? 어제 경기는 패배했지만 끝판왕의 부재는 애틀랜타 선수들에게 희망을 줬다.
‘너만 없으면 어떻게든 된다.’
어제와는 또 다른 경기 흐름, 보스턴은 선취점을 내며 앞서나갔지만 중심타자 브라이언 퀸의 활약과 나머지 선수들의 분투로 애틀랜타는 역전에 성공했다.
그리고 이 장면을 호텔에서 지켜보고 있던 다카기는 밖으로 나와 산책을 했다.
꾀병 부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아무리 최고급 스위트룸이라도 감옥에 갇혀 있는 기분, 가볍게 뛰며 몸을 풀었다.
“저거 다카기 아냐?”
“그러게?”
근처를 지나가던 애틀랜타 시민들은 경악했다.
경기장에 있어야 할 선수가 여기에 있으니 다들 어리둥절, 길가에 차를 댄 경찰은 손을 흔들며 반가움을 표했다.
“Lord Takagi, What are you doing here?”
=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친절하게 Lord까지 붙여주는 예의 있는 경찰, 다카기는 가던 길을 멈추고 미소로 답했다.
“호텔에 가만히 있으니까 심심하더라고요.”
“그럼 야구장으로 가면 되는 거 아닙니까?”
“농땡이 부리고 있어요. 지금 당신이 하는 것처럼 말이죠.”
별로 재미있는 개그도 아닌데 경찰은 박수를 치며 낄낄거렸다. 주위 사람들도 신기하다는 반응, 경찰은 실례가 안 된다면 같이 사진 한 장 찍어도 괜찮겠냐고 물었지만 다카기는 꾀병이 발각 될까 봐 사인만 해주고 가던 길을 갔다.
에이스가 농땡이를 부리는 사이, 보스턴은 5대 3 패배를 당했고 이제 여론의 관심은 다카기의 등판에 집중됐다.
브라이스 감독은 다카기의 몸 상태가 좋지 않다고 솔직하게 말했는데, 일각에선 산책을 하는 모습을 봤다는 제보가 날아든 상황, 도대체 어느 쪽이 맞는 건가.
다음 날 아침, 다카기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방문을 열어젖혔다.
“자네, 오늘은 괜찮나?”
“네, 등판해도 될 것 같네요.”
“그런데 자네 어제 호텔 밖으로 나갔다는 말을 들었는데 … ”
브라이스 감독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정말 아팠던 건지, 아니면 우릴 놀리려고 했던 건지, 어느 쪽이든 60을 넘긴 노인의 심장에는 좋지 않았다.
“가만히 있어봤자 몸이 좋아지는 게 아니잖아요. 가볍게 걸었어요.”
“뭐 … 그럼 됐네.”
그렇다는데 뭘 어쩌겠나, 능구렁이처럼 감독의 취조를 회피한 다카기는 호텔로 향하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가능하면 보고 싶지 않았던 끝판왕의 등장, 애틀랜타 사진 기자들은 불펜에서 몸을 풀고 있는 다카기를 집중 조명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만 나가 달라는 구단직원의 요구에 따라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팔에 로켓을 달았나?’
불펜 포수 짐 라이스는 몸이 뒤로 밀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동안 다카가의 공을 받아봤지만 오늘은 특히 컨디션이 좋은 편, 힘든 하루를 보낼 애틀랜타 선수들에게 동정심까지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