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화. 무책임 - (3)
‘또 조급증인가?’
2차전이 끝난 후 수더랜드 단장은 계산기를 두들겼다.
로버트 클레이튼을 1차전으로 내세운 전략을 기가 막히게 들어맞았지만, 2차전은 다 잡았던 경기를 놓치고 말았다.
ALCS와 비슷한 패턴, 수더랜드 단장은 1승 1패에서 에이스를 내세워 분위기 전환에 성공했지만 다카기는 포스트시즌 3연속 완투라는 쓸데없이 화려한 퍼포먼스를 펼쳤다.
솔직히 3차전에 에이스를 내세운 것도 무모했던 기용, 포스트 시즌 2경기 연속 완봉 승을 거둔 투수를 그렇게 활용한 건 비효율적이었다.
‘그래, 이번에는 안 쓴다.’
고심 끝에 다카기는 벤치에 앉혔다.
필승카드의 등판은 4차전, 그렇게 애틀랜타로 무대를 옮긴 보스턴은 훈련 없이 휴식을 택했다.
2차전에서 타선이 조금 답답한 모습을 보였지만 브라이스 감독은 그 원인을 피로 누적으로 인한 집중력 저하로 판단했다.
‘주입식 교육도 병행한다.’
그리고 일부 선수들은 따로 불러 조언을 줬다.
올 시즌 2번에서 좋은 활약을 한 베논 리퍼드, 하지만 이번 ALCS에서부터 존재감이 죽어버렸다.
작년만 해도 볼넷이 너무 적을 정도로 적극적인 타격을 했던 선수, 그리고 그게 발목을 잡았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올 시즌, 베논 리퍼드는 인내심 있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많은 볼넷을 얻어냈고 여기에 20홈런, 2루타 40개라는 놀라운 생산력을 보여줬다.
그런데 2번은 출루보다는 타격이 더 중요한 자리, 조금 더 적극적으로 배팅을 해도 좋지 않을까? 브라이스 감독은 중심타선에게 기회를 넘기려는 모습에 아쉬움을 표했다.
“자네는 영웅이 될 능력이 있어, 왜 그렇게 하지 않는 건가?”
“저 이번 포스트 시즌에서 2할 2푼 치고 있는데요.”
“그건 자네가 너무 신중하게 볼을 보느라 기회를 놓친 것뿐이야.”
리퍼드가 초구를 건드리지 않자 상대 배터리는 이 점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럼 그걸 치면 되는 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다. 작년만 해도 조급한 스윙이 문제가 됐던 리퍼드, 본인도 그게 문제라는 걸 몸으로 느꼈다.
초구를 잘 건들지 않으면서 좋아진 성적, 하지만 이건 깊이 생각해 볼 문제였다.
■ 브라이언 퀸(애틀랜타)
= 초구 타율 : 0.559
= 장타율 1.059
= WRC + 306
2차전에서 적극적인 타격으로 팀을 승리로 이끈 브라이언 퀸, 보스턴의 호프만 포수는 이런 타자의 특성을 알고 초구에 좋은 공을 주지 않으려 했던 거다.
그런데 고집을 부리다 얻어터진 게 댈러스 레이븐, 상대 타자에 대한 공부가 얼마나 부족했으면 이런 결정을 내렸겠나.
공부를 안 했으면 포수 말이라도 잘 들었을 것이지, 그러지 못했던 게 레이븐의 결정적인 실책, 브라이스 감독은 이 문제를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그 친구도 마음만 먹으면 잘 칠 수 있는데 … ’
베논 리퍼드는 브라이언 퀸에게 밀릴 선수가 아니다.
20홈런에 2루타 40개를 때려낼 수 있는 2번 타자가 메이저리그에 몇 명이나 있겠나. 이런 보물이 제 빛을 발휘하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내가 자네에게 공을 잘 보라고 한 건 볼넷을 얻어내라고 한 말이 아니야. 자네는 충분히 영웅이 될 자질을 갖추고 있어. 좀 더 적극적으로 해 보게”
“알겠습니다.”
이렇게 보스턴은 2차전 패배로 어수선해진 분위기를 재정비하고 경기에 나섰다.
1회 초 보스턴의 선공, 주앙 고메즈가 타석에 들어섰다.
리퍼드와 달리 고메즈는 초구 타격을 즐기는 편, 올 시즌 초구 상대로 OPS 0.883을 기록했다. 요즘은 타율이 아니라 OPS를 두고 타격을 평가하는 시대, 이 정도면 어지간한 중심타자 부럽지 않았다.
‘어림없다.’
‘그래, 너희들의 시커먼 속은 알고 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애틀랜타 배터리는 좋은 공을 주지 않았다.
그리고 한 수 앞을 더 내다본 고메즈, 게스 히팅은 거의 안 하는 성격이지만 경력이 쌓이면서 투구 패턴을 읽는 능력도 제법 좋아졌다.
따악 ~ !!
“잡아당긴 타구가 라인 안 쪽에 떨어집니다!! 고메즈는 1루를 지나 2루를 바라보는군요!! 2루까지 들어갑니다!! 선두 타자 2루타!! 보스턴이 좋은 기회를 맞이합니다.”
“이번 월드시리즈에서 벌써 5안타네요. 하루가 다르게 자라고 있습니다.”
피트 오어는 고메즈의 성장에 박수를 보냈다.
작년만 해도 수비는 물론 공격도 뭔가 어설펐는데, 이번 시즌 들어 성장세가 뚜렷하다. 큰 대회에서 좋은 경기를 보여주는 것도 기특한 일, 이 정도면 수더랜드 단장이 이른 나이에 거금을 쥐여주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장기계약을 예측했다.
‘나는 내 방식대로 할 거야.’
이제 타석에는 베논 리퍼드, 넌 영웅이 될 수 있다는 감독의 격려를 받았지만 리퍼드는 자기만의 스타일을 밀고 갔다.
작년에 비해 올 시즌 성적이 크게 뛰어오른 건 밀어치는 타격을 중시한 것도 한몫했다.
작년 시즌, 리퍼드는 당겨 친 타구 비율이 60%를 넘었다. 뜬 공 비율은 무려 46%, 그런데 올 시즌은 당겨 친 타구가 42%, 뜬공은 40% 정도로 줄어들었다.
대신 센터 쪽으로 밀어내는 타구가 늘어나면서, 타율과 출루율이 비약적으로 상승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브라이스 감독은 강한 2번을 원한다. 그리고 그 요구를 채워준 리퍼드, 감독의 말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나만의 방식을 버리고 싶진 않았다.
“초구, 지켜봅니다.”
“글쎄요. 볼이 되긴 했지만 이 정도면 방망이가 나올 만하지 않았나요?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리퍼드가 너무 신중한 타격을 하는 것 같습니다.”
2구는 지켜보면서 원 볼 원 스트라이크, 하루 이틀 된 일도 아니라 고메즈는 2루 근처를 맴돌았다.
딱 ~ !!
드디어 나온 방망이, 의도대로 타구는 센터 쪽으로 갔지만 멀리 뻗지 못했다.
영웅이 되라고 그렇게 용기를 줬는데 이번에도 열매를 맺지 못하다니, 브라이스 감독은 그러려니 하는 반응을 보였다.
팀의 주연은 선수, 감독은 주연이 될 수 없다. 조언을 줘도 그걸 받아들이는 건 선수의 몫, 그나마 경기에 개입할 수 있는 건 투수 교체뿐이다.
왜 내 말대로 하지 않았느냐는 말은 이곳에서 통하지 않는 법, 12년 차 베테랑 감독은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자, 이제 타석에는 알 디즌이 들어섭니다. 이번 포스트 시즌 성적은 0.278, 홈런 2개, 9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월드시리즈에선 0.222에 그치고 있죠. 타점이 2개가 있긴 한데, 잔루가 너무 많아요.”
디즌은 이번 월드시리즈에서 잔루만 6개를 기록했다.
리퍼드와 달리 공격적인 타격을 하는데도 이런 결과가 나온다는 게 문제, 갑작스런 타선의 엇박자는 보스턴의 불안요소로 작용했다.
‘작전을 바꿔야겠어.’
알 디즌은 팀 배팅에 주력했다.
강한 타구가 43%나 될 정도로 강한 타구에 집중했던 시즌, 하지만 월드시리즈에서 잔루가 쌓이자 방향을 수정했다.
‘강하게 치지 왜 그랬냐.’
벤치에 앉아 있던 다카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메이저리그에 올라온 타자가 밀어치기를 못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디즌이 무슨 생각으로 저런 스윙을 했는지 이해는 됐지만, 팀에 큰 도움이 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너무 결과만 보고 플레이를 하고 있어.’
다카기는 동료들이 필요 이상으로 긴장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분명 프로선수라면 결과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결과를 신경 쓰느라 내 평소 패턴까지 무너진다면 그게 옳은 일은 아닐 거다.
‘그래, 열심히 해도 때론 지고 삼진을 당할 수도 있는 거지.’
아무리 열심히 해도 결과는 따라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
특히 야구는 다른 스포츠에 비해 변수가 많은 운동, 결과만 보고 행동하면 모든 게 엉망이 돼 버린다.
마이 페이스를 유지하는 것도 필요한 법, 지금의 디즌이라면 기대할 게 별로 없었다.
딱 ~ !!
“높게 뜬 타구!! 하지만 중견수가 잡아냅니다. 2루 주자는 움직이질 못하는군요.”
“답답하네요. 2차전에서도 초반에 앞서나가다가 중반에 공격이 끊기면서 역전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불펜도 무너진 상황에서 이런 답답한 공격이라면 … 글쎄요.”
엄습해 오는 불안감, 이대로 득점 없이 공격이 끝나는 건가. 피트 오어의 불안감은 현실이 됐다.
반면, 애틀랜타는 3회까지 6안타를 퍼부으며 3득점, 34년 만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기원하는 홈 팬들의 환호성은 한껏 달아올랐다.
‘밀리고 있다. 확실히’
이제 메이저리그 7년 차, 고참 냄새가 제법 나는 다카기는 표정 없는 얼굴로 경기 흐름을 살폈다.
2차전 때도 그렇지만 지금 보스턴은 패배를 향해 직진하고 있다.
처참하게 구겨진 분위기를 끌어올리겠다는 영웅도 없는 상황, 결국 내가 4차전에서 수습해야 하는 건가.
하지만 내가 내일 이긴다는 보장도 없고, 뭔가 조치가 필요했다.
“감독님, 저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왜 그러나?”
“몸이 좋지 않네요. 병원에 다녀오겠습니다.”
브라이스 감독은 흠칫했다.
오늘 져도 내일이 있다는 희망이 있었는데, 다카기의 몸 상태가 따라주지 않는다면? 주위에 있던 선수들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농담하는 거지?”
“네가 아플 리가 없잖아? 분위기 안 좋은데 장난치지 말라고”
뭐라고 하든 말든 더그아웃 뒤편으로 들어가 버리는 에이스, 진짜 아픈 건가. 에이스의 이탈로 보스턴 분위기는 더욱 가라앉았다.
물론 다카기는 진짜 아픈 게 아니었다. 내가 언제까지 너희들 뒤치다꺼리 할 순 없다는 충격요법, 역효과가 일어날 위험도 컸지만 원래 영웅은 난세에서 나오는 법이다.
내가 사라져야 그 자리를 대신하겠다는 놈이 튀어나오겠지, 몇몇 선수가 슬쩍 반기를 들었다.
‘내가 너희들은 구원하겠다.’
다사다난한 포스트 시즌을 보내고 있는 제임스 올슨도 그 중 한 명, 첫 두 타석은 무안타로 물러났지만 3번째 타석에서 한 방을 터뜨렸다.
따아악 ~ !!
“잡아당긴 타구가!! 높게!! 우측 담장을 넘어갑니다!!!! 제임스 올슨의 솔로 홈런!! 보스턴이 드디어 추격을 개시합니다!! 스코어 3대 1!! 경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월드시리즈 1차전에서도 앞서 나가는 홈런을 치지 않았습니까? 존재감을 제대로 드러내고 있네요.”
홈런을 날리고 돌아온 올슨은 동료들과 세리머니를 마치고 한 자리를 차지했다.
다카기가 앉았던 바로 그 자리, 올슨을 좋게 보지 않는 몇몇 선수들은 눈꼴 시리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 팀의 리더는 다카기다. 네가 아니야.’
다카기의 충신들은 바로 견제에 나섰다.
저게 조금 잘 나간다고 이젠 왕좌까지 넘보는 건가. 그것만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덕분에 활기가 살아난 벤치, 보스턴은 8회 초 공격에서 1점을 더 따라붙었다. 2차전에서 잠시 불안한 모습을 보였던 불펜이 애틀랜타의 공격을 봉쇄, 보스턴은 정규이닝 마지막 9회 초 반격에 나섰다.
‘괜찮을 거라고 믿는다. 아니, 괜찮을 거야.’
타석에는 스탠리 호프만, 병원으로 간 에이스의 몸 상태가 조금 걱정됐지만, 언제까지 그 녀석에게 책임을 떠넘길 순 없는 거 아닌가.
그동안 팀을 위해 노력했으니 우리가 더 열심히 해야겠지, 몸도 마음도 지쳤지만 집중력을 끌어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