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282화 (282/361)

282화. 무책임 - (2)

이어지는 2차전, 보스턴은 레이븐의 투구에 기대를 걸었다.

ALDS에서 살짝 흔들렸지만 그 이후 경기에서 2승 무패, 평균자책점 2.14를 기록하고 있는 레이븐, 제2의 다카기의 등장인가.

지금 같은 제구를 유지한다면 마냥 헛소리는 아니겠지, 레이븐도 본인의 실력에 자신감을 부여했다.

“나도 오늘 완투나 해볼까?”

경기를 앞둔 레이븐은 동료들 앞에서 큰소리를 쳤다.

데뷔 2년 차를 맞이했지만 완투는 아직 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다카기가 포스트 시즌 3연속 완투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우자 자극을 받은 것도 사실, 이때 같은 2년 차 신인 제임스 올슨이 끼어들었다.

“넌 6회까지만 막아도 괜찮아.”

“난 완투를 할 능력이 없다는 거야?”

“능력이고 자시고 감독이 널 그때까지 놔둘지도 의문이다.”

악역을 자처한 데다 동료들과도 관계도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닌 올슨, 그러다 보니 필터 없이 속마음을 쏟아내는 일이 많아졌다.

“감독이 너한테 원하는 건 딱 6회까지 막아주는 거야, 그 이후는 너와 관계없어. 아니 책임질 이유도 없지”

“네가 감독의 생각을 어떻게 알아?”

“널 어떻게 다루는지 쭉 봤잖아?”

조금씩 날카로워지는 목소리, 이때 스탠리 호프만이 눈치를 줬다.

다카기가 캡틴에서 물러난 이후, 클럽하우스 분위기는 최고참 호프만이 주도하는 중, 쓸데없는 충돌은 용납하지 않았다.

“완투하면 하는 거지 너는 왜 말을 그렇게 하냐?”

“아니 … 나는 그저 사실을 … ”

“말대답하지 마. 그냥 미안하다고 해”

마지못해 하는 사과, 레이븐도 진심이 담기지 않은 사과에 별다른 호응은 해주지 않았다.

‘6회 이후는 내가 책임질 영역이 아니라고?’

화가 난다기보다는 자존심이 상하는 말, 오늘은 무조건 길게 간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건 그렇고 왜 안 오지?’

몇몇 선수들은 클럽하우스 입구 쪽에 시선을 뒀다.

평소라면 벌써 출근했을 철벽의 에이스, 그런데 오늘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등판하는 날이 아니니 조금 늦게 와도 상관없지만 그래도 너무 늦은 시간, 이때 알 디즌이 지나가던 코치를 붙잡았다.

“전화라도 해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음 … 그 친구 오늘은 조금 늦는다고 했어.”

“왜요?”

“병원에 간다고 하던데”

선수들은 뜨끔했다. 역시 3경기 연속 완투가 어깨에 부담을 준 건가.

투구를 안 해도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지는 클럽하우스, 돌아온 답은 불길함과 거리가 멀었다.

“아내가 임신을 해서 같이 병원에 갔다는군.”

“훗 ~ 역시 어디에서든 생산력이 뛰어나네,”

디즌의 농담에 선수들은 낄낄거렸다.

전체적으로 젊은 보스턴 선수단, 아이는커녕 결혼도 안 한 선수들이 넘쳐난다. 그런데 혼자 아이 셋의 아빠가 되다니, 온갖 참견이 쏟아졌다.

“그런데 다카기 결혼 일찍 하지 않았나?”

“결혼보다 아이가 먼저였다고 들었는데, 스무 살에 아빠가 됐다고 하지 않았어?”

“오우 ~ 그런 비극이 ~ 난 절대 그렇게는 못 살아.”

주앙 고메즈는 결혼은 절대 일찍 하고 싶지 않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 나이면 한창 즐길 때 아닌가, 그런데 가정을 꾸리고 가족을 책임져야 했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하지만 엄격한 가톨릭주의가 대세를 이루는 보스턴에서 단란한 가정을 이룬 다카기가 좋은 이미지로 자리 잡은 것도 사실, 실력도 실력이지만 가정에 헌신하는 모습도 보스턴 팬들에게 사랑을 받는 이유 중 하나다.

그리고 어떤 인생을 살든 그건 본인의 선택, 다카기는 이른 나이에 가정을 이룬 걸 후회하지 않았다.

“임신 맞나요?”

“예, 3개월이네요.”

이곳은 보스턴 시내의 산부인과, 임신 판정을 받은 부부는 의사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손을 꼭 맞잡았다.

첫 번째, 두 번째도 그랬지만 이번에 찾아온 아이도 가슴을 뛰게 하는 귀한 손님, 다카기는 한껏 들뜬 얼굴로 집으로 향했다.

“오늘은 출근 안 해도 돼?”

“조금 늦어도 괜찮아. 그리고 우리 가족이 먼저지”

내가 왜 밖에 나가서 공을 던지고 돈을 버는가. 다 가족을 위해서, 그게 아니라면 내일부터라도 출근할 이유가 없다.

출근을 하더라도 난 무엇을 위해 공을 던져야 하나, 명예? 지위? 어느 쪽도 끌리는 말은 아니었다.

“경기 끝나면 바로 올게”

“잘 갔다 와요. 내 사랑 ~ ♡”

키리코는 남편의 볼에 수줍은 애정을 표했다.

연을 맺은 지 벌써 7년이나 지났지만 지금도 멋있고 든든한 내 남편,

이런 사람의 아이를 셋이나 품에 안는다는 건 축복이었다.

“자꾸 그러면 혼내주고 간다.”

“그건 조금 있다가 집에서 … 늦었잖아.”

차 안에서 벌어지는 닭살 돋는 사랑싸움, 어쨌든 아내를 내려준 다카기는 뒤늦은 출근길에 올랐다.

“야 ~ 호 ~ !!!!”

집에서 조금 멀어지자 흥분한 가장은 미친 듯이 경적을 울렸다.

어차피 이 주변은 인적이 드물어 보는 사람도 없다. 내가 세 아이의 아빠가 된다니, 이번에는 딸이 좋지 않을까. 그렇게만 된다면 더는 이 세상에 미련은 없을 텐데, 먼저 태어난 녀석들이 다 아들이라 조금 불안하기는 했다.

“와아아 ~ !!!”

다카기가 조금씩 브라민 파크에 접근하는 동안, 경기는 어느새 3회에 접어들었다.

오늘도 리드를 안고 시작하는 보스턴, 입은 경솔해도 실력은 진짜인 제임스 올슨은 리드를 벌리는 적시타를 날렸다.

진지하게 월드시리즈 MVP도 노려볼 수 있는 활약, 기세가 오른 올슨은 더그아웃을 향해 손가락 세리머니를 날리는 여유를 부렸다.

따악 ~ !!

“아 … 이 타구는 좌중간을 빠져나가는군요. 릭키 비버리가 천천히 2루까지 들어갑니다.”

“다음 타자가 브라이언이거든요. 그래도 승부를 피할 이유는 없습니다. 아직 3대 0이에요.”

하지만 애틀랜타의 반격도 만만치는 않았다.

월드시리즈까지 올라온 저력이 어디 가겠는가.

거기다 지금 타석에 들어선 브라이언 퀸은 올 시즌 타율 0.316 - 홈런 24개 - 127타점을 올린 클러치 히터, 2번 타자지만 팀에서 가장 많은 타점을 올렸다.

2번은 병살을 칠 확률이 다른 타순보다 1.5배 정도 높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타점을 올릴 기회가 그만큼 많다는 거다.

홈런은 적어도 많은 2루타(42개)와 빠른 타구로 타점을 쓸어 담는 스타일, 보스턴의 2번 베논 리퍼트처럼 브라이언은 강한 2번을 대표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리퍼드는 내가 못 쳐도 다른 선수들이 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진 선수, 덕분에 많은 볼넷을 얻어냈고 후속타자 알 디즌이 149타점을 쓸어 담을 수 있었다.

하지만 퀸은 내가 치겠다는 성향을 보유한 스타일,

보스턴의 호프만 포수는 성급한 승부는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내가 왜?’

하지만 레이븐은 정면 승부를 고집했다.

평소 스트라이크를 넣으라고 그렇게 잔소리를 했던 게 호프만 아닌가, 그런데 이제 와서 도망치라니, 설득력이 없었다.

따악 ~ !!

“아 … 이 타구는 다시 한 번 좌중간을 가릅니다. 2루 주자가 3루를 지나 홈으로 들어오는군요. 브라이언 퀸이 다시 한 번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뭐 … 좋은 타자에요. 그래도 레이븐은 기죽으면 안 됩니다. 오늘 공이 나쁘지 않거든요.”

보스턴 지역해설위원 피트 오어는 레이븐의 입장을 변호했지만 당사자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가끔은 내 생각이 들어맞을 법도 한데, 이상하게 호프만의 지시를 어길 때마다 결과가 좋지 않다.

이게 바로 경험차라는 건가. 자존심이 상하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하는 법, 부정하면 사람이 너무 치졸해 보였다.

‘늦게 와서 끼어들 필요는 없지.’

마침 클럽하우스에 도착한 다카기는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소파 위에 자리를 잡았다.

TV로 봐도 알 수 있는 그라운드의 긴장감, 스코어는 3대 1인가. 초반이라는 걸 고려하면 나쁘지 않은 긴장감, 관중이 된 기분으로 관람을 시작했다.

‘왜 여기에 있지?’

이때 직원실에서 나온 클러비는 라커룸을 떡 하니 차지한 다카기를 마주했다.

딱히 여기 있어도 문제 될 건 없지만, 눈이 오든 비가 오든 더그아웃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선수라 이 상황이 약간 어색했다.

“이거 세탁 네가 했지?”

“어”

마침 눈이 마주친 두 사람, 다카기는 손짓으로 클러비를 부르더니 제법 많은 팁을 건네줬다.

단장이 팁 절대 주지 말라고 했는데 이래도 되는 건가. 거기다 어제 놀림을 당한 입장이라 클러비는 팁을 거부했다.

“또 나 놀리려고 그러지?”

“아니야. 오늘은 내가 기분이 아주 좋거든, 그래서 주는 거야.”

“단장이 팁 주지 말라고 했잖아?”

“내가 언제부터 단장 눈치 보고 살았냐? 얼른 주머니에 넣어 누가 보기 전에”

다카기는 너와 내가 비밀만 지키면 문제 될 게 없다는 윙크를 날렸다.

정말 속을 알 수가 없는 사람, 어쨌든 때 아닌 횡재를 수확한 클러비는 주머니에 돈을 욱여넣었다.

‘생각보다 일이 복잡해지는데’

장난스러운 대화도 그때 뿐, 다카기는 심각하게 전개되는 경기에 집중했다.

잘 버텨주던 레이븐은 5회에 다시 1실점, 6회에도 마운드에 올라왔지만 1아웃 주자 1 - 2루 위기에 몰렸다.

그리고 이 타이밍에 마운드로 향하는 브라이스 감독, 속이 상한 레이븐은 등을 돌려버렸다. 감독이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겠다는 태도, 그러건 말건 브라이스 감독은 손을 내밀었다.

“오늘 수고했네.”

“조금만 더 던져보면 안 될까요?”

레이븐은 한 번만 더 믿어봐 달라고 부탁했지만 감독의 말은 냉정했다.

“이 다음은 자네가 책임질 일이 아니야.”

다카기는 몰라도 다른 투수들의 강판은 냉정한 감독, 결국 레이븐은 아쉬운 결과를 남기고 마운드를 내려갔다.

‘완투? 감독이 너한테 원하는 건 그게 아닐 걸?’

이때 제임스 올슨이 했던 말이 레이븐의 머리를 점령했다.

기분은 나쁜데 정확했던 예언, 감독이 내게 기대한 활약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그럼 거기까지만 해도 괜찮을 텐데, 레이븐은 소심해도 자존심은 강한 성격, 이 다음부터는 자네가 책임질 영역이 아니라는 감독의 말도 조금은 서운하게 다가왔다.

‘엇?!’

클럽하우스에 입성한 레이븐은 소파에 앉아 있는 뒷모습을 보고 흠칫했다.

언제부터 여기에 앉아 있었던 건지, 하지만 누가 오든 말든 다카기는 TV 시청에 집중했다.

[아 ~ 여기서 실책이 나오는군요. 2루 주자가 홈으로 들어오면서 스코어는 이제 3대 3입니다.]

[초반에 앞서 나갔다고 너무 방심한 거 아닌가요? 마지막까지 긴장해야 합니다.]

기어이 동점을 내준 보스턴, 시리즈 내내 위세를 떨치던 제임스 올슨이 평범한 타구를 알까기로 흘리는 대형 사고를 치고 말았다.

순식간에 가라앉은 분위기, 이런 전개에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는 레이븐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왔어?”

“응. 오늘 수고 많았다.”

무안한 마음에 뒤늦게 걸어본 인사, 간단한 답을 해준 다카기는 다시 TV에 집중했다.

수고했다는 저 말, 그렇게 복잡한 의미가 담긴 말은 아니었을 거다.

그런데 왜 이렇게 내가 부끄럽게 느껴지는 건지, 정확히 말하면 레이븐은 본인의 투구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수고했다는 말을 듣기에도 부끄러운 결과, 도망치듯 자리를 피해버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