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279화 (279/361)

279화. Respect - (21)

레이븐이 호투를 펼치면서 보스턴은 ALCS 첫 경기를 잡아냈다.

포스트 시즌 들어 놀라운 활약을 보여주고 있는 선발진, 타선이 약간 침체기에 빠졌지만 그런 건 눈에도 안 띌 정도로 불펜진의 뒷수습도 완벽했다.

[휴스턴 2차전 반격]

하지만 다음 경기는 뜻대로 되지 않았다.

보스턴은 안젤로 레이스, 휴스턴은 맥 존스를 출격시켰는데, 휴스턴은 2회 말 만루 기회에서 벤 잉글리시가 적시 2루타를 때려내 선취점을 올렸다.

여기에 맞불을 놓은 게 4회 초 베논 리퍼드의 투런 홈런, 그렇게 2대 2로 흘러가던 경기는 7회에 승부가 갈렸다.

안젤로 레이에스는 1사 주자 1 - 3루 기회에 몰렸는데 투 볼 투 스트라이크에서 잡아낸 스트라이크를 주심이 볼로 판정하면서 풀 카운트에 몰렸다.

중계석에서 문제의 화면을 되감아 봤지만 명백한 스트라이크, 이 판정에 평정심을 잃은 안젤로 레이에스가 볼넷을 내주면서 보스턴은 1사 주자 만루에 몰렸다.

브라이스 감독은 스티븐 루카스를 투입, 휴스턴의 중심타자 J. J. 핵먼이 2구를 통타, 그랜드 슬램을 때리면서 스코어는 6대 2가 됐다.

[우리는 사기를 당했다]

[폴 바우어가 또 일을 저질렀다]

보스턴이 1점을 추가했지만 6대 3으로 끝난 경기, 보스턴은 결정적인 오심을 저지른 폴 바우어를 맹비난했다.

폴 바우어는 미국 현지에서 ‘명품 오심’, ‘애국심판’이라는 조롱을 당하고 있다.

2009년 WBC에서 일본과 맞붙은 미국의 승리를 위해 대놓고 오심을 연발했는데, 당시 상황은 대략 이랬다.

4대 4, 팽팽하게 흘러가던 9회 초 일본의 공격, 1사 주자 만루에서 츠루오카 히데토시가 들어섰다.

히데토시는 2구를 받아쳐 좌익수 플라이를 날렸고 3루 주자는 태그 업, 그런데 폴 바우어 주심은 좌익수의 포구보다 주자가 먼저 뛰었다며 3루 주자를 아웃시켰다.

누가 봐도 어이가 없는 장면, 결국 이 경기는 미국이 끝내기 안타를 때려내며 끝났다. 미국이 승리했지만 개최국 얼굴에 X칠을 한 오심, 사무국은 오심도 경기의 일부라는 말로 대회의 수준을 깎아내렸다.

‘어? 오심을 해도 뭐라고 안 하네?’

이때부터 폴 바우어의 막장 판정이 노골화됐다.

키우던 개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면 폭주하는 것과 마찬가지, 자신이 신이라도 된 것처럼 경기를 주도하고 나 몰라라 하면서 사무국 뒤에 숨는 행동이 반복됐다.

이번 사건도 마찬가지, 하지만 보스턴은 별다른 항의 없이 넘어갔다.

항의한다고 결과가 바뀌는 것도 아니고 내부적으로 신경 써야 할 사건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입막음 제대로 한 건가?”

“예”

“다른 선수들도 알아보게.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게 있을지도 몰라”

수더랜드 단장은 제임스 올슨이 도박에 연루된 사건을 두고 노심초사했다. 수습은 잘한 것 같지만 올슨만 엮였다는 증거도 없지 않은가.

암덩이가 1cm만 되도 그 이상의 조직을 도려내는 법, 정말 올슨만 이 사건에 연루된 걸까. 다른 선수들도 철저하게 조사했다.

‘이렇게까지 해야 돼?’

선수들은 통장거래 내역까지 조사하려는 구단에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큰 병은 초기에 발견해야 하는 법, 브라이스 감독은 모두를 위하는 일이니 협조하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다행히 올슨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혐의는 없는 보스턴, 하지만 전날 당한 패배 때문인지 선수들은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그 자식 바보 아냐? 무슨 생각으로 돈을 걸라고 한 거야?”

“야, 그만해. 남자가 잘 빠진 여자 쳐다봤다고 감옥에 가야 되냐?”

“그건 경우가 다르잖아. 이 멍충아”

물론 올슨이 직접 도박을 한 건 아니다.

친구에게 도박을 하려면 보스턴에게 걸라고 한 것뿐, 하지만 사무국은 본인이 직접 도박을 하는 건 물론 누구에게 도박을 권유하는 행위도 금지하고 있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 선수들은 이미 도박에 연루돼 있다.

보스턴이 있는 매사추세츠 주만 따져 봐도 매년 2억 달러에 가까운 세금을 도박사업에서 거둬들이고 있고, 보스턴 구단도 적지 않은 수입을 챙기고 있다.

그 수입이 어디로 가겠는가?

선수들 연봉으로 들어가는데, 보스턴이 미국 스포츠 최고 수준의 팀 연봉을 감당할 수 있는 것도 이런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당장 다카기만 따져 봐도 1년 연봉이 4천만 달러, 그 뒤를 잇는 알 디즌도 총액 2억 달러가 넘는 대형 계약을 맺었다.

두 선수가 받는 연봉만 해도 어지간한 구단 전체 연봉의 절반에 가까운 수준, 도박이 금지된 것뿐이지 선수들은 도박 수익을 꼬박꼬박 챙겨먹고 있다.

‘그래, 너희들은 도박해라. 그리고 그 돈은 내 주머니에 들어오겠지.’

이렇게 생각하는 선수들이 있는 것도 사실, 그렇다고 죄책감을 가져야 하나? 다카기는 그렇게 생각하진 않았다.

‘그런 것까지 다 따져야 돼?’

다카기는 파칭코 사업으로 큰 성공을 거둔 재일교포, 한성태의 손자 구루지마 쿠니오와 지금도 관계를 맺고 있다.

파칭코는 한때 일본에서 선풍적인 유행을 끈 사행성 게임, 정부에서 때려잡아도 이거 아니면 할 게 없는 재일교포들은 계속 사업을 확정해 나갔다.

그리고 끝내 허가를 받아내 정식사업 등록, 떳떳하게 돈을 벌었다.

스포츠 도박 사업이 파칭코와 뭐가 다른가.

미국 주정부도 도박을 금지하다가 최근 들어 합법화하고 세금을 거둬들이고 있지 않은가. 구단이 챙기는 수익은 주정부가 가져가는 세금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 우리가 도둑놈이라면 저 위의 도둑놈들은 뭔가.

다만 선수가 주변사람들에게 도박을 권하는 건 좋지 않은 장면, 봉사활동 하면서 이미지 챙기고 구단이 주는 돈이나 받으면 되는 거 아닌가.

다카기는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완벽한 조직 따윈 꿈꾸지 않았다.

나는 돈을 받고 뛰어주는 용병일 뿐, 그 돈이 어디서 났든 누구의 피와 땀이 서려있든 정당하게 받는 대가라면 가릴 이유가 없었다.

* * *

“조금 일찍 쓰는 게 어떻겠나?”

“글쎄요. 조금 무리지 않을까요?”

한편, 수더랜드 단장은 브라이스 감독과 머리를 맞댔다.

ALCS 3 - 4 - 5차전은 휴스턴에서 치르게 되는데, 보스턴은 지난 2차전에서 6대 3 패배를 당하면서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다.

이런 때는 필승카드를 꺼내드는 게 좋겠지, 하지만 브라이스 감독은 다카기가 정규 시즌부터 너무 무리를 하고 있다며 말렸다.

정규시즌에서 271이닝, 포스트 시즌 2경기 연속 완봉, 누가 봐도 비정상적인 일정 아닌가. 하지만 수더랜드 단장은 우리가 괜히 그 친구에게 4천만 달러를 주는 게 아니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투구 수는 그동안 자네가 잘 관리해주지 않았나. 문제없을 거야.”

“ … 네, 그렇게 하죠.”

브라이스 감독은 단장의 뜻대로 다카기를 내보내기로 했다.

작년에 한 번 미끄러졌다고 예전으로 돌아온 단장의 조급한 성격, 어떤 선수를 사오느냐는 단장의 권한이지만 그걸 실전에서 운영하는 건 감독의 몫이다.

그런데 잊을 만하면 끼어드는 단장의 참견, 10년 넘게 같이 일을 했으니 익숙해질 만도 한데 이번은 조금 불쾌했다.

“단장이 3차전 등판하라는데 그렇게 해 줄 수 있나?”

“그래야죠. 연봉은 공짜로 받는 게 아니니까요.”

의미심장한 말에 브라이스 감독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혹시 단장이 무슨 말을 했는지 어디서 들은 건가. 다카기는 그런 건 아니라고 손을 저었다.

“저 이 팀에 뿌리를 내린 지 벌써 7년이에요. 이 정도면 단장이 조급해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죠.”

“단장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는 건가?”

“네, 이것도 제 추측인데 당신은 절 내보내지 말라고 했겠죠. 아닌가요?”

브라이스 감독은 마음속으로 백기를 들었다.

우리를 너무 잘 알고 있는 선수, 독심술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데, 7회 이전에 내린다 그런 생각은 하지 마세요. 저는 던질 만큼 던지고 내려올 겁니다.”

“오케이 ~ 알았네 알았어.”

브라이스 감독은 몸서리를 쳤다.

알몸으로 취조를 받는 기분, 더 상대했다간 정신이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어쨌든 이렇게 다카기는 ALCS 3차전에 오르게 됐다.

절대 질 수 없는 필승카드를 냈으니 선수들의 마음가짐도 남다른 편, 팀에 누를 끼친 제임스 올슨도 정신을 바로 세웠다.

‘악역이라면 강한 악역이 되자.’

고참도 아니고 풀타임 1년 차 애송이가 도박에 연루됐으니, 동료들의 따돌림과 눈총을 받는 건 당연, 그렇다고 어깨가 쪼그라드는 건 권장할 일이 아니다.

약물을 하고도 뻣뻣하게 고개를 들고 다니는 선수들이 있지 않은가.

지금은 그런 뻔뻔함이 필요한 상황, 내가 팀에 필요한 선수가 되면 동료들이 날 외면할 수 있을까.

되돌릴 수 없는 악의 길이라면 누구도 얕볼 수 없는 강한 악이 되기로 했다.

“자, 1회 초 보스턴의 공격으로 선공이 시작됩니다. 타석에는 주앙 고메즈, 이번 ALCS에서 9타수 3안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스턴이 2차전에서 12안타를 때려냈지만 집중타가 없었거든요. 아무리 강력한 폭탄이라도 한곳에 집중 투하해야 의미가 있는 겁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고메즈는 중견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를 날렸다.

다음 타자 베논 리퍼드는 볼넷 출루, 3번 타자 알 디즌은 좌익수 플라이로 물러났지만 채드 고잉의 적시타로 보스턴은 선취점을 냈다.

계속되는 1사 주자 1 - 2루 기회, 타석에 들어선 제임스 올슨은 배트 헤드를 귀에 대는 특유의 자세를 잡았다.

흔히 인 앤 아웃 스윙을 얘기하는데, 올슨도 이 스윙을 하다가 높은 공에 약점을 보이면서 타격에 한계를 드러냈다.

어린 선수들은 잠시만 부진해도 자세를 바꿀 만큼 자신만의 방식이 정립이 되지 않은 게 문제, 그렇다면 올슨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올슨도 변화를 택했지만 마구잡이로 스윙을 교정하진 않았다.

높은 공에 약점을 드러내자 배트 헤드를 귀까지 올렸고, 이 밖에 다른 선수들의 타격 자세를 참고해 자신만의 스윙을 완성해 냈다.

2루수가 5번에 배치됐다는 건 그만한 실적을 올렸다는 것, 올슨은 올 시즌 타율 0.287, 홈런 16개를 때려내며 팀에 큰 보탬이 됐다.

이러니 수더랜드 단장이 올슨을 당장은 어떻게 하지 못한 것, 아니, 마땅한 대체자를 찾기 전까진 라인업에서 함부로 뺄 수도 없었다.

결국 선수는 실력이 우선, 악역을 자처한 올슨은 더 강한 악역이 되기 위해 배트를 곧추세웠다.

‘그래, 나 주변 사람들한테 도박 권했다. 어쩌라고?’

제대로 받아친 3구는 우측 담장을 그대로 넘어갔다.

4대 0을 만든 악마의 방망이, 한동안 올슨에게 눈치를 줬던 선수들은 이번만큼은 억지 미소라도 지어야 했다.

한결 밝아진 보스턴 벤치, 실적을 쌓은 올슨은 가슴을 펴고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하아 ~ 괜히 썼나?’

한편, 경기를 지켜보던 수더랜드 단장은 후회의 한숨을 뿜어냈다.

이렇게 쉽게 풀릴 줄 알았으면 다카기는 쓰는 게 아니었는데, 또 조급증이 도지면서 일이 꼬였다.

감독에게 반 협박까지 하면서 다카기를 마운드에 올렸는데 이제 와서 그만두라고 하는 것도 못난 일, 그냥 지켜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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