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화. Respect - (18)
“음 … 다시 볼입니다. 레이븐이 조금 흔들리는데요.”
“또 문제점이 도졌네요. 자꾸 비교하는 것 같은데, 솔직히 제구라는 기준만 봤을 때 다카기와 레이븐은 큰 차이가 없습니다.”
다카기는 올 시즌 271이닝 동안 볼넷을 30개밖에 주지 않았다.
레이븐은 200이닝이 조금 못 되고 볼넷은 60개를 넘겼는데 피트 오어는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걸까. 하지만 이 주장은 나름 근거가 있었다.
“올 시즌 다카기가 스트라이크 존 경계에 던진 공은 27% 정도입니다. 레이븐이 26%였거든요. 즉,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죠? 저는 이런 정보는 처음 듣는데요.”
“지금부터가 중요합니다. 다카기는 올 시즌 스트라이크 존 한 가운데에 던진 공이 38%, 레이븐은 22%였습니다. ”
두 선수의 결정적인 차이는 스트라이크 존 공략 비율, 다카기는 그동안 바깥쪽 빠른 볼로 카운트를 많이 잡아냈다.
그런데 통계로 보니 한가운데로 던진 공이 의외로 많았던 것, 심지어 이 공을 던졌을 때 피안타율은 0.244, 장타율은 0.404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레이븐은 어땠을까? 한가운데 스트라이크를 던졌을 때 피안타율은 0.322, 피장타율은 0.513,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었을까.
두 선수의 빠른 볼 구위는 비슷한 편, 피트 오어는 볼 배합에 주목했다.
“다카기는 초구를 가운데로 집어넣는 일이 많았습니다. 방금 설명했지만 타자가 초구를 휘두를 확률은 30%가 안 되죠. 투수 입장에선 잡으러 들어가는 게 당연합니다. 다카기처럼 구위가 좋은 투수라면 더욱 그래야겠죠. 하지만 레이븐은 그게 아닙니다.”
“뭐가 말입니까?”
“레이븐은 볼 카운트가 몰리면 그제야 스트라이크를 잡으러 들어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레이븐이 공격적인 투구를 해준다면 더 좋은 투수가 될 수 있을 텐데 그 점은 조금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두 선수의 차이를 설명하긴 어렵지 않습니까?”
또 다른 해설위원 올러우가 여기서 의문을 제기했다.
스트라이크를 잡아내는 능력에 차이가 있다고 해도 이렇게 결과에 차이가 있을 수 있을까. 몇 가지 정보를 추가했다.
“당신이 말했듯이, 다카기가 스트라이크 존 경계에 던진 공은 레이븐과 다를 게 없습니다. 하지만 그 공을 어떤 상황에서 던졌냐는 것도 중요하겠죠.”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다카기는 투 스트라이크에서 경계선에 공을 던질 수 있는 선수입니다. 레이븐은 할 수 없는 일이죠.”
투 스트라이크에서 경계선에 던진 공은 한가운데로 던진 공보다 삼진을 잡을 확률이 3배나 늘어난다는 자료가 있다.
다카기는 그 일을 했다는 걸 통계로 증명, 구위는 비슷하더라도 다카기는 ‘제구’에서 레이븐이 범접할 수 없는 능력을 보여줬다.
결국 구위가 아무리 좋아도 제구가 받쳐주질 않는다면 무의미, 피트 오어는 레이븐의 공격성을 문제 삼았지만 올러우는 반대로 레이븐의 섬세함을 지적했다.
어느 쪽이 옳은 걸까. 그 해답은 레이븐 본인이 찾아내야 했다.
‘넣으라고, 넣으라니까.’
호프만 포수는 계속 한가운데 스트라이크를 요구했다.
이 녀석의 구위라면 초구부터 넣어도 맞아나갈 확률은 낮다. 그런데 그게 안 되니 답답할 노릇, 제구라는 개념을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냥 스트라이크 잡는 거다.
무슨 재주를 부려 구석을 찌르는 게 아니라는 뜻, 다카기만 봐도 한가운데로 던진 공이 3개 중 1개는 된다.
물론 그 자식은 인간의 영역을 초월한 녀석이라 마음만 먹으면 바깥쪽 제구가 될 뿐, 호프만은 레이븐에게 그런 재주를 요구하진 않았다.
스트라이크 존에 집어넣기만 해도 충분, 하지만 생각만큼 잘 되진 않았다. 시즌 마지막 등판에서 볼넷 5개를 내주며 흔들리더니 오늘도 같은 증세가 반복, 브라이스 감독도 오늘은 길게 가기 어렵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 친구 불러’
4회 초, 브라이스 감독은 마운드로 향하면서 불펜에 사인을 보냈다.
부드러운 리더십을 앞세우고 있지만 투수 교체는 칼 같은 감독, 이렇게 레이븐은 4회를 채우지 못하고 마운드를 내려갔다.
3과 2/3이닝 동안 볼넷 2개, 3피안타, 2실점, 본인은 아쉽겠지만 팀을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보스턴은 이날 4득점에 그쳤지만 브라이스 감독의 빠른 투수 교체와 불펜 기용이 맞아 들어가면서 뉴욕 타선을 2점으로 봉쇄했다.
디비전 시리즈 1차전은 보스턴의 승리로 종료, 2차전은 난타전 끝에 뉴욕이 9대 7승리를 거뒀다.
이제 무대는 보스턴의 홈구장 브라민 파크, 다카기는 예정대로 4일 휴식 등판에 나섰다.
[We ask this through our Lord, Amen]
= 우리는 당신을 믿습니다. 아멘
홈 팬들은 패배 따윈 생각하지 않았다.
신이 악의 무리에게 패배한다는 건 세상의 종말을 의미, 하지만 다카기는 쏟아지는 함성에 귀를 닫고 마운드에 올랐다.
‘초구는 무조건 들어온다.’
선두 타자 모리슨의 타석, 이게 몇 번째 맞대결인가.
7년 동안 수도 없이 마주한 얼굴, 모리슨은 다카기의 성향을 알고 있었고 초구부터 치고 나갔다.
딱 ~
“밀린 타구, 2루수 올슨이 잡아 1루에 던져 잡아냅니다. 원 아웃, 공 하나로 선두 타자를 잡아냅니다.”
“지금은 바깥쪽으로 던졌죠. 모리슨이 초구를 노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을 겁니다.”
이렇게 되자 후속 타자 브라운의 머리는 복잡해졌다.
초구를 치긴 해야 되는데 지금처럼 땅볼이 나오면 낭패, 망설이는 사이 한 가운데 볼이 들어왔다. 구속은 97마일, 선뜻 반응할 구속은 아니라 멍하니 지켜봤다.
딱 ~ !
“이번에는 파울입니다. 카운트는 노 볼 투 스트라이크”
“지금도 한 가운데죠. 이렇게 되면 다카기는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집니다.”
다카기는 바깥쪽 빠른 볼을 던져 헛스윙을 유도했다.
빠른 볼에 익숙해진 타자의 눈을 속인 것, 구석에 걸친 공도 아니지만 브라운은 헛스윙을 돌렸다.
타자의 심리를 역이용할 줄 아는 피칭, 이렇게 두 타자가 공 4개로 갈려나갔다.
“우우 ~ 우 ~ ”
다음 타자는 숀 스팸, 보스턴 팬들은 격한 야유를 쏟아냈다.
보스턴을 버리고 뉴욕으로 간 녀석, 거기다 돈으로 타점을 산 전적까지 있으니 좋은 대우를 못 받는 건 당연했다.
여기서 다카기가 심판을 내려주면 더 짜릿하겠지, 하지만 신은 인간들의 아우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딱 ~ !!
“자, 이 타구는 중견수 앞에 떨어지는군요. 다카기가 이번 경기 첫 안타를 허용합니다.”
“신경 안 쓴다는 얼굴이죠. 저라도 그럴 겁니다.”
한가운데로 던진 볼이 맞아나가자 다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귀찮은 녀석이었는데 볼 하나로 꺼져준다면 감사한 일, 다음 타자를 땅볼 처리하고 유유히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칠 수 있다면 쳐라. 나야 고마운 일이지.’
공격적인 투구는 2회, 3회에도 계속됐다.
작년 시즌, 다카기는 스트라이크 존 구석에 던진 공 비율이 33%에 달했다.
통계에 따르면 스트라이크 존 가운데에 던진 공은 98% 비율로 스트라이크 콜 판정을 받았지만, 구석에 걸친 공은 콜을 받을 확률이 81%로 급락했다.
스트라이크 존에 들어왔어도 주심이 잡아주질 않았다는 뜻, 핀 포인트 제구가 내 발목을 잡고 있었다니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작년 시즌 빠른 볼이 맞아나간 이유도 일단 바깥쪽으로 찔렀다가 가운데로 투구를 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구위가 아니라 볼 배합의 문제, 가운데로 넣는 비율이 높아지면서 경기 운영 능력은 확실히 올라왔다.
이래도 레이븐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걸까? 배움이란 스스로 깨닫는 것, 앞으로도 떠먹여 줄 생각은 없었다.
‘역시 가운데로 던져야 되는 구나.’
다행히 더그아웃에 앉은 레이븐도 뭔가를 깨달았다.
그런데 그게 안 된다는 게 문제, ‘제구’라는 단어는 원래 범위가 넓은 개념이다. 볼넷을 내주지 않는 것도 제구, 스트라이크를 넣을 줄 아는 것도 제구, 구석에 볼을 밀어 넣는 것도 제구다.
레이븐은 스트라이크를 넣는 빈도가 떨어진다는 게 문제, 원래 투수가 던지는 볼의 절반은 스트라이크 존을 비껴간다.
그만큼 어려운 일, 기술적인 문제일 수도 있고 심리적인 부담이 원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한 가운데로 던진 공이 피안타율 0.332, 피장타율 5할을 넘긴 투수 입장에선 던지기 쉽지 않은 공, 하지만 이건 볼 배합을 제대로 못해서 일어난 일이다.
호프만의 지시대로 초구부터 빠른 볼을 넣었다면 훨씬 더 쉽게 투구를 할 수 있었겠지, 한 수 배운다는 생각으로 에이스의 투구에 집중했다.
“떨어집니다!! 삼진!! 두 번째 승부에선 숀 스팸을 잡아냅니다!!”
“이건 아무도 못 칩니다. 최고의 타자가 못 치는데 누가 칠 수 있겠습니까?”
빠른 볼을 공략하지 못한 스팸은 체인지업에 헛스윙을 돌렸다.
첫 타석에선 안타를 쳐냈지만 다시 친다는 보장이 없는 빠른 볼, 그만큼 다카기의 구위는 대단했다.
아차 하는 사이 7회 돌파, 다카기는 지난 와일드카드 결정전에서 완봉승을 달성했다.
그런데 설마 오늘도 완투? 도박장은 오늘도 시끄러운 하루가 이어졌다.
‘나는 또 걸었지’
지난 와일드 카드 결정전에서 다카기의 완봉에 3천 달러를 걸었던 팬은 이번에 1만 달러를 질렀다.
다카기가 완투를 하면 배당금은 3만 달러, 지난 도박에서 1만 5천 달러를 벌었기 때문에 여기서 돈을 날려도 손해는 없었다.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선수, 돈 안 쓰는 수더랜드 단장이 왜 저 선수에게 3억 9천만 달러를 썼는지 이제는 이해가 됐다.
딱 ~ !!
“다시 땅볼!! 유격수가 잡아 1루에 송구합니다!! 2아웃!! 모리슨은 오늘 한 번도 출루를 하지 못합니다.”
“맙소사, 이러다 정말 2경기 연속 완봉하는 거 아닌가요?”
“제가 지금 기록을 찾아봤는데 포스트 시즌에서 3경기 연속 완투를 한 선수가 있네요. 1982년, 세인트 루이스의 마이크 무손이 그해 포스트 시즌 포함 339이닝을 던졌습니다.”
무려 40년도 더 전에 있었던 기록,
다카기는 지금까지 포스트 시즌 포함 288과 2/3이닝을 던졌다. 339이닝은 무리겠지만 300이닝 돌파는 충분히 가능한 페이스,
저게 정녕 인간인가. 와 ~ 라는 감탄도 안 나오는 투구, 시대를 초월한 투구에 해설위원들은 기가 막힌다는 반응을 보였다.
“와아아 ~ !!”
다카기는 브라운을 삼진 처리하고 마운드를 내려왔다.
스코어는 2대 0, 지금 불펜에서 클로저 브랜든 바이어가 몸을 풀고 있다. 에이스에게 조금 더 무리를 시킬 것인가. 아니면 예정대로 바이어를 기용할 것인가.
브라이스 감독은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그래, 가자’
브라이스 감독은 다카기를 9회에도 올렸다.
투구 수는 딱 100개,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고 바이어가 몸을 다 풀어놨으니 여차하면 올리기로 했다.
‘그럴 필요 없음’
하지만 다카기는 공 4개로 첫 두 타자를 처리했다.
오늘도 나는 유급휴가인가. 하나 정도는 남겨 줄 것이지, 바이어는 글러브를 허리에 댄 채 에이스의 화려한 피날레를 지켜봤다.
“우와아아 ~ !!”
결국 완봉으로 마무리 된 경기, 사방에서 환호성이 쏟아졌지만 다카기는 덤덤한 얼굴로 호프만의 목에 팔을 걸쳤다.
나는 이 녀석이 시키는 대로 던졌을 뿐, 오늘도 호프만의 볼배합과 투수 리드는 완벽했다.
“여러분!! 믿으세요!! 다음 경기에서도 다카기는 완투합니다!!”
한편, 다카기 덕분에 4만 5천 달러를 번 팬은 도박장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내질렀다.
잃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1만 달러를 걸었는데, 정말 완봉을 해버릴 줄이야.
믿음이 부족했던 패배자들 앞에서 자랑스럽게 돈뭉치를 꺼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