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화. Respect - (17)
“음, 다시 볼입니다. 에반스가 흔들리는데요.”
“익숙한 장면 아닙니까. 그렇게 놀랄 일도 아니죠.”
피트 오어는 본격적인 여론전에 나섰다.
에반스는 올 시즌 18승을 거둔 뉴욕의 히트 상품, 하지만 단점도 명확한 편이다.
에반스는 올 시즌 27경기에서 163이닝을 던졌다. 매 경기 6이닝은 던져줬다는 뜻, 하지만 9이닝 당 볼넷이 3.4개나 될 정도로 제구와는 거리가 먼 피칭이었다.
이런 투구로 어떻게 평균 6이닝을 버텨준 걸까. 피트 오어는 그 원인을 분석했다.
‘혹시 맞춰 잡는 능력이 좋아서?’
하지만 컨택률과 투구 수는 거의 상관이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관된 주장이다. 두 변수의 상관계수는 마이너스 0.15, 즉 투수가 컨택을 많이 허용한다고 해서 투구 수가 줄어든다는 뜻이 아니다.
물론 예외의 경우도 있긴 있다.
던지는 공이 주구장창 맞아 나가면서도 이닝 당 투구 수가 13개밖에 안 됐던 선수, 바로 애틀랜타의 전설 테드 보디컬(Boedicker)이다.
다른 선수들이 이닝 당 투구 수가 15개가 넘어갈 때 혼자 판타지 게임을 했던 보디컬, 그 비결은 뭐였을까. 답은 간단했다.
“상대하는 타자가 늘어날수록 투구 수는 늘어납니다. 그래서 저는 볼넷을 싫어합니다.”
보디컬은 통산 4472이닝을 던지는 동안 897개의 볼넷만 허용했다.
9이닝 당 1.80개에 불과한 수치, 실제로 볼넷과 이닝 당 투구 수의 상관계수는 플러스 0.73으로 밝혀졌다.
본격적인 통계가 구축되기도 전에 투구 수와 볼넷의 상관관계를 알고 있었던 선구자, 보디컬의 논리라면 9이닝 당 볼넷이 3.4나 되는 에반스는 절대 긴 이닝을 소화할 수 없다.
그런데도 올 시즌 평균 6이닝을 투구했다는 건 이유가 있겠지. 피트 오어는 에반스를 두 얼굴을 가진 투수로 평가했다.
“통계를 보면 볼넷 비율이 높은 상위 10%의 선수의 이닝 당 투구 수는 16.90개죠. 반대로 볼넷을 적게 주는 하위 10%의 투수는 14.57개에 불과합니다. 한 경기로 치면 10개 이상 차이가 나는 거죠.”
“그런데도 에반스가 평균 이상의 이닝 소화력을 지닌 이유가 뭡니까?”
“복잡한 변수가 있겠지만 일단 탈삼진 비율이 높습니다. 삼진을 많이 잡는다고 투구 수가 많아진다는 논리는 이미 논파가 됐죠. 플라이 볼 비율이 높은 것도 투구 수를 줄이는 요인이 됐을 겁니다.”
플라이 볼이 내야 땅볼보다 안타가 될 확률이 낮은 건 당연, 땅볼을 유도하는 스타일이었다면 그만큼 많은 안타를 맞고 상대하는 타자가 늘어났을 거다.
당연히 투구 수도 늘어났겠지,
하지만 제구가 정교한 편이 아니라 몰리는 공이 많고 플라이 볼이 장타로 연결되는 빈도도 높았다.
평균자책점이 4.35나 됐던 것도 이런 배경과 무관하지 않겠지, 좋은 구위와 많은 삼진으로 단점을 커버하고 있지만 에이스라는 이미지와 거리가 멀었다.
초반부터 난타를 당한 에반스는 3점을 내주고 1회를 종료, 사방에서 쏟아지는 야유를 받아내며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볼넷은 주지 말자.’
이어지는 뉴욕의 1회 말 반격,
마운드에 오른 댈러스 레이븐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주문처럼 중얼거렸다.
레이븐은 올 시즌 16승 11패, 평균자책점 3.56, 볼넷 67개, 탈삼진 205개를 기록하며 2선발 노릇을 잘 해냈다.
하지만 마무리가 최악, 팀의 지구 우승이 걸린 시즌 33번째 등판에서 5이닝을 소화했지만 볼넷 5개, 5실점을 내주며 무너졌다.
거기다 마음대로 볼 배합을 바꾸다가 호프만, 다카기에게 잔소리까지 들었고, 이래저래 최악의 하루를 보냈다.
내 문제는 뭘까. 그동안 나름대로 고민했고 오늘은 그 답을 찾기 위해 마운드에 올랐다.
“초구, 들어왔다는 판정입니다.”
“그래요. 레이븐은 이렇게 들어가야 합니다. 굳이 다카기가 될 필요는 없어요.”
피트 오어는 레이븐이 자신의 투구를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올 시즌 메이저리그 타자들이 초구에 배트를 낸 확률은 30%가 안 된다. 90마일도 안 되는 볼을 던지는 투수라면 모를까, 레이븐은 구위만 따지면 다카기와 큰 차이가 없는 선수다.
바깥쪽을 찌를 게 아니라 가운데에 밀어 넣는 용기가 필요, 핀 포인트 제구 한다고 까불어 봤자 본인만 손해다.
이것만 익숙해져도 볼넷이 줄고 더 좋은 투수로 성장하겠지,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 호프만도 이날은 레이븐의 기를 살려주는 쪽으로 볼 배합을 유도했다.
‘던져, 계속 던지라고’
호프만은 계속 빠른 볼을 요구했다.
뉴욕의 선두 타자 모리슨은 몸 쪽 빠른 볼에 약점이 있는 편, 한 시즌 20홈런도 쳐낼 수 있지만 타고난 파워가 떨어져 밀어치는 홈런은 거의 없다.
이런 선수가 레이븐의 빠른 볼을 밀어낼 수 있을까.
바깥쪽으로 던지는 건 오히려 커트를 해낼 기회를 마련해 줄 뿐, 던져도 가운데로 던져야 했다.
“스윙!! 헛칩니다. 카운트는 노 볼 투 스트라이크”
“모리슨이 확실히 예전만 못하네요. 6년 연속 200안타를 기록한 선수인데, 올 시즌은 174안타, 타율도 0.277에 머물렀습니다.”
약점이 명확해지면서 모리슨은 올 시즌 고전을 거듭했다.
그래도 좋은 타자라는 건 분명하지만 7년 1억 7천만 달러 장기 계약을 안겨준 뉴욕 입장에선 뒤통수를 맞은 기분, 모리슨도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나름대로 변화를 시도했다.
스탠스를 좁히고 짧게 치는 건 무의미, 대신 홈 플레이트에서 조금 멀어졌다. 몸 쪽 공에 조금 더 잘 대응하기 위한 방법, 덕분에 2할 5푼 대에 머물렀던 타율도 제법 끌어올렸다.
문제는 바깥쪽 공 대응 능력이 떨어졌다는 것, 어떻게 해야 옛 명성을 되찾을 수 있을까.
일단 지금은 포스트 시즌에 집중하는 게 우선, 상대가 다카기라면 바깥쪽 제구된 공에 꼼짝없이 당했겠지만 상대는 레이븐이다. 어떻게든 되겠지 특유의 컨택 능력으로 난제를 풀어냈다.
따악 ~ !
‘앗?!’
내야를 빠져나가는 안타에 레이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노 볼 투 스트라이크에서 맞아 더 기분 나쁜 안타, 역시 빠른 볼을 과신하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호프만의 의견은 달랐다.
타이밍이 약간 늦으면서 2루수 옆을 빠져 나간 안타, 냉정히 따지면 잘 쳤다고 보긴 어렵다.
평소 당겨 치는 타격을 하는 모리슨이 이런 타격을 했다는 건 그만큼 레이븐이 좋은 공을 던지고 있다는 뜻 아닐까. 미리 짜둔 볼 배합을 그대로 밀고 나갔다.
다음 타자는 제레미 브라운, 대기타석에서 보스턴 배터리의 볼 배합을 지켜본 브라운은 초구부터 치고 나갔다.
딱 ~ !
“높게 뜬 타구!! 호프만이 그 자리에서 잡아냅니다!! 원 아웃!!”
“글쎄요. 브라운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이해는 되는데, 어쨌든 결과는 최악으로 끝났습니다.”
브라운은 고개를 저으며 더그아웃으로 들어갔다.
생각보다 더 몸 쪽으로 들어온 공, 힘을 싣기 어려운 코스에 타이밍까지 밀리면서 최악의 결과가 나왔다.
강속구 투수를 상대로 초구 타격이 어려운 이유, 나는 왜 그렇게 성급했던 걸까. 생각할수록 속이 쓰렸다.
[No 88 - first baseman!! - Shawn ~ Spam!!]
“와아아 ~ !!!!”
“MVP!! MVP!!”
이때 한 선수의 등장이 실망에 빠진 팬들을 구원했다.
올 시즌 타율 0.333, 홈런 45개, 147타점을 기록한 숀 스팸, 타점을 돈으로 사고도 타점 왕을 놓쳤다는 조롱을 받고 있지만 올 시즌 최고의 타자였다는 것만큼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뉴욕 역사상 40홈런과 140타점을 동시에 달성한 선수는 역대 4명뿐, 그만큼 위대한 시즌이었다.
3대 0으로 앞서고 있지만 여기서 한 방 터지면 3대 2, 보스턴 벤치도 바짝 긴장했다.
‘던져’
호프만은 이번에도 빠른 볼을 요구했다.
다만 미트를 벌린 코스는 몸 쪽, 슬라이더를 결정구로 삼으려면 이 정도 모험은 감수해야 했다.
딱 ~ !
“파울입니다. 98마일, 오늘 레이븐의 구위는 어떻습니까?”
“좋네요. 또 던질 수 있다면 한 번 더 던져보는 것도 괜찮습니다.”
피트 오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헛스윙이 나왔고, 이때부터 레이븐은 자신의 구위를 확신했다.
덩치가 좋아서 통나무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지만 유일하게 얇은 부위가 귀, 레이븐은 여론에 지나치게 신경 쓰는 성격이다.
‘다카기는 체인지업을 제대로 던질 수 있다고? 나는 안 되고?’
사람마다 세상을 보는 시선은 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보는 세상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만, 세상이 날 바라보는 시선을 신경 쓰는 사람도 있는 법, 굳이 따지자면 레이븐은 후자에 가깝다.
그래서 지난 경기에서 되지도 않는 체인지업을 던지다가 호프만에게 지적을 당했다.
내 문제는 단조로운 구종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던 게 아닐까. 이제 2년 차에 접어든 커리어, 재출발을 할 시간은 충분했다.
딱 ~ !!
“타격!! 투수 발 맞고 3루수가 잡아 1루로 송구합니다!! 그 사이 1루 주자는 2루까지, 보스턴이 큰 산을 넘어갑니다.”
“글쎄요. 지금은 피하는 게 어땠을까 했는데, 역시 올라가네요.”
브라이스 감독은 마운드로 향했다.
타구를 몸으로 막는 건 위험천만한 일, 그래도 레이븐은 등을 돌리지 않았다.
타구가 정면으로 날아올 때 본능적으로 등을 돌리는 선수들이 있는데, 그러다 진짜 크게 다칠 수가 있다.
타구가 어깨나 등을 강타하는 경우가 이런 경우, 어떤 상황에서도 투구를 마치면 투수는 상체를 꼿꼿하게 세워둬야 한다.
그래야 투수 앞 땅볼에 대응할 수 있고, 타구가 날아와도 눈으로 보고 피할 수 있는 법, 위험한 수비였지만 레이븐은 기본을 지켰다.
“어디 다친 데는 없나?”
“괜찮아요. 제 몸은 통나무처럼 튼튼하니까요.”
이 긴장되는 무대에서 미소까지 보이는 녀석, 브라이스 감독은 엉덩이를 한 번 툭 쳐주고 더그아웃으로 돌아갔다.
‘젖비린내가 조금은 가신 건가.’
다카기는 팔짱을 낀 채 레이븐의 투구를 지켜봤다.
확실히 지난 경기보다는 봐줄 만한 투구, 그렇다고 높게 평가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다음 타자를 어떻게 상대하는지 지켜봤다.
따악 ~ !!
“아 ~ 이 타구가 중견수 앞에 떨어지는군요!! 2루 주자가 3루를 돌아 홈으로 들어옵니다!! 스코어 3대 1!! 뉴욕이 바로 추격에 나섭니다!!”
“지금은 카운트가 투 볼로 몰리면서 잡으러 들어갈 수밖에 없었거든요. 타자가 이걸 놓칠 리가 없죠.”
레이븐은 다시 문제점을 노출했다.
잊을 만하면 발목을 잡는 제구,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원인이 보이긴 하는데 다카기는 캡틴에서 물러났고, 앞으로 남 일에 간섭 안 하겠다고 선서까지 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간섭하자니 피곤하고, 모른 척하고 넘어가지니 가슴 한편이 찌릿했다.
‘알아서 해 봐라’
다카기는 방목을 선택했다.
작년 시즌에도 다카기는 빠른 볼이 맞아나가는 문제로 곤욕을 치렀다.
레이븐도 눈이 있다면 그 과정을 지켜봤겠지, 그런데 아직도 깨닫지 못했다면 생각하는 머리가 없는 거 아닌가.
직접 가르치는 것보다는 눈으로 보고 깨닫게 하는 게 낫겠지. 동료를 아끼는 가슴은 열어뒀지만 입은 봉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