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화. Respect - (16)
[일본에는 세 명의 신이 있다. 하나님, 부처님, 다카기 님]
와일드카드 결정전이 끝나고 미일 양국은 다카기를 찬양하는 기사를 쏟아냈다.
하지만 본인은 무덤덤한 반응, 찬양을 하든 말든 자유인데 그 소리에 귀를 기울여 줄 이유는 없었다.
‘원래 신은 무관심하잖아?’
신이 정말 존재한다고 해도 인간의 외침에 고개를 끄덕여줄까.
무관심하니까 아무리 빌어도 이루어지는 게 없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면 모른 척하는 게 나았다.
‘지금부터가 본 게임이다.’
문제는 지금부터, 와일드카드 결정전을 통과한 보스턴은 이제 뉴욕과 디비전 시리즈를 치르게 됐다. 전문가들이 평가하는 양 팀의 전력은 거의 호각, 일각에선 이게 진짜 월드시리즈라는 말도 나오고 있다.
신도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총성 없는 전쟁, 와일드카드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보스턴은 홈 어드밴티지를 받지 못하는 불리함까지 안고 가야 한다.
붙었다 하면 사건사고가 나는 라이벌 대전, 그것도 플레이오프에서 만났으니 팬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당연했다.
[찰리 블레어를 죽여라]
아니나 다를까 사고가 터졌다.
보스턴의 NBA 스타 찰리 블레어가 뉴욕 로고가 새긴 티셔츠를 입고 밖으로 나간 모습이 파파라치에게 잡힌 것, 극단적인 팬들은 블레어를 보스턴에서 추방시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일부는 살해위협까지 했고, 블레어는 이 일에 발끈했다.
“뉴욕에선 보스턴 유니폼을 입고 거리를 돌아다녀도 별문제가 없는데 보스턴 팬들은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같다. 보스턴은 최근 10년 동안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많은 우승을 한 팀이다. 언제까지 이렇게 속 좁게 행동할 건가?”
블레어는 이 발언으로 더욱 많은 비난에 시달렸다.
보스턴 팬들은 당장 여기서 나가라고 목소리를 높였고, 욱한 블레어가 소속 팀에 트레이드를 요청하면서 문제는 생각보다 커졌다.
보스턴 구단은 이 사태에 침묵을 유지, 선수들도 다를 건 없었다.
지금 일어난 소동은 팬들이 시리즈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 뉴욕과 보스턴의 대결은 언제나 MLB 시청률 흥행을 보증했다. 불이 붙은 라이벌전에 찬물을 끼얹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 덕분에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타올랐다.
[너희들은 처음부터 우리 라이벌이 아니었어.]
[시라큐스가 우리의 라이벌이다.]
가만히 있던 뉴욕 팬들도 반격을 시작했다.
시라큐스는 뉴욕 주에 위치한 도시로 뉴욕에서 인구가 4번째로 많은 대도시다. 1898년에 야구팀이 창단했지만 인기가 별로 없어서 서쪽으로 이동, 지금의 LA 머린스로 바뀌었다.
실제로 LA는 월드시리즈에서 뉴욕과 5번이나 맞붙었고 제법 치열한 경기를 펼쳤다.
뉴욕 팬들은 보스턴을 무시하기 위해 이런 역사적 사실까지 들춰냈지만 LA는 내셔널리그, 한 시즌에 만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보스턴은 1년에만 정규 경기에서 19번을 맞붙는 사이, LA와 뉴욕의 월드시리즈는 옛일이지만 뉴욕과 보스턴의 라이벌리는 현재 진행 중이다.
여론도 은근 둘의 싸움질을 부추기는 분위기, 사실 뉴욕도 신사적인 척하고 있지만 보스턴이 월드시리즈 5연패를 달성하는 동안 끓는 속을 다스렸다.
“숀 스팸은 무조건 잡아. X 같은 보스턴에게 빼앗길 순 없지”
뉴욕의 구단주 잭 샐리스버리가 숀 스팸 영입에 올 인 한 것도 이런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21세기 들어 역전된 양 팀의 위상, 이번 경기는 양 팀에게 단순한 디비전 시리즈가 아니다. 뉴욕에겐 옛 위상을 회복할 성전(聖戰), 월드시리즈 5연패를 달성한 보스턴은 이번 기회에 뉴욕의 시대를 끝장내 버리겠다는 의욕을 드러냈다.
* * *
“X 같은 양키!!”
“여긴 뉴욕이라고 XX아!! 네 머리통을 검은 봉지에 넣어서 바다에 버려줄까?!!”
디비전 시리즈 당일, 뉴욕의 홈구장은 긴장감에 휩싸였다.
12년 전 양 팀이 포스트 시즌에서 붙었을 때 유혈사태가 벌어졌고, 팬 2명이 숨지기도 했다.
진짜 사람이 죽어나가는 경기, 입구에 진을 친 경찰들은 사소한 충돌도 좌시하지 않았다.
“거기!! 지금 뭐 하는 거야?!! 경기 보러 왔으면 얌전히 기어들어 가라고!!”
문제를 일으킨 팬들은 경찰관의 호통에 목소리를 죽였다.
미국 경찰은 시민의 안전을 우선으로 하지 않는다. 위협이 생겼을 때 자신의 목숨을 최우선으로 하기 때문에 언제든지 총을 발사할 수 있는 것, 미국은 치안을 위해 경찰의 총기 사용을 필요악으로 생각한다.
수틀리면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를 일, 경찰의 무서움을 알고 있는 팬들은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클럽하우스 입구에도 배치된 경찰, 이곳은 최소 경사(Sergeant Station Commander)급의 인력이 배치되는데 무슨 일이 벌어지면 바로 출동해 사태를 수습할 수 있는 권력을 지닌 사람들이다.
미국의 치안을 위협하는 건 총기지만 역설적이게도 경찰의 적극적인 총기 사용 덕분에 그럭저럭 치안국가를 유지하고 있는 것, 생각할수록 아이러니한 일 아닌가.
미국 생활 7년 차에 접어들었지만 다카기는 이런 분위기가 익숙하지 않았다.
‘경찰은 선수에게 말 걸지 말 것’
‘선수도 경찰에게 말 걸지 말 것’
암묵적인 동의하에 이뤄진 동거, 경기를 앞둔 보스턴 선수단은 브라이스 감독 밑에서 전의를 다잡았다.
“두말하면 잔소리겠지만, 오늘 경기는 정말 중요하네. 자네들도 그걸 알고 있다면 경기에 집중해줬으면 좋겠어.”
“수틀리면 쏴 버려도 됩니까?”
이때, 헤드 헌터로 유명한 하버스태드가 목소리를 높였다.
사실 보스턴은 뉴욕에 갚아줄 게 있다. 지난 9월 경기에서 베논 리퍼드가 몸에 맞는 볼을 맞았는데, 브라이스 감독의 저지로 보복이 무산된 일이 있다.
그 일을 아직도 가슴에 담아두고 있는 하버스태드, 브라이스 감독은 조용한 목소리로 주의를 줬다.
“쏘는 건 저 사람들이 할 일이지 자네가 할 일이 아니야.”
클럽하우스 앞에 진을 치고 있던 경찰은 슬쩍 뒤를 돌아봤다.
돌아보면 안 되는데 누군가 내 얘기를 하면 자기도 모르게 귀를 세우지 않나. 마침 마주친 시선, 겁이 없는 하버스태드는 손가락 총을 쏘는 시늉을 했다.
그걸 또 받아주는 경찰, 유쾌하게 넘어갔지만 현장 분위기는 제법 살벌했다.
총을 찬 경찰들이 곳곳에 배치된 관중석, 경기는 시작도 안 했는데 양 팀 팬들은 ‘너 X같아!!’를 연호했다.
“자, 오늘 뉴욕은 프란시스코 에반스를 선발로 내세웁니다. 올 시즌 27경기 등판, 18승 4패, 평균자책점 4.35, 163과 1/3이닝 동안 볼넷 62개, 탈삼진은 180개를 기록했습니다.”
“뉴욕의 불안요소라면 역시 선발이라고 할 수 있겠죠. 올 시즌 무려 21명의 선발 투수가 기용됐는데, 부상과 부진도 많았고 … 타력과 불펜으로 여기까지 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보스턴은 뉴욕이 불펜 싸움으로 끌고 가기 전에 승기를 잡아야겠죠. 물론 보스턴의 불펜도 뉴욕에 밀리지 않습니다. 양 팀 모두 초반에 승기를 잡아야겠죠.”
주심의 콜과 함께 디비전 시리즈 1차전의 막이 올랐다.
선두 타자는 주앙 고메즈, 올 시즌 에반스에게 7타수 4안타 강점을 보인 고메즈는 초구부터 매서운 스윙을 돌렸다.
따악 ~ !!
“좋아!! 좋아!!”
“계속 뛰어!!”
좌중간에 떨어진 타구, 고메즈는 좌익수가 공과 숨바꼭질을 벌이는 사이 2루까지 진출했다.
순조롭게 출발하는 1회 초 공격, 후속 타자 베논 리퍼드는 보스턴 팬들의 환호를 받으며 타석에 들어섰다.
따악 ~ !!
“자!! 이 타구는!! 계속 뻗어서!! 원 바운드로 펜스를 때립니다!! 그 사이 2루 주자는 홈으로!! 타자 주자도 2루까지 들어갑니다!! 연속 2루타!! 보스턴이 선취점을 올립니다!!”
“보스턴이 올 시즌 홈런은 그렇게 많지 않았지만 팀 타율은 전체 1위를 기록했거든요. 타선의 짜임새는 역대 최고라고 봐도 좋습니다.”
보스턴의 테이블 세터를 이루는 고메즈와 리퍼드는 390득점을 합작했다.
메이저리그 전체 1위, 두 선수 모두 발이 빠르지만 이게 그것만으로 설명될 수 있는 지표일까.
득점에서 중요한 건 주루가 아니라 타격, 실제로 주루가 팀 득점에 미치는 영향력은 10분의 1 정도인 것으로 드러났다.
공격력을 갖춘 선수가 테이블 세터를 이루고 중심 타선이 뒤를 받쳐주고 있는데 득점이 안 나는 게 이상한 거 아닌가.
올 시즌 보스턴은 팀 홈런이 187개에 그쳤지만 242개를 때린 뉴욕(852)보다 더 많은 득점(854)을 기록했다.
큰 차이는 아니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뉴욕은 홈런이 안 나오면 득점이 안 된다는 뜻, 많은 전문가들은 양 팀의 전력이 대등하다고 보고 있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보스턴의 승리를 점쳤다.
확실한 선발 카드 2장과 짜임새 있는 타선 그리고 철벽 불펜까지, 보스턴은 전력에 빈틈이 없다.
이런 전력으로 뉴욕에 밀려 지구 2위에 내려앉았다는 게 불가사의할 정도, 하지만 보스턴의 브라이스 감독은 그 이유를 대략 알고 있었다.
‘좋아, 다들 집중하고 있어.’
뉴욕의 선발 에반스는 바깥쪽 빠른 볼을 던졌지만 포수가 블로킹을 하지 못하면서 공이 옆으로 튀었다.
3루까지 진출했어도 되는 상황, 하지만 리퍼드는 2루를 지켰고 브라이스 감독은 박수를 보냈다.
“득점을 억지로 만들려고 하지 말게. 안타가 나오면 그때 뛰라고”
리퍼드는 올 시즌 무리한 주루 플레이로 비명횡사 당한 경우가 적지 않다.
폭투가 나오면 무조건 뛰어야 하나? 지금 상황은 그냥 가만히 있는 게 낫다.
포수가 생각보다 빨리 대응해서 3루로 송구하면 어떻게 할 건가.
리퍼드가 1루에 있었다면 2루로 뛰어도 됐겠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다. 득점은 억지로 만들어 내는 게 아니라는 게 브라이스 감독의 철학, 실력은 있지만 세심한 면이 부족한 어린 선수들은 명장 밑에서 착실히 성장을 거듭했다.
따악 ~ !!
“그렇지!! 좋았어!!”
알 디즌의 추가 적시타, 스타트를 끊은 리퍼드는 3루를 지나 홈으로 질주했다.
가볍게 2점 추가, 더그아웃 밖으로 나온 브라이스 감독은 리퍼드와 격한 하이파이브를 주고받았다.
‘역시 명장은 명장이다.’
다카기는 그런 감독을 가만히 지켜봤다.
생각할수록 대단한 사람, 예전에도 생각했던 거지만 월드시리즈 우승 7회가 우연으로 만든 결과가 아니다.
경기는 선수가 한다는 말이 있는데 다카기는 브라이스 감독과 함께하면서 감독이 경기에 미치는 역할도 적지 않다는 걸 느꼈다.
방금 전 상황도 그렇다.
어느 감독은 왜 폭투가 나왔을 때 3루로 뛰지 않았느냐며 주자를 질책했겠지만, 브라이스 감독은 다르다.
야구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이 확고하고 그걸 선수들에게 주입시킬 수 있는 사람, 선수를 휘어잡는 카리스마는 조금 부족하지만 그 단점을 채우고도 남을 장점을 지닌 감독이다.
누군가가 팀 기강만 바로잡아준다면 만사 OK, 다카기는 그동안 그 역할을 자처해 왔다.
감독에게 불만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건 투구 수 관리뿐, 다른 건 전혀 불만 없다. 캡틴에서 은퇴했지만 다카기는 여전히 클럽하우스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존재, 다카기가 존경을 표하는 만큼 선수들은 브라이스 감독에게 신뢰를 보였다.
브라이스 감독이 부드러운 리더십을 유지할 수 있도록 조금이나마 보탬이 된 것, 하지만 그걸 떠벌리고 다니면 멋없는 짓 아닌가.
나는 이곳에서 어둠의 손으로 군림할 뿐, 눈에 띄는 건 마운드 위로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