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273화 (273/361)

273화. Respect - (15)

“자, 와일드카드 결정전, 보스턴은 다카기 하루요시가 선발로 출전합니다. 올 시즌 35경기 등판, 23승 3패, 평균자책점 1.46, 271이닝 동안 볼넷 32개, 탈삼진은 334개를 기록했습니다.”

“역대 최고의 시즌이었죠. 개인적으로는 그 인간의 흔적을 하나 더 지워냈다는 게 뿌듯합니다.”

와일드카드 결정전을 앞두고 피트 오어는 고인(故人)을 저격했다.

1981년부터 1989년까지 보스턴에서 뛰었던 제임스 눅콜스(Nuckolls), 이 시절 보스턴은 한 번도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지 못했고, 팀은 긴 암흑기를 보내고 있었다.

눅콜스는 그 시기를 버텨준 에이스, 1982년부터 1선발 자리를 꿰차더니 19승 12패, 평균자책점 2.43을 기록했다.

눅콜스의 무서운 점은 지칠 줄 모르는 체력, 1982년부터 1987년까지 250이닝 이상을 꾸준히 던졌고, 1984년엔 무려 270과 1/3이닝을 소화했다.

라이브볼 시대 이후 보스턴 역사상 단일 시즌 기준, 가장 많은 이닝을 소화한 투수, 하지만 눅콜스의 커리어는 오래 가지 못했다.

너무 많은 이닝을 던진 탓도 있겠지만 자기 관리를 못한 게 치명적, 보스턴이 있는 매사추세츠 주는 청교도 엄숙주의가 자리 잡은 곳이다.

그만큼 사생활면에서 엄격함을 요구하는데, 눅콜스가 5명의 사생아를 뒀다는 충격적인 기사가 나오면서 보스턴 팬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여기에 심각한 수준의 알코올 중독과 가정폭력, 심지어 경기가 있는 날에도 술을 마시고 마운드에 올라갔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미지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보스턴에서 보낸 마지막 시즌이었던 1989년 성적은 9승 8패, 평균자책점 4.20, 구단은 망설임 없이 눅콜스를 포기했다.

그렇게 각 팀을 전전하다 1994년에 은퇴한 눅콜스는 2007년, 자택에서 숨진 채로 발견, 시신에선 케타민이 검출됐다.

케타민은 동물 마취제로 사양되고 있지만 필로폰이나 코카인과 섞어서 환각제로 악용되기도 한다.

마지막까지 팬들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떠난 왕년의 스타, 보스턴 팬들은 눅콜스를 외면했고 지역 여론도 애도를 표하지 않았다.

[보스턴의 전설이 사망했다.]

물론 다른 주의 기자들은 이런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보스턴 팬들은 그딴 인간 우리는 모른다고 적극 부정, 보스턴 구단도 지금까지 눅콜스의 등번호를 영구 결번시키지 않았다.

9년 동안 보스턴에서 169승을 거둔 선수지만 한 짓거리나 너무 심각해서 오히려 팀 명성에 먹칠을 하는 선수, 보스턴 팬들 사이에선 금기어로 자리를 잡았다.

그래도 워낙 대단한 커리어를 보낸 탓에 잊을만하면 이름이 튀어나오는데, 다카기가 올 시즌 271이닝을 투구하면서 다시 언급이 됐다.

선발이 200이닝만 던져도 대단한 시대에서 271이닝을 던졌다?

70이닝도 어지간한 불펜 투수가 한 시즌에 소화하는 이닝, 여론은 다카기가 올 시즌 세 명 이상의 활약을 해냈다는 찬사를 보냈다.

“아직도 안 되는 겁니까?”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준비하고 있습니다.”

“서둘러요!! 이러다 배팅 못 한다고요!!”

한편, 이곳은 매사추세츠 주 플레인 빌에 들어선 스포츠 도박장

청교도주의가 엄격하게 적용되는 지역이지만 도박만은 예외다.

주에서 스포츠 도박을 합법화하면서 더욱 달아오른 열기, 개장 2시간 만에 42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도박장에 자리를 잡았다.

돈 거래나 폭주하다 보니 시스템이 마비가 될 정도, 이 도박장은 지난 2년 동안 무려 3억 4천만 달러를 주세로 납부했다.

이런데 주에서 허락을 안 해주겠나, 경찰들까지 파견해 철저하게 감독하는 지역, 경기가 시작되자 도박장은 엄숙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완투하라고, 나는 그쪽에 걸었으니까.’

도박장에선 별의별 조건이 배팅이 된다.

승패는 물론이고 스코어, 심지어 그 선수가 완투를 하느냐 홈런을 치느냐 못 치느냐는 조건도 돈이 걸린다.

다카기는 올 시즌 완투를 9번이나 한 선수, 선발을 오래 두지 않는 브라이스 감독의 스타일이 마음에 걸렸지만 어느 팬은 다카기의 완투에 3000달러를 걸었다.

실현된다면 배당률은 5배, 안 되면 쪽박, 초조한 표정으로 경기를 지켜봤다.

“스윙!! 크게 헛칩니다. 카운트는 원 볼 투 스트라이크”

“다카기 선수가 올 시즌 빠른 볼 피안타율이 0.211밖에 안 됩니다. 작년에는 0.240이 넘었거든요. 딱히 구위나 구속이 변한 건 아닌데, 제구가 더욱 정교해졌습니다.”

다카기는 올 시즌 빠른 볼을 철저하게 스트라이크 존 바깥쪽으로 밀어 넣었다.

일정하게 형성된 탄착군, 바깥쪽으로 타자의 시선을 돌려놓고 흘러나가는 슬라이더, 떨어지는 체인지업 등으로 입맛에 맞춰 잡아냈다.

탈 삼진률은 작년에 비해 떨어졌지만(12.44 ->11.09), 단순한 투구 패턴으로 타자의 스윙을 이끌어냈고, 투구 수를 줄이면서 작년보다 50이닝을 더 던졌다.

예전에도 대단했지만 지금은 투구계의 신적인 존재, 투수교체가 잦은 브라이스 감독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나 취했나? 안 마셨는데”

결정구는 높게 들어오는 96마일 포심, 헛스윙을 돌린 샘 라이슨(오스틴 텍산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다카기의 투구 폼은 로우 쓰리 쿼터, 바깥쪽 높은 코스에 던지면 타자 입장에선 구속이 점점 상승하는 것 같은 혼란에 빠져든다.

이 공에 몇 번이나 당한 타자들은 술에 취한 것처럼 환상을 본다는 증언을 하는데, 직접 겪어보면 그런 말이 절로 나왔다.

‘으리얏 ~ !!’

다음 타자 조디 왓슨도 힘차게 스윙을 돌렸지만 제대로 맞추질 못했다.

다음 공은 뚝 떨어지는 체인지업, 체크 스윙이 되면서 순식간에 투 스트라이크가 적립됐다.

“다시 떨어트립니다!! 삼진!! 첫 두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웁니다!!”

“체인지업도 종류가 3가지나 있는 선수입니다. 갑부가 지갑에서 돈을 꺼내는 것 같아요. 이런 때는 10달러짜리, 어떤 때는 20달러짜리, 지금은 100달러짜리를 꺼내 들었네요.”

“하하 ~ 그러게 말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본인이 원하는 공을 던질 수 있는 선수죠.”

해설위원의 칭찬이 끝나기 무섭게, 다카기는 3번 타자를 땅볼로 처리하고 마운드를 내려왔다.

겨우 9개로 정리한 1회, 포스트 시즌에서 이렇게 든든한 선수가 어디에 있을까. 그동안 다카기와 즐거움을 함께한 팬들은 열렬한 환호와 절대적인 신뢰를 드러냈다.

“자, 이제 보스턴의 1회 말 공격으로 이어집니다. 선두 타자는 주앙 고메즈, 올 시즌 타율 0.284, 홈런 6개, 52타점을 기록했습니다.”

“다카기의 유니폼에서 캡틴 마크를 떼어낸 선수죠. 속죄를 하고 싶다면 지금 밖에 없습니다.”

짓궂은 피트 오어는 고메즈를 집중 공격했다.

무사 주자 1 - 2루에서 땅볼 치고 더그아웃으로 걸어 들어오는 바보가 어디에 있나.

볼 카운트를 착각했다는 변명으론 해명이 안 되는 대사건, 본인의 죄를 알고 있는지 고메즈는 땅볼을 쳐도 최선을 다해 뛰었다.

첫 타석은 아웃 됐지만 어쨌든 근성은 보여줬고, 베논 리퍼드가 타석에 들어섰다.

차분하게 볼을 고르는 리퍼드, 정규시즌에서 출루율 0.404을 기록한 만큼, 수준 있는 눈 야구를 선보였다.

여기에 올 시즌 27홈런, 2루타 48개를 기록할 만큼 파워도 겸비한 선수, 알 디즌과 함께 보스턴의 핵심 타선을 이루는 선수라 배터리도 잔뜩 긴장했다.

따악 ~ !!

“와아아 ~ !!”

우중간으로 깨끗하게 밀어 친 타구, 생각보다 멀리 뻗은 공은 우익수 글러브 위를 넘어갔다.

리퍼드는 1루를 지나 2루까지 대시, 3루 코치가 무리하지 말라는 사인을 보내면서 리퍼드는 일단 2루에 안착했다.

역시 2루타 머신, 보스턴 홈 팬들은 득점권에서 알 디즌을 맞이했다.

“자, 이제 알 디즌이 타석에 들어섭니다. 올 시즌 타율 0.305, 홈런 40개, 149타점, 숀 스팸의 타격 3관왕을 저지했습니다.”

“마지막 경기에서 5타점을 쓸어 담은 게 결정적이었죠. 1타점만 더 냈어도 150타점이었는데 그건 조금 아쉬웠습니다.”

알 디즌은 올 시즌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수비야 원래 뛰어났고, 타격이 각성하면서 WAR 8.8을 찍었다.

수비에서 약간 불안한 모습을 보인 숀 스팸이 WAR 7.2를 기록했으니 올 시즌 아메리칸 리그 MVP 수상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종합적인 평가를 따져보면 디즌의 우위지만 투표를 던지는 건 기자들의 몫, 투표는 이미 끝났지만 디즌은 내가 올해의 주인공이라는 시위를 이어갔다.

따아악 ~ !!

“우와아아 ~ !!”

맞는 순간 결과를 알 수 있는 타구, 홈 팬들은 MVP를 연호했다.

그 환호에 답하듯 관중석을 향해 손가락 세리머니를 날리는 디즌, 하지만 다카기는 코웃음을 쳤다.

‘까불지 마라. 여기에 나 있다.’

올 시즌 271이닝을 던진 다카기도 유력한 MVP 수상 후보, 2년 전에 MVP를 수상하긴 했지만 원래 먹어본 놈이 또 먹는 거 아닌가.

팀 동료라고 양보할 생각 없었다.

2회 3회 4회에도 계속되는 호투, 방금 전까지 디즌에게 MVP를 연호하던 여론은 다카기에게 돌아섰다.

투표는 이미 끝났는데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 건지, 디즌은 갈대 같은 팬심에 섭섭한 마음을 품었다. 억울하면 또 존재감을 어필하는 수밖에, 마침 외야로 제법 큰 타구가 날아들었다.

따악 ~ !!

“외야로 멀리 가는 타구!! 중견수가 펜스 근처에서 잡아냅니다!! 투 아웃!! 브라민 파크가 팬들의 함성으로 뒤흔들리고 있습니다.”

“지금 팬들이 MVP를 연호하고 있는데, 이게 누구에게 보내는 찬사일까요?”

“저는 다카기 쪽에 한 표 걸겠습니다.”

피트 오어는 꿋꿋하게 다카기를 밀고 나갔다.

예전부터 팬이었으니 당연, 디즌이 들으면 섭섭하다고 하겠지만 솔직히 40홈런은 매 시즌 나오는 기록이다.

지난 40년 동안 270이닝을 넘긴 투수가 한 명이라도 있었나?

거기다 1점대 초반의 평균자책점과 334탈삼진까지, 기자들이 야구를 볼 줄 아는 인간들이라면 표가 가는 곳은 정해져 있다고 봤다.

“됐어!! 이제 다 왔어!! 당신은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한편, 도박장 열기도 경기장만큼 뜨겁게 달아올랐다.

어느새 7회를 돌파한 다카기, 다카기의 완투에 3000달러를 배팅한 팬은 다소곳이 양손을 모았다.

브라이스 감독만 안 끼어들면 문제없는 완투, 그런데 8회 초 다카기가 안타를 내주면서 분위기가 묘하게 돌아갔다.

때마침 중계카메라가 비춰주는 불펜, 투수 코치가 불펜에 전화를 하는 모습까지 잡히면서 팬의 가슴은 무너져 내렸다.

“일단 대기 시켜 놓게”

“알겠습니다.”

연락을 불펜 코치는 스티븐 루카스에게 몸을 풀라는 지시를 내렸다.

다카기의 현재 투구 수는 90개, 스코어가 5대 0이니 바꿔도 문제될 게 없다. 그래도 조금 놔두는 게 좋겠지, 브라이스 감독은 팔짱을 낀 채 에이스의 투구를 지켜봤다

딱 ~ !!

“유격수 잡아서 2루에!! 다시 1루에서 ~ !! 아웃입니다!! 더블 플레이!! 다시 루상은 깨끗해집니다!!”

“주자가 있는 꼴을 못 보네요. 오늘 텍산스가 안타 4개를 쳤는데 그때 마다 병살타가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 병살만 4개를 때린 텍산스는 침통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희망이 안 보이는 경기, 다음 타자가 범타로 물러나면서 벤치는 절망에 휩싸였다.

“또 나갈 건가?”

“당연하죠.”

브라이스 감독은 다카기에게 9회에도 올라갈 거냐고 물었다.

에이스의 뜻을 확인한 코치는 수화기를 붙잡았고, 스티븐 루카스는 불펜에서 연습 투구만 하다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결국 이날 다카기는 마지막까지 경기를 책임졌고, 도박장의 희비는 엇갈렸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카기 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다카기에게 3천 달러를 배팅한 팬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고래고래 소리를 내질렀다.

3천 달러를 1만 5천 달러로 바꿔준 존재, 지금만큼은 하나님보다 더 위대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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