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272화 (272/361)

272화. Respect - (14)

[보스턴 막판 역전 우승 노린다]

[댈러스 레이븐 선발 출전]

시즌 최종전을 앞두고 보스턴 선수단은 왕좌 재탈환을 다짐했다.

작년 시즌은 탬파베이, 올해는 뉴욕의 약진에 가로막힌 왕좌 등극, 그래도 작년에 비하면 사정이 나은 편이다.

작년 시즌은 포스트 시즌 진출에 실패했지만, 올 시즌은 6경기 차로 여유 있게 와일드카드 1위를 차지, 보스턴이 못한 게 아니라 뉴욕이 너무 잘했던 것뿐이다.

격차라고 해봤자 2게임, 자력으로 뒤집는 건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희망을 버리진 않았다.

“다른 건 모르겠고 실수만 하지 말자, 정신 바짝 차리고”

경기 전, 다카기는 선수들에게 정신무장을 요구했다.

안타를 치고 삼진을 잡으라는 막연한 요구보다는 이게 훨씬 낫지 않은가. 실수만 줄여도 결과는 따라오는 게임, 평소 잘했던 녀석들이지만 그래도 한 번 더 잡아줬다.

“자, 댈러스 레이븐이 시즌 32번째 선발 등판에 나섭니다. 올 시즌 16승 10패, 평균자책점 3.36, 187이닝 동안 볼넷 62개, 탈삼진은 199개를 잡아냈습니다.”

“작년에 14승, 올해 16승, 프로 2년 만에 30승을 달성했거든요. 이대로 성장한다면 다카기 선수와 함께 메이저리그 최강의 원투 펀치를 형성할 게 분명합니다.”

보스턴 지역방송 해설위원 피트 오어는 레이븐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

사실 레이븐은 전형적은 투 피치 투수다. 포심 구사율이 53%, 슬라이더 구사율이 34%, 이런 선수가 어떻게 루키 시즌에 14승을 거두는 활약을 펼친 걸까.

피트 오어는 그 답을 나름대로 정리했다.

비교 대상은 필라델피아의 슈퍼 루키 케빈 바론, 바론은 포심과 커브 비율이 90%에 달하는 투 피치 투수다.

전반기에 9승 6패, 평균자책점 2.83이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뒀지만 후반기에는 4승 7패, 평균자책점 4.48로 추락, 내셔널리그 신인왕을 수상했지만 올해는 작년만큼의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케빈 바론과 댈러스 레이븐의 결정적인 차이는 볼 배합과 구위, 바론은 포심 비율이 64%나 될 정도로 너무 뻔한 볼 배합을 보여줬다.

그에 비해 레이븐은 포심, 슬라이더 외에도 투심과 체인지업을 12% 비율로 구사, 대표 구종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타자의 타이밍을 뺏는 역할은 충분히 해냈다.

“넌 빠른 볼하고 슬라이더만 잘 던져도 돼”

다카기는 레이븐이 투심을 던지는 걸 원치 않았다.

레이븐의 빠른 볼과 슬라이더는 구위가 워낙 좋아 알고도 치기 어렵다.

투 피치 투수는 메이저리그에서 장수하기 어렵다고 하는데, 그건 구위가 떨어져서 그런 말이 나오는 것뿐이다.

볼 배합을 다양하게 가져가겠다고 무리하게 구종을 늘리다간 잘 던지던 슬라이더까지 망가진다.

초밥으로 유명한 집이 메뉴의 다양화를 위해 튀김을 병행하다 초밥의 퀄리티까지 망치는 것과 다를 게 없지 않은가.

빠른 볼과 슬라이더만으로도 메이저리그에서 통할 구위를 갖춘 레이븐, 코치진의 생각도 다카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없어도 상관은 없는데 있으면 더 좋고 … ’

사실 브라이스 감독은 레이븐이 체인지업을 조금 더 다듬어 주길 바랐다.

다카기가 메이저리그 역대 최고를 다투는 투수에 올라선 건 빠른 볼, 슬라이더, 여기에 스플리터처럼 떨어지는 체인지업을 갖췄기 때문이다.

레이븐도 그렇게 될 수 있다면 보스턴은 단기전에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겠지, 레이븐도 감독의 마음은 대강 알고 있었다.

‘메뉴를 더 추가해야겠어.’

투 스트라이크를 잡은 레이븐은 체인지업 사인을 보냈다.

왜 안 하던 짓을 하려고 하는 건지, 평소 온순한 성격이지만 그라운드에선 미친개가 되는 호프만 포수는 슬라이더 사인으로 맞불을 놨다.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의견차, 보통 이런 경우는 연차가 낮은 선수가 고개를 숙이는데 레이븐은 계속 고집을 부렸다.

“바깥쪽으로 빠지는군요. 카운트는 원 볼 투 스트라이크가 됩니다.”

“레이븐이 이게 문제에요. 투심과 체인지업의 경계가 모호한데, 사실 두 구종은 그립이 비슷하고 무브먼트가 일정 부분 겹치는 부분도 있거든요. 그걸 잡아내야 하는데, 컨트롤을 못하고 있어요.”

“다카기라면 여기서 확실하게 떨어트렸겠죠. 이게 레이븐과 다카기의 차이입니다.”

해설위원 존 얼라우는 은근슬쩍 레이븐을 다카기와 비교했다.

그런데 이 해설을 선수들도 듣는다는 게 문제, 캡틴과 비교되는 게 은근 신경 쓰였던 레이븐은 이후에도 투심 구사율을 늘리려는 모습을 보였다.

‘너 잠깐 나 좀 보자.’

보다 못한 호프만 포수가 마운드로 올라갔다.

왜 던지지도 못하는 투심을 던지려고 하는 건지, 하지만 레이븐은 투심이 아니라 체인지업이었다며 어린애처럼 투정을 부렸다.

“옆으로 휘는 게 체인지업이냐? 너는 네 공이 어디로 가는지도 몰라?”

호프만은 단호하게 대응했다.

2년 차밖에 안 된 투수가 볼 배합을 주도하려는 건 어불성설, 뭣보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경기 시간을 줄이기 위해 인터벌 시간을 제한하면서, 보스턴은 볼 배합을 경기 전에 미리 정해둔다.

볼 배합이 바뀌는 건 처음 세운 작전이 통하지 않았을 때뿐, 이것도 코치진이 정해주기 때문에 배터리가 이렇게 싸울 이유도 없다.

다만 예외가 있다면 캡틴, 다카기는 1년 차 시즌부터 메이저리그를 초토화하는 피칭을 선보였다.

“그러니까 당신들이 나한테 맞춰. 내 공은 내가 잘 알아”

애송이가 이런 소리를 해도 포수와 코치들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만한 실적을 쌓았으니 가능했던 일, 하지만 레이븐은 그 정도 권력을 부릴만한 지위가 없었다.

‘내가 저랬었나?’

배터리의 다툼을 지켜보던 다카기는 생각에 잠겼다.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는 말이 있지만, 다카기는 예전에 기자들 앞에서 선수를 위한 팀도 있다는 인터뷰를 했다.

이건 틀린 말이 아니다.

삼진을 잡을 수 있는 투수라면 그에 맞는 볼 배합을 짜주는 게 포수와 코치진이 해야 하는 일 아닌가. 그래서 당신들이 나한테 맞추라는 말을 했고 성과도 냈다.

하지만 레이븐은 그 정도 수준은 아니다. 실력이 부족하면 노련한 포수의 리드를 따르는 게 맞는 법, 문제가 커지기 전에 교통정리를 했다.

“볼 배합 다 짜고 나왔잖아. 왜 네 마음대로 룰을 바꿔? 네가 팀의 룰을 바꿀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이닝을 마치고 내려온 레이븐은 캡틴 앞에 섰다.

괜히 포수한테 대들었다가 꼼짝없이 붙잡힌 꼴, 긴말 싫어하는 다카기는 마지막 경고를 날렸다.

“오늘 짜낸 볼 배합은 코치들이 널 위해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거야. 그 사람들이 할 일 없어서 저기 앉아 있다고 생각해?”

“ … 아니”

“알면 됐어. 가 봐”

캡틴은 문제아를 제자리로 돌려보냈다.

이제는 감독과 비슷한 존재감을 뿜어내는 다카기, 브라이스 감독은 그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훗날 내 뒤를 이을 자가 있다면 저 녀석이 아닐까.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다카기는 아직 30도 안 된 젊은 선수, 당분간 이 자리에 머물러도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입꼬리가 들썩거렸다.

‘뭐 하냐 지금’

보스턴의 3회 말 공격, 다카기는 본 헤드 플레이에 인상을 구겼다.

무사 주자 1 - 2루에서 타석에 들어선 주앙 고메즈, 그런데 여기서 체크 스윙이 나왔다.

3루 쪽으로 힘없이 굴러가는 땅볼, 3루수가 베이스를 찍고 2루에 송구하면서 더블 플레이가 됐다.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는데, 더그아웃으로 들어오는 고메즈, 아웃카운트를 착각한 것 같은데 다카기는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야 인마!!!!”

그제야 자신의 실책을 알아챈 고메즈, 뒤늦게 1루로 향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경기 전에 다른 건 몰라도 실책은 하지 말자고 몇 번이나 주의를 줬던 캡틴, 본 헤드 플레이로 삼중살을 만든 고메즈는 더그아웃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빨리 이리 안 와?!!”

불호령에 바로 뛰어오는 고메즈, 주위 선수들은 알아서 자리를 피했다.

그렇잖아도 레이븐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 있는 캡틴, 당장이라도 폭발할 화산처럼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다.

나까지 데이면 큰일, 자기 살길부터 찾았다.

“너 내가 요즘 잔소리 안 한다고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냐? 노 아웃 1 - 2루에서 땅볼 치고 더그아웃으로 들어오는 놈이 어디 있어?!! 네가 그러고도 프로냐?!!”

사방으로 튀는 화산탄, 최근 잔소리를 줄이고 장난이 늘어난 캡틴이라 이 대폭발은 선수들에게 더 무섭게 다가왔다.

“됐다. 프로한테 이런 말 하는 것도 웃기지. 앞으로 관심 끌 테니까 네 마음대로 해.”

다카기는 손짓으로 고메즈를 밀어냈다.

지구 1위가 걸린 경기인데 평소보다 집중력이 떨어진 녀석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결국 이날 보스턴은 6대 3패배를 당하며 지구 1위와 완전히 이별했다.

2년 연속 지구 1위 등극 실패, 포스트 시즌 진출은 확정지었지만 팬들은 나사 빠진 플레이를 보여준 선수들을 향해 비난을 퍼부었다.

“저도 책임을 지겠습니다.”

경기 후, 다카기는 기자들 앞에서 캡틴 완장을 반납하겠다는 뜻을 표했다.

오늘 경기엔 등판하지 않았지만 캡틴으로서 선수들을 제대로 통솔하지 못한 건 분명, 엄격함과 부드러움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아야 했는데 그게 잘 안 되는 편, 솔직히 내가 가는 길을 닦는 것도 쉬운 게 아니다.

그런데 남이 가는 길까지 간섭하고 있으니, 그동안 내색은 안 했지만 스트레스 때문에 폭발하기 일보직전이었다.

“이게 뭔가?”

“다카기가 전해달라고 합니다.”

수더랜드 단장은 뜯겨나간 캡틴 완장을 받아들었다.

얼마나 힘이 좋으면 이걸 손으로 뜯어낸 건가. 그건 그렇고 이건 진짜 화가 났다는 뜻, 자네가 아니면 누가 캡틴을 하겠냐며 설득에 나섰다.

“서로 고독한 늑대처럼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예전에도 그랬잖아요. 생각해 보면 그 시절이 좋았어요.”

하지만 다카기는 캡틴을 거부했다.

사실 다카기는 남의 일에 참견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누가 트레이드되든 나가든 그냥 지켜봤던 편, 그런데 캡틴이라는 몸에 맞지도 않는 옷을 입으면서 남의 일에 끼어드는 일이 잦아졌다.

고등학교 시절 때는 어쩔 수 없이 참견을 했지만 지금 클럽하우스에 있는 선수들은 모두 프로 레벨 아닌가.

내가 참견을 하는 것도 웃긴 일, 그리고 생각해 보면 늑대처럼 따로 놀던 시절의 팀 성적이 좋았다.

캡틴을 없애버리는 게 오히려 팀 성적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근거 없는 말이 아니라 수더랜드 단장은 할 말을 잃었다.

“그러니까 오늘부터 캡틴 자리는 반납하겠습니다. 이제부터는 제 일에만 집중하고 싶네요.”

“뭐 … 자네 뜻이 그렇다면 … 알았네.”

수더랜드 단장은 결국 완장을 수거했다.

포스트 시즌을 앞두고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팬들은 이러다 가을 야구에서 미끄러지는 거 아니냐며 우려를 표했다.

“속이 후련한가?”

“네, 너무 좋네요.”

다음 날, 다카기는 브라이스 감독의 참견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할 일만 집중할 수 있게 됐으니 날아갈 것 같은 기분, 역시 남을 다루는 건 못 할 짓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감독님은 그 자리 안 힘드세요?”

“뭐가 말인가?”

“성질 죽이고 선수들 기분 맞춰주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잖아요. 저라면 1년도 못 버텨요.”

브라이스 감독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차기 감독감이라고 생각했는데 본인은 전혀 생각이 없는 모양, 조금 아쉬웠지만 그 입장도 이해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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