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화. Respect - (13)
[숀 스팸, 15년 만에 타격 3관왕 달성?]
시즌이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개인 타이틀 전쟁은 조금씩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탬파베이에서 뉴욕으로 둥지를 옮긴 숀 스팸은 지금까지 타율 0.328, 홈런 43개, 128타점을 기록하며 아메리칸 리그 타이틀 경쟁 1위를 달리는 중, 보스턴의 알 디즌이 타율 0.303, 홈런 38개, 128타점을 기록하며 그 뒤를 바짝 쫓고 있다.
홈런은 차이가 조금 있지만 타점은 언제 순위가 뒤바뀔지 모르는 상황, 기록을 의식한 숀 스팸은 동료들에게 농담이 섞인 본심을 드러냈다.
“야, 지금부터 내 안타나 홈런으로 홈 밟는 사람한테 상금 줄게”
“얼마나 줄 건데?”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동료들, 숀 스팸은 득점 하나당 천 달러를 걸었다.
[뉴욕, 승부 조작인가?]
[메이저리그 사무국, 뉴욕에 해명 요구]
그런데 이 농담이 생각보다 큰 사건으로 번졌다.
7회 말, 뉴욕은 1사 주자 3루 기회를 맞이했는데 3루 주자 빈스 스나이더는 충분히 들어올 수 있는 외야 플라이에 반응하지 않았다.
다음 타자는 숀 스팸, 스팸은 이 타석에서 안타를 치며 시즌 129번째 타점을 올렸다. 누가 봐도 이상한 장면, MLB는 지금까지 승부 조작 때문에 몇 번이나 곤욕을 치렀다.
그냥 넘어갈 수 없었던 장면, 사무국은 뉴욕 구단에 정식으로 해명을 요구했고, 빈스 스나이더는 동료들끼리 한 내기였다는 입장을 밝혔다.
[네 말이 옳다고 해도 어쨌든 승부조작이다.]
하지만 팬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숀 스팸의 적시타가 나와서 다행이지, 그때 득점이 나지 않았다면 뉴욕은 패배를 당할 뻔했다.
메이저리거라는 놈이 팀의 승리보다 그깟 1천 달러가 욕심났다는 건가? 이해하기 어려운 태도, 빈스 스나이더는 물론 숀 스팸까지 세트로 묶여 비난을 받았다.
[3억 달러 계약 맺었다고 돈이 썩어나나 보지?]
[네가 3관왕을 달성해도 나는 인정하지 않을 거다.]
결국 숀 스팸은 정식으로 팬들에게 사죄해야 했다.
이유야 어쨌든 숀 스팸이 빈스 스나이더에게 1천 달러를 지급한 건 사실,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선수인 만큼 자신이 한 행동에 책임을 져야 했다.
“이번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기자들은 이번 사건과 무관하지 않은 알 디즌에게 마이크를 내밀었다.
정정당당한 경쟁에 찬물을 끼얹은 사건, 디즌은 표정 없는 얼굴로 답변을 이어갔다.
“선수들이 그런 짓을 하는 경우는 종종 있습니다. 저희 선수들도 사소한 내기를 걸죠.”
“어떻게 말입니까?”
“적어도 돈은 걸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커피 심부름을 하는 정도죠.”
누가 봐도 숀 스팸을 우회적으로 저격하는 발언, 그 속마음을 읽어낸 기자드는 좀 더 노골적인 질문을 던졌다.
“지금 스팸의 타격 3관왕을 저지할 선수는 당신뿐입니다. 마지막까지 흥미로운 대결 기대해도 되겠습니까?”
“당연하죠. 솔직히 조금 불타올랐습니다.”
인터뷰를 마친 디즌은 클럽하우스로 복귀, 좌석에 앉아 있던 다카기는 디즌에게 내기를 걸었다.
“우리도 기록조작 좀 해 보자.”
“뭘 어떻게 할 건데?”
“너 못 칠 때마다 내가 한 대씩 때려줄게.”
디즌은 어이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자극이 될 만한 걸 걸어야지, 못 치면 한 대 맞아야 된다고? 어느 바보가 그런 불합리한 내기를 하냐며 콧방귀를 뀌었다.
“그럼 내가 홈런이나 타점 올릴 때마다 너도 한 대 맞을래?”
“그러지 뭐”
“그럼 좋아.”
“야, 그만 둬, 누가 봐도 네가 불리하잖아.”
이때, 브랜든 바이어가 끼어들었다.
타자는 아무리 잘 쳐도 3할을 넘기기 어렵다. 다카기가 3대 맞을 동안 디즌은 7대 맞을 수밖에 없는 운명, 그런데도 하겠다는 건가.
하지만 알 디즌은 나름 설득력 있는 논리를 앞세웠다.
“이번 기회가 아니면 내가 언제 저 자식을 때려 보겠어?”
다카기가 누군가에게 맞는 장면은 상상도 하기 어렵다. 원래 남의 집 불구경은 재미있는 법, 디즌이 자신의 몸을 희생해 그 장면을 연출해 낸다면 동료들은 이 내기를 말릴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때릴 건데? 주먹으로 때릴 순 없잖아?”
“시범을 보여줄게, 너 이리 와봐”
괜히 한소리 했다가 희생양이 된 주앙 고메즈, 도망치려 했지만 동료들에게 붙잡혀 다카기 앞에 끌려 왔다.
얼굴을 뒤덮은 거대한 손, 겁을 먹은 어린 양은 눈을 질끈 감았다.
따악 ~ !!
“뜨악!!”
이마에 고속도로를 낸 손가락 타격, 두개골이 쪼갤 듯한 파열음에 선수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내가 저걸 맞아야 한다고?’
디즌은 어색한 미소와 함께 공포에 휩싸였다. 웃기긴 한데 괜히 자존심 상하는 벌칙, 하지만 이제 와서 물러서긴 싫었는지 내기를 받아들였다.
까짓거 내가 안타치고 때리면 되는 거 아닌가. 디즌은 긴장감을 한껏 끌어올렸지만 여유가 있는 다카기는 벤치에서 손가락을 풀어뒀다.
“자, 1회 초 보스턴의 선공으로 경기가 시작됩니다. 타석에는 주앙 고메즈, 올 시즌 타율 0.281, 홈런 4개, 47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타격은 괜찮은데 출루율이 조금 떨어지죠. 그래도 주루 능력은 뛰어나기 때문에 득점권에 나가기만 하면 괜찮습니다.”
보스턴 지역방송 해설위원 피트 오어는 개인 타이틀 경쟁을 의식했다.
얼마 전 일어난 사건으로 시끄러워진 타이틀 경쟁, 오늘 디즌이 좋은 활약을 펼쳐 타점만이라도 역전해 주길 바랐다.
그러기 위해선 주자들의 출루가 필수, 고메즈는 2구를 받아쳐 좌중간에 떨어지는 타구를 날렸다.
좌익수가 턴을 하는 사이 2루까지 노려볼까 했지만 일단 1루에 안착, 다음 타자 베논 리퍼드가 타석에 들어섰다.
올 시즌 성적은 타율 0.294, 홈런 24개, 78타점, 타격도 좋지만 출루율도 0.398로 수준급이다.
지금 보스턴 벤치는 디즌에게 타점을 몰아주자는 분위기, 리퍼드는 가볍게 친다는 자세로 타격에 임했다.
따아악 ~ !!
“자, 밀어낸 타구가!! 우익수 뒤로!! 계속 뒤로!!!! 담장을 넘어 갑니다!!!! 베논 리퍼드의 시즌 25호 홈런!! 보스턴이 2대 0으로 앞서나갑니다!!”
“이렇게 되면 디즌이 먹을 게 없는데요. 너무 정직한 거 아닙니까?”
피트 오어는 불만 섞인 환호를 내질렀다.
어느 팀은 누구한테 타점을 밀어주고 있는데 눈치 없게 너무 정직한 보스턴 타자들, 리퍼드도 이 상황이 어이가 없는지 주앙 고메즈와 어색한 하이파이브를 주고받았다.
“미안, 일부러 홈런 친 거 아니야.”
“그런 말 하지 마라.”
디즌은 리퍼드의 농담을 한 귀로 흘려보냈다.
분명히 말하지만 디즌은 동료들에게 타점 몰아달라고 한 적이 없다. 아무리 귀한 식재료도 냉장고에 썩혀두면 의미가 없는 법, 먼저 먹는 놈이 임자 아닌가.
주자는 쌓아둘수록 좋다고 하는데 그때그때 먹어치우는 게 제일 좋은 법, 냉장고는 텅 비었지만 디즌은 나름대로 방법을 찾아갔다.
‘맙소사!!’
초구부터 힘껏 휘둘렀지만 중견수 정면으로 가는 타구, 손가락을 풀어뒀던 다카기는 바로 형을 집행했다.
“뭐야? 여기서 하는 거야?”
“나중에 한꺼번에 맞으면 더 힘들어. 지금 맞자”
어느새 다가온 고메즈는 디즌의 팔을 결박했다.
나도 맞아봤으니 너도 당해보라는 심보, 눈치를 살피던 리퍼드도 형 집행을 거들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보스턴 더그아웃 근처에 자리 잡은 카메라 기자는 둔탁한 파열음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눈에 들어온 건 고통에 몸부림치는 디즌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사방으로 흩어지는 범죄자들,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사람이 걸레가 됐네.”
“어이 캡틴, 너무 심한 거 아냐?”
보스턴 선수들은 마음에도 없는 말을 지껄였다.
다들 재미있다고 웃고 난리인데 저런 말을 해봤자 설득력이 없지 않은가, 자존심이 상한 디즌은 자기 자리에서 이마를 어루만질 뿐, 정신적 충격이 컸는지 멍한 얼굴로 먼 곳을 바라보기도 했다.
‘이것도 봐준 거다 인마’
다카기는 디즌을 향해 묘한 미소를 날렸다.
투구를 하는 오른손은 쓸 수가 없어 왼손으로 형을 집행, 오른손으로 때렸으면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거다.
맞기 싫으면 공을 치면 될 거 아닌가. 지금부터 부지런히 따라가도 장담할 수 없는 타이틀 경쟁, 정신 차리라는 뜻으로 손가락을 다시 풀어뒀다.
‘저 자식, 오늘은 안 되겠네’
이날 알 디즌은 4타수 무안타로 물러났다.
한 대는 농담으로 때려줬지만 3대를 또 때리는 건 잔인한 일, 본인도 속이 쓰릴 텐데 모른 척 넘어가 줬다.
“안 때리고 뭐 해?”
하지만 디즌은 클럽하우스에서 이마를 들이밀었다.
맞는 것보다 4타수 무안타로 물러난 게 더 치욕스러웠던 듯, 다카기는 그런 정신 상태면 됐다며 손을 거뒀다.
“그건 아니지, 나만 맞는 건 손해잖아.”
“기어이 날 한 대 때려 보겠다는 거냐?”
하지만 디즌은 물러서지 않았다. 타이틀 경쟁도 경쟁이지만 나만 맞고 끝내는 게 싫은 모양, 다카기는 이 자식이 매를 번다며 미뤘던 형을 집행했다.
“아 … 잠깐만”
“이리 안 와? 어딜 도망가.”
두 대 더 맞고 해롱거리는 디즌, 괜히 멋있는 척하다가 상대를 자극한 거 아닐까. 나머지는 내일로 미루자고 하고 싶었지만 다카기는 봐주지 않았다.
‘차라리 돌로 맞는 게 낫지’
자기 일도 아닌데 고메즈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한 대 맞아 봤으니 저 손가락에 실린 파워가 얼마나 대단한지 잘 알고 있다. 그걸 4대나 맞은 디즌, 하지만 이건 약속된 일이라 불쌍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때? 내일도 또 할래?”
“ … 생각 좀 해 보고”
결국 디즌은 백기를 들었다.
브랜든 바이어 말대로 이딴 내기는 하는 게 아니었는데, 자존심만 걸레가 됐다.
‘나도 아프다 인마’
다카기도 마음은 편치 않았다.
조금만 분발하면 정상인데 그 한 발을 못 뻗는 디즌, 숀 스팸이 타점에 상금을 걸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다카기는 뭐 그런 자식이 있느냐고 분개했다.
거기다 상금을 받겠다고 고의적으로 태그 업을 하지 않은 빈스 스나이더, 우리가 그런 기록 조작자들에게 성스러운 타이틀을 내줘야 하나.
디즌이 2인자로 시즌을 마무리하는 건 원치 않았다.
“너 그딴 녀석들한테 밀려서 2인자 되고 싶냐?”
“당연히 아니지”
“분명히 말하는데 나는 그 꼴 못 본다. 알아서 잘 해”
경기는 승리를 거뒀지만 보스턴 선수단에겐 여러모로 찝찝했던 하루, 다음 날 다카기는 심각한 표정으로 경기를 지켜봤다.
숀 스팸은 어제 2타점을 추가하며 디즌과의 격차를 더욱 벌렸다. 남은 경기도 얼마 없는데 이대로라면 디즌의 패배, 팀의 자존심이 걸린 일이라 디즌의 타석이 자기 일처럼 다가왔다.
‘3관왕은 절대 못 줘’
디즌은 첫 타석부터 집중력을 발휘했다.
홈런 타이틀은 멀어졌지만 타점 경쟁은 아직 승산이 있는 싸움, 마침 1사 주자 2루라 볼넷보다 치고 나가겠다는 의욕을 앞세웠다.
따악 ~ !!
“잡아당긴 타구가 2루수 옆을 빠져 나갑니다!! 고메즈는 3루를 돌아 홈으로!! 홈으로!! 들어옵니다!! 선취 득점!! 오늘도 보스턴이 경기를 리드합니다.”
“이렇게 되면 또 모르죠. 마지막까지 집중력을 발휘해주길 바랍니다.”
1루를 밟은 디즌은 벤치를 향해 딱밤을 때리는 세리머니를 했다.
타점 하나 올렸으니 오늘은 내가 널 때리겠다는 도발, 다카기는 어디 한 번 해보자며 가소롭다는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