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Respect - (12)
“자, 다카기는 오늘도 7회에 마운드에 오릅니다. 이렇게 되면 올 시즌 전 경기 7이닝 이상 투구를 기록하는 군요.”
“제가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메이저리그 역대 최고의 투수는 다카기 하루요시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기록으로 이미 증명이 되고 있죠.”
“어떤 점에서 말입니까?”
“일단 타구를 컨트롤 할 줄 압니다. 다카기 선수의 통산 BABIP이 0.261인데, 리그 평균이 0.300 정도예요. 그런데 올해는 BABIP이 0.230밖에 안 됩니다.”
투수의 BABIP은 이닝을 거듭할수록 높아지기 때문에 마무리 투수들의 수치가 좋게 나온다.
올 시즌 후반기부터 보스턴의 클로저로 낙점된 브랜든 바이어의 BABIP은 0.261, 이것도 리그 평균에 비하면 엄청나게 낮은 거다.
그런데 선발 투수가 0.230을 기록한다는 건 정상적인 일은 아니다.
우연이라고 폄하하기도 뭣한 게 통산 BABIP이 0.261, 이건 다카기가 타구를 컨트롤 할 줄 안다는 명백한 증거다. 어영부영 넘어가기엔 너무 좋은 화젯거리, 다카기의 열혈 팬으로 유명한 피트 오어는 캐스터의 질문을 계기로 대화를 이어갔다.
“그것만으로 다카기 선수를 역대 최고의 투수라고 평가하기엔 조금 부족하지 않습니까?”
“드릴 말씀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뉴욕 팬들이 다카기 선수를 샘 파슨스와 비교하는데 비교하는 것 자체가 실례입니다.”
샘 파슨스는 포스트 시즌 통산 22승, 뉴욕을 월드시리즈 5회 우승으로 이끈 전설적인 투수다.
뉴욕과 라이벌구도를 이루고 있는 보스턴, 이 팀에서 포스트 시즌 통산 21승, 보스턴의 월드시리즈 5연패를 이끈 다카기가 파슨스와 비교되는 건 당연한 일 아닐까.
하지만 피트 오어는 두 선수의 격차는 분명하다고 선을 그었다.
“파슨스는 통산 BABIP이 0.278로 아주 좋았습니다. 그런데 통산 평균자책점은 3.04, FIP은 2.79를 기록했죠. 이렇게 차이가 나는 이유는 파슨스의 수비 능력이 형편없었기 때문입니다.”
파슨스의 수비력은 역대 최악이라고 봐도 좋다.
1910년 이후 투수 최다 실책을 저질렀고 통산 필딩률은 0.892, 도루 저지율도 27%를 겨우 넘겼다.
[최고의 투수이자 최악의 수비수]
샘 파슨스의 커리어를 요약하면 대략 이렇게 평가할 수 있다.
투수는 타자와 가장 가까운 야수. 그래서 공을 던지는 순간 제5의 내야수가 된다. 그 정도로 중요한 자리, 그렇다면 다카기는 어떨까?
[골든 글러브 6회 수상, 만테냐 어워드 6회 수상]
대략 이 정도로 정리 가능, 많은 탈삼진에 가려져서 그렇지 다카기는 누구보다 많은 풋 아웃(Put out)을 만들어 냈다.
■ 플라이 볼, 직선타구를 잡아 타자를 아웃시킨 경우
■ 송구를 받아 타자나 주자를 아웃시킨 경우
■ 베이스에서 떨어져 있는 주자를 아웃시킨 경우
풋 아웃의 개념은 대략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수비력이 받쳐주질 않으면 쌓을 수 없는 기록, 누가 유격수 출신 아니랄까 봐 타구에 재빠르게 반응하는데 바로 놀라운 장면이 나왔다.
딱 ~
빗맞은 타구가 3루 쪽으로 굴러왔다.
3루수 베논 리퍼드는 타구를 향해 대시, 그런데 한 발 앞선 다카기가 공을 잡고 역동작으로 1루 송구를 했다.
정확하게 글러브 안으로 들어가는 공, 보스턴 선수들은 물론 상대팀인 샬롯도 경악했다. 저 덩치로 어떻게 이런 송구를?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딱 ~
“다시 투수 앞 땅볼, 직접 잡아 1루로 송구합니다. 투 아웃”
“다카기 선수는 올 시즌 한 단계 더 진화했습니다. 아무리 구위가 좋은 투수도 맞춰 잡는 능력이 없으면 길게 가기 어렵거든요. 20년 이상 던질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고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피트 오어의 칭찬이 끝나기 무섭게, 다카기는 후속 타자를 3루 땅볼로 처리하고 7회를 마쳤다.
시즌 평균자책점은 1.19까지 하락, 클로저도 이 정도면 특 A급인데 선발투수가 이런 기록을 찍고 있으니, 투구 수 제한이 엄격한 브라이스 감독도 다카기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지켜봤다.
“다시 바깥쪽!! 이번 승부도 선전 포고 없이 시작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맞고 시작할 수밖에 없는 거죠. 쳐 봤자 좋은 결과가 안 나온다는 걸 타자들도 알고 있는 거예요.”
타자 입장에선 정말 욕 나오는 바깥쪽 빠른 볼, 아이싱을 마치고 벤치로 복귀한 하파엘은 생각에 잠겼다.
저 공은 나도 던질 줄 아는데 도대체 뭐가 다른 걸까.
일단 구속부터 차원이 다른 수준, 하파엘의 빠른 볼은 평균 92마일 정도다.
그에 비해 다카기는 평균 97마일, 심지어 8회 구속이 가장 높게 나온다(98.1마일). 그 다음이 9회(97.8마일), 이런 초인적인 체력은 타자들을 심리적으로 질리게 만들었다.
진짜 기계가 아닌지 의심될 정도, 타자가 반응한다 싶으면 팔을 조금 들어 구속을 끌어올렸다.
‘따라 할 엄두가 안 난다.’
하파엘은 조언을 구하는 걸 포기했다.
비결을 전수받는다고 해도 내가 저렇게 던질 수 있을까. 차라리 내 특징을 살리는 게 낫겠지, 실제로 다카기의 투구를 벤치마킹하려다 실패한 투수들이 많다고 들었다.
뉴욕의 맥다겟도 그런 경우, 다카기와 달리 좌완이라는 것만 빼면 스타일은 비슷하다. 하지만 결과는 정 반대, 나도 그 꼴이 될 순 없지 않은가. 나는 내 갈 길을 가겠다며 돌아섰다.
‘드디어 이겼네.’
다카기는 기어이 마지막까지 경기를 책임졌다.
3경기만의 시즌 14승, 완봉승을 거뒀지만 효율적인 투구 덕분에 지친 기색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내일도 던지는 게 어떤가?”
“진짜 그럴까요?”
“그냥 해 본 소리네.”
브라이스 감독은 농담을 던졌다가 바로 취소, 후반기 첫 승을 거둔 다카기는 기자들의 관심에 둘러싸였다.
“올 시즌 4번째 완투를 기록하셨는데,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닙니까?”
“글쎄요. 저는 이것도 적당히 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여유가 넘치는 얼굴에 기자들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진짜 기계가 아닌지, 한 기자는 전신 촬영이라도 해봐야 하는 거 아니냐며 농담을 던졌다.
“제 속살을 보고 싶으신 것 같은데, 꿈도 꾸지 마십쇼.”
다카기는 유쾌하게 맞받아쳤다.
메이저리그 최고의 선수들은 알몸 상태로 화보를 촬영하는데, 다카기도 잡지사에서 제의를 몇 번 받았다.
하지만 노출을 꺼리는 성격이라 전부 거절, 내 속살을 볼 수 있는 건 와이프뿐이라며 기자들의 웃음보를 자극했다.
“오늘 피트 오어가 중계석에서 당신을 최고의 투수로 치켜세웠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무슨 말을 듣고 싶으신 겁니까?”
계속 되는 질문, 다카기는 기자의 속마음을 들췄다.
진짜 노련한 기자는 자신이 원하는 답을 유도하기 위해 밑그림을 그린다. 내가 현역 최고의 투수라는 건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 그런데 왜 이런 질문을 한 걸까.
그라운드에선 인내심이 많은 편이지만 평소 성격은 급한 편, 말 돌리지 말고 원하는 답이 뭐냐며 직구를 던졌다.
“저는 개인적으로 당신이 역대 최고의 투수라고 생각합니다. 그 비결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노력? 아니면 타고난 재능입니까?”
“노력입니다. 정말 타고난 건 타격이죠.”
다카기는 진짜 타고난 재능은 타격이라고 못을 박았다.
중학교 시절부터 타격이라면 누구보다 뛰어났고, 본격적인 투구를 시작한 건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다.
야구부 사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겸업해야 했던 투구, 그런데 이게 직업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늦게 배운 만큼 타격보다 더 신경을 기울였고 결국 여기까지 왔다며 소감을 밝혔다.
“그럼, 타자로 데뷔했다면 지금보다 더 뛰어난 활약을 할 수 있다고 자신하시는 겁니까?”
“당연하죠. 제 타격은 고교 시절 이후 발전한 게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곳에서 3할에 홈런 19개를 쳤죠. 투수들은 제가 타자를 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 겁니다.”
기자들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실적이 없다면 허풍으로 들렸겠지만 보여준 게 있으니 농담처럼 들리질 않았다.
어쨌든 그렇게 인터뷰를 마무리 한 다카기는 클럽하우스로 복귀, 샤워를 마친 동료들은 헐벗은 상태로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지금 씻어야지.’
다카기는 가장 늦게 샤워 실에 들어섰다.
기자들의 인터뷰 요청에 친절하게 응하는 건, 속살을 비공개로 전환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고교 시절엔 학업을 병행하느라 얼른 샤워를 하고 귀가해 숙제를 해야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민망했다.
남자라고 서로 다 까야 할 이유도 없고, 그래서 동료들이 샤워를 하는 동안 인터뷰로 최대한 시간을 끌어왔다.
물론 동료들은 이런 속마음을 모른다. 다들 내가 인터뷰에 친절히 응하는 줄로 이해, 그렇게 원정일정을 마치고 보스턴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샬롯이 있는 노스 캐롤라이나주에서 보스턴까지 거리는 자동차로 11시간이지만 비행기를 타면 금방, 새벽 1시 즈음에 집에 도착했다.
“자기야, 왔어?”
“안 자고 있었어?”
“자기 기다리고 있었지.”
오늘 따라 끈적끈적하게 들러붙는 키리코, 하지만 아들을 둘이나 둔 사이라 다카기는 거부감 없이 스킨십을 받아들였다.
“애들 자?”
남편의 물음에 키리코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리장성도 무용지물로 만드는 통행증, 마침 힘도 남았는데 어디에 쓰겠나. 일과를 마친 가장은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이게 무슨 소리지?’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다카기는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혼자 자기 무섭다고 칭얼거리는 둘째 아들의 소행인가, 대충 옷을 차려입고 문밖으로 나갔다.
“내가 잘못 봤나?”
다카기는 눈앞의 사물을 두고 머리를 흔들었다.
내가 아직 잠이 덜 깬 건가. 하지만 이건 분명 어린 사슴, 큰 눈망울에 등에 피어난 꽃무늬까지, 한눈에 봐도 무척 사랑스러웠다.
‘나 몰래 또 애완동물을 데려온 건가?’
얼마 전 고양이를 키우기 시작한 장남, 이번엔 스케일을 키워서 사슴을 데려온 건가. 손을 내밀자 꽃사슴은 한 걸음에 달려와 품에 안겼다.
“너 어디서 왔니? 엄마 어디 갔어?”
품에서 꼼지락거리던 사슴은 부부의 방에 들어섰다.
자연스럽게 아내 옆에 자리를 잡는 녀석, 정말 식구들이 나 몰래 애완동물로 데려온 건가. 어쨌든 꽃사슴을 처음 본 다카기는 신기하다는 얼굴로 녀석과 시선을 마주했다.
‘놀랬나?’
그런데 갑자기 도망치려고 하는 사슴, 다카기는 본능적으로 녀석을 품에 끌어안았다.
동물을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 내가 왜 이러는 걸까. 어쨌든 그 순간만큼은 이 녀석을 놓쳐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 자기야, 나 숨 막혀.”
아내의 고통스러운 목소리에 다카기는 눈을 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모두 꿈, 끌어안은 건 사슴이 아니라 아내였다.
“갑자기 왜 그래?”
“아니 그게 … 사슴이 도망치려고 해서”
남편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키리코는 그게 지금 무슨 소리냐며 킥킥거렸다. 남편과 잠자리를 7년 동안 같이 했지만 이런 적은 처음,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거 아니냐며 다독거렸다.
“오늘 내가 너무 힘들게 했나?”
“아니, 딱히 그런 건 아닌데 … 뭐였지?”
생각할수록 신기한 꿈, 평소 꿈을 잘 꾸는 편도 아닌데 정말 피곤해서 그런 건가. 머쓱한 표정으로 다시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