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Respect - (11)
“오늘 컨디션은 어때?”
고메즈는 후반기 첫 등판을 앞둔 캡틴에게 말을 걸었다.
경기를 앞둔 투수에게 말을 거는 건 조심스러운 일이지만, 다카기는 딱히 민감히 반응하는 성격이 아니라 그러려니 받아들였다.
“대답은 뻔한데 그런 거 물어서 뭐 하게?”
“아니, 혹시 안 좋으면 내가 신경을 좀 쓸까 해서”
이제 풀타임 메이저리거라고 어깨에 힘이 들어간 건가. 다카기는 가소롭다는 반응을 보였다.
“내가 너한테 도움을 받아야 한다면 은퇴할 때가 됐다는 소리지, 까불지 말고 너 할 일이나 신경 써.”
“알았어. 티 안 나게 도와달라는 뜻으로 이해할게.”
끝까지 까불거리는 녀석, 별말 없이 불펜으로 자리를 옮긴 다카기는 몸을 풀며 경기가 시작되길 기다렸다.
“자, 오늘 샬롯 머스키티어스는 하파엘 생로랑(Stlaurent) 선수가 선발로 나섭니다. 올 시즌 1경기 등판, 승패 없이 평균자책점 5.40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선수 경력이 조금 특이하죠. 9년 전에 자드 생로랑이라는 15세 소녀가 메이저리그 도전을 선언해서 여론의 주목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누나 따라왔던 이 선수가 메이저리그 계약을 맺었어요.”
하파엘 생로랑은 프랑스 국적 출신 메이저리거, 프랑스는 야구 불모지로 알려져 있지만 세계화를 꿈꾸는 메이저리그 사무국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은 없다.
메이저리그 구단은 8월마다 유럽 엘리트 캠프를 열어 유망주들을 모집하는데, 메이저리그 출신 감독이나 코치의 지도를 받고 눈에 띄면 스카우트를 받기도 한다.
하파엘 생로랑도 그런 경우,
누나 자드 생로랑은 18세에 메이저리그 구단과 계약을 맺고 마이너리그에서 선수생활까지 했다. 물론 신체적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은퇴했지만, 지금도 프랑스 여자 야구 국가 대표 팀으로 활약하고 있다.
누나 따라왔다가 재미 삼아 공 몇 개 던져본 하파엘도 샬롯의 눈에 띄어 선택을 받았는데, 15세까지 야구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는 소년이 여기까지 올라왔다는 것만 해도 기적에 가까웠다.
‘어쩌다 여기까지 와 버렸네.’
몸을 풀던 하파엘은 긴장된 얼굴로 캡을 눌러썼다.
솔직히 본인도 여기까지 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정말 이 자리에 오르길 바랐던 건 누나, 그 꿈을 대신 이뤄주겠다는 거창한 각오는 없지만 일단 시작한 도전이라면 끝을 맺겠다는 마음가짐으로 경기에 임했다.
따악 ~ !!
“초구 타격!! 내야를 빠져나갑니다!! 주앙 고메즈의 안타!! 선두 타자가 출루하는 보스턴입니다.”
“매력은 있는데, 뭔가 확실한 게 없습니다. 샬롯이 왜 이 선수를 택했는지는 이해하겠는데, 선발은 아니에요.”
하파엘은 언더에 가까운 낮은 팔로 최고 157km의 강속구를 던진다.
하지만 평균 구속은 140km 후반대, 주무기는 우타자 기준으로 바깥쪽으로 날카롭게 휘어나가는 슬라이더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문제는 이게 다라는 것, 메이저리그에서는 횡으로 휘는 공만으로 살아남기 어렵다.
메이저리그에는 언더 핸드 투수가 정말 없는 걸까?
정확히 말하면 없는 게 아니라 올라와도 살아남는 투수가 거의 없다. 실제로 마이너리그에는 언더핸드 투수들이 심심찮게 보이는데, 메이저리그 타자들은 횡으로만 휘는 공은 기가 막히게 쳐낸다.
다카기가 메이저리그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상하좌우를 동반한 빠른 볼 무브먼트와 좌타자 발등으로 떨어지는 슬라이더 그리고 체인지업, 제구력을 모두 갖췄기 때문, 아무리 구위가 좋아도 하파엘의 투구는 선발로 쓰기엔 조금 아쉬웠다.
‘제구가 안 되나?’
다카기는 먼 곳에서 하파엘의 투구를 지켜봤다.
저런 폼에서 최고 157km가 나온다는 건 엄청난 재능이다. 팔을 약간 올린다면 구위도 더 살 텐데, 저렇게 던진다는 건 제구에 문제가 있다는 거 아닐까.
실제로 많은 투수들이 팔각도를 낮춰 제구를 잡는 건 흔한 일이다.
다만 구위 하락은 어쩔 수 없는 일, 사실 투수 입장에서 제구와 구위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는 건 제일 어려운 일이다.
요리도 약간의 과정만 바꾸면 맛이 변하듯, 투구도 약간의 차이가 결과를 만들어내는데, 적의 입장에서 봐도 조금 안타까웠다.
‘이건 뭐냐?’
한편, 보스턴의 2번 타자 베논 리퍼드는 몸 쪽으로 날아오는 볼에 몸을 움츠렸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바깥쪽으로 들어온 공,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무브먼트가 있나. 투구 패턴은 단순하지만 하파엘의 구위는 인정했다.
따악 ~ !!
“밀어낸 타구!! 계속 뒤로 갑니다!! 멀리 가는 타구!! 우익수가 ~ !! 펜스 앞에서 잡아냅니다!! 조엘 릿츠의 멋진 수비!! 위기를 넘어갑니다.”
“지금은 리퍼드 선수가 대응을 잘 했는데 힘이 약간 못 미쳤네요.”
타구가 날아간 방향을 확인한 하파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이너리그에선 타자들이 반응도 못했던 공, 그런데 이곳의 타자들은 분명 다르다. 뭔가 넘을 수 없는 한계에 부딪힌 느낌, 나는 앞으로도 이곳에서 선수생활을 할 수 있을까.
의심이 깊어지는 만큼 공에 대한 믿음은 떨어졌다.
다행히 실점은 하지 않았지만 타자들을 압도하지 못한 투구, 하파엘은 감독의 격려를 받으며 더그아웃에 들어섰다.
“괜찮아. 지난 경기보다 훨씬 나아졌다고”
감독이 격려를 해줬지만 솔직히 립 서비스로 들렸다.
우리 팀 선수니까 이런 말을 해주는 거겠지, 내 투구가 먹히지 않는 건 하파엘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자, 이제 샬롯의 1회 말 공격으로 이어지겠습니다. 오늘 보스턴의 선발은 다카기 하루요시, 올 시즌 17경기 등판, 13승 2패, 평균자책점 1.25, 136이닝 동안 볼넷 15개, 탈삼진은 160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난 경기에서도 8이닝 무실점 투구를 했는데 승리가 없었거든요. 오늘도 득점 지원 없이 시작을 합니다.”
다카기는 평소처럼 투구를 이어갔다.
벌써 7년 차에 접어든 메이저리그 무대, 이제 막 이곳에 발을 들인 애송이와 달리 모든 것이 일상처럼 느껴졌다.
따악 ~ !!
‘엇?”
초구부터 강한 타구, 다카기는 등 뒤로 시선을 돌렸다.
안타라고 생각했는데 어느덧 타구를 추격한 고메즈, 멋진 비하인드 캐치와 대포알 송구가 이어졌다.
“아웃입니다!! 주앙 고메즈의 멋진 송구!! 안타 하나를 지워냅니다!!”
“고교 시절 99마일을 던진 선수 아닙니까. 역시 어깨는 알아줘야겠네요.”
한 건 올린 고메즈는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저렇게 하라고 키운 녀석이지만 왜 이렇게 얄미워 보이는지, 다카기는 철저하게 삼진으로 밀고 나갔다.
‘뭐 이런 녀석들이 다 있지?’
하파엘 생로랑은 보스턴 선수들의 플레이에 혀를 내둘렀다.
보스턴이 강팀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직접 상대해 본 건 이번이 처음이다.
마이너리그에서도 안 나올 1점대 평균자책점을 찍는 투수, 말도 안 되는 수비 범위에 대포알 송구를 꽂아 넣는 유격수, 제구가 된 공도 쳐 버리는 타자들, 이 놈들은 다른 차원에서 사는 괴물인가.
같은 공간에서 야구를 하고 있지만 저들과 섞이기 어렵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확실히 구위는 좋은데?’
반면, 보스턴 타자들은 하파엘의 재능을 인정했다.
뭔가 어설픈 것 같지만 잠재력은 충분한 선수, 귀찮은 존재로 성장하기 전에 눌러버려야겠다며 입을 모았다.
따아악 ~ !!
“자!! 이 타구는 높게 떠서!! 우측 담장을 넘어갑니다!! 알 디즌의 시즌 26호 홈런!! 보스턴이 드디어 앞으로 치고 나갑니다!!”
“하파엘은 아직 좌타자를 상대할 무기가 부족하거든요. 슬라이더를 던지긴 어려웠고, 결국 빠른 볼을 택했는데 디즌 선수가 놓치질 않았습니다.”
3회 초 보스턴의 공격, 선두 타자 알 디즌은 투 볼 노 스트라이크에서 몸 쪽 약간 높은 공을 잡아당겼다.
다카기처럼 백 도어 슬라이더를 던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 상황에서 투수가 던질 수 있는 공이 뭐가 있을까.
예상했던 바로 그 공, 아무리 구위가 좋아도 디즌 정도의 타자라면 얼마든지 공략할 수 있었다.
아메리칸 리그 홈런 1위를 달리고 있는 숀 스팸과의 격차는 이제 1개, 이어지는 5회 초 공격에서 디즌은 내친김에 동률까지 노렸다.
“스윙!! 크게 헛칩니다.”
“디즌이 올 시즌 강한 타구 비율이 47%, 작년 보다 11%가 늘었거든요. 물론 마이너리그 시절부터 20개 정도는 때려낼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파워에 의존하는 스타일은 아닙니다. 몸의 유연성을 바탕으로 풀스윙을 하는데, 이런 타격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보스턴의 해설위원 피트 오어는 극단적인 풀 스윙에 염려를 표했다.
발목이 꺾일 정도로 기울어지는 상체, 굳이 저렇게 무리를 하지 않아도 스탠스를 넓게 써서 비거리를 늘리는 방법도 있다.
디즌은 중견수 자리에서 묘기에 가까운 플레이를 선보일 만큼 놀라운 운동능력과 유연성을 갖췄지만, 피트 오어는 최근 디즌이 스트레칭을 잘 하지 않는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저런 타격을 할수록 스트레칭에 신경 써야 할 텐데, 타고난 재능에 의지해도 되는 걸까. 실제로 크지 않은 체구를 가지고도 타고 난 순발력과 허리 유연성으로 장타를 만들어내는 선수들은 메이저리그에 많다.
문제는 부상, 얼마 전 샌프란시스코의 스티브 도허티는 등 쪽 신경 손상으로 부상자 명단에 올랐다. 알 디즌과 마찬가지로 순발력과 유연성을 바탕으로 한 스윙이 문제, 그동안 문제가 없었는데 결국 탈이 났다.
결국 손을 봐야 한다는 게 피트 오어의 논리, 하지만 알 디즌은 전문가들의 참견에 콧방귀를 뀌었다.
‘웃기는 소리’
스탠스를 넓게 쓰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인가.
디즌도 그동안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지만 잘 되지 않아 다른 방법을 찾았다. 그게 지금 타격 폼, 올 시즌 홈런 선두권을 달리고 있는데 뭐가 그렇게 불만인가.
야구는 입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것, 보란 듯이 2구를 잡아당겼다.
따아악 ~ !!
“아악 ~ !!”
담장 밖으로 사라지는 포물선을 확인한 하파멜은 글러브에 얼굴을 박고 괴성을 질렀다.
이번에도 원하는 곳에 던졌는데 왜 공략당하는 걸까.
하파엘은 오늘도 승리투수 요건을 갖추지 못하고 강판, 5와 1/3 이닝 동안 볼넷 2개, 3실점, 4탈삼진으로 경기를 마무리했다.
“괜찮아. 그 정도면 선방한 거라고”
동료들의 위로가 이어졌지만 마음에 닿지 않았고, 그라운드를 응시하던 하파엘은 클럽하우스로 자리를 옮겼다.
‘넌 아직도 던지냐?’
아이싱을 받는 동안 TV를 통해 경기를 확인, 다카기는 여전히 투구를 이어가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저렇게 던질 수 있는 걸까. 비결이 뭐지?’
팔각도도 나처럼 낮은 편이고, 주무기가 슬라이더인 것도 비슷하다.
그런데 무슨 차이가 이런 결과를 만들어 낸 걸까, 답답했는지 트레이너를 붙잡고 늘어졌다.
“나와 저 녀석의 차이가 뭘까요?”
“넌 프랑스인이고 저 녀석은 일본인이야.”
농담으로 한 말이지만 오히려 썰렁해진 분위기, 무안해진 트레이너는 그렇게 궁금하면 직접 가서 조언이라도 구해보라며 화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