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Respect - (9)
[미국 이동식주택 절벽으로 추락]
[일가족 모두 사망]
6월 27일, 한 기사에 미국 일대가 들썩거렸다.
이동식 주택이 절벽으로 떨어져 일가족이 사망했다는 기가 막힌 소식, 부주의가 원인이었을까. 이 비극의 배경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최근 미친 듯이 오르고 있는 미국의 집세, 그만큼 노숙자들도 빠르게 늘고 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구책을 마련해 이동식 주택을 마련했는데, 이제는 토지 주인이 땅값을 올려버리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집이 있어도 머물 곳이 없어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됐다.
이번에 추락 사고를 당한 가족도 얼마 전까지 콜로라도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땅 주인이 공원을 매각하면서 쫓겨났고 머물 곳을 찾다가 절벽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을 절벽으로 내몬 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갈수록 심각해지는 집 문제와 늘어나는 거리의 노숙자들, 이 질문에 미국 사회는 답을 해야 할 때가 왔다.
‘나한테도 문제 있는 건가.’
다카기는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고모에게 전화를 드렸다.
사실 다카기는 야구 외에도 수입이 따로 있다.
지금은 고인이 된 할아버지가 물려주신 도쿄의 빌딩 그리고 시애틀 주에 있는 공터, 지금은 다양한 사업으로 발을 넓혔지만 스기토모 그룹은 본래 부동산으로 재력을 쌓은 기업이다.
각지에 땅이 있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 그냥 있는 땅 놀리기도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다카기는 공터에 이동식 주택이 들어서도록 했고 약간의 임대료를 받았다.
그동안 관리는 고모님이 해주셨지만 명색이 땅 주인인데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알아야겠지, 다카기의 고모는 걱정할 것 없다며 조카를 다독였다.
[지금 100세대 정도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래요? 임대료는 딱히 비싼 거 아니죠?”
[다른 데에 비하면 1/3도 안 돼. 왜? 올리라고?]
“아니요.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은 아니에요.”
가뜩이나 임대료 때문에 난리인데 올리면 어쩌라는 건가. 물론 고모가 조카를 놀리기 위해 농담으로 해 본 말이었다.
[하긴, 요즘 집세 때문에 난리긴 난리다.]
“거기도 그래요?”
[그래, 여기에 자리 있냐고 몇 번이나 문의 전화가 왔는데 주에서 허락을 잘 안 해주는 것 같다. 솔직히 자리도 없고 … ]
미국의 각 주는 최근 주거지 이동을 제한하고 있다.
집세가 낮은 곳을 찾아 사람들이 대거 이동하다 보니 이런저런 문제점이 생기는 건 당연, 하지만 이건 근본적인 해결방안이 아니다.
임대료를 잡아야 하는데 토지를 가진 자들이 반발하면서 이것도 쉽지 않은 상황, 이런 때일수록 힘을 발휘해야 하는 게 정부 아닌가?
하지만 정부는 조용, 각 주는 노숙자들을 위한 임시 거처를 마련하겠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뭔가 대책이 필요한 상황, 잠시 고민하던 다카기는 고모를 슬쩍 찔러봤다.
“고모 혹시 놀리는 있는 땅 없어요?”
[왜?]
“있으면 제가 살게요.”
집은 있는데 떠도는 사람들에게 땅을 제공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냥 푸는 게 아니라 합리적인 임대료를 받으면 되는 거 아닌가. 하지만 임대사업을 하려면 수도와 부수적인 시설을 갖춰야 하고 주의 허락도 받아야 한다.
이것저것 챙길 게 많은 사업, 그래도 다카기는 고모의 도움을 받아 임대 사업을 확장했다.
“임대료 인상 없음”
그리고 현재 운영하고 있는 시애틀 주의 임대료도 동결, 그런데 이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근처의 임대 사업자가 클레임을 걸었다.
가뜩이나 낮은 시애틀 주의 임대료, 수요가 많아진 만큼 그만큼 세를 올려야 될 것 아닌가. 하지만 다카기는 그런 시장 상황은 내가 알 바 아니라고 못을 박았다.
“이봐, 난 그저 합리적인 돈을 받고 사업을 하고 있는 것뿐이라고, 당신이 뭔데 남의 사업장에 이래라저래라 참견이야?”
[아니 … 그러니까 제 말을 들어보십시오. 다른 곳에 비해 임대료가 낮으니까 조금은 올려도 … ]
“그럼 올리시던가. 나는 그럴 생각 없어.”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오는 태도, 그런데 한 기자가 임대료 문제를 두고 자료를 수집하던 중 다카기가 시애틀 주에서 임대사업을 하고 있다는 소문을 입수했다.
여기에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는 정보도 추가, 기자는 바로 인터뷰를 요청해 사실 확인에 나섰다.
“네, 맞는데요?”
“임대료를 올릴 계획은 없으십니까?”
“올리길 바라시나요?”
“아니요. 그냥 해 본 소리입니다.”
기자는 이미 다카기가 임대료를 동결했다는 정보를 주민들에게 입수했다. 땅 주인들은 임대료를 올리느라 난리인데, 어떻게 동결할 생각을 했을까.
하지만 다카기는 미국 특유의 영웅 만들기에 난색을 표했다.
“제 조상님들이 한국에서 일본으로 넘어와 처음 시작한 사업이 숙박업입니다. 저도 들은 소문인지만 사업이 쉽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뭐가 그렇게 어려웠죠?”
“같은 조선인끼리 무슨 돈을 받으려고 하느냐며 숙박료를 내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거기다 조선인이 일본에서 조선인들 상대로 장사를 한다며 국내의 이미지도 좋지 않았죠. 하지만 제 조상님들은 합리적인 가격으로 서비스를 제공했던 것뿐입니다. 제가 하는 일도 마찬가지죠.”
다카기는 사회주의자나 이상주의자는 아니다.
사회에는 분명 격차라는 것이 있고, 여기에 억지 평등을 밀어 넣으면 질서가 무너져 내린다.
누군가는 노력해서 사회적 지위를 얻고 많은 돈을 버는 거 아닌가. 모두가 평등해야 한다면 누가 노력을 할지, 다카기는 사회적 격차를 인정하는 입장, 물론 혼자 잘 먹고 잘살겠다는 탐욕주의는 견제했다.
“저는 영웅이 아닙니다. 그저 임대료 받아먹는 장사꾼일 뿐이죠. 다시 말씀드리는데 제가 임대료를 동결한 건 사회의 영웅이 되겠다고 한 짓이 아닙니다. 장사도 사회의 질서가 유지돼야 할 수 있는 거죠. 그러니 그 이상의 의미는 부여하지 마세요.”
기자는 이 인터뷰를 글씨 하나 빼놓지 않고 기사에 올렸다.
그런데 생각보다 폭발적인 여론의 반응, 영화 속에서 자신을 희생하며 타인을 돕는 히어로는 솔직히 너무 작위적이다.
하지만 이 정도면 현실 세계에 있을 법한 영웅, 사회의 질서가 유지돼야 장사도 할 수 있다니, 결국 사회의 질서에 이바지하는 거 아닌가. 결국 이 사건으로 다카기는 이름을 미국 전역에 알리게 됐다.
‘이거 써먹을 수 있겠는데’
소식을 접한 스기토모 그룹은 내부회의를 거쳤다.
길거리로 나간 왕자 덕분에 미국 내에서 스기토모 그룹을 바라보는 이미지도 덩달아 좋아졌다.
장사꾼들이 이 기회를 놓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다카기의 얼굴을 걸고 임대 사업을 하는 방안이 추진됐다.
“우릴 사회의 악으로 규정하는 건가?”
하지만 미국 토지 소유자들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토지 소유자들을 사회의 악으로 몰아세우는 여론, 그런데 일본 자본을 낀 집단이 미국에서 임대사업을 벌이면 어떻게 되겠나. 물론 그룹 내부에서 추진되는 일이라 아직 여론에 알려지진 않았지만, 추진된다면 충돌은 피할 수 없다.
잘못하면 아들 가족에게도 위협이 될 수 있는 사업, 다카기의 아버지 요시무네는 아들의 이미지만 잘 사용해도 미국에서 벌이는 사업은 괜찮을 거라며 임대사업을 보류했다.
“오빠 나중에 은퇴하면 정치하는 거 아니에요?”
“그게 무슨 소리냐?”
“지금 분위기가 그렇잖아요.”
이런 복잡한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코하루는 들뜬 얼굴로 아버지와 얼굴을 마주했다.
미국에서 조금씩 입지를 넓혀가고 있는 오빠, 이러다 정말 정치인 할지 누가 아나? 하지만 요시무네는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라며 선을 그었다.
“왜요? 오빠 의외로 잘 할 것 같은데 … ”
“여기서 일하게 하면 되지 무슨 정치냐? 그런 거 해봤자 골치 아프다.”
“칫 ~ 아빠는 너무 보수적이야.”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너 오빠한테 괜한 말 하면 안 된다.”
“알았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코하루는 오빠에게 전화를 걸어 정계 진출을 부추겼다. 야구 선수가 무슨 정치를 한다는 건지, 다카기는 관심 없다며 입장을 분명히 했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장사꾼이었어. 내가 그 길로 가서 뭐 하게?”
[오빠는 지금 야구 선수 하고 있잖아. 그럼 일탈해도 되는 거 아냐?]
“장사도 정치의 일환이야. 너 그날 어떤 사람들 왔는지 봤잖아?”
올해 초, 스기토모 그룹은 대대적인 주주총회를 벌였다.
돈이 있는 곳엔 권력이 따라가기 마련, 그날 총회에는 일본의 부총리는 물론이고 각지의 유력인사들이 참석했다.
이미 다카기 가문은 자신들의 왕국을 세웠고, 일본 정부도 그룹과 협력해 경제를 이끌어 가는 상황이다.
다카기는 길거리로 나온 왕자 신세, 그리고 운동과 사업을 병행하며 나만의 왕국을 세우고 있다.
그럼 된 거 아닌가? 출세할 거라면 평생 할 수 있는 왕이 되는 게 낫겠지, 유권자들의 표심에 끌려다니고 싶진 않았다.
[오 ~ 그런 거야?]
“그래. 정치인은 표 구걸하느라 자기만의 정치를 못해, 결국 여론에 휩쓸리고 줏대 없는 인간으로 전락하지. 하지만 왕은 그게 아니잖아? 난 내 마음대로 살고 싶다.”
그제야 코하루는 오빠의 뜻을 이해했다.
하긴 표 구걸하며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정치인보다는 한자리에서 느긋하게 앉아 있는 왕이 더 멋있지 않은가.
역시 오빠는 뭔가 다르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 * *
“이렇게까지 해야 되나요?”
“저는 지시대로 하는 것뿐입니다.”
시간은 흘러 7월, 키리코는 아들들과 함께 경호를 받으며 집을 나섰다.
임대료 사건에 앙심을 품은 몇몇 토지 소유자들이 협박을 가한 게 원인, 키리코는 설마 그런 일이 벌어질까 했지만 다카기는 경호원 6명을 가족 곁에 붙였다.
집은 철옹성처럼 경계를 강화해 놨으니 상관없지만 이동할 때만큼은 조심해야겠지, 그렇게 다카기 가족은 삼엄한 경호를 받으며 브라민 파크에 입성했다.
“이쪽으로 오시죠.”
구장에서도 특별대우는 계속됐다.
이곳은 홈이니 괜찮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일, 수더랜드 단장이 마련해 준 특별석에 자리를 잡았다.
“엄마, 우리 왜 여기에 있어야 돼요?”
키리코는 장남의 질문에 답을 망설였다. 아버지가 괜한 말을 해서 그랬다는 말을 하기에도 그렇고, 따지고 보면 남편이 잘못한 건 없다.
어떻게 답을 해 줘야 할까, 타다요시는 엄마가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빈틈을 치고 들어왔다.
“여기에 있으면 팬들한테 인사를 못하잖아요.”
“인사? 왜?”
“여기 팬들은 아빠를 좋아하잖아요. 그러니까 저도 감사의 표시는 해야죠.”
키리코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유명한 건 아빠인데 왜 본인이 정치를 하려고 하는 건지, 역시 피는 못 속인다는 건가. 그 사이 불펜에서 몸을 풀던 주인공이 천천히 그라운드로 걸어 나왔다.
[모두 왕을 맞이하라]
전광판 네온사인의 지시대로 보스턴 팬들은 일제히 일어나 예를 표했다.
현재 메이저리그, 아니 미국에서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는 스포츠 스타, 왕이라는 별명은 예전부터 불리던 칭호지만 이제는 완전히 굳어졌다.
정당하게 돈을 내고 차지한 자리지만 왠지 우리가 예의를 갖춰야 할 것 같은 분위기, 특별석에서 이 장면을 지켜보던 타다요시도 자리에서 일어나 거수경례를 했다.
아버지가 얼마나 위대한지 다시 한 번 확인한 자리, 나도 그 명성에 맞는 아들이 돼야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