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4화. Respect - (6)
[알 디즌, 올 시즌 일 내나]
시즌은 어느덧 5월 초에 접어들었다. 공격력에서 고전을 면치 못할 전문가들의 예상과 달리 보스턴은 경기 당 4.8점이라는 준수한 기록을 냈다.
어린 선수들도 잘해주고 있지만 가장 눈에 띄는 건 알 디즌의 타격, 전에도 훌륭했지만 그렇다고 3할 이상에 30홈런을 겸비할 선수는 아니었다.
그런데 올 시즌은 조금 다른 분위기, 4월 한 달 동안 타율 0.336, 홈런 6개 15타점을 기록하며 타선을 이끌었다.
놀라운 건 107타석에서 삼진을 13개밖에 당하지 않았다는 것, 작년 시즌 150삼진을 적립한 선수답지 않았다.
‘이렇게 잘 치는데 하위타선은 아니겠지.’
경기를 앞두고 알 디즌은 감독의 눈치를 살폈다.
오늘 상대할 팀은 뉴욕, 좌완 데니스 맥다겟이 등판할 예정이다.
작년 시즌 알 디즌은 타율 0.271을 기록했는데 좌완 상대 타율이 0.242로 형편없었다. 더 큰 문제는 장타력, 타율이야 그럴 수도 있는데 장타력까지 큰 폭으로 하락해버렸다.
■ 좌완 상대(타/출/장) .273/.331/.437
■ 우완 상대(타/출/장) .363/.463/.634
그나마 올 시즌은 나아진 편, 하지만 좌타석에 들어서면 장타력이 급감해버리는 문제는 여전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하위타선으로 보낼 수준은 아니겠지, 예상대로 브라이스 감독은 알 디즌을 고정 3번으로 출전시켰다.
‘밀어치는 게 정식이긴 한데’
디즌은 연습 타격에서 좌중간으로 타구를 보내는 훈련에 집중했다.
물론 이게 좌타자가 좌투수를 상대하는 정석이긴 한데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다.
예를 들어 공과 방망이가 15도 각도에서 맞았다고 하면, 그 지점에서 공이 똑바로 외야로 날아가는 게 아니다.
반사각이라고 해서 타구가 15도만큼 밖으로 더 밀려나는데, 이것 때문에 밀어 쳤을 때 의외로 파울이 많이 나온다.
거기다 메이저리그 투수들의 공은 워낙 빠르기 때문에 밀어치는 타격이 쉽지 않은 것도 이유, 이런 배경 때문에 알 디즌 뿐만 아니라 많은 좌타자들이 좌완 상대 성적이 좋지 않다.
하지만 이겨내야 하는 일, 디즌은 올 시즌을 앞두고 타격 위치를 조금 조정했다.
‘못 치면 맞고 나가자.’
타자가 모든 공을 다 칠 이유는 없다.
어쨌든 좌투수가 좌타자를 상대할 때 바깥쪽을 던지는 게 정석, 그렇다면 스윙을 바꿀 게 아니라 홈 플레이트에 조금 더 붙는 것도 방법이다.
대신 몸 쪽으로 떨어지는 슬라이더나 변화구에 약점을 보이게 됐지만, 그 코스에 제대로 공을 던질 수 있는 투수는 많지 않다.
투수가 결정구를 던지기 전에 타격을 하면 그만, 알 디즌은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중견수 레벨에 올라섰지만 기본을 중시하는 자세는 잊지 않았다.
‘밀어치기에도 레벨이 있다.’
디즌은 타구를 좌중간으로 보냈지만, 무리하게 밀어치는 스윙을 하지 않았다.
몸과 먼 곳의 공을 때릴수록 스윙이 퍼져 나오는 건 당연, 스윙 각이 넓어지기 때문에 당연히 타구도 그만큼 파울라인 밖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그런 공을 때리는 건 볼 카운트 싸움에서 몰렸을 때나 하는 일, 유리한 볼 카운트에서 그 공을 때렸다는 건 컨택이 아니라 실책이다.
타자에게 가장 중요한 건 내가 어느 공을 어떤 타이밍에 때렸을 때 안타가 나오는지 감을 유지하는 것, 슬럼프에 빠졌을 땐 자세나 스윙의 문제를 따지기 전에 내가 칠 수 있는 공을 제대로 골라내고 있는지부터 생각해야 한다.
알 디즌은 예전부터 선구안이 나쁜 편은 아니었지만, 가끔 어처구니없는 코스에 방망이가 반응하면서 많은 삼진을 적립했다.
내가 작년 시즌 150삼진을 당한 건 정말 스윙의 문제였을까? 아니면 타석에서의 집중력 부족이었을까. 프로 생활 6년에 접어든 만큼, 디즌은 수많은 실전을 겪으면서 학습한 것들을 실전에 적용했다.
“자, 1회 초 보스턴의 선공으로 경기가 시작됩니다. 선두 타자는 주앙 고메즈, 올 시즌 타율 0.281, 홈런 없이 7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은 성적이죠. 특히 최근 4경기에서 15타수 5안타, 감이 좋습니다.”
따아악 ~ !!
“말씀드리는 사이!! 좌측으로 가는 타구가!! 담장을 넘어 갑니다!!!! 주앙 고메즈의 올 시즌 첫 홈런포!! 보스턴이 선취점을 냅니다!!”
“역시 좌완에게는 강점이 있네요. 94마일, 제법 빠른 공이었는데 초구부터 스윙이 나왔습니다.”
빠르게 홈 플레이트를 통과한 고메즈는 동료들과 하이파이브를 나누며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작년 시즌만 해도 일단 달려들었는데, 이제는 내가 뭘 쳐야하는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만의 히팅 존이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건 좋은 신호, 후속 타자 리퍼드도 아웃은 됐지만 자신이 칠 수 있는 영역 밖으로 나가진 않았다.
“자, 이제 타석에는 알 디즌이 들어섭니다. 올 시즌 타율 0.311, 홈런 6개, 15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4월에 페이스가 좋았는데, 5월 들어 안타가 없거든요. 조금 더 집중을 해야 합니다.”
뉴욕 배터리는 예상대로 바깥쪽을 찌르는 투구를 택했다.
스트라이크 콜이 울렸지만 내가 칠 공이 아니라고 판단한 디즌은 그러려니 하는 얼굴로 다음 공에 집중했다.
‘이제는 나오겠지.’
배터리는 다시 바깥쪽을 택했지만 타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초구와 제법 비슷하게 들어왔는데 반응이 없다니, 그렇다고 뉴욕의 선발 맥다겟은 세밀한 컨트롤이 가능한 선수도 아니다.
구위를 믿고 가운데로 넣는 스타일이지만, 디즌처럼 힘 있는 타자를 만났을 땐 탄착군을 바깥쪽에 두고 볼넷도 감수하는 투구를 하는 선수, 당연히 삼진도 많지만 볼넷도 많은 편이다.
고메즈에게 일격을 당했는데 여기서 무리하게 승부를 할 이유는 없겠지, 바깥쪽을 노리는 투구를 이어갔다.
‘그래, 이렇게 하면 되는 거야.’
차분하게 볼을 골라낸 디즌은 1루로 걸어 나갔다.
내가 못 치는 공은 안 치면 그만, 그런데 그 선별과정이 너무 오래 걸렸다. 무려 6년을 투자한 고난의 나날, 이제부터는 내가 꿈꾸던 야구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밝은 미소를 지었다.
‘분위기는 나쁘지 않아.’
벤치에 앉은 다카기는 박수를 치며 동료들의 활약을 독려했다.
올해는 어떻게 하나 걱정되는 마음이 없었다면 거짓말, 그만큼 올 시즌은 불투명했다. 그런데 어린 선수들은 생각보다 빠르게 성장하고 있고, 주축 선수들 역시 작년보다 더 나은 활약을 보여주고 있다.
보스턴은 현재 16승 11패로 아메리칸 리그 동부 지구 2위에 안착, 1위 뉴욕과의 격차는 3게임이다.
시즌 후반까지 지금 기세를 유지한다면 좋은 승부가 되겠지, 관중이 된 기분으로 차분히 경기를 지켜봤다.
보스턴의 1회 초 공격은 1득점으로 종료, 뉴욕의 1회 말 공격이 시작됐다.
“자, 타석에는 잭 모리슨이 들어섭니다. 올 시즌 타율 0.222, 홈런 3개, 5타점, 초반 기세가 별로 좋지 못합니다.”
“그래도 6년 연속 3할에 190안타 이상을 친 선수 아닙니까. 언제 어떻게 터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모리슨은 타격 메커니즘 특성상, 낮은 공, 특히 몸 쪽에 약점을 보일 수밖에 없다.
안타는 그럭저럭 때려내지만 장타는 거의 안 나오는 코스, 그래서 다카기는 모리슨을 상대할 땐 자동 출루를 각오하고 몸 쪽 빠른 볼을 밀어붙였다.
이것 때문에 서로 얼굴 붉힌 일도 많았지만 모리슨을 잡아내려면 무조건 던져야 하는 공, 레이븐 - 호프만 배터리도 잘 알고 있었다.
‘일단 던져’
호프만은 예상대로 몸 쪽을 택했다.
레이븐은 아직 제구가 덜 잡혔지만 이제 막 커리어를 시작한 강속구 투수에겐 당연한 일, 못 던지는 코스라고 외면하기보다는 계속 던져보면서 감을 잡는 게 나았다.
‘잘 안 되는데’
초구를 던진 레이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몸 쪽을 요구했는데 가운데로 몰린 공, 하지만 호프만은 괜찮다는 사인을 보냈다.
평속 98마일을 던지는 투수가 스트라이크를 던진 것도 잘한 일, 구위에 눌린 모리슨은 안타를 치지 못했다.
‘더 강한 공으로 눌러버리면 된다.’
브라이스 감독도 레이븐에게 공격적인 투구를 요구했다.
모리슨은 한때 3년 연속 20홈런을 쳤을 정도로 정교함과 장타력을 겸비한 선수였다. 하지만 약점이 발각되면서 장타력은 급감, 작년에도 타율 0.303을 쳤지만 홈런은 11개로 절반 가까이 줄었다.
특히 몸 쪽 빠른 볼을 던졌을 때 급감하는 장타력,
모리슨이 파이어볼러가 즐비한 보스턴을 상대로 약한 모습을 보인 게 우연이었을까.
빠른 볼만 잘 던져도 잡아낼 수 있는 선수, 레이븐이라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고 봤다.
‘너는 스트라이크만 잘 던져도 돼.’
레이븐은 다카기의 조언을 떠올리며 투구를 이어갔다.
평균 98마일을 던지는 투수라면 스트라이크를 던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타자들에겐 위협이 된다.
어차피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하는 공은 전체의 절반도 안 되고, 타자는 그걸 가려내야 하는 입장, 1초도 안 되는 시간에 분류작업을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저 정도 구위를 갖췄다면 일단 던지고 보는 거 아닌가.
빠른 공을 가지고도 좋은 투구를 못하는 투수는 스트라이크를 못 던지기 때문, 여기에 쓸만한 변화구 한두 개만 갖췄다면 실패할 리가 없다.
레이븐은 일단 스트라이크를 던지는 훈련부터 해야 하는 입장, 투수코치도 결과에 상관없이 공격적인 투구를 주문했다.
“이런 젠장!!”
갑자기 얼굴 근처로 날아오는 공, 그러잖아도 몸 쪽 공에 노이로제가 걸린 모리슨은 격한 불만을 드러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뉴욕 팬들의 야유는 덤, 깜짝 놀란 건 레이븐도 마찬가지였다.
“네가 맞는 것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야?!! 또 던져!! 타자는 의외로 잘 안 죽는다고!!”
이때 보스턴 벤치에서 폭언이 튀어나왔다.
범인은 다카기, 모리슨은 순간 울컥했지만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것도 날 흔들기 위한 작전이겠지, 한가운데로 들어오는 공을 받아쳐 좌익수와 유격수 사이에 떨어지는 안타를 만들어 냈다.
“우연이야!! 우연!! 제대로 친 것도 아니잖아!!”
또 시작된 그 녀석의 폭언, 상대 팀 입장에서 다카기는 때려죽이고 싶은 존재지만 팀 동료들에게 받는 신뢰는 그만큼 대단했다.
안타를 맞았지만 레이븐은 자신의 구위를 믿고 투구를 이어갔고, 다음 타자를 상대로 좌익수 플라이를 이끌어 냈다.
“자, 이제 숀 스팸이 타석에 들어섭니다. 올 시즌 타율 0.344, 홈런 7개, 18타점, 아메리칸 리그 타율, 홈런, 타점 모두 1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작년 시즌 활약이 우연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있죠. 보스턴 입장에선 경계를 해야 합니다.”
보스턴 벤치는 레이븐에게 승부를 지시했다.
여기서 스팸을 잡아내야 자신감을 얻고 한 단계 더 성장하겠지, 이 상황을 위기가 아니라 기회로 바꾸기로 했다.
‘못 치네?’
초구는 101마일 빠른 볼, 숀 스팸은 크게 헛스윙을 돌렸다.
내 공은 아직 갈 길이 멀다고 생각했는데, 메이저리그 최고의 타자가 헛스윙을 돌릴 정도면 쓸만하다는 거 아닌가.
용기를 얻고 다시 빠른 볼을 욱여넣었다.
따악 ~ !!
“파울, 밀려납니다. 이번에도 101마일이군요.”
“레이븐 선수가 작년에 14승을 거뒀지만 제구가 약간 아쉽다는 평가를 받지 않았습니까. 올 시즌도 약간 그런 기미가 보였는데, 오늘은 제구가 괜찮군요.”
레이븐은 다시 빠른 볼을 던졌지만 숀 스팸은 커트해 냈다.
역시 빠른 볼만으로는 공략하기 어려운 선수, 빠른 볼은 충분히 보여줬다고 판단한 호프만 포수는 바깥쪽으로 빠져 앉았다.
결정구는 슬라이더, 블로킹이라면 일가견이 있는 호프만이 포수를 보고 있는데 뭐가 걱정일까.
레이븐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