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263화 (263/361)

263화. Respect - (5)

‘게임을 시작해 보실까.’

마운드에 오른 다카기는 포수 사인도 없이 초구를 던졌다.

초구는 십중팔구 바깥쪽 빠른 볼, 메이저리그 입성 이후 이 패턴은 달라진 게 없다.

그걸 알고도 공략을 못하는 이유가 뭘까.

작년 시즌, 메이저리그 전체 땅볼 타구 비율은 49% 정도, 땅볼 유도에 능숙한 워너 로드리게스(워싱턴)는 무려 57%의 땅볼 비율을 기록했다.

로드리게스가 던지는 구종은 빠른 볼, 커터, 체인지업, 커브, 특히 커터의 움직임이 예리한데 이 구질로 무려 70%의 땅볼을 유도해 냈다.

작년 시즌 탈삼진율이 9이닝 당 6개에 불과했는데도 좋은 성적을 낸 비결은 압도적으로 높은 땅볼 비율 덕분, 반면 다카기는 로드리게스와 조금 다른 패턴을 보여줬다.

던지는 구종은 크게 빠른 볼, 슬라이더, 체인지업 이 세 가지뿐, 빠른 볼 비율이 59%로 가장 높았다.

9이닝 당 탈삼진율이 12나 되는 선수라 얼핏 보면 삼진 잡는 투수처럼 보이지만 조금만 파보면 다른 매력이 숨겨져 있다.

‘저 자식 초구는 무조건 거기였지.’

바깥쪽으로 제구 된 빠른 볼은 누가 와도 치기 어렵다. 치더라도 땅볼이 되기 쉽고, 그렇다고 지켜보기도 어려운 게 다카기는 초구 스트라이크 비율이 60%를 상회하는 투수다.

그만큼 상대 타자들이 거부하기 힘든 공을 던진다는 뜻, 오늘 캔자스시티 타자들은 이 유혹을 참아낼 수 있을 것인가.

캔자스시티의 선두 타자 딘 쿠퍼는 일단 참아냈다.

‘걸렀어? 그럼 승부’

초구가 빗나가면 다카기는 탄착군을 스트라이크 존 가운데로 옮긴다.

맞더라도 일단 밀어 넣겠다는 뜻, 평균 97마일을 상회하는 구위라 타자들도 쉽게 공략하진 못했다.

따악 ~ !

“타격!! 유격수가 잡아 1루로 송구합니다!! 원 아웃!! 2구만에 선두타자를 잡아냅니다.”

“다카기 선수의 작년 평균 투구 수가 95개 약간 안 되거든요. 그런데도 평균 7이닝 이상을 던질 수 있었던 건 바로 이 구위죠. 제구도 제구지만 역시 구위가 따라주는 선수는 투구 수를 아낄 수 있습니다.”

다카기는 다음 타자를 상대로도 바깥쪽 빠른 볼을 초구로 택했다.

이번에는 스트라이크, 호프만 포수는 똑같은 공을 요구해 파울을 유도했다.

‘기계도 이 정도로 정확히는 못 던질걸?’

호흡을 맞춘 지 벌써 3년, 매번 마주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호프만은 다카기의 투구에 경의를 표했다.

이렇게 빠른 볼을 던지는 선수가 제구력까지 겸비하면 정말 방법이 없다. 구종은 단순해도 공략이 안 된다는 게 그 증거, 내야 수비만 조금 받쳐주면 올 시즌은 뭔가 일을 낼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떨어집니다!! 93마일!! 데이비드 스콧을 상대로 시즌 첫 탈삼진을 기록합니다!!”

“타자 입장에선 정말 막막하죠. 초구를 때리자니 땅볼이 나올 위험이 있고, 지켜보면 지금처럼 카운트가 몰리면서 슬라이더에 헛스윙, 6년째 같은 패턴에 계속 당하고 있는데 … 올해도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다카기는 다음 타자 알렉스 머피까지 삼진으로 돌려세우고 마운드를 내려왔다.

공 10개로 마무리한 1회, 삼진을 2개나 잡아냈지만 군살을 뺀 투구를 선보였다.

‘게임도 이렇게까지 잔인하진 않을 거야.’

캔자스시티 타선은 3회까지 단 한 명도 주자를 밟지 못했다.

아무리 어려운 게임이라도 약간의 버그나 패턴만 읽어내면 공략할 수 있다. 그런데 저 자식은 투구 패턴이 공개됐는데도 공략이 안 되는 수준, 세상에 이런 불공평한 게임이 어디에 있나.

공략이 안 되는 게임은 쓰레기통에 쑤셔버리면 그만이지만 이건 도망칠 수도 없는 게임, 절대 공략할 수 없는 최종보스 앞에 유저들은 절망했다.

딱 ~ !

“이번에는 2루 땅볼! 올슨이 잡아서 1루로 송구합니다!! 투 아웃, 11명의 타자를 연속해서 범타로 돌려세웁니다.”

“보스턴이 확실히 내야진이 작년에 비해 단단해졌네요. 이렇게 되면 다카기 선수는 조금 더 편하게 투구를 할 수 있겠죠.”

해설위원의 말대로 다카기는 계속 초구 스트라이크를 밀어 넣었다.

방망이에 걸려도 다 잡아주는 내야진, 아직 초반이지만 작년 1년 동안 시행착오를 거친 애송이 3인방(리퍼드, 고메즈, 올슨)은 시즌 초부터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

따악 ~ !!

수비가 되면서 공격도 술술 풀리기 시작했다.

첫 타석에서 홈런을 때린 리퍼드는 5회 초 세 번째 타석에서 초구를 받아쳐 중견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를 만들어 냈고, 후속 타자 알 디즌은 호쾌한 스윙으로 우측 담장을 넘어가는 투런 홈런을 날렸다.

순식간에 스코어는 4대 0, 다카기는 통산 4점 이상을 지원받은 경기에서 져 본 적이 없다.

승리 공식의 완성, 하지만 보스턴 선수단은 긴장을 풀지 않았다.

넋 나간 플레이는 캡틴이 제일 싫어하는 일, 작년에 태업을 했던 도허티가 어떻게 쫓겨났는지 다들 봤지 않았나.

뭣보다 보스턴은 어린 선수들이 주축이라 미래가 불투명하다.

보장받은 게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긴장을 풀고 경기를 하나, 뭣보다 5회까지 퍼펙트를 이어가고 있는 캡틴, 실수하면 죽는다는 각오로 경기에 임했다.

‘아뿔싸!!’

순조롭게 흘러가던 경기는 6회에 흔들렸다.

고메즈는 땅볼 타구를 한 번에 포구하지 못했고, 누가 봐도 1루 진출은 막기 어려운 상황, 하지만 고메즈는 무리한 송구를 했고 공이 뒤로 빠지면서 주자가 3루까지 진출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기록원은 안타 하나와 유격수 실책을 부여, 다카기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그걸 왜 던지냐.’

솔직히 퍼펙트가 날아간 것보다 고메즈의 판단이 아쉬웠다.

좀 잘한다고 생각이 들 찰나에 벌어진 실책, 일단 내야진을 다독이고 다음 타자에 집중했다.

타석에는 좌타자 제임스 페인트, 주자가 3루에 있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선 당겨치는 게 팀 배팅이다.

다카기는 얼른 먹고 떨어지라고 스트라이크를 던졌고, 희생타가 되면서 3루 주자가 홈을 밟았다. 그래봤자 4대 1, 후속 타자들을 잘 막아내고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너도 느끼는 게 있겠지.’

고메즈에게 할 말은 많았지만 다카기는 입을 다물었다.

이런 상황에선 던지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았으면 그만, 언제까지 말로 가르칠 수도 없고, 실전을 반복하다 보면 본인도 느끼는 게 있을 거 아닌가.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도 가르침, 실점했다고 에이스가 떽 떽 거리는 것도 보기 안 좋았다.

“오늘은 내가 마무리할 테니까 불펜 쉬게 하세요.”

대신 감독에게 통보를 날렸다.

6회를 마쳤는데 투구 수는 겨우 64개, 올 시즌은 경기 당 투구 수를 100개까지 보장해 달라고 감독에게 미리 약속을 받아냈다.

분업화가 이뤄지면서 선발 투수의 완투는 계속 줄어들고 있지만 그래도 완투는 여전히 가치가 있는 기록이다.

300탈삼진도 좋지만 올 시즌은 많은 이닝을 소화하는 게 목표, 적어도 240이닝은 채우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우리 그냥 퇴근할까?”

“그건 좀 그렇고, 누가 가서 커피 좀 사와라.”

8회까지 이어지는 캡틴의 투구, 불펜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하버스태드는 동료들과 농담을 주고받았다.

하루 종일 여기서 죽치고 앉아있는데 우린 오늘 왜 출근한 건가. 스코어는 7대 1, 캡틴의 투구 수는 83개, 누가 봐도 완투 페이스라 농담 따먹기, 간식 먹기 외엔 할 게 없었다.

“95개 넘길까?”

“난 안 넘기는데 한 표”

“얼마 걸 거야?”

이젠 캡틴의 투구 수를 두고 내기를 벌이는 상황, 그 사이 9회에도 마운드에 오른 다카기는 공 하나로 첫 타자를 땅볼 처리했다.

투구 수는 이제 84개, 95개를 안 넘긴다는 쪽으로 여론이 기울면서 내기는 시시하게 끝나버렸다.

딱 ~

“파울입니다. 카운트는 노 볼 원 스트라이크”

“다카기 선수가 오늘은 상당히 공격적으로 투구를 하네요. 지금까지 26명의 타자를 상대했는데 초구 스트라이크가 무려 17번, 안타는 하나 밖에 맞질 않았습니다.”

“세부적으로 보면 더 놀랍습니다. 오늘 빠른 볼이 62개, 무려 73%거든요. 빠른 볼만 던지고 있는데도 공략을 못하고 있습니다.”

해설위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카기는 101마일 강속구를 던져 헛스윙을 유도했다.

이제 마지막이니 체력을 아껴둘 이유가 없겠지, 클로저로 돌변한 다카기는 100마일을 오가는 구위와 슬라이더를 앞세워 탈삼진을 뽑아냈다.

다음 타자는 좌익수 플라이로 마무리, 이렇게 다카기는 공 87개로 경기를 종료시켰다.

90개 이하 완투승은 2009년 이후 무려 18년 만의 기록, 어떻게 보면 퍼펙트만큼 위대한 기록 아닐까. 경기 후, 다카기는 기자들의 관심에 휩싸였다.

“다카기 선수, 개막전 승리 축하드립니다.”

“네, 감사합니다.”

“오늘은 꽤 경제적인 투구를 하셨는데, 처음부터 그렇게 던지겠다는 생각이 있었습니까?”

“저는 그동안 삼진 위주의 투구를 했습니다. 그게 효과적인 투구라는 건 통계로 증명됐고 저도 그게 옳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피곤한 일이죠. 최고의 피칭은 사실 공 27개로 경기를 마무리하는 겁니다. 그럼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완투를 할 수 있으니까요.”

한 경기를 공 27개만 던지고 끝낼 수 있다니, 투수 입장에선 얼마나 꿈같은 일인가.

다카기는 솔직히 지금도 힘이 많이 남아 있고 내일 던지라면 또 던질 수 있을 것 같다며 기자들을 놀라게 했다.

“그래도 그건 좀 무리 아닐까요?”

“아니요. 짐(브라이스 감독)이 허락한다면 내일도 던질 수 있습니다.”

옆에 있던 브라이스 감독은 그건 절대 안 된다며 손사래를 쳤다.

경기 당 투구 수를 100개까지 늘려준 것도 어렵게 결정한 일인데 이틀 연속 투구라니,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말라며 정색했다.

‘더 던질 수 있을 것 같은데 … ’

하지만 다카기는 농담 따윈 하지 않았다.

그런 걸 별로 좋아하는 성격도 아니거니와, 맞춰 잡는 투구를 하다 보니 이것도 나름 색다른 매력을 느꼈다.

‘올 시즌 완투 10개 채워 봐?’

단일 시즌 10완투를 달성한 마지막 선수는 1999년에 은퇴한 조엘 가디스, 가디스는 1995년, 262과 1/3이닝을 던지며 11완투 시즌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2년 연속 260이닝을 넘기면서 어깨에 탈이 나버렸고, 결국 이 팀 저 팀을 전전하다 은퇴했다.

브라이스 감독이 내 투구 수를 제한하는 것도 그런 이유겠지, 하지만 당시 가디스는 경기 당 평균 투구 수가 114개나 됐다.

20년 전이면 제법 먼 시대의 일이지만, 야구의 역사를 기준으로 보면 별로 오래전 일도 아니다.

투구 수 관리라는 개념도 따지고 보면 그렇게 오래된 일도 아니고, 이런 기세라면 완투 10번, 못할 것도 없지 않은가.

월드시리즈 우승을 최우선으로 삼는 수더랜드 단장이 이 목표를 듣는다면 놀라서 팔짝 뛰겠지, 일단 가슴에 묻어두고 천천히 실행하기로 했다.

‘난 왜 안 되는 거야?’

다음 날, 보스턴의 선발로 나선 댈러스 레이븐은 자신의 투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레이븐도 구위라면 다카기에게 뒤지지 않는 편, 하지만 바깥쪽 제구가 안 되다 보니 땅볼 비율은 그렇게 높지 않다.

까짓거 삼진 잡으면 된다고 생각하면 그만인데, 90개도 안 되는 공으로 경기를 지배한 다카기의 투구도 매력적인 게 사실, 흉내를 내보려고 했지만 계속 빠지면서 카운트를 유리하게 끌고 가지 못했다.

“도대체 왜 그래? 뭐가 문제야?”

“아니, 나도 땅볼 좀 유도해 보려고”

보다 못한 호프만 포수가 마운드를 방문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 남을 흉내 내고 있으니, 호프만은 넌 다카기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가운데로 던져. 알았어?”

“알았어.”

결국 레이븐은 평소처럼 스트라이크 존에 욱여넣는 스타일로 돌아왔다.

5와 2/3이닝 동안 볼넷 3개, 삼진 7개, 2실점을 기록하며 시즌 첫 승을 수확, 결과는 나쁘지 않았지만 많은 볼넷은 숙제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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