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화. Respect - (4)
“너희들 커피 한 잔 마실래?”
이곳은 시범경기가 열리는 스프링캠프, 다카기는 과도한 친절로 클럽하우스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전에는 저렇게 친절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우리가 뭘 잘못하기라도 한 걸까? 작년에 다카기는 태업을 한 스티브 도허티를 보란 듯이 클럽하우스에서 쫓아냈다. 다른 선수도 아니고 메이저리그 최고의 타자 중 한 명이 방 빼를 당했으니, 어린 선수들이 이걸 보고 뭘 배웠을까.
다카기 앞에서 까불면 재미없다는 건 모든 선수들이 아는 사실, 과도한 친절이 오히려 공포로 돌아왔다.
“아니, 나는 됐어.”
“이 자식이 왜 그래. 내가 주는 건 못 마시겠다는 거냐?”
“아 … 아니, 그런 건 아닌데 … ”
안 마신다고 하면 왠지 한 대 맞을 분위기, 결국 클럽하우스의 모든 선수들이 캡틴의 친절을 강요받았다.
‘사람을 부리려면 그만한 친절을 베풀어야 한다. 돈도 그렇다, 잘 쓰면 사람의 마음까지 살 수 있지.’
다카기는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조언대로 행동했을 뿐이다.
사람을 공짜로 부려먹으려고 하면 반드시 반발을 사기 마련, 옛 후배였던 사노 코이치에게 친절을 베푼 것도 다 계산된 행동이다.
화재로 불타버린 아버지의 가게를 재건해드렸으니 녀석도 양심이라는 게 있으면 그룹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지, 클럽하우스 정치도 다르지 않다.
다카기는 작년 시즌에도 좋은 성적을 거뒀지만 빠른 볼 피안타율이 너무 높아졌다는 지적을 받았다.
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일, 구위가 좋은 투수들은 보통 플라이 볼 비율이 높은 편이지만 바깥쪽 빠른 볼 제구가 되는 다카기는 땅볼 비율이 높은 편이다.
작년 보스턴의 내야를 책임진 건 애송이들, 이런 녀석들이 받쳐주는 내야에서 어떻게 피안타율을 낮출 수 있겠나. 올 시즌 잘 부려먹으려면 잘 해줘야겠지, 부드러운 리더십은 익숙하지 않아서 아직 뭔가 어색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노력은 했다.
‘숨이 막힌다.’
‘차라리 그냥 혼을 내줘.’
물론 동료들은 숨이 막혀 죽을 지경, 아니, 솔직히 조금 서운했다.
캡틴이 가끔 틱틱 거려도 그게 다 우리를 위해서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사람이 갑자기 바뀌니까 조금 어색한 게 사실, 그래도 괜히 이상한 말 했다고 무슨 불똥이 튈지 몰라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래, 칭찬으로 키우자, 까짓거 어려울 것도 없잖아.’
이런 사정을 알 리 없는 다카기는 혼자서 뿌듯해했다.
고교 시절 후배들을 엄하게 부렸던 내가 이렇게 변하다니, 녀석들이 알면 경악을 하겠지, 마침 고교 시절 다카기에게 호되게 당했던 타키야마가 안부전화를 걸어왔다.
[잘 지내세요?]
“나야 늘 잘 지내지.”
[왜 이렇게 목소리가 부드러워지셨어요? 부담스럽게]
“네가 들어도 그러냐?”
타키야마는 몸을 휘감는 닭살에 몸서리를 쳤다.
실수라도 하면 천둥처럼 내리쳤던 캡틴의 목소리, 그런데 요즘은 사람이 달라졌다고 해야 하나.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성격이 달라진다는데, 하지만 괜한 말 했다가 벼락이 떨어질까 봐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았다.
“너도 이젠 애 아빤데 어떻게 함부로 대하냐.”
[그거 진심이세요?]
“그래, 너도 이제 내가 뭐라고 할 입장은 아니지]
얼마 전 타키야마는 첫 아이를 봤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귀여운 딸, 여기에 메이저리그 진출 대신 소속팀과 4년 20억 엔의 장기계약까지 맺으며 겹경사가 일어났다.
유격수가 연 평균 5억 엔을 받을 정도면 말 다한 거 아닌가. 타키야마는 작년에 타율 0.316, 홈런 31개, 89타점을 기록하며 NPB 베스트 9에 뽑혔다. 공격력뿐만 아니라 수비까지 완성형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으며 프로무대에 연착륙, 메이저리그와 직접적인 비교는 어려워도 NPB 역시 무수한 경쟁을 치러야 하는 야생이다.
그런 곳에서 최고의 선수에 오른 후배를 언제까지 함부로 대할 순 없겠지, 전화할 때마다 한 소리 들었던 타키야마는 조금 얼떨떨한 반응을 보였다.
* * *
[복귀하고 싶다.]
개막전을 앞두고 메이저리그엔 작은 소동이 일어났다.
데이브 셰퍼드가 복귀를 선언한 것, 통산 586홈런으로 600홈런을 앞둔 선수가 갑자기 은퇴해 버렸으니 작년 시즌 여론은 큰 충격에 빠졌다.
하지만 본인도 이렇게 커리어를 마무리하긴 아쉬웠겠지, 그러나 다카기는 SNS를 통해 보스턴엔 자리가 없다고 선을 그었다.
셰퍼드는 수비가 안 되기 때문에 지명타자로 뛰어야 할 선수, 당연히 아메리칸 리그 팀 아니면 갈 곳이 없다. 뭣보다 셰퍼드는 시즌 중 제 멋대로 은퇴를 선언해 보스턴에 큰 피해를 끼친 선수, 다카기는 다시는 네 얼굴 안 봤으면 좋겠다고 이미 결별을 선언했다.
올 시즌부터 부드러워진 리더십을 내세우고 있지만, 그건 우리 팀원들에 한정된 서비스, 제멋대로 문을 박차고 나간 녀석에게 베풀 친절 따윈 없었다.
“관심 없음”
수더랜드 단장도 다카기와 마찬가지로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일각에선 생각 없는 팬들의 욕설이 셰퍼드를 자극했다며 옹호에 나섰지만 팬들이 욕설을 하는 건 예전에도 앞으로도 있을 일이다.
그걸 못 참아서 관중석에 뛰어들어 주먹을 휘둘렀다? 여기까진 좋은데 멋대로 은퇴를 선언한 건 감싸줄 수 없는 일, 600홈런 달성을 앞둔 선수라고 이제 와서 두 팔 벌려 환영할 일은 없었다.
“우리는 이대로 간다.”
수더랜드 단장은 기자들 앞에서 추가 영입은 없다고 선을 그었다.
몇몇 팬들은 지금이라도 셰퍼드를 받아주는 게 어떻겠냐고 청을 넣었지만 수더랜드 단장은 팀 기강을 앞세웠다.
“클럽하우스의 리더는 다카기입니다, 캡틴이 거부한 선수를 억지로 밀어 넣는 건 제 권한 밖의 일이죠.”
행정부의 수장인 대통령이 나라를 이끌어 가지만 사법부를 건드릴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 보스턴은 지난 8년 동안 클럽하우스에 캡틴이 없었다.
그 자리를 넘겨줬다는 건 다카기를 향한 단장의 신뢰가 그만큼 크다는 뜻, 그 캡틴이 거부한 선수를 내가 클럽하우스에 밀어 넣는 게 말이 되나, 사법 농단이나 다를 게 없는 조치, 수더랜드 단장은 그곳은 내가 건드릴 수 없는 영역이라며 다카기의 입지를 세워줬다.
‘누가 널 쓰겠어?’
다른 팀들도 수더랜드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나이도 이제 40이 넘었거니와 예전부터 성격이 워낙 까다로워 함부로 다룰 수 없는 선수, 뭣보다 무책임하게 시즌 중 은퇴를 선언했다는 게 마이너스로 작용했다.
[복귀하고 싶다. 기회를 달라]
다급해진 셰퍼드는 보스턴 구단에 다시 애원했다.
이대로 계약을 맺지 못하면 600홈런 달성은 영원히 불가능, 내가 정말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다며 애원했지만 수더랜드 단장은 단호하게 밀어냈다.
“더 추해지기 전에 은퇴해라. 이게 너의 현실이다.”
다카기는 SNS를 통해 다시 한 번 확인 사살을 날렸다.
찾는 팀이 없다는 건 선수생명이 끝났다는 것, 그걸 아는 놈이 왜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구는 건가. 보스턴은 30대 중반에 접어든 선수에게 장기계약을 제시하며 충분히 기회를 줬다.
그걸 걷어차고 나간 건 셰퍼드, 이제 와서 용서를 구할 바엔 조용히 사라지는 게 나았다.
‘역시 이런 건 가차 없구나.’
보스턴 선수단은 캡틴의 서슬 퍼런 칼날이 아직 살아있다는 걸 재확인했다. 지금은 칼집에 잘 넣어뒀을 뿐, 문제가 생겼을 때 저 칼날이 우리 목을 노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나.
어쨌든 단장과 캡틴이 추가 영입은 없다는 뜻을 확실히 하면서 보스턴은 어린 선수들을 중심으로 개막전을 맞이했다.
다카기는 6년 연속 개막전 선발로 등판하는 영광을 누렸고, 불펜에서 몸을 풀며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
‘괜찮아, 연습 많이 했잖아.’
경기를 앞두고 주앙 고메즈는 심호흡으로 마음을 다스렸다.
작년 시즌, 고메즈는 유격수 자리에서 UZR 마이너스 0.4를 기록했다. 수비 부문에서 80점 만점을 받았던 스카우트 리포팅에 비하면 아쉬운 결과, 그래도 수확이 없는 건 아니었다.
5월 중순까지만 해도 UZR 마이너스 11을 찍었는데 이걸 0.4까지 끌어내린 건 대단한 거 아닌가.
역시 유격수에게 중요한 건 넓은 수비범위와 강한 어깨, 고메즈는 이 두 가지를 모두 갖춘 선수다. 만 19세 시즌에 143경기를 유격수로 소화하며 이 정도를 해냈다는 건 천재성을 입증하는 것뿐, 오프 시즌에도 좀 더 나은 선수가 되기 위해 구슬땀을 흘렸다.
메이저리그 타자들의 강한 타구에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으니 결과는 따라오겠지, 긴장은 해도 걱정은 하지 않았다.
“자, 1회 초 보스턴의 공격으로 2027시즌의 막이 오릅니다. 선두 타자는 주앙 고메즈, 작년 시즌 성적은 타율 0.259, 홈런 8개, 56타점을 기록했습니다.”
“신인치고는 나쁘지 않았죠. 그리고 오프 시즌 동안 타격 폼을 보완했다고 하는데, 이번 스프링캠프에서 인상적인 타격을 보여줬습니다.”
고메즈는 작년보다 허리를 더 곧게 펴는 쪽으로 타격 폼을 변경했다.
예전에 캡틴에게도 지적을 받았지만 고메즈는 타격 할 때 몸이 홈 플레이트 쪽으로 쏠리는 편이다.
사실 타격 후 몸이 홈 플레이트 쪽으로 쏠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특히 처음부터 허리를 많이 굽히는 선수라면 타격 후 몸을 펴는 과정에서 상체가 눕혀지고 뒷발이 들리는 현상이 일어나는데, 고메즈가 딱 이 유형이다.
파워 히팅에 집중하는 타격 폼, 이게 고메즈에게 어울리는 옷일까.
모든 선수들이 파워 히팅을 할 이유는 없다. 자신에게 맞는 타격 폼을 찾는 게 우선, 고메즈는 타격 후 상체를 투수 쪽으로 완전히 열어젖혔다.
하체보다 상체를 이용한 타격, 힘이 실리기 어려운 방법이지만 스트라이드를 넓게 쓰면서 부족한 힘을 보완해 줬다.
첫 타석에서 아웃은 됐지만 작년보다 확실히 부드러워진 스윙, 브라이스 감독은 박수를 치며 다음 타석의 성과를 기대했다.
‘이젠 나도 풀타임 메이저리거다.’
이제 베논 리퍼드의 타석,
작년 시즌 스타팅 멤버와 후보를 드나들었던 리퍼드는 올 시즌 주전 3루 자리를 보장받았다.
FA 영입실패가 어린 선수들의 자리를 보장해 준 것, 작년 시즌 리퍼드는 타율 0.290, 홈런 11개를 기록하며 가능성을 보여줬다.
하지만 이 기회를 살리지 못하면 신기루로 사라질 영광, 적어도 풀타임 3 ~ 4년은 치러야 메이저리거로 자리를 잡았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이제 막 발을 뗀 애송이일 뿐, 콧대를 세울 여유는 없었다.
“초구는 지켜봅니다. 카운트는 원 볼 노 스트라이크”
“리퍼드 선수가 작년에 62삼진을 당하면서 볼넷은 21개 밖에 없었거든요. 적극적인 타격이 나쁜 건 아닌데, 그래도 좀 더 신중해야 합니다.”
리퍼드는 2구도 골라냈다.
좋은 타자가 되려면 스트라이크 존에 대한 감각을 키우는 게 우선, 자신만의 히팅 존이 정해지면 그다음은 편해진다.
리퍼드는 작년 시즌 바깥쪽, 특히 낮은 공에 강점이 있었던 편, 배터리는 바깥쪽으로 유인하고 몸 쪽으로 승부를 거는 패턴을 들고 나왔다.
하지만 리퍼드는 유인구 2개를 잘 골라냈고, 한가운데 약간 낮게 들어오는 공을 걷어 올렸다.
따아악 ~ !!
“멀리 가는 타구!! 중견수가 뒷걸음질 치지만 그저 지켜볼 뿐입니다!!!! 베논 리퍼드의 솔로 홈런!! 보스턴의 올 시즌 첫 득점이자 첫 홈런을 장식합니다!!!!”
“역시 낮은 공에 강점이 있는 선수네요. 이렇게 칠 줄 아는데 왜 작년에는 그렇게 많은 삼진을 당했는지 … 지금이라도 잘 하면 됩니다.”
리퍼드는 천천히 베이스를 돌아 홈에 입성했다.
두 달 전 돌아가신 할머니를 향해 바치는 세리머니는 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할머니를 어머니처럼 여기고 살았는데, 삶의 큰 조각이 떨어져 나간 아픔은 생각보다 컸다.
앞으로도 많은 홈런을 저 하늘에 바쳐야겠지, 시즌 첫 타석부터 홈런을 날렸지만 그 얼굴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