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화. Respect - (2)
“공격을 최우선으로 삼겠다.”
다카기가 한국에서 휴가를 즐기는 동안, 수더랜드 단장은 명예 회복을 위해 칼을 빼들었다.
일단 타선부터 대대적으로 손질,
보스턴은 월드시리즈 5연패를 달성하는 동안 타선의 막강함으로 경기를 풀어냈다. 그런데 작년엔 그게 안 되면서 힘든 경기가 많았던 편, 막판에 지구 우승 달성에 실패한 것도 터져주지 않는 타선이 문제였다.
‘그래서?’
다카기는 단장의 선언에 의문을 품었다.
공격을 우선으로 삼겠다니, 이 불똥이 스탠리 호프만에게 튀는 건 아닌가. 호프만은 뛰어난 수비 덕분에 장기계약을 맺은 선수, 하지만 공격에서 다소 아쉬운 면을 보여줬다.
수비는 분명 뛰어나지만 타선에선 기대할 게 별로 없는 편, 그래도 젊은 투수들이 많은 보스턴에겐 필요한 선수다.
공격력을 보강하는 건 찬성이지만 호프만을 건드리는 건 좀 위험한 수술, 견제를 할까 했지만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우리끼리 있으니까 좋다. 그렇지?”
계속되는 동생과의 오붓한 휴가, 가이드를 자처한 채근성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남매는 둘만의 시간이 더 편했다.
그래도 대놓고 대답하긴 어려웠는지 오묘한 미소로 고개만 끄덕이는 코하루, 다카기는 그런 동생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언제 크나 했는데 이젠 엄마만큼 커져버린 녀석, 동생과 자식들이 성장하는 만큼 나는 늙어가는 건가. 아직 27살밖에 안 됐지만 괜히 섭섭하기도 했다.
“오빠야”
“왜?”
“나 고민 상담 좀 해도 돼?”
이때 훅 치고 들어오는 코하루, 다카기는 오빠는 언제나 네 편이라며 동생의 진심을 유도했다.
“나 얼마 전에 학교에서 고백받았어.”
“ …… 그런데?”
“솔직히 내 취향은 아니거든, 그런데 걔가 너무 필사적이야.”
다카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꾹 눌렀다. 취향은 아니라니, 그럼 답은 나온 거 아닌가, 너무 착해서 만나주려고 하는 것 같은데 다카기는 그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취향이 아니라며, 그럼 거절해야지”
“그런데 그게 너무 어려워. 내가 나쁜 사람 되는 것 같기도 하고 … ”
“그게 뭐가 나쁜 거야. 싫다면 싫다고 하는 거지, 그런 것도 확실히 말할 줄 알아야 어른이 되는 거야.”
“ … 그런 거야?”
“그래, 네가 뭐가 아쉬울 게 있다고 마음에 안 드는 애랑 사귀냐? 싫다고 확실히 말해, 그래도 계속 치근덕거리면 꺼지라고 해, 네가 계속 친절을 베푸니까 걔도 착각하고 다가오는 거 아냐.”
코하루는 뭔가를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상대가 상처를 입을까 봐 내가 확실하지 못했던 게 원인, 다음에는 확실히 해야겠다며 독기를 품었다.
“오빠도 싫은 애한테 고백받았을 때 그렇게 했어?”
“으음 … 처음엔 오빠도 너처럼 상대가 상처 입을까 봐 그냥 좋게 넘어갔어. 그런데 그게 반복되면 나중에 더 큰 상처를 주더라고, 그래서 나중엔 확실하게 했지.”
“그럼 언니한테 고백받았을 땐 어떻게 했어? 한 번에 OK 했어?”
계속되는 질문에 다카기는 식은땀을 흘렸다. 그런 것까지 동생에게 얘기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렇다고 도망치진 않았다.
“몇 번은 도망쳤지.”
“에 ~ 그게 뭐야. 방금 한 말이랑 다르잖아.”
“그때는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여유가 없었어. 걔가 싫었던 건 아니야.”
“으음 … 그런데 고백을 받아준 계기가 있었어?”
“오빠는 뭐든 나보다 한 가지는 나은 사람하고 결혼하자는 생각이 있었거든.”
다카기는 학창시절 성적으로 아내를 이겨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하지만 한 번도 이겨보질 못했다. 공부와 운동을 병행했기 때문? 그런 변명을 앞세우고 싶진 않았다.
야구는 내가 좋아서 시작한 일, 좋아해서 하는 일을 변명으로 앞세우는 놈이 어디에 있나.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하면 그만, 그렇게 3년 동안 서로 투닥거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마음을 열게 됐다.
“너도 연애하려면 나보다 나은 사람하고 만나야 돼, 그래야 서로 발전이 있는 거니까.”
“그건 … 조금 어렵지 않을까?”
“왜?”
“나보다 잘난 남자 찾는 게 쉬운 게 아니잖아. 눈을 조금 낮춰야 하지 않을까?”
코하루는 본인이 잘났다는 걸 알고 있었다.
공부 잘하지 집안 빵빵하지 또래들에 비해 발육도 좋지, 얼굴 예쁘지, 이건 그냥 완전체 아닌가.
나보다 잘난 남자애가 세상에 있긴 있는 건지, 동생의 솔직한 속마음에 다카기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보니 콧대가 보통이 아닌 녀석, 그런데 뭣 하러 그런 쓸데없는 친절을 베푼 걸까. 빗장이 풀린 코하루는 숨겨왔던 본심을 털어놨다.
“이미지라는 게 있잖아. 친구들한테 늘 친절하게 대해왔는데, 싫다고 꺼지라는 좀 아니잖아.”
이미지까지 살뜰하게 챙기는 녀석, 툭하면 동료들에게 싫은 소리 하고 꽥꽥거리는 오빠보다 사회성은 훨씬 뛰어났다.
“그런 걸 뭐라고 하는 줄 알아?”
“뭔데?”
“속이 시커멓다!!”
오빠의 견제에 코하루는 얼굴을 붉혔다. 내가 하라구로라니, 그런 거 아니라고 변명했지만 뒤늦은 수습에 불과했다.
“코하루 짱, 이거 먹을래?”
마침 자리로 돌아온 가이드, 방금 전까지 오빠와 기싸움을 벌인 코하루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소곳한 자세로 미소를 지었다.
“야, 너 그거 봤냐?”
“뭔데?”
“호프만 트레이드 될 것 같은데”
이건 또 무슨 헛소리인가. 다카기는 그럴 리가 없다고 답했지만 채근성은 방금 전 올라온 기사를 보여줬다.
“이딴 걸 믿는 거야?”
“여기 기사 났잖아.”
“개소리에 내가 한 표 건다.”
다카기는 그럴 리가 없다고 철벽을 쳤다. 호프만의 가치는 누구보다 단장이 더 잘 알고 있다. 단장이 공격력 강화 선언을 했다고 기자들이 제멋대로 휘갈긴 소설, 실제로 이뤄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울반스키와 포데스와를 처리하면서 팀 페이가 여유가 생겼는데, 단장이 그런 무리수를 던질까.
공격력을 보강하고 싶으면 지금 라인업에서 더하기만 하면 된다. 딱히 뺄 게 없는 전력, 예상은 어긋나지 않았다.
“야, 나 전화 온다.”
“얼른 가 봐.”
그렇게 계속된 여행, 가이드 채근성은 에이전트의 연락을 받았다.
특급은 아니지만 메이저리그에서 외야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선수, 작년 시즌 보스턴은 공격 부진에 시달렸지만 채근성은 타율 0.283, 홈런 18개, 63타점을 놀리며 나름 역할을 해줬다.
올 시즌, FA 시장에 뛰어난 야수들이 워낙 많이 나왔으니 대박은 어렵겠지만 중형급 계약은 맺을 수 있겠지, 우리는 신경 쓰지 말라며 보내줬다.
인연이 있다면 내년에도 보겠지, 매년 보는 얼굴이 바뀌는 정글에서 사사로운 인연에 매달리진 않았다.
* * *
[채근성, LA 머린스와 6년 9천만 달러 계약]
[숀 스팸, 뉴욕과 9년 3억 2천만 달러 계약]
[존 헤링, 뉴욕과 6년 1억 1천만 달러 계약]
[스티브 도허티, 샌프란시스코와 9년 2억 8천만 달러 계약]
해가 바뀐 2월, 스프링캠프를 앞두고 굵직한 계약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문제는 보스턴, 공격력 보강을 약속했는데 아무 성과가 없지 않은가.
팬들은 정말 공격력을 보강할 생각이 있는지 의문이라며 불만을 쏟아냈고, 지역 여론도 수더랜드 단장을 독촉하는 기사를 연일 쏟아냈다.
■ 제레미 브라운(前 뉴욕 소속) : 0.255, 32홈런, 93타점
■ 헨리 퍼실(前 샌프란시스코 소속) : 0.271, 28홈런, 85타점
■ 에릭 킴블(前 탬파베이 소속) : 0.247, 38홈런, 103타점
이제 FA 시장에 남은 거물은 대략 이 정도, 다들 매력적인 카드지만 수더랜드 단장의 입맛에 맞는 선수는 없었다.
사실 숀 스팸을 노렸는데 뉴욕이 제레미 브라운과의 재계약을 포기하고 생각보다 많은 돈을 쓰면서 영입경쟁에서 패배한 게 뼈아팠다.
거기다 나중에 잡아도 된다고 생각한 채근성을 LA가 채가면서 완전히 틀어진 계획, 아쉬운 대로 에릭 킴블에게 접근했지만, 에이전트는 8년 2억 4천만 달러라는 터무니없는 돈을 요구했다.
샌프란시스코와 계약을 맺은 스티브 도허티와 별다를 게 없는 규모, 아쉬운 대로 이거라도 잡을까 했지만 장고 끝에 그만뒀다.
결국 2월 초까지 보스턴이 손에 쥔 수확은 제로, 누구와 접촉했다 어느 구단과 트레이드 논의가 이뤄졌다는 소문만 무성할 뿐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았다.
‘나는 내 일만 하자.’
그러건 말건 다카기는 일본에서 몸만들기에 열중했다.
내가 언론플레이를 해봤자 단장에게 부담이 될 뿐,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 처음부터 답은 정해져 있었다.
[선배님, 저 내일부터 출근해요.]
“그래, 우리의 일원이 된 거 축하한다.”
그러던 어느 날, 다카기는 고교 후배의 연락을 받았다.
중학교 시절까지 야구 경험은 전혀 없었지만 고교 시절 나름 열심히 노력했던 사노 코이치, 회사에 취직한 뒤 사회인 야구에서 나름대로 경력을 쌓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프로구단 러브 콜을 받았다.
하지만 이게 내가 정말 가야 할 길일까?
27살에 프로 선수라니 너무 늦은 건 아닌지, 고민이 많았지만 프로의 꿈을 접고 그동안 쌓은 회사 경험을 살려 스기토모 그룹으로 전직했다.
스기토모 그룹 산하에도 사회인 야구 팀이 있다.
야구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환경, 거기다 일본 최고 그룹의 일원이 됐으니 이 길도 나쁘지 않았다.
“아버님은 건강하게 지내시니?”
[네, 그런데 얼마 전 식당은 그만두셨어요.]
“뭐?! 왜?”
[실은 … 안 좋은 일이 있었거든요.]
다카기는 고교 시절, 코이치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자주 신세를 졌다.
타지 생활 중 무엇보다 힘들었던 건 식사, 입맛에 맞는 식당을 찾는 게 어려워 편의점 도시락도 자주 먹었다.
그 공허함을 채워줬던 추억의 식당, 그런데 얼마 전 화재가 일어나 건물이 전소해버렸다. 할아버지 때부터 대대로 지켜왔던 식당이 이렇게 되다니, 상심한 코이치의 아버지는 식당을 그만뒀다.
아들이 번듯한 직장에 취업했으니 부모로서 할 수 있는 역할은 다 했다는 게 이유, 하지만 그게 본심이었을까.
학창시절 신세를 진 분이 그런 큰일을 당했다니, 다카기는 안타까운 마음에 코이치 아버지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식당은 다시 지으면 됩니다. 정말 중요한 건 찾아주는 손님들이 있다는 거 아닐까요?”
건물이 불에 타 없어졌다고 식당의 생명이 다 한 건 아니다.
찾아주는 손님들이 있다면 건물은 다시 지으면 그만, 다카기는 식당 재건에 필요한 돈은 내가 내겠다며 코이치의 아버지를 설득했다.
“아버님이 그만두시면 실망할 손님들이 많을 겁니다. 저도 그중 한 명이고요. 다시 시작할 마음만 있으시다면 제가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그러기엔 너무 죄송한데 … ]
“죄송하긴요. 그동안 아버님께 신세 진 게 있잖아요.”
다카기는 약속대로 식당 재건에 필요한 돈을 모두 지원했다.
감격한 코이치 아버지는 앞으로 평생 동안 무료로 식사 대접을 하겠다고 했지만 다카기는 거부했다.
내가 아쉬워서 도움을 드린 것뿐인데, 왜 음식을 무료로 대접받아야 하나. 앞으로도 계속 식당을 유지해주신다면 그걸로 된 일,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선배님 정말 감사드려요. 나중에 이 은혜는 꼭 갚을게요]
“됐어 내가 좋아서 한 일이라니까. 회사생활 열심히 해라”
[네, 감사합니다.]
코이치는 그날부터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이 그룹은 선배님 가족들이 운영하는 회사, 능력은 없지만 노력하면 조금이라도 보탬은 되지 않을까.
선배님을 존경하는 만큼, 이 회사를 위해 뭔가를 해야겠다는 의지는 확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