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화. Respect - (1)
[헨리 구단주, 수더랜드 단장 재신임]
시즌이 끝나자마자, 보스턴의 에디슨 헨리 구단주는 단장 재신임을 선언했다.
일부 여론은 수더랜드 단장이 당장의 우승에 눈이 멀어 트레이드나 재계약 등에서 실책을 저질렀다고 비난했지만, 월드시리즈 7회 우승을 달성한 단장을 자르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거기다 단장은 기업으로 치면 CEO, 계약직이기 때문에 당장의 성적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이걸 두고 잘잘못을 따지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언론플레이, 뭣보다 수더랜드 단장은 우승을 위해 팜을 초토화시킨 것도 아니다.
재신임은 당연한 일, 다카기도 SNS를 통해 수더랜드 단장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우리 집안도 어림없다. 잡것들이 까부는 거 아니지’
다카기는 그동안 관심을 두지 않았던 집안 사업에도 어느 정도 관심을 보였다.
최근 스기토모 그룹은 일본의 운송 네트워크 시장을 완전히 장악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일본은 세계 62위의 넓은 국토에 1억 3천만의 인구를 보유한 대국, 당연히 도시와 시내를 연결하는 교통은 아주 중요하다. 문제는 인프라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다는 것, 철도는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수준이지만 도로는 폭이 좁고 개통이나 보수가 늦어 후진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거기다 요금은 왜 이렇게 비싼지, 본인들도 살인적인 고속도로 요금을 알고 있는지 외국인 여행객을 대상으로 고속도로 하이 패스 이용권을 렌터카 회사와 제휴해 판매해 왔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경쟁이 치열해졌고, 너 죽고 나 죽기 식의 전쟁터가 돼 버렸다.
“우리가 정리한다.”
이때 손을 쓴 기업이 바로 스기토모 그룹, 다카기의 아버지 요시무네는 스기토모 산하의 운송기업은 물론 다른 회사들에도 막대한 돈을 투자해 일본 운송 네트워크 시장 최대주주에 올라섰다.
불필요한 경쟁을 줄이고 각 기업이 일본에서 독점시장을 구축하도록 한 것, 덕분에 많은 기업들은 한숨 돌릴 수 있게 됐고 국민들이 누리는 교통 서비스도 대거 개선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스기토모 그룹은 한국 기업]
[일본이 한국 자본에 잠식되고 있다.]
문제는 지금도 스기토모 그룹을 한국 기업으로 매도하며 깎아내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실제로 스기토모 그룹은 일본 최대의 재벌집단이지만 젊은이들의 취업 선호도는 8위 정도에 머물고 있다.
정말 한국 기업이라고 생각하고 입사를 거부하는 건지, 외부의 시선을 의식해 대답만 그렇게 한 건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스기토모 그룹은 예전부터 여론의 압박을 받아왔다.
[다카기 일가가 물러나고 CEO가 운영을 해야 한다]
심지어 우익 성향이 강한 신문사는 대놓고 기업 운영에 참견을 했다.
스기토모 그룹이 일본의 모든 것을 독점하고 있으니 이러다간 일본이 다카기 오너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는 논리, 하지만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그 논리에 동조하지 않았다.
‘고영길 회장이 쓰러졌을 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잊었나.’
10년 전, 고영길 회장이 쓰러졌을 때 스기토모 그룹과 자회사들의 주가는 10% 가까이 떨어졌다.
고영길 회장의 수완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던 그룹, 고영길 회장이 없어진 지금도 다카기 일가는 그룹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런 거대 세력이 기업 운영에서 손을 뗀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는 이사회는 전문경영인을 앞세우자는 말은 감히 하지도 못하는 실정, 지금도 다카기의 아버지 요시무네가 오너와 CEO를 겸하고 있다.
다카기 일가의 막대한 재산과 추진력이 있기 때문에 스기토모 그룹은 지금도 각 분야에서 다양한 투자와 기술 발전을 이뤄내고 있다.
이걸 쳐냈다간 대지진에 버금가는 충격파가 일본을 덮치겠지, 이사회는 얼마 전 주주 총회에서 다카기 요시무네 회장의 연임을 공식 승인했다.
[요시무네 회장의 연임을 축하합니다.]
일본 의회와 왕실도 요시무네 회장의 연임에 공식적으로 축하를 표했다.
절대 흔들릴 일 없는 왕좌, 다카기는 그동안 집안일에 참견하지 않았지만 기업 공식 행사에 참석했다.
이름만 들어도 아 ~ 하는 거물들도 참석한 자리, 다카기는 여기서 일본 부총리 아이소 츠네나리의 국민 영예상 수상 제안을 받았다.
하지만 이미 2번이나 거절했던 상, 다카기는 생각이 없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언제까지 거절만 할 건가. 자네도 이제는 진정한 일본인이 돼야 하지 않겠나?”
“그럼 지금까지는 아니었다는 건가요?”
수상을 안 하면 일본인이 아니라는 것과 뭐가 다를 게 있나.
웃긴 건 아이소 츠네나리도 순수 일본인이 아니라는 것,
아이소 츠네나리는 일본인 아버지와 현지 어머니에서 태어난 혼혈이다. 1988년까지 브라질에서 살았지만 1989년, 일본 정부가 혼혈 일본인들을 자유롭게 일본으로 입국할 수 있게 하자 부모님과 함께 일본으로 왔다.
“차별 없는 사회를 만들겠습니다.”
혼혈에 대한 끔찍한 차별에 시달린 아이소 츠네나리는 이후 사회운동가로 활동하며 명성을 쌓았고, 지난 2003년 후쿠오카 지역구에서 정치인생의 막을 올렸다.
그런데 사람이 출세하더니 약간 맛이 간 걸까. 다음 선거에서 떨어지더니 철저한 극우 정치인으로 돌변해 지금은 부총리까지 올라왔다.
꼭대기에 오르더니 이제는 혼혈로 차별받는 시절을 잊은 건가. 본인도 아차 했는지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라며 뒷수습에 나섰다.
“앞으로 조심하세요. 높은 곳에 오를수록, 내가 한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는 거니까요.”
다카기는 뼈 있는 한방을 날리고 자리를 떴다.
나도 보스턴에서 왕 대접받고 사는 인간인데, 누굴 훈계하려고 하는 건가. 하는 짓이 너무 같잖아서 상대도 해주지 않았다.
“오빠야, 우리 저기로 가자.”
“왜?”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이때, 코하루가 오빠를 잡아끌었다.
소심한 건 아닌데 낯가림은 있는 동생, 다카기는 그 손에 이끌려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창가 앞에 섰다.
야경을 바라보며 귀밑머리를 쓸어내리는 코하루, 다카기는 그 모습을 보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오빠야, 왜 웃어?”
“아니, 너도 이젠 숙녀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내가?”
“어, 특히 목이 매력적이네. 어지간한 남자들은 다 넘어오겠다.”
코하루는 엉큼하게 어딜 보는 거냐며 서둘러 목을 가렸다. 숙녀다워졌다는 칭찬이 싫은 건 아닌데 왜 이렇게 부끄러운지, 12살이나 됐지만 앞으로도 오빠의 귀여운 동생으로 남고 싶었다.
“오빠야, 우리 여행 갈까?”
“어디로?”
“어디든 좋아. 오빠 훈련하기 전에 다녀와야지.”
“그게 제일 애매해 이 녀석아.”
무슨 사랑의 도피도 아니고 무작정 떠나는 게 어디 있나. 다카기는 구체적인 장소를 요구했고, 답은 바로 튀어나왔다.
“나 한국에 가보고 싶어.”
“한국? 왜?”
“내 친구들은 다 갔다 왔단 말이야. 나만 못 갔어. 가자, 응?”
한국과 일본의 거리는 서로 어지간한 국내 여행보다 쉽게 오갈 수 있는 정도,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닌데 소중한 여동생의 부탁은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예고 없는 여행, 일단 남매는 부산에 발을 들였다.
제주도와 서울은 왔다 갔다 했지만 다카기도 부산은 이번이 처음, 현지인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여 ~ 여기다!!”
공항에서 두 사람을 맞이한 사람은 채근성, 작년에 보스턴으로 트레이드 된 채근성은 올해 자유계약 신분 선수가 됐다.
앞으로도 함께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2년 동안 동고동락했으니 나름 친한 사이, 어쨌든 남매는 차를 얻어 타고 시내로 향했다.
“너도 한국어 할 줄 아니?”
“쵸큼이요”
채근성의 물음에 코하루는 부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할 줄 아는 한국말이라고 해 봤자 저는 누구에요, 안녕하세요 이 정도 수준, 채근성은 든든한 오빠들이 있으니 너는 즐기기만 하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오 ~ 예쁘게 생겼네. 너 몇 살이니?”
“작업 걸지 말고 앞이나 봐”
계속 코하루에게 말을 거는 채근성, 다카기는 동생에게 접근하는 수컷을 용납하지 않았다.
코하루는 12살밖에 안 됐지만 키는 이미 170cm에 근접했다. 어머니가 170이 넘고 아버지도 186이나 되는 장신이니, 자식도 큰 건 당연, 뒤에서 보면 숙녀라고 봐도 믿을 정도다.
가뜩이나 수컷들이 꼬일까 봐 걱정인데, 지인까지 추파를 던지고 있으니 다카기는 은근 신경이 쓰였다.
“누가 작업을 걸었다고 그러냐?”
“몰라, 어쨌든 얘한테 말 거는 거 금지”
“와아 ~ 이 자식이 사람을 어떻게 보고 … ”
코하루는 두 사람의 말에 집중했다.
뭐라고 하긴 하는 것 같은데 한국어라 알아듣는 건 불가능, 어쨌든 사이가 나빠 보이진 않았다.
“テレビで 見ました. 野球選手でしょう?”
= TV에서 봤어요. 야구 선수시죠?
오빠 마음을 알 리 없는 코하루는 채근성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자세히 보니 오빠와 같은 팀에서 뛰는 선수, 아는 척을 했지만 다카기는 통역사를 자처하진 않았다.
“야, 네가 통역 좀 해봐. 뭐라고 하잖아.”
“몰라 어쨌든 말 시키지 마.”
“어휴 ~ 이 자식, 이제 보니 동생바보였네.”
투닥거리다 보니 어느덧 도착한 시내, 아직 한국이 낯선 코하루는 오빠 옆에 딱 붙어서 거리를 활보했다.
생각보다 일본과 큰 차이가 없는 거리, 그래도 오빠와 함께 하는 여행이라 모든 게 신선하게 다가왔다.
메이저리그 둘이 거리를 활보하는데 눈에 안 띄는 게 이상한 일, 부산의 스타로 이름 난 채근성은 엄청난 환호와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사람들의 관심은 다카기에게 집중됐다. 메이저리그를 호령하는 대스타가 이곳에 나타나다니, 마침 길거리에서 인터넷 방송을 진행하던 BJ는 이 소식을 접하고 섭외에 나섰다.
“No, thank you”
하지만 다카기는 매몰찰 정도로 거절했다.
오늘은 동생에게 투자하는 날, 방송에 붙잡히면 동생은 어쩌라는 건가. 그런데도 매달리는 BJ, 다카기는 이게 뭐 하는 짓이냐며 화를 냈다.
“당신 지금 엄청 실례되는 짓 하고 있는 거야. 사람들 통행에 불편 주는 거 안 보여?”
무작정 카메라를 들이대는데, 이런 식으로 나오면 찍히기 싫은 사람들도 다 카메라에 노출된다.
이런 몰지각한 행동 때문에 한국에서도 길거리 방송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고 있는 중, 주위에서도 비난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망신을 당한 BJ는 서둘러 도망, 민폐덩어리를 쫓아낸 다카기는 다시 제 갈 길을 갔다.
인파를 뚫고 겨우 자리를 잡은 식당, 자리에 앉자마자 주머니에 넣어뒀던 휴대폰이 가볍게 몸을 떨었다.
“전화 받았습니다.”
[다카기 선수 맞으십니까?]
“예, 그런데요.”
[축하합니다. 올해도 만테나 어워드를 수상하게 되셨습니다.]
사무국에서 걸려온 전화, 다카기는 1위표 27개를 쓸어 담으며 6년 연속 만테냐 어워드 수상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게 됐다.
월드시리즈 우승은 실패했지만 나는 여전히 최고라는 사실을 증명한 것, 눈치를 살피던 채근성은 축하한다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조금 더 기뻐해 인마, 그건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거잖아.”
“기뻐하고 있어.”
“그런데 표정이 왜 그러냐?”
“체통을 지키는 것뿐이야. 왕이 왕관 썼다고 자랑하는 거 봤어?”
채근성은 말없이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내가 저 입장이었다면 방방 뛰며 기뻐했을 텐데, 역시 일류는 다르다는 건가.
본인도 메이저리거지만 이 녀석은 그 수준을 넘어선 존재, 2년 동안 함께 한 사이라 가깝게 느껴질 만도 한데, 오늘따라 유독 거대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