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불경기는 투잡으로 - (17)
‘끝났다.’
마지막 아웃카운트가 올라가는 순간, 다카기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런 시나리오를 예상 못한 건 아니지만, 지난 5년 동안 걸어온 길을 생각하면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결과, 하지만 내가 시즌 동안 게으름을 부린 것도 아니지 않은가.
최선을 다했으니 결과를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겠지, 침통에 빠진 선수단을 다독여 클럽하우스로 이끌었다.
“너희들 표정이 왜 그러냐? 아쉬움이라도 남아 있어?”
다카기는 사실 태업이라도 했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도허티를 저격하는 발언, 이미 한바탕 난리를 치렀는데 또 건드려서 무슨 이득이 있을까. 그래서 말을 한 번 더 정리했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시즌 아직 안 끝났다. 난 내일 예정대로 등판할 테니까 마지막까지 후회 없는 경기 하자.”
다카기는 내일 경기 등판을 강행했다.
포스트 시즌엔 진출하지 못했지만 아직 마지막 경기가 남아 있지 않은가. 탈락했다고 등판을 거르는 건 팬들에게 예의가 아니고 스스로도 납득할 수 없는 일, 많은 것들을 뒤로 하고 퇴근길에 올랐다.
“왔어?”
“응”
키라코는 남편의 눈치를 살폈다.
얼핏 보면 평소와 다를 게 없지만 정신이 반쯤 나간 얼굴, 지진을 피해 대피소로 도망쳤던 그날이 떠올랐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이 없던 고시엔의 스타, 키리코는 그날 처음으로 남편의 넋 빠진 얼굴을 봤다.
남편도 사람인데 어떻게 감정이 없겠는가, 때론 절망하고 힘들면 주저앉는 게 인간의 본성, 그래도 아내로서 조금이라도 힘이 되어 주겠다는 마음에 애교를 부렸다.
“포스트시즌 진출 못해서 서운해?”
“모르겠어. 그냥 시원섭섭해.”
“좋게 생각해. 자기 그동안 고생 많았잖아.”
다카기는 지난 6년 동안 포스트 시즌 포함 1463이닝을 소화했다.
일반적인 선수라면 벌써 퍼졌어도 이상하지 않은 강행군, 고액 연봉 받는다고 꼭 팀을 월드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어야 하나.
마운드는 물론 어린 선수들의 성장을 이끌어 내기 위해 클럽하우스에서도 동분서주했던 남편, 누가 뭐라고 해도 당신은 쉴 자격이 있다며 남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조금은 힘이 나?”
“응, 고마워”
당신은 쉬어도 괜찮다고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몇 명이나 있을까.
힘들 때는 역시 가족이 최고, 평소에도 애정표현이 박한 건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오늘은 표현이 과해졌다.
전사에게도 휴식은 필요한 법, 아내 말대로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일이 왜 이렇게 된 거야.’
하지만 쉬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 법, 수더랜드 단장은 끓는 속을 술로 다스렸다. 근래 이렇게 속이 상했던 적이 있었나, 뭣보다 본인이 주도한 트레이드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게 무엇보다 충격이 컸다.
■ 빈센트 맥킬립
애리조나(83경기) : 타율 0.274, 18홈런, 59타점
보스턴(0경기)
세인트루이스(72경기) : 타율 0.293, 12홈런, 43타점
■ 스티브 도허티
세인트루이스(84경기) : 타율 0.337, 25홈런, 71타점
보스턴(73경기) : 타율 0.269, 9홈런, 22타점
수더랜드 단장이 도허티를 데려오기 위해 삼각 트레이드 도구로 활용했던 맥킬립은 세인트루이스에서 맹활약을 펼치며 커리어 하이 시즌을 이뤄냈다.
반면 도허티는 태업 플레이에 기대 이하의 성적을 기록, 탬파베이가 부진한 사이 보스턴이 치고 올라가지 못한 건 도허티의 부진이 가장 큰 영향으로 작용했다.
지난 5년 동안 트레이드에서 실패한 적이 없었기에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과, 오랫동안 성공가도를 달린 만큼 실패를 인정하는데 제법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래, 소득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어.’
일단 쓸모가 없어진 고액 연봉자 2명을 치워내지 않았다.
애리조나로 트레이드 시킨 울반스키와 포데스와는 예상대로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뒀다.
쓸 만큼 쓰고 폭탄은 애리조나에게 떠넘겼으니 성공, 그리고 레이븐, 고메즈, 리퍼드, 올슨 등 쓸 만한 유망주들도 많이 발굴해 냈다.
약간의 투자만 더하면 내년에는 올 시즌보다 강한 전력을 갖추겠지, 일단 시즌 내내 고생이 많았던 에이스의 등판을 취소시키기로 했다.
“아니요. 나갑니다.”
하지만 다카기는 시즌 마지막 등판을 강행했다.
1년 동안 무수한 성장 통을 겪은 애송이들, 그 고난의 행진에 마침표를 찍는 무대를 캡틴이 외면해서야 되겠나.
내가 마지막까지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이면 녀석들도 평소보다 조금은 더 집중하겠지, 남은 경기는 한 게임뿐이지만 그것도 루키들의 성장 동력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벌써 마지막이네.’
경기를 앞두고 고메즈는 섭섭한 얼굴로 자기 자리를 맴돌았다.
시즌 초만 해도 최종전까지 유격수를 책임질 줄은 예상 못했다. 18살짜리가 무슨 주전이냐며 코웃음을 쳤던 전문가들, 고메즈도 4 ~ 5월 즈음엔 마이너리그로 강등되는 걸 각오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지켜봐 줬던 팀 관계자들, 내친김에 포스트 시즌 진출까지 노려보고 싶었지만 생각 보면 여기까지 온 것 자체가 기적이다.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지만 꿈만 같았던 지난 1년, 내년을 기약하며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자, 다카기 하루요시가 시즌 33번째 등판을 치릅니다. 올 시즌 18승 3패, 평균자책점 2.24, 224이닝 동안 볼넷 30개, 탈삼진은 295개를 기록했습니다.”
“절대 기록을 위한 등판은 아닙니다. 본인도 예고를 했어요.”
피트 오어는 이 경기가 숫자 놀이를 위한 게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2개만 채우면 4년 연속 300탈삼진 달성, 1900년 이후 단일 시즌 300K를 달성한 선수는 19명뿐이다.
이 중 300K 시즌을 3번 이상 치른 선수는 3명뿐, 다카기는 그 이상의 영광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일각에선 기록을 위한 등판이라며 비아냥거리고 있지만, 내가 언제부터 여론의 눈치를 보며 경기를 치렀는가.
다카기는 마음대로 생각하라며 일갈을 날렸다.
“조직을 대표하는 사람이라면 그날 뭘 해야 하는지 목표가 있어야 한다. 마지막 경기에서 해야 할 일은 내가 잘 알고 있다.”
조직을 입에 담았다는 건 기록보다는 팀 승리에 집중하겠다는 뜻, 증명은 실전에서 하는 거라 그 이상은 입에 담지 않았다.
딱 ~ !
“땅볼, 유격수가 잡아 1루로 송구합니다. 원 아웃, 첫 타자를 가볍게 처리합니다.”
“젊은 선수들은 이 선수의 투구를 유심히 지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카기가 구위를 앞세우는 스타일이지만 바깥 쪽 제구를 기본으로 하지 않습니까. 그 이유가 뭔지 생각을 해야 해요.”
다카기는 바깥쪽 높은 빠른 볼을 활용해 땅볼을 유도했다.
볼카운트가 불리한 타자에게 높은 빠른 볼보다 유혹적인 구질은 없겠지, 그리고 몸쪽으로 붙인 공은 타자 입장에서 바깥쪽보다 히팅 포인트를 앞당겨야 하기 때문에 공략하기 까다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카기는 바깥쪽 높은 빠른 볼을 결정구로 삼았다.
몸 쪽 빠른 볼? 이론적으로는 타자를 억누르기에 이것만큼 좋은 구종도 없고 실제로 결정구로 삼는 투수들이 있다.
하지만 제구도 어렵거니와 잘못하면 장타 위험이 높은 승부, 실제로 메이저리그에 올라온 타자라면 높은 공 대응 능력은 어느 정도 갖췄다고 봐도 좋다.
그래서 대안으로 바깥쪽 높은 코스를 활용한 것,
타자에게 볼을 조금 더 볼 수 있는 시간을 주는 대신, 조금 더 높은 코스로 던져 헛스윙을 유도했다.
눈에 보이는 만큼 반응하는 몸, 확실히 몸 쪽보다는 바깥쪽으로 던졌을 대 타자가 달려드는 빈도가 높았다.
덕분에 다카기는 다른 탈삼진 형 투수들보다 땅볼 비율이 높은 편, 덕분에 피안타율은 높아도 홈런을 내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꼭 다카기를 따라할 필요는 없지만 이런 유형의 투수가 있다는 걸 알아두는 것도 어린 선수들에겐 참고가 되겠지, 실제로 다카기를 흉내 내 보려 노력한 투수들은 있지만 누구도 제 2의 다카기는 되지 못했다.
그만큼 따라 하기 어려운 투구, 구위와 정교한 제구를 갖춘 선수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잘 안 되던데’
댈러스 레이븐은 벤치에서 캡틴의 투구를 지켜봤다.
올 시즌 신인왕 급 투구를 펼쳤지만 저 정도로 완벽한 투구를 하진 못했다. 그나마 흉내 낸 게 있다면 볼넷을 줄인 것 정도, 그것만으로도 대단했지만 내년 시즌에도 제 2선발 노릇을 해야 할 입장에선 갈 길이 멀었다.
‘잘 봐둬, 어제 같은 실수 반복하지 않도록’
투구를 앞둔 다카기는 2루수 제임스 올슨에게 손가락 사인을 보냈다.
다음 타자는 어제 보스턴에 패배를 안겨주는 적시타를 날린 케빈 콜린스, 콜린스는 타구 방향이 우측으로 쏠리는 편이다.
이 자료를 알고 있는 코치는 유격수는 2루 베이스, 2루수는 우익수 앞 잔디, 1루수는 베이스 깊숙한 곳에 배치시켰는데 타구는 중견수 앞에 떨어지면서 시프트가 박살 났다.
타자 입장에서 시프트를 깨는 정석은 없다. 그저 야수가 잡을 수 없도록 빠르고 강한 타구를 날릴 뿐, 콜린스는 당겨 치는 타입이 아니라 강한 타구에 집중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야수진은 코치의 말만 믿고 너무 극단적인 수비에 치중, 결국 수비 위치는 선수의 개인적인 판단도 중요하다.
지금 상황에서 투수는 어떤 볼 배합을 할 것인가? 그에 따라 타구 방향도 달라지겠지, 캡틴의 지시대로 올슨은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했다.
“초구!! 크게 돌려봅니다.”
“역시 좌타자를 상대할 땐 몸 쪽을 적극 활용하네요. 좌타자의 땅볼은 안타로 이어질 확률이 높기 때문에 플라이 볼을 유도하는 게 좋겠죠. 올슨 선수는 조금 더 깊숙한 곳에 있어도 괜찮습니다.”
몸 쪽 승부가 반복되자 콜린스는 히팅 포인트를 조금 더 앞에 뒀다.
2루 쪽으로 굴러가는 타구, 제법 강한 타구였지만 깊숙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던 올슨은 문제없이 타구를 처리했다.
‘기준은 투수였어.’
올슨은 그제야 시프트의 진짜 의미를 깨달았다.
보통 시프트는 상대 타자에 맞추는데, 진짜 위대한 투수들은 타구를 자기가 의도한 대로 끌어낼 수 있다.
올슨이 콜린스의 성향만 생각하고 우측으로 치우친 수비를 하고 있었다면 이 타구를 쉽게 처리할 수 있었을까.
다카기는 몸 쪽 높은 공을 던져 땅볼을 이끌어낼 수 있는 선수, 그럼 문제는 타구의 강도 아닌가. 플라이 볼이 나오면 따라가서 잡으면 그만, 평소보다 깊숙한 수비를 했는데 타구는 바로 글러브로 날아왔다.
매 경기 느끼는 거지만 다카기와 호흡을 맞추면 뭔가 하나를 얻어가는 기분, 다른 선수들도 다를 건 없었다.
“스윙!! 삼진입니다!! 오늘 경기 5번째 탈삼진!! 4년 연속 300탈삼진 위업을 달성합니다!!”
“이런 선수가 포스트시즌을 치를 수 없는 겁니까? 통탄할 노릇이군요.”
그렇게 계속 진행된 경기, 14타자를 연속 범타 처리하던 다카기는 5회 초에 금자탑을 쌓아 올렸다.
크리스 윌슨 이후 55년 만에 나온 대기록, 포스트 시즌은 물 건너갔지만 보스턴 팬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갈채를 보냈다.
하지만 다카기는 내년을 대비해 애송이들 조련에 열중할 뿐, 그 능력을 알고 있는 코치진은 손을 놔버렸다.
인정하긴 싫지만 우리보다 야구를 더 잘 이해하고 있는 선수, 오프 시즌 동안 공부 좀 더 해야겠다는 의욕을 불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