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화. 불경기는 투잡으로 - (16)
‘그 자리가 아니잖아.’
그것도 잠시, 다카기는 수비 코치의 지시대로 2루수의 수비 위치를 옮겼다.
J. J. 핵먼이 이탈하면서 공석이 된 2루수, 그 빈자리는 지금 제임스 올슨이 채우고 있다.
핵먼은 수비 범위가 좁았던 선수라 수비 위치를 조정하는 일이 거의 없었지만, 올슨은 마이너리그 시절부터 넓은 수비 범위와 안정적인 송구 능력을 인정받았다.
다만 뜬공도 본인이 잡으려고 하는 등 의욕이 너무 앞서는 게 문제, 지금도 일반적인 위치에서 너무 뒤로 물러나 있다.
수비가 넓은 만큼 그물망을 넓게 치고 싶은 것 같은데, 지금 위치는 보기에도 너무 과했다.
“이건 내 꺼야!!”
마침 2루수와 중견수 사이로 날아오는 타구, 중견수 수비라면 정평이 난 알 디즌은 애송이의 구역 침범을 용납하지 않았다.
가볍게 처리하면서 2아웃, 자기 자리로 돌아가던 알 디즌은 네 자리는 거기라며 올슨의 구역을 재조정해줬다.
혈기가 넘치는 건 좋지만 지나치면 문제가 되는 법, 그걸 조절해주는 건 베테랑들의 몫 아니겠나. 덕분에 보스턴은 선취점을 내주고도 차분한 분위기에서 경기를 풀어갔다.
“자, 이제 5회 말 보스턴의 공격으로 이어집니다. 타석에는 알 디즌, 오늘 첫 두 타석에서는 모두 범타로 물러났습니다.”
“가장 중요한 시기에 기세가 꺾인 게 아쉽습니다. 전체적으로 나쁜 시즌은 아닌데 말이죠.”
알 디즌은 올 시즌 타율 0.270, 홈런 32개, 92타점을 기록하고 있다.
나쁘지 않은 성적이지만 올스타 브레이크 이후 성적은 0.262, 홈런 10개, 33타점, 특히 순위 경쟁이 치열한 9월에 0.232, 홈런 4개로 성적이 급락해 버렸다.
수더랜드 단장이 야심차게 영입한 도허티가 디즌의 부진을 만회해 줬다면 좋았겠지만 세트로 부진에 빠진 게 치명적, 타선의 동력을 잃은 보스턴은 후반기 승률 5할을 겨우 유지하며 여기까지 왔다.
탬파베이가 부진에 빠지지 않았다면 벌써 멀어졌을 포스트시즌 진출, 2억 2천 6백만 달러 대형 계약을 맺은 만큼, 디즌은 깊은 책임감을 느꼈다.
‘쟤 안 되겠네.’
떨어지는 볼에 맥없이 딸려 나오는 스윙, 다카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디즌은 올 시즌 볼넷 79개를 얻어냈고, 출루율도 0.359로 나쁘지 않다.
문제는 컨택 능력, MLB 평균이 79%인데, 디즌은 딱 평균에 수렴하는 컨택률을 기록하고 있다. 거기다 중심 타선이라 견제가 더 심할 수밖에 없는데, 좋을 때와 안 좋을 때의 선구안은 좀 차이가 있다.
올 시즌 123삼진이 그 증거, 볼을 고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선수인데 가끔 어이없는 공에 배트가 딸려 나온다.
저것만 고쳐도 삼진이 줄고 훨씬 더 좋은 선수가 될 수 있을 텐데, 같은 장면을 5년 동안 보고 있으니, 안타까운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다시 바깥쪽, 참아냅니다. 카운트는 원 볼 원 스트라이크”
“디즌은 절대 서두르면 안 됩니다. 또 당하면 바보 되는 거죠.”
보스턴 지역 해설위원 피트 오어는 나름대로 해법을 제시했다.
오늘 볼티모어의 선발로 나선 마틴 그레이는 땅볼 유도 비율이 높은 투수, 그만큼 바깥쪽 제구 비율도 높다.
그렇다면 이런 투수는 핀 포인트 제구력을 갖췄을까? 답은 아니다.
다카기처럼 구위와 제구력을 겸비했다면 모를까, 어정쩡한 투수는 정면 승부가 불리하기 때문에 볼넷을 주더라도 좋은 공은 거의 못 준다.
바깥쪽을 던질 줄 안다고 해도 마틴 그레이의 투구는 볼넷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스타일,
그걸 알고 있다면 알 디즌이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정신 차리자.’
3구를 골라낸 디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는 공이 형성되는 탄착군 자체를 바깥쪽으로 옮긴 것뿐, 의도적으로 떨어트리는 공을 제외하면 투구는 대부분 바깥쪽에 형성될 수밖에 없다.
탄착군 자체를 바깥쪽으로 옮겼는데 몸 쪽 승부가 될까? 다카기처럼 좌우를 찌를 수 있는 실력자가 아니라는 뜻, 보스턴 타선이 4회까지 안타 6개를 때려낸 건 우연이 아니다.
이걸 알고도 못 친다는 건 타자의 실력이 부족하다는 뜻, 알 디즌도 그레이의 약점은 알고 있었지만 자기도 모르게 의욕을 앞세웠다.
냉정함만 유지한다면 못 칠 공이 아니지 않은가. 차분하게 다음 공을 기다렸다.
따아악 ~ !!
“잡아당긴 타구가!! 우중간으로 높게!! 떠서!! 담장을 넘어갑니다!!!! 알 디즌의 동점 솔로 홈런!! 보스턴도 홈런으로 바로 반격에 나섭니다!!”
“이게 디즌의 원래 모습이죠!! 모두가 원했던 장면입니다!!”
보스턴은 디즌의 홈런으로 숨을 골랐다.
하지만 이제 겨우 1대 1, 후속타자들이 연달아 땅볼로 물러나면서 추가 득점에 실패했다.
5회까지 안타를 7개나 때려냈는데 겨우 1득점, 예전만 못한 공격력에 브라이스 감독의 마음은 초조해졌다.
‘이대로는 못 내려가지.’
댈러스 레이븐은 시위라도 하듯 6회까지 위력투를 펼쳤다.
피홈런 하나 제외하면 나무랄 게 없는 투구, 교체가 잦은 감독에게 그런 건 꿈도 꾸지 말라는 경고를 보냈다.
따악 ~ !!
하지만 7회 들어 선두 타자에게 안타를 허용, 병살 상황이 되자 내야진은 서로 사인을 주고받았다.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알았어.’
일단 2루수 제임스 올슨은 제법 깊숙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수비 범위는 누구보다 자신 있는 편, 자신이 커버를 들어가야 할 상황이 일어나도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유격수 주앙 고메즈는 평소 자리를 유지, 여차하면 본인이 직접 2루를 찍고 1루 송구까지 할 마음도 있었다.
‘이건 도박인데’
애송이들의 독단에 브라이스 감독은 반신반의하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이 작전이 마냥 나쁜 건 아니다. 2루수가 깊은 곳에 자리를 잡은 만큼, 유격수가 책임져야 할 수비 범위는 넓어진다.
당연히 타자는 타구를 좌측으로 보내려고 하겠지, 이러다 타구가 3루 쪽으로 향하면 유격수가 커버를 들어가면서 병살로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3루는 강한 타구가 많이 나오는 위치, 거기다 지금은 유격수의 수비 부담을 안고 가는 작전이다.
잘 해주고 있지만 아직 1년 차인 애송이가 어쩌자고 이런 모험을 택했을까.
모험을 좋아하지 않는 브라이스 감독은 별로 권장하지 않는 수비, 유격수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2루수 올슨에게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오라는 주문을 넣었다.
따악 ~ !
하지만 사인이 닿기도 전에 시작된 투구, 타구 방향은 2루지만 유격수 쪽으로 쏠렸다.
여차하면 고메즈가 잡아 직접 태그 하고 1루로 던질 수 있는 상황, 눈치를 살피던 올슨은 알아서 퇴장, 뭣보다 이제 와서 뛰어봤자 커버할 거리가 아니었다.
‘어?! 어?!’
여기서 참극이 벌어졌다.
정말 평범한 타구였는데 글러브를 맞고 옆으로 튄 공, 그제야 올슨은 허겁지겁 달려가 공을 주워들었다.
하지만 이미 상황 종료, 결정적인 실책을 범한 고메즈는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했다.
잡기만 했어도 병살이었는데, 동료들에게 너무 미안해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다들 모여 봐.’
브라이스 감독은 급히 마운드로 달려갔다.
실책은 어쩔 수 없지만 지금부터가 중요, 어린 선수들을 다그쳐봤자 무슨 소용인가. 하지만 본인이 뭘 해야 하는지 집중하라는 잔소리는 덧붙였다.
“난 자네 이번 이닝까지 지켜볼 거야.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전력을 다하라고”
“알겠습니다.”
“자네들도 마찬가지야. 기죽지 말라고”
내야수의 수비 위치는 대부분 선수의 감으로 결정해야 한다.
결과가 안 좋았을 뿐 나름 괜찮았던 작전, 브라이스 감독은 잘잘못을 따지는 게 의미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실책으로 바닥에 떨어진 고메즈의 자신감, 실책이 한두 번도 아닌데 오늘은 특히 포스트 시즌 진출이 걸린 경기라 정신적 충격이 제법 컸다.
‘할 말이 없네.’
다카기는 벤치에서 머리를 긁적거렸다.
올 시즌 고메즈의 수비율은 0.952, 그렇게 높은 수치는 아니지만 메이저리그에서 수비율은 큰 의미가 지표다.
수비 범위가 넓을수록 불리해지는 필딩률, UZR, DRS가 보편화 되면서 전문가들이 수비를 평가하는 눈이 달라졌다.
방금 전 상황도 그렇다. 처음부터 유격수의 부담을 안고 시작한 수비, 그런데 고메즈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있을까. 결과가 안 좋았을 뿐, 과정까지 책망할 이유는 없었다.
‘정신 좀 차려라.’
다카기는 박수로 고메즈의 주목을 끌었다.
어깨가 넓은 선수가 넓은 수비 범위를 책임지는 건 절대 나쁜 게 아니다. 오히려 권장해야 할 일, 실책 하나에 벌벌 떨면 어떻게 유격수를 하겠나.
올해보다는 내년, 내년보다는 그 다음이 기대되는 선수, 기죽지 말라는 사인을 보냈다.
따악 ~ !!
마침 유격수 쪽으로 날아오는 타구, 고메즈는 순간 멈칫했지만 전력을 다해 추격에 나섰다.
이번에는 글러브에 걸린 공, 중심이 약간 기울었지만 베이스 커버를 들어온 2루수 올슨에게 노 룩 송구를 날렸다.
“2루!! 다시 1루에서 ~ !! 아웃입니다!!!! 더블 플레이!! 2사 주자 3루로 바뀝니다!!”
“팬들을 들었다 놨다 하네요.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팬들의 박수와 응원이 쏟아졌지만 고메즈는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안 좋은 건 잊어버려야 되지만 계속 생각이 나는 실책, 뭣보다 주자가 3루에 있으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따악 ~ !!
“아악!! 악!!!!”
레이븐은 마지막 위기를 넘지 못했다.
중견수 앞에 떨어지는 타구, 투수의 안타까운 괴성의 사방으로 울려 퍼지면서 분위기는 다시 가라앉았다.
“아직 끝난 거 아니다!! 남은 아웃 하나 잘 막자!!”
다카기는 아쉬움을 억누르고 응원의 목소리를 높였다.
아직 3번 남은 공격 기회, 마지막까지 정신 줄 놓지 말라며 애송이들을 독려했다.
7번 타자 주앙 고메즈부터 시작하는 타석, 마음의 빚이 남은 고메즈는 초구부터 거친 스윙을 돌렸다.
따악 ~ !!
“아 ~ 이 타구가 정면으로 가는군요. 1루에 송구하면서 아웃됩니다.”
“오늘 고메즈는 안 풀리네요. 물론 오늘 안타가 하나 있지만, 타구 질에 비해 결과가 안 좋습니다.”
1루를 지나친 고메즈는 헬멧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되는 게 없는 하루, 하지만 바로 헬멧을 주워들고 터벅터벅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이상할 정도로 야수 정면으로 가는 타구, 어 ~ 어 ~ 하는 사이 7 - 8회가 지나가 버렸다.
이제 남은 공격 기회는 9회뿐, 지구 1위 탬파베이는 이미 승리를 거뒀다. 여기서 패하면 격차는 2경기로 벌어지고 지구 우승도 그대로 안녕, 설마 이대로 포스트 시즌과 이별하는 건가.
5년 연속 월드시리즈 우승을 맛본 보스턴 팬들은 설마 하는 얼굴로 마지막 공격을 지켜봤다.
하지만 첫 두 타자는 모두 범타, 오늘 멀티 히트가 있는 스티브 도허티에게 기대를 걸었다.
“아 ~ 여기서 고의사구를 택하는군요.”
“당연한 일이죠. 굳이 도허티를 상대로 정면승부 할 이유가 없습니다.”
보스턴 팬들은 야유를 퍼부었지만 볼티모어는 아랑곳하지 않고 고의사구를 택했다.
우리는 어차피 포스트 시즌 못 가지만 그렇다고 보스턴이 나가는 것도 마음에 안 드는 일, 이렇게 보스턴의 2020시즌 운명은 고메즈의 손에 떨어졌다.
만 18세 선수가 감당하기엔 조금 벅찬 상황, 이겨내면 영웅, 고메즈는 초구부터 스윙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