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불경기는 투잡으로 - (10)
“다시 바깥쪽! 높게 들어옵니다. 삼진! 오늘 경기 5번 째 탈삼진을 잡아내고 있습니다.”
“오늘은 유독 빠른 볼 승부가 많네요. 뭔가 이유가 있을까요?”
“글쎄요. 제가 올 시즌 다카기 선수의 빠른 볼 피안타율이 약간 높다는 설명을 드렸는데, 오히려 빠른 볼로 몰아붙이고 있네요.”
삼진 퍼레이드에 피트 오어는 약간 머쓱한 반응을 보였다.
다카기 하면 빠른 볼도 유명하지만 타자의 타이밍을 뺏는 고속 슬라이더와 체인지업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런데 올 시즌은 예전처럼 빠른 볼 비율이 더 높아진 느낌, 거기다 평균 구속도 97마일 정도를 유지했다.
불펜도 아니고 이렇게 던져도 되는 건가. 하지만 다카기는 보란 듯이 4회까지 뉴욕 타선을 무실점으로 틀어막았다.
‘나는 안 될 거야. 아마도 … ’
댈러스 레이븐은 이 무식한 투구 앞에 혀를 내둘렀다.
레이븐도 최고 166km를 던지는 만큼 구위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문제는 지속력, 레이븐은 1 ~ 3회까지는 98마일 이상을 유지하지만 그 이후는 94 ~ 95마일 정도로 구속이 떨어진다.
그런데 97마일을 계속 던지는 저 인간은 도대체 뭔가. 완급조절의 문제인지, 아니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감이 안 잡혔다.
‘지금이 적기인가.’
경기가 7회에 접어들자 브라이스 감독은 교체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브라이스 감독은 투구 수를 철저하게 관리하는 스타일, 다카기가 아직 신인이었을 때도 어지간하면 95개를 넘기게 하지 않았다.
감독의 성향을 잘 알고 있는 다카기는 후반에 페이스를 끌어올리는 투구에 익숙해 졌고, 그런 과정이 반복되다 보니 던질수록 구속이 오르는 투수라는 오해를 샀다.
사람이 던질수록 구위가 올라가는 게 말이 되나, 7회 들어 100마일을 3번이나 찍었지만 브라이스 감독은 투구 수가 98개가 되자 바로 마운드로 향했다.
‘싸워봤자 의미 없겠지.’
시즌 8승 요건을 충족하고 내려오는 마운드, 사방에서 팬들의 박수가 쏟아졌지만, 다카기는 덤덤한 얼굴로 수건을 머리에 뒤집어썼다.
꼭 퍼펙트를 해야 성이 풀리는 건 아니지만 왠지 내 주권을 침해당한 느낌, 이건 다카기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다.
스포츠 전문 주간지 조사에 따르면 약 60%의 선발투수가 투구 수 제한이 지나치다고 응답했다.
보스턴은 특히 과잉보호가 심한 편, 뉴욕의 선발 투수 투구 수가 99.2개에 달하는 반면, 보스턴은 86.4개 밖에 안 된다.
이게 정말 맞는 건지, 보스턴은 왜 선발투수가 성장을 못하는 건가.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불펜을 중시하는 감독의 스타일도 문제, 너무 많은 투구는 좋지 않지만 실전도 연습의 연장, 최대한 많은 투구를 해봐야 투수도 뭔가 느끼는 게 있을 거 아닌가.
다카기는 그나마 나은 편이지 어지간한 선수들은 90개도 못 채우고 내려가는 지경, 이게 어린 투수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감독은 생각해 봤을까?
다음 날, 다카기는 감독에게 정식으로 반기를 들었다.
“오늘은 좀 오래 던지게 해주시죠.”
“그게 무슨 소린가?”
“과잉보호 하지 마시라고요.”
다카기는 오늘 선발로 나서는 레이븐에게 최소 100개는 던지게 해주라고 권했다.
일반 선수가 이런 말을 했다면 항명으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다카기는 이제 캡틴이라 감독에게 정식으로 건의 할 권리가 있었다.
레이븐은 왜 후반에 들어설수록 구위가 떨어지는 걸까. 85개를 겨우 넘는 평균 투구 수, 조금 흔들리면 감독이 내려버리니 완급조절 없이 전력을 다한다.
다카기도 투구 수 제한을 받긴 하지만 후반에 페이스를 끌어올리는 반면 레이븐은 초반에 달려버리는 편, 이런 식이라면 성장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제발 부탁이니까 100개까지만 지켜봐주세요.”
“뭐 … 알겠네. 자네 뜻이 그렇다면 … ”
감독의 약속을 받아낸 다카기는 레이븐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예상도 못한 전개, 레이븐은 그게 정말이라며 거듭 되물었다.
“감독님한테 얘기해 뒀으니까 오늘은 마음 놓고 던져봐.”
“알았어.”
레이븐은 약간 들뜬 마음으로 마운드에 올랐다. 유망주라고 마이너리그시절부터 철저하게 관리를 받았는데, 솔직히 투구 수 제한 없이 마음 놓고 투구를 해 본 기억이 없다.
속마음을 털어놓고 싶었지만 상대는 월드시리즈 우승 7회를 달성한 명감독, 내 말에 귀를 기울여줄까. 그런데 그 말을 캡틴이 대신 해 줄 줄이야. 적극적으로 표현 하진 않았지만 너무 고마웠다.
“자, 댈러스 레이븐 선수가 시즌 15번째 등판에 나섭니다. 올 시즌 5승 3패, 평균자책점 3.69, 63과 1/3이닝 동안 볼넷 27개, 탈삼진은 73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구위는 뛰어난데, 아직 갈 길이 멀죠. 뉴욕과는 이번이 2번 째 등판인데, 어떤 투구를 보여줄지 기대가 됩니다.”
레이븐은 선두 타자 모리슨을 상대로 몸 쪽 승부를 택했다.
모리슨은 올해도 3할 200안타 20홈런 이상을 노리는 뉴욕의 주포, 만만치 않은 상대지만 몸 쪽에 약하다는 다카기의 조언을 참고했다.
3루 땅볼로 산뜻하게 출발하는 경기, 레이븐의 성장을 바라는 다카기는 박수를 치며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힘을 조금 남겨둬야 하나?’
하지만 애송이는 곧 혼란에 빠졌다.
마이너리그 시절부터 철저한 관리를 받았으니 초반에 페이스를 끌어올리는데 익숙해져 있다.
조절을 하긴 해야 되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다음 타자 프리츠에게 93마일 공을 던졌다가 2루타를 두들겨 맞았다.
‘계속 던져봐야지, 이건 답이 없음’
하지만 다카기는 박수를 치며 응원을 보냈다.
완급조절에 딱히 비결은 없다. 많이 던져보다 보면 저절로 익히는 기술, 올 시즌 콜 업 된 선수에게 뭘 더 바라겠나. 그동안 과잉보호를 받았으니 가끔은 땅바닥에 굴러봐야겠지, 하지만 평소 성격이 느긋한 브라이스 감독은 투수 교체만큼은 칼처럼 냉정했다.
‘교체해야 되는데 … ’
6회 초, 2대 3으로 뒤진 뉴욕의 공격, 레이븐은 선두볼넷을 내줬다.
투구수는 이제 84개 평소라면 교체했겠지만, 브라이스 감독은 100개까지만 지켜봐 달라는 약속이 마음에 걸렸다.
따악 ~ !!
“아, 이 타구는 좌중간에 떨어지는군요. 무사 주자 1 - 2루가 됩니다.”
“글쎄요. 불펜이 몸을 풀고 있긴 한데 … 아, 나오나요?”
마침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브라이스 감독, 이때 캡틴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잠깐!! 지금 어디 가요?!! 어디?!!”
급브레이크가 걸린 발걸음, 브라이스 감독은 다시 앞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다카기는 바로 제동을 걸었다.
“제발 좀 지켜보라고요!! 네?!! 부탁입니다!!”
망설이던 브라이스 감독은 다시 더그아웃으로 들어왔다. 오늘 따라 유독 우렁찬 목소리, 튀어나오는 감독을 보고 흠칫했던 레이븐도 캡틴의 목소리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여기서 무너지면 면목이 없지.’
레이븐은 집중력을 바짝 끌어올렸다. 저렇게 믿어주는데 무너지면 나는 뭐가 되나. 남아 있던 힘을 모두 끌어냈다.
“스윙!! 헛칩니다. 98마일!! 구위는 건재합니다.”
“경기 후반인데 구속이 유지되네요. 평소라면 약간 떨어지는 모습을 보였을 텐데, 좋은 신호입니다.”
레이븐은 다음 공도 98마일로 밀어붙여 파울을 이끌어 냈다.
주자가 2루에 있으니 공이 빠져도 바로 실점으로 이어지진 않겠지, 스위핑 커브를 결정구로 삼았다.
스위핑 커브는 커터와 슬라이더의 조상 쯤 되는 구질, 우타자 기준으로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궤적을 그리는데 제대로만 던지면 땅볼 유도에 적합했다.
딱 ~ !!
잡아당겼지만 깊은 타구, 평소 실책을 연발하던 주앙 고메즈는 중심이 쏠린 자세에서 정확하게 3루 송구를 마쳤다.
이어지는 2루, 1루 송구, 삼중살을 노렸지만 타자 주자는 1루에서 살면서 더블 플레이에 그쳤다.
그래도 좋았던 플레이, 병살타에 힘을 얻은 레이븐은 다음 타자를 내야 플라이로 잡아내고 6회를 마무리 했다.
투구수는 89개, 감독은 약속했던 100개를 채워줄 것인가. 다카기는 계속 눈빛으로 감독을 압박했다.
“자, 레이븐 선수가 7회에도 마운드에 오릅니다. 오늘은 좀 지켜보는군요.”
“평소 브라이스 감독의 스타일을 생각하면 벌써 내려갔어야 했는데, 오늘은 구위가 좋으니 좀 더 지켜보는 것 같습니다.”
레이븐은 7회에도 좋은 투구를 이어갔다. 구속은 96마일로 약간 떨어졌지만 타자를 상대하기엔 충분한 구질, 그래도 걱정이 됐는지 호프만 포수는 스위핑 커브로 맞춰 잡는 리드를 앞세웠다.
‘그냥 던지게 하지 뭘 … ’
하지만 다카기는 이 리드가 마음에 안 들었다.
마침 투수 코치도 같은 생각, 코치가 뒤에서 지시를 주자 다카기는 손짓으로 호프만에게 사인을 보냈다.
“와아아 ~ !!”
투 볼 투 스트라이크에서 레이븐은 96마일 빠른 볼로 헛스윙을 이끌어 냈다. 확실히 싹이 보이는 선수, 투구 수가 100개를 넘겼지만 브라이스 감독은 그냥 지켜봤다.
“됐어!!”
투 아웃에서 조 프리츠를 땅볼로 처리한 레이븐은 가슴을 치며 포효했다. 이게 얼마만의 7이닝 투구 인가. 마이너리그에서도 거의 없었던 경험, 내 자신이 너무 자랑스러웠지만 끝까지 믿어준 사람들에게도 감사를 표했다.
“나한테 고마워할 것 없네.”
브라이스 감독은 공을 다카기에게 돌렸다.
평소라면 6회가 끝나기도 전에 내렸을 텐데, 그걸 막아선 사람이 누구인가. 이젠 에이스에 코치, 감독 노릇까지 하는 선수, 실력뿐만 아니라 리더십도 인정해야 했다.
하지만 다카기는 덤덤한 반응, 7이닝 투구는 레이븐이 했는데 왜 내가 칭찬을 받아야 하나,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며 저리 밀어냈다.
따아악 ~ !!
“이 타구는 좌측으로 멀리!! 담장 너머로 사라집니다!! 주앙 고메즈의 솔로 홈런!! 시즌 6번째 홈런입니다!!”
“추가점이 필요할 때 쳐주네요. 이 기세라면 올 시즌 10홈런 넘기겠는데요?”
이어지는 보스턴의 7회 말 공격, 주앙 고메즈는 4대 2로 달아나는 솔로 홈런을 기록했다.
어제는 실책을 남발하더니, 오늘은 호수비에 홈런까지, 이 정도면 내 경기엔 대놓고 태업하는 거 아닌가.
속이 쓰렸지만 그래도 다카기는 고메즈를 칭찬해줬다. 어린 선수들이 성장한 만큼 밝아지는 보스턴의 미래, 지금 좀 못하면 어떤가. 성장하면 나중에 덕을 보는 날도 오겠지. 그러려니 받아들였다.
이날 경기는 5대 2 보스턴의 승리로 종료, 5연승을 달린 보스턴은 지구 1위 탬파베이와의 격차를 3경기로 좁혔다.
5할을 넘기기 어려웠던 초반에 비하면 놀라운 기세, 브라이스 감독은 기쁨을 감춘 채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다.
“어제 다카기 선수는 98개 만에 내렸는데, 레이븐은 103개를 던지도록 한 이유가 있습니까?”
“사실 6회에 내리려고 했는데, 다카기가 막아섰습니다.”
브라이스 감독은 당시 상황을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했다.
감독이 일개 선수에게 막혀 투수 교체를 못하다니, 메이저리그 역사상 이런 일이 있었던가. 하지만 브라이스 감독은 사실이라며 대화를 이어갔다.
“저는 이제 바지사장입니다. 선수 영입은 단장이 하고 경기는 선수들이 하고 교체는 캡틴이 알아서 하고 있죠. 제가 여기 있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누가 들으면 오해하기 딱 좋은 발언이지만 다 웃자고 하는 말, 하지만 보스턴 여론은 차기 감독은 다카기로 확정된 거 아니냐며 쓸데없는 논란을 부추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