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화. 불경기는 투잡으로 - (9)
“넌 어떤 집에서 살아?”
“갑자기 그건 왜?”
“아니, 연봉 4천만 달러 받는 선수는 어떤 집에서 사나 궁금해서”
어느덧 7월에 접어든 시즌, 평소처럼 클럽하우스에서 평온한 나날을 보내던 다카기는 고메즈의 질문에 시달렸다.
고메즈는 부자 집안은 아니지만 평범한 가정에서 그럭저럭 부족할 것 없이 자랐다. 하지만 메이저리거가 된 이상 언젠간 영화 속에 나오는 저택에서 살아 봐야겠지, 일단 연봉 끝판왕인 다카기의 집이 궁금했다.
“궁금하면 직접 찾아보던가.”
“검색해 봐도 안 나오던데?”
다카기의 대저택은 여론에 공개가 안 됐다.
일단 위치가 도심과 제법 떨어져 있고, 시즌이 끝나면 바로 일본으로 날아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기자들의 접근이 용이한 일본의 친가가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친가만 해도 허걱 소리 나는 고급 저택이지만 미국에 있는 저택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 그래도 18살짜리 애송이 앞에서 쓸데없는 자랑은 하지 않았다.
“구경 좀 시켜줘. 그래야 나도 자극을 받을 거 아냐.”
“그럼 이거 봐라.”
다카기는 집 안에서 식구들과 찍은 사진을 공개했다.
서재에서 책을 읽는 평범한 일상, 하지만 고메즈는 금으로 도색된 천장에 시선을 빼앗겼다. 서재부터 범상치 않은 포스, 다음 사진은 더 놀라웠다.
“이거 식탁 비싸 보이는데?”
“내가 산 거 아니야.”
“그래도 가격은 알고 있을 거 아냐?”
“전 주인이 5만 달러(약 6천만 원) 주고 맞췄다고 들었어.”
고메즈는 경악했다. 식탁만 해도 우리 집 값의 1/4, 물론 이건 애교 수준이었다.
영화관 스피커 가격은 대략 20만 달러, 스피커와 식탁을 합쳐도 고메즈 가족이 사는 집은 가뿐히 넘어섰다.
하지만 이건 다 전 주인이 쓰라고 남겨두고 간 가구, 다카기가 직접 산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내 손으로 장만한 게 있다면 야외 온천뿐, 아내가 온천을 좋아하기에 아예 집에 들였다.
‘부럽다!! 으 ~ 으 ~ ’
고메즈의 눈은 질투와 야욕으로 불타올랐다.
역시 성공한 스타는 다르다는 건가, 최저 연봉을 받는 선수에겐 꿈속의 궁전 같은 배경, 더는 보기 어려웠는지 고메즈는 휴대폰을 주인에게 넘겼다.
“더 안 보냐?”
“안 볼래, 나랑 너무 비교돼서 싫어.”
“보여 달라고 한 건 너잖아, 왜 멋대로 삐치고 그래?”
생각할수록 웃긴 자식, 어쨌든 하루 일과를 마친 다카기는 집으로 향하는 차에 올랐다.
도심과 조금 떨어졌지만 나름 고즈넉한 분위기, 제법 늦은 시간이지만 아들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아빠 품에 뛰어들었다.
“오늘 재미있게 놀았어?”
“아니요. 엄마가 밖에서 못 놀게 해요.”
장남 타다요시는 아빠에게 푸념을 늘어놨다.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 키리코는 아들이 집 밖에 나가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잘못하다 길이라도 잃으면 어쩌나, 덕분에 타다요시는 338평짜리 감옥에 감금된 신세가 됐다.
‘이렇게 집이 넓은데도 답답한 건가?’
다카기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집이 어지간한 운동장 급인데 답답하다니, 역시 아이들은 밖에서 뛰어노는 게 최고인가.
캡틴으로서 집 밖의 어린애들을 챙겨야 하는 입장이지만 집안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그럼 아빠가 놀아줄게.”
“정말요?”
“놀아달라고 기다린 거 아냐?”
속마음을 들켰는지 헤헤 거리는 아들, 다카기는 농구 코트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 저택은 1980년대를 풍미했던 NBA의 스타 래리 캣 맨이 살던 곳이다. 한때 땅 값만 300억이 넘었던 대저택, 하지만 본인 입맛대로 꾸미다 보니 인기가 없어졌고, 나중에 떨이로 내놨지만 아무도 사질 않았다.
자연스럽게 여론의 관심에서 멀어진 저택, 그렇게 12년 동안 주인도 찾지 않는 빈집으로 남았다.
그걸 넙죽 집어 먹은 게 다카기, 여론은 보스턴을 대표하는 스타가 여기로 이사한 걸 아직도 모르고 있다.
래리 캣맨은 뛰어난 선수였지만 유독 선수시절 우승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 선수의 저택을 월드시리즈 5연패를 달성한 다카기가 거뒀다니, 기자들이 가만히 있을까.
올 시즌 우승을 못하면 저주의 저택이니 뭐니 하면서 온갖 험담을 늘어놓겠지, 하지만 저택에 무슨 죄가 있겠나.
다카기는 싼 값에 매수한 집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철썩 ~
“우와 ~ ”
다카기는 꽤 먼 거리에서 슛을 적중시켰다.
그런 아빠를 바라보는 아들은 그저 입을 떠억 벌릴 뿐, 우리 아빠는 못 하는 운동이 없는 건가. 존경심으로 반짝거리는 눈빛, 다카기는 보란 듯이 다시 한 번 슛을 적중시켰다.
“여보야, 언제 왔어?”
마침 감금의 주범이 농구코트에 들어섰다.
첫째가 문을 열어주는 동안 키리코는 잠을 설치는 둘째와 씨름을 벌이고 있었다. 남편이 온 것도 이제야 눈치챌 정도, 집은 마음에 들지만 사람이 와도 기척이 안 느껴지는 건 조금 무서웠다.
“방금 전에 왔어.”
“그럼 다녀왔다고 말 해야지, 귀신처럼 쑥 들어오면 어떻게 해. 무섭잖아.”
생긴 것처럼 겁이 많은 아내, 다카기는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아들에게 공을 넘겨줬다.
“너도 한번 해 볼래?”
“안 돼요. 너무 높아요.”
타다요시는 고개를 저었다. 공도 무거운데 이걸 어떻게 저기까지 던지나, 아빠는 어른이지만 나는 어린애라며 그럴듯한 논리를 앞세웠다.
“누가 슛 던지라고 했니? 드리블이라도 해 봐.”
“전 야구선수 될 거라 안 해도 괜찮아요.”
다카기는 헛웃음을 지었다.
농구코트에는 흥미가 없는 아들, 그렇잖아도 유행병 때문에 집안에 감금돼 있는데 놀이공간이라도 제대로 해줘야 하지 않을까, 여길 야구 연습장으로 바꿔주기로 했다.
“진짜 바꿀 거야?”
“어, 농구대 치우고 바닥 깔고 … 그렇게 하면 될 것 같네.”
아빠의 제안에 타다요시는 펄쩍 뛰며 좋아했다.
유일하게 마음이 안 드는 공간이 야구 연습장으로 바뀐다니, 정말 그렇게 해줄 거냐며 되물었다.
“아빠가 이렇게 큰 집도 샀는데 그 정도도 못 해주겠니?”
“와아이 ~ ”
좋다고 방방 뛰는 녀석, 미끄러운 농구코트에 살짝 미끄러졌지만 다시 중심을 잡고 이곳저곳을 들쑤셨다.
“너무 응석받아주지 마요.”
“그 말 그대로 반사”
다카기는 아내를 슬쩍 질책했다.
도심에서 떨어진 곳이니 엄마 입장에선 아들이 걱정되겠지, 하지만 펜스가 높게 쳐져 있어 야생 동물이 정원으로 들어올 염려는 없다.
정원에 수영장도 있고 놀 거리가 얼마든지 있는데 왜 집안에만 가둬두려는지, 과잉보호도 별로 좋지 않다는 논리를 앞세웠다.
“아니면 야구장을 정원에 만들어 줄까?”
“그것도 좋아요. 이마 ~ 안큼 크게 만들어 주세요.”
여자 마음은 모르고 죽이 잘 맞는 수컷 두 마리, 집안에 여자라곤 나밖에 없으니 키리코는 왠지 소외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엄마가 걱정하시니까 야구장은 집안에 만들자.”
“네에 ~ ”
애교는 없어도 눈치는 있는 다카기는 바로 방향을 수정, 덕분에 가벼운 기싸움은 평화롭게 막을 내렸다.
“일본으로 돌아가는 거 생각해 봤어요?”
이날 밤, 다카기는 이불 속에서 아내와 진지한 대화를 나눴다.
이미 의사 공부를 끝낸 아내, 이제 병원에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기왕이면 아버지가 원장으로 있는 병원에서 커리어를 시작하는 게 좋겠지, 하지만 키리코는 남편을 미국에 남겨두고 가는 게 싫었다.
“나 없으면 외롭지 않겠어요?”
“애들 위주로 생각해요. 나한테 맞추지 말고”
다카기는 아내가 일본으로 가길 바랐다.
학창시절부터 수재로 이름이 높았던 아내, 지금은 의사 데뷔를 앞두고 있다. 여기서 의사 생활을 하려면 애들은 남의 손에 맡겨야 하는데 그건 믿음직스럽지 못했다.
일본이라면 돌봐 줄 사람도 많고 안심하고 직장을 다닐 수 있겠지, 하지만 키리코는 고민을 거듭했다.
“나는 솔직히 여보하고 떨어지는 거 싫어요.”
“그럼 의사 포기할 거예요?”
“그건 … 모르겠어요.”
남편하고 떨어지기는 싫고 그렇다고 의사는 포기하기 아쉽고, 의사를 하면 애들은 누군가가 봐야 하는데 이래저래 복잡한 상황이다.
그동안 내색은 안 했지만 갈등의 연속, 다카기는 아내의 입장을 최대한 배려했다.
“난 당신이 무슨 길을 택하든 존중할 거예요.”
“정말요?”
“네, 그러니까 마음 가는 대로 해요.”
키리코는 이불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고맙긴 한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 건지, 한참을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나 의사 안 할래요.”
“왜요?”
“환자들 상대하는 것보다 가족하고 있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정말이에요? 나중에 후회해도 난 몰라요?”
“그러니까 후회 안 하게 날 즐겁게 해 줘요.”
다카기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결국 죽을 때까지 가장 노릇 하라고 하는 것 아닌가. 야구 선수 커리어는 길어봤자 40대지만 의사는 그 이상, 나중에 아내에게 가장의 책임을 지울 생각이었는데 실패로 돌아갔다.
‘그래, 힘내야지. 어쩌겠어.’
다음 날, 다카기는 출근길에 올랐다.
내가 열심히 벌어야 가족들이 편할 거 아닌가, 평소처럼 홈팬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마운드에 올랐다.
“자, 오늘은 다카기 선수가 마운드에 오릅니다. 올 시즌 15경기 등판, 7승 2패, 평균자책점 2.31, 105이닝 동안 볼넷 12개, 탈삼진은 140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5월에는 승리가 없었는데 6월 이후 상승세를 타고 있죠. 팀도 지금 3연승을 달리고 있기 때문에 그 기세를 이어가 줘야 합니다.”
다카기는 첫 타자를 땅볼로 잡아내며 산뜻하게 출발했다.
하지만 본인은 만족하지 못한 표정, 작년에 비하면 탈삼진 페이스가 조금 떨어져 있다.
작년 성적은 9이닝 당 13.5K, 그런데 올 시즌은 12.0K로 떨어졌다.
지금도 훌륭한 수치지만 애송이들이 뒤에 서 있다는 걸 고려하면 아쉬운 성적, 조금 더 삼진에 집중했다.
따악 ~ !!
“아 … 이 타구가 내야를 벗어나는군요. 오늘 첫 피안타를 허용합니다.”
“다카기가 작년 시즌 빠른 볼 피안타율이 0.222 밖에 안 됐거든요. 그런데 올 시즌은 0.241로 약간 높은 편입니다. 뭐 … 그렇게 우려할 만한 수치는 아니지만 작년 시즌에 비해 타자들이 잘 대응하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안타가 나왔지만 호프만은 계속해서 빠른 볼을 요구했다.
투수의 BABIP은 운이 많이 작용하는 기록, 올 시즌 다카기는 BABIP 0.311을 기록하고 있다.
평균보다 약간 높은 수준, 그렇다고 지금 던지는 공이 치기 좋은 수준이냐? 그런 것도 아니다.
투수의 손을 떠난 순간 결과는 운에 맡겨야 하는 법, 9이닝 당 탈삼진율이 12나 되는 투수에게 도망치는 투구를 요구하는 건 바보짓이었다.
‘아 ~ 이걸 또!!’
잘 맞진 않았지만 유격수 옆을 빠져 나가는 타구, 한 박자 느린 타이밍에 스타트를 끊은 고메즈는 손바닥으로 바닥을 치며 아쉬움을 표했다.
이번에도 보이지 않는 실책, 이래가지고 언제 대저택을 사겠나.
요즘은 통계 전문가들이 눈에 불을 켜고 선수의 가치를 평가하는 시대, 고메즈는 스카우터 평가에서 수비 - 어깨 모두 80점 만점을 받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능성일 뿐이다.
지금 하고 있는 짓은 60점도 주기 어려운 수준, 뭣보다 에이스의 등판에서 석연치 않은 안타를 내주는 건 좋지 않았다.
‘나 한 번만 믿어봐. 제발’
고메즈는 배터리가 병살을 노리는 볼 배합을 하길 바랐지만, 다카기는 높은 빠른 공으로 헛스윙을 끌어냈다.
땅볼 유도와는 거리가 먼 볼 배합, 아니나 다를까 다카기는 남은 타자들을 모두 삼진으로 돌려세우고 이닝을 마무리했다.
‘네 덕 보는 건 아직 이르지. 난 아직 팔팔하다고’
다카기는 이날 철저하게 삼진 위주로 투구를 이끌었다.
고메즈를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저 녀석의 수비 실력은 아직 피라미 수준, 덕을 보는 건 나중이라며 철저히 외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