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화. 불경기는 투잡으로 - (8)
[보스턴 대 반격 시동?]
[최근 12승 4패 상승세]
보스턴은 6월 들어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부진하다 부진하다 욕을 먹었는데 어느덧 38승 26패로 승률 6할을 돌파했다.
우승을 이끌었던 주축 야수진이 대거 빠져나갔는데 이 정도라니, 비난을 일삼았던 보스턴 지역여론은 슬그머니 칭찬으로 돌아섰다.
젊은 선수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게 무엇보다 긍정적인 신호, 이들을 이끌어 줄 리더만 있으면 완벽했다.
“이미 정해진 거 아닌가? 다들 이견은 없겠지?”
“없습니다. 선수들도 동의하는 분위기입니다.”
수더랜드 단장은 내부 회의를 거쳐 다카기를 공식 캡틴으로 정하기로 정했다.
성적 부진과 셰퍼드의 돌발 이탈로 엉망이 된 보스턴 클럽하우스, 그걸 지탱해 준 사람이 누구인가.
예전부터 결정했어야 하는 일인데, 본인이 거부한 것도 아니고 그 당시 다카기는 캡틴 노릇을 하기엔 연차가 너무 부족했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도 반대하지 않겠지, 명분과 실리 모두 완벽한 타이밍 아닌가.
이제는 진짜 보스턴의 왕으로 즉위할 때, 망설임은 있었지만 다카기는 구단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투수가 캡틴이 된 건 이번이 처음, 그것도 보수적 성향으로 유명한 보스턴에서 일어난 일이다.
야구팬들의 관심이 집중된 캡틴 즉위, 올해는 유독 기자들을 멀리했던 다카기는 간만에 카메라 앞에 섰다.
“다카기 선수, 인터뷰는 정말 오랜만 아닙니까?”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으니까요. 그건 여러분들도 잘 아실 겁니다.”
어린 선수들이 욕을 먹는데 누군가는 방패막이가 돼야 할 것 아닌가.
그것도 모르고 던진 질문이라면 그냥 눈치가 없는 것, 척하고 알아들은 기자는 방향을 틀었다.
“보스턴은 지난 7년 동안 공식 캡틴이 없었습니다. 비어있던 자리에 오르셨는데 앞으로 어떻게 팀을 이끌어 가실 생각이십니까?”
“다들 아시겠지만 저는 그렇게 친절한 성격이 아닙니다. 동료들에게 듣기 싫은 소리도 자주 하는 편이죠.”
다카기는 캡틴에 오르기 전 동료들에게 동의를 구했다.
예전에도 친절하진 않았지만 캡틴이 되면 더 냉정해 질 거라는 선언, 동료들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부드러운 리더십과는 거리가 있는 스타일, 부족한 점은 감독이 채워주기로 했다.
“팀이 최근 상승세를 타고 있습니다. 올해도 월드시리즈 우승 자신하십니까?”
“글쎄요 … 하면 좋겠지만 지금 보스턴은 미래를 위한 재정비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이 끝나면 팀 기반은 더욱 굳건해지겠죠. 왕조의 역사에 언제나 영광만 있는 건 아닙니다. 가끔은 시련도 겪기 마련이죠. 저희는 지금 그 단계를 밟고 있을 뿐입니다.”
인터뷰를 마친 다카기는 평소처럼 더그아웃에 앉아 경기를 지켜봤다.
캡틴 취임 이후 첫 공식 활동, 일단 손이 많이 가는 녀석부터 신경 썼다.
“자, 주앙 고메즈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올 시즌 타율 0.254, 홈런 3개, 20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직 어린 선수라 콜 업이 조금 이르지 않나 하는 의견도 있었는데, 의외로 잘 적응하고 있습니다. 최근 수비도 많이 안정이 됐어요.”
해설위원들은 칭찬을 쏟아냈지만 다카기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스프링캠프에서 다카기는 고메즈에게 뒷다리 무릎을 조금 더 굽히는 스윙을 추천했다.
선천적으로 힘이 강한 선수가 아니라, 강한 타구를 날리려면 몸이 약간 굽혀지는 자세가 돼야 한다.
사실 하체를 움직이는 것보다 어깨 높이를 조정해서 스윙 각을 만들어 주는 게 최선이지만, 그런 스윙을 할 수 있는 선수가 얼마나 되겠나.
지금 하고 있는 스윙도 제대로만 소화하면 어느 정도 성과는 내겠지, 하지만 고메즈는 예상했던 문제점을 드러냈다.
‘주저앉으면 안 된다니까 … ’
무릎이 너무 가라앉으면서 홈 플레이트 쪽으로 쏠리는 상체, 풀스윙이 나쁜 건 아닌데, 저렇게 몸이 쏠려버리면 변화구에 대응이 어렵다.
아니나 다를까 그 점을 집중 공략하고 있는 배터리, 바깥쪽 빠른 볼을 보여준 뒤, 몸쪽으로 떨어지는 변화구로 잡아내는 패턴이 반복됐다.
‘잔소리하지 말자. 깨닫는 게 있겠지.’
언제까지 내가 코흘리개 입에 떠먹여 줘야 하나, 다카기는 참고 또 참았지만 고메즈는 똑같은 패턴에 당하는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타격 폼은 둘째 치고 볼 배합에 관심이 있긴 있는 건가. 경기가 끝난 후 바로 주의를 줬다.
“너 오늘 배터리가 무슨 공 던졌는지 기억하냐?”
“어 … 그게 … ”
“여기에다 적어 봐. 기억나는 대로”
고메즈는 종이 위에 뭔가를 끄적거렸다. 나도 기억이 잘 안 나는데, 그걸 다 기억한다는 건가. 답안지를 확인하는 캡틴의 눈치를 살폈다.
“으이그 ~ 이게 답이다 인마.”
다카기는 고메즈가 적은 답안지에 줄을 박박 긋고 정답을 적어냈다.
첫 번째 타석부터 마지막 4번째 타석까지 똑같았던 패턴, 고메즈는 그럴 리가 없다고 반박했지만 코치가 적은 기록지에 입을 다물었다.
“너 꿈속에서 야구하다 왔냐? 이게 뭐야 이게? 투수가 뭘 던졌는지도 기억 못 하는데 치는 게 이상하지.”
세상에서 제일 멍청한 학생은 한 번 틀린 문제를 또 틀리는 학생이다.
고메즈는 지금 그 짓거리를 한 셈, 많은 타자들이 빠른 볼에 타이밍을 잡고 변화구에 대응하는 단순한 타격을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왜 많은 선수들이 평소보다 일찍 출근해 비디오 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걸까. 상대 투수의 스타일을 철저히 분석하고 내 문제점이 뭔지 되돌아보는 것, 고메즈는 아직 루키라 데이터가 많이 쌓여있다고 할 순 없다.
하지만 이제 2달이 넘게 뛰었으니 상대팀도 어느 정도 데이터가 쌓였겠지, 배터리의 볼 배합이 그 증거다.
계속 당하면 어떻게 될까. 수비가 아무리 좋아도 공격이 안 되면 반쪽짜리 선수일 뿐, 공부 좀 더 하라며 충고를 줬다.
‘쉬운 게 하나도 없구나.’
다음 날, 고메즈는 평소보다 2시간 일찍 그라운드에 출근했다.
타격 폼도 손봐야 하고 배터리 볼 배합도 신경 써야 하는 숙제의 연속, 하지만 이 어린 나이에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는 선수가 얼마나 있을까.
FA를 늦추기 위해 고의적으로 콜 업을 지연시키는 구단도 있는데 그에 비하면 나는 행복한 입장, 계속 출장한다는 건 구단의 기대가 크다는 뜻 아닌가.
다카기도 그걸 알고 계속 관심을 주는 것, 진짜 가망성이 없는 선수라면 잔소리를 하지도 않았다.
‘또 틀리면 진짜 혼난다.’
절치부심하고 맞이한 2차전, 타석에 들어선 고메즈는 바깥쪽 빠른 볼을 지켜봤다.
‘어차피 이 공은 내가 칠 게 아니야.’
나는 무엇을 위해 스프링캠프에서 구슬땀을 흘렸는가. 고메즈는 이 물음에서 다시 출발했다.
오늘 선발로 나선 제임스 샘포드(오클랜드)는 최근 보기 드문 싱커볼러, 바깥쪽 빠른 볼을 던진 건 몸 쪽으로 떨어지는 싱커를 던지기 위한 준비단계다.
몸 쪽 공이라고 의도적으로 잡아당겨야 하나? 하지만 밀어치기와 당겨치기는 의도적으로 하는 게 아니다. 타격에서 그런 건 공 하나 차이, 특히 투수 구속이 빠른 메이저리그에선 더 어렵다.
지금 내가 해야 하는 건 자연스러운 스윙, 다른 건 생각하지 않았다.
따악 ~ !
“잡아당긴 타구!! 유격수가 막아서지만 글러브를 맞고 나옵니다!! 고메즈가 오늘은 안타를 추가하는군요.”
“내야 안타지만 타구 질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습니다.”
숙제를 해결한 고메즈는 한결 가벼운 표정을 지었다.
아쉬운 건 생각만큼 강한 타구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 그래도 무리하게 장타를 의식하진 않았다.
‘이제 살아났네.’
이어지는 보스턴의 매끄러운 공격, 다카기는 박수를 치며 동료들의 활약을 독려했다.
평균 6점을 내던 공격력은 이제 기대하기 어렵지만, 3점도 내기 어려웠던 4 ~ 5월을 생각하면 훨씬 나아진 방망이, 특히 알 디즌의 활약이 돋보였다.
5월 말까지만 해도 0.250, 0.330, 0.421에 그쳤던 성적, 그런데 6월 들어 사람이 바뀌었다.
최근 16경기 성적은 타율 0.343, 홈런 4개, 12타점, 타율도 0.273으로 제법 끌어올렸다. 홈런이 조금 아쉽지만(9개) 25개 정도는 쳐 줄 수 있는 페이스, FA 계약 첫 해에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았다.
‘내 실력은 이 정도가 아니라고’
하지만 알 디즌은 이 정도에 만족하지 않았다.
20홈런은 기본으로 쳤고 2년 전엔 30홈런도 넘겼다. 그런 내가 20홈런에 만족해야겠나. 나이 어린 선수들이 대거 들어선 만큼 내가 리드를 해줘야겠지, 오늘도 날카로운 타격감을 선보였다.
따악 ~ !!
“잡아당긴 타구가!! 라인 안 쪽에 떨어집니다!! 2루 주자는 홈으로!! 1루 주자도 3루를 돌아 홈으로!! 들어!! 옵니다!! 타자 주자는 2루까지!! 알 디즌의 2타점 적시타입니다!!”
“6월 들어 벌써 22타점이네요. 타율이 그렇게 높은 선수가 아닌데, 득점권에서만큼은 무서운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예전엔 울반스키가 이 역할을 해줬는데 지금은 디즌 선수가 그 기세를 이어받고 있네요.”
“원래 타격은 서로 부족한 점을 채워가는 겁니다. 물론 같이 터져주면 좋겠지만, 서로 돌아가면서 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해설위원이 하는 말을 들었는지 울반스키는 바로 좌중간을 가르는 적시타를 뽑아냈다.
순식간에 3대 0, 득점 지원을 받은 댈러스 레이븐은 호투를 이어갔다.
제구는 지금도 기복이 있지만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투구 내용, 특히 평균 98마일에 이르는 빠른 볼은 알고도 배트를 내기 어려웠다.
“몸 쪽 못 던지면 너 이 무대에서 바보 된다.”
레이븐은 다카기의 조언대로 몸 쪽 승부를 피하지 않았다.
구속이 느린 선수라면 바깥쪽을 집중 공략해야겠지만 강속구 투수는 그럴 필요가 없다. 내 구위는 하늘이 내려준 선물, 그 재능을 활용 못한다면 바보 아닌가.
가끔은 맞춰도 괜찮다는 조언을 떠올린 레이븐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진짜 던져 봐?’
마침 상대는 첫 타석에서 안타를 날린 피터 허스트, 다카기와 싸움을 벌이다 병원으로 실려 가고 한 달 만에 겨우 복귀했다.
그런데 여기서 몸 쪽을 던지면 싸우자는 거 아닌가. 그래도 지금은 던져야 할 타이밍, 99마일 빠른 볼을 박아 넣었다.
“엇?!!”
깜짝 놀란 허스트는 몸을 바짝 움츠렸다.
맞진 않았지만 등골이 서늘해지는 구위, 다음에도 이러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경고를 보냈다.
‘싫은데?’
맛이 들인 레이븐은 다시 몸 쪽을 던졌다. 조금씩 달아오르는 분위기, 기회를 엿보던 다카기는 보호 펜스 앞으로 나왔다.
불꽃이 튀면 전장으로 뛰어들 기세, 개막전에서 그 괴력을 온몸으로 맛봤던 허스트는 기를 억눌렀다.
또 덤빈다고 내가 이길 수 있는 상대인가? 레이븐과의 승부에만 집중하느라 다카기의 존재를 잊어버렸다.
‘이럼 우리가 이긴 거지.’
눈치를 살피던 호프만 포수는 바깥쪽 빠른 볼을 요구,
허를 찌르는 승부에 허스트는 루킹 삼진을 당했다.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슬라이더는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는데 이건 전혀 예상 못 한 패턴, 더그아웃에 비치된 물건을 걷어차며 울분을 표했다.
“Ok, 잘 했어.”
그 사이 다카기는 이닝을 마무리 짓고 내려온 레이븐을 칭찬했다.
가끔은 폭력도 무기가 되는 법, 다음에도 똑같이 승부하라며 용기를 불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