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248화 (248/361)

248화. 불경기는 투잡으로 - (7)

[데이브 셰퍼드 은퇴 선언]

그럭저럭 버텨가던 보스턴에 또 다른 악재가 겹쳤다.

팬의 도발에 울컥해 관중석에 난입했다가 10경기 출장 정지 처분을 받은 셰퍼드가 복귀를 앞두고 돌연 은퇴를 선언해버린 것, 통산 600홈런에 14개만 남겨둔 선수라 다들 납득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였다.

“욱해서 그냥 해 본 소리 아닙니까?”

“나도 잘은 모르겠네.”

다카기는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기자들이 근거 없는 소문을 토대로 기사로 쓰는 게 한두 번인가. 이번에도 그렇겠지, 하지만 출장정지 기간이 끝났는데도 셰퍼드가 돌아오지 않으면서 불안은 점차 현실이 됐다.

“더는 험한 꼴 보고 싶지 않다.”

셰퍼드는 정식으로 은퇴를 발표했다.

지금 은퇴해도 명예의 전당은 확정적, 우승도 보스턴에서 4번이나 했다. 그런 내가 뭐가 아쉬워서 퇴물이라는 모욕까지 참아가며 팬들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나. 올 시즌을 앞두고 보스턴과 2년 연장계약에 합의했지만, 위약금을 물고 파기해버렸다.

계약서에 서명을 했으면 책임을 져야지, 이게 프로 19년 차에 접어든 베테랑의 행동인가. 셰퍼드에게 실망한 다카기는 바로 항의 전화를 걸었다.

“이렇게 물러나면 떳떳하냐? 팬들은 둘째 치고 팀원들에게는 안 미안해?”

수더랜드 단장은 30대 후반에 접어든 선수에게 연장계약을 제시하며 600홈런에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줬다.

보스턴 팬들이 원래 그런 건 다들 아는데, 조금 일이 안 풀린다고 은퇴를 선언해버리다니, 그럼 그 공백은 어떻게 하라는 건가?

우승을 4번이나 함께 한 동료들에게도 못 할 짓, 하지만 셰퍼드는 더는 뛰고 싶지 않다는 입장을 반복했다.

“그래, 우리끼리 알아서 할 테니까 각자 갈 길 가자. 다시는 돌아올 생각하지 말고, 내 눈에 띄면 좋은 꼴 못 볼 거다.”

다카기는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말라며 완전한 이별을 선언했다.

셰퍼드는 한때 복싱을 한 선수라 싸움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지만, 배신감에 사로잡힌 다카기는 눈에 띄면 주먹부터 날아갈 거라고 경고했다.

어차피 일은 벌어졌고 수습은 해야겠지, 수더랜드 단장은 지명타자 공백을 두고 고민을 거듭했다.

1루를 보고 있는 울반스키를 지명타자로 돌리는 건 그렇고, 그렇다고 알 디즌을 지명타자에 세울까? 중견수 수비 능력 때문에 2억 2천 6백만 달러를 줬는데 지명타자로 돌리면 우리가 손해, 이 임무는 신인타자들에게 돌아갔다.

‘못해도 평균 이상은 쳐 줘야 되는데 … ’

하지만 그 자리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 선수들도 많았다.

지명타자는 정말 팀에 도움이 되는 존재일까?

wOBA(weighted On Base Average : 가중 출루율)을 계산해보면 작년 시즌 지명타자는 13포인트를 기록했다.

반면 대타를 투입했을 때 얻을 수 있는 wOBA는 20포인트, 즉 지명타자를 내세웠을 때보다 대타를 투입했을 때 효율성이 더 높았다는 뜻이다.

세이버메트리션들은 이런 점을 고려해 지명타자가 팀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근거로 활용하기도 하는데, 물론 셰퍼드처럼 3할에 30홈런 이상을 쳐 줄 수 있는 선수가 있다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그런 선수가 메이저리그에 몇 명이나 되겠는가.

작년 시즌, 메이저리그 지명타자 평균 성적은 타율 0.261, 출루율 0.314 장타율 0.434, 평균 타자들보다 높지만 지명타자가 이 정도 쳤다고 잘 했다고 칭찬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20홈런 쳐도 생산력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는 지명타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제 막 메이저리거의 첫 발을 내디딘 신인선수들에게 셰퍼드의 빈자리를 채우라는 요구는 조금 부담스러웠다.

“아무도 할 사람이 없나?”

“ ……… ”

“이건 자네들에겐 기회야. 잘 생각해 보라고”

브라이스 감독이 거듭 목소리를 높이자 한 선수가 손을 들었다.

올 시즌 시범경기에서 3홈런 10타점을 기록하며 오프닝 데이에 합류한 베논 리퍼드, 마침 셰퍼드가 퇴장했으니, 이건 내게 좋은 기회가 될 수 있겠지.

이렇게 새로운 지명타자가 결정됐다.

‘아직은 무리인가.’

하지만 리퍼드는 지명타자로 기용된 이후 타율 0.212를 기록했다.

타율이 낮아도 장타력이 따라주면 상관없는데 장타율도 0.313, 리퍼드는 2024년 상위 싱글 A에서 타율 0.333, 출루율 0.374, 장타율 0.584를 찍은 특급 유망주다.

상위 레벨로 올라가면서 타율이 떨어지는 건 당연하지만 장타율까지 떨어지는 건 곤란, 본인도 지명타자는 안 맞는 것 같다며 거리를 뒀다.

“기회는 얼마든지 줄 테니 조금 더 해 보는 게 어떻겠나?”

“아니요. 저는 이 자리하고 안 맞는 것 같습니다.”

선수에겐 루틴이라는 게 있다.

더그아웃과 필드를 오가며 긴장감을 유지하는 것도 루틴의 일부, 그런데 더그아웃에만 가만히 앉아 있으니, 리퍼드는 뭔가 리듬이 깨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브라이스 감독은 그 입장을 존중, 다른 선수를 찾아봤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그냥 내가 해 버려?’

다카기는 이 말을 하려다가 참았다.

재원들이 눈앞에 있는데 내가 지명타자를 해버리면 동료들을 무시하는 것밖에 더 되겠나. 하지만 셰퍼드의 빈자리는 생각보다 컸고, 타선의 동력을 잃어버린 보스턴은 순위경쟁에서 앞으로 치고 나가질 못했다.

가뜩이나 투수력도 떨어지는데 이젠 타선까지 말썽, 이게 정말 월드시리즈 5연패를 달성한 팀인가.

성적이 올라오지 않자 수더랜드 단장도 심리적인 압박을 받았다.

FA 계약에 구장 이전까지 얼마나 많은 돈을 썼나, 인내심 없는 팬들은 당장의 성적을 원하는데 이래서야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할 말을 잃었다.’

시간은 흘러 5월 27일, 그동안 쌓여있던 문제점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상대는 아메리칸 리그 최하위 팀 시애틀, 작년 전력이라면 가뿐히 밟아줬을 텐데, 보스턴은 7회까지 12대 1로 끌려가는 졸전을 벌였다.

선발진의 한 축이 될 것이라고 믿었던 레이븐은 제구력 난조를 보이며 4이닝 동안 볼넷 7개를 내주며 붕괴, 설상가상 그나마 믿을 만한 불펜까지 무너지며 수습할 수 없는 경기가 됐다.

다카기는 더그아웃에서 멍한 얼굴로 참극을 지켜볼 뿐, 하필이면 연봉 4천만 달러를 받는 시즌에 이런 불경기가 닥칠 줄 누가 예상이나 했겠나.

하지만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게 문제, 팀 성적은커녕 자기 성적 챙기기도 바빴다.

올 시즌 7경기에 등판했지만 거둔 승리는 2승 뿐, 세부지표는 나쁘지 않지만 작년과 비교해서 좋다고 할 수 없다.

일단 평균자책점이 2.54, 작년 기록(1.48)보다 무려 1이나 올라갔다. 이것도 대단한 수치지만 팬들 입장에선 납득이 안 된다는 분위기, 어쨌든 이날 보스턴은 시애틀에게 14대 1 패배라는 굴욕을 당했다.

“에잇 ~ !!”

채근성은 입구에 세워져 있는 쓰레기통을 발로 차버렸다.

예전엔 패배를 이렇게까지 분하게 여기진 않았는데, 작년에 보스턴에서 워낙 많은 승리를 거두다보니 이젠 패배가 어색해졌다.

‘찍어서 기사로 보내야지.’

보스턴 기자들은 이런 장면까지 찍어 기사로 내보냈다.

공은 못 치는 놈이 쓰레기통은 잘 찬다는 게 보스턴 팬들의 반응, 채근성은 울컥했지만 다카기는 신경 쓰지 말라며 다독였다.

“괜찮아. 졌는데 더그아웃이 조용하면 그게 이상한 거지. 안 그래?!!”

다카기는 방망이로 테이블을 내리치며 위협적인 분위기를 조성했다.

프로가 져서 화가 나는데 신경질 좀 내면 안 되나? 마침 클럽하우스 입구를 기웃거리던 기자들은 알아서 뒤로 빠졌다.

마음 같아선 클럽하우스를 통째로 날려버리고 싶은 기분, 동료들과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논의했다.

“질 수는 있어. 질 수는 있는데 … 어제 경기는 좀 아닌 것 같아”

에이스의 무거운 목소리에 선수들은 고개를 숙였다.

14대 1이라니, 적어도 최근 몇 년 동안 이런 참패를 당한 기억은 없다. 우리는 누구도 달성하지 못한 월드시리즈 5연패를 달성한 최강의 팀 아닌가.

이래선 안 된다는 목소리에 슬슬 반응이 왔다.

“네가 지명타자를 하는 게 어때?”

“뭐라고? … 지금 누가 말 한 거야?”

선수들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뭔가 화가 난 에이스의 얼굴, 범인도 이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누구냐고? 왜 말을 안 해?”

“이 자식이 말했어.”

리퍼드는 주앙 고메즈를 지목했다. 치사하게 일러바치다니, 고메즈는 눈앞까지 다가온 에이스의 얼굴에 흠칫했다.

“내가 지명타자를 보라니,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거냐?”

“아니 … 나는 그저 … 그러니까 … ”

“혼내는 거 아니니까 근거를 대봐. 들어줄게”

고메즈는 당황했지만 나름대로 논리를 앞세웠다.

다카기는 통산 0.315, 홈런 19개를 쳐낸 투수, 이 정도면 어지간한 타자들보다 나은 수준 아닌가. 아니, 오히려 훌륭한 수준, 아직 미숙한 신인들에 비하면 훨씬 낫지 않겠냐는 입장을 드러냈다.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얘들 체면은 생각 안 하냐?”

다카기는 고메즈에게 가볍게 주의를 줬다. 투수에게 타자를 하라고 하는 건 그 팀 야수들을 바보로 여기는 뜻, 막말로 내가 지명타자로 나가서 잘 치면 그동안 헛스윙을 돌린 신인들은 뭐가 되나.

그 짓은 내가 할 일이 아니라며 선을 그었다.

“너희들, 이런 말 듣고 부끄럽지도 않냐? 알아서 잘 해, 얼마 전 감독님이 말씀하셨지만,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오는 게 아니야. 단장 성격은 내가 잘 안다고”

신인선수들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지금 보스턴의 라인업은 전국시대 뺨을 갈길 정도로 변화무쌍하다. 명문 팀에서 이렇게 좋은 기회를 얻었는데, 투수가 대타를 봐야 한다는 말이 나와야겠나.

뭣보다 수더랜드 단장은 여차하면 돈을 풀 수 있는 사람, 신인들에게 언제까지 기회가 주어질지는 장담 못 했다.

‘집중하자 집중’

다카기에게 깨진 신인들은 다음 경기에서 놀라운 집중력을 선보였다.

어제 삼진 11개를 당하는 동안 볼넷은 한 개도 얻어내지 못한 타선, 하지만 오늘은 1회부터 볼넷 2개를 얻어내며 사뿐하게 출발했다.

오늘 선발 등판이 잡힌 다카기는 불펜에서 몸을 풀 뿐, 하지만 보스턴 선수들에게 그 존재감은 뚜렷했다.

[따악 ~ !!]

“걷어낸 타구가 … 중견수 앞에 떨어집니다!! 2루 주자는 일단 3루까지!! 무사 주자 만루가 됩니다!!”

“보스턴이 최근 6경기에서 득점권 타율이 0.221밖에 안 됐거든요. 어제는 5타수 무안타였는데, 어쨌든 오늘은 출발이 괜찮습니다.”

후속 타자 알 디즌은 신중하게 볼을 골랐다.

예전엔 5 ~ 6번을 쳤기 때문에 적극적인 타격을 했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주자가 쌓이는 만큼 배터리의 투구도 신중해지기 마련, 그런데 예전 습관을 못 버리고 달려들다 놓친 기회가 너무 많다.

다카기는 3 ~ 4점만 내면 팀에 승리를 안겨주는 투수, 알 디즌은 팀 내 2위 연봉자로서, 이 타석에 걸린 책임감을 온몸으로 느꼈다.

“바깥쪽!! 다시 골라냅니다. 카운트는 투 볼 노 스트라이크!!”

“어제 삼진만 두 번을 당했는데 오늘은 괜찮네요. 이렇게 골라낼 수 있는 선수인데, 어제는 너무 달려들었어요.”

디즌은 3구를 잡아당겨 라인 선상에 떨어지는 타구를 날렸다.

싹쓸이 장타 코스, 3루 주자 - 2루 주자 - 1루 주자까지 홈으로 빨려들어 오자 보스턴 팬들은 열광했다.

이게 얼마만의 화끈한 공격인지, 한편 3루에 안착한 알 디즌은 관중석을 향해 눈을 찌르는 세리머니를 했다.

내가 2억 2천 6백만 달러짜리 쓰레기인지, 아니면 그만한 가치를 지닌 보석인지 지켜보라는 항의, 후속 타자들도 그 뜻을 이어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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