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불경기는 투잡으로 - (2)
‘어쩌다 이렇게 됐냐.’
개막을 앞두고 각 구단은 유격수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올 시즌 30개 구단 중, 유격수 18명은 국제계약으로 메이저리그에 안착한 선수들이라는 게 밝혀졌다.
파워를 중시하는 시대가 되다 보니 구단들이 덩치 좋은 유망주들을 뽑는 게 당연, 하지만 유격수는 덩치 큰 선수들이 소화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그럴 능력이 있다고 해도 타격에 집중하기 위해 포지션을 바꾸는 게 일상, 그러다 보니 괴물들이 득실거리는 메이저리그에서도 기본도 못 갖춘 선수가 유격수를 보는 일도 허다했다.
얼마나 미국 내에 선수가 없었으면 국제계약으로 빈자리를 채웠을까. 사정은 보스턴도 다르지 않았다.
‘네가 200만 달러짜리라고? 어디 지켜보겠어.’
다카기는 훈련에 임하는 어린 선수를 유심히 지켜봤다.
올해 미국 나이로 18살이 된 주앙 고메즈, 축구의 나라로 유명한 브라질에서 넘어온 선수다.
태어난 건 브라질이지만 부모님을 따라 13살에 미국으로 이주, 뒤늦게 야구를 시작했지만 특유의 운동능력에 주목한 수더랜드 단장은 제법 많은 계약금을 안겨줬다.
고등학교 시절 유격수 - 3루수를 보며 나름대로 경험을 쌓은 다카기도 선수 보는 눈은 있는 편, 냉정한 눈으로 기량을 판단했다.
‘왜 저기에 서 있지?’
일단 수비 위치부터 이상, 메이저리그가 아무리 빠른 타구가 많이 나와도 정면에서 굴러오는 타구도 적지 않다.
그런데 왜 잔디가 있는 곳까지 물러나서 수비를 하는 건지, 여기서부터 점수가 깎였다.
1아웃에 주자가 베이스에 있다면, 내야진은 미리 병살 플랜을 짜 놔야 한다. 어느 선수가 공을 잡을 것인지, 누가 백업을 들어갈 것인지, 모든 게 약속이 돼 있어야 한다는 뜻,
예를 들어 탬파베이의 유격수 론 카스타네다는 자신이 병살 플레이의 축이 됐을 때 70%가 넘는 성공률을 기록했다.
반면, 2루수 제프리 윌슨이 병살 플레이의 축이 됐을 때 성공률은 46%로 급격히 떨어졌는데 이게 우연일까?
지금은 수비 시프트가 만연하는 시대, 현대야구에서 내야수의 위치는 정해져 있지 않다. 타자의 성향, 데이터를 숙지하고 그에 맞는 자리를 잡는 게 우선, 카스타네다는 그 역할을 충실히 해냈지만 제프리 윌슨은 아니었다.
강한 타구가 많다고 저렇게 뒤에 물러서 있는 게 최선이 아니라는 뜻, 유격수는 포수 못지않게 상대타자의 성향을 공부하고 숙지해야 한다.
그런데 저렇게 뒤로 물러나서 수비를 한다면 유격수로서 뭘 해야 하는지 기본조차 모른다는 뜻, 아니나 다를까 실전 훈련에서 밑천은 바로 드러났다.
‘아이고 … 아이고 … 저거 봐라 … ’
스텝이 꼬이면서 놓쳐버린 타구, 더는 보기 힘들었는지 다카기는 경기가 끝난 후 고메즈를 따로 불러 조언을 줬다.
“왜 놓쳤는지 생각해 봤어?”
“스텝이 잘못돼서 … ”
“스텝은 무슨 스텝이야? 너 어깨 강해서 유격수 보는 거 아냐?”
2루수와 유격수가 밟는 스텝은 분명 차이가 있다.
유격수는 넓은 범위에서 날아오는 강한 타구를 잡아내야 하기 때문에 스텝이 넓고 경쾌한 편, 그에 반해 2루수는 잔발로 타구를 잡아내는 경우가 많다.
공을 잡을 때 왼발이 글러브 앞에 오도록 하라는 말이 있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기본일 뿐, 정말 빠른 타구가 오면 스텝이고 뭐고 따라가기 바쁘다.
일단 잡는 게 우선, 어깨가 강하면 무게 중심이 송구 방향과 반대로 쏠린 상황에서도 송구는 가능하다.
정 안 된다면 송구는 못해도 타구를 잡아내면 그걸로 충분, 유격수는 기본기도 중요하지만 타고난 운동신경과 어깨가 있어야 가능한 자리, 수더랜드 단장도 그걸 보고 이 녀석을 영입한 게 아닐까.
그런데 스텝 밟다가 어버버 하면서 공을 놓친 고메즈, 그건 아니라고 충고를 줬다.
“너는 연습 좀 더 하자. 따라 와”
다카기는 장비를 정리하는 직원들을 물렸다.
갑자기 연장된 훈련, 팀 내 최고 선수가 지시하는 일이라 구단 직원들은 쭈뼛거리며 물러섰다.
“타구 하나 날려 봐.”
“알았어.”
다카기는 일단 직접 시범을 보였다.
195cm나 되는 기럭지를 이용해 시원시원하게 뻗는 스텝, 어깨가 강한 건 누구나 아는 사실 아닌가. 쭉 뻗어나간 송구는 1루수 글러브로 빨려 들어갔다.
“와우 ~ 뷰리풀 ~ 어썸!!”
현장에 나와 있던 수더랜드 단장은 자기도 모르게 박수를 치고 말았다.
알고는 있었지만 다시 봐도 놀라운 능력, 구단 사정 때문에 투수를 하도록 유도했지만 운동 능력은 역시 타고 났다는 걸 재확인했다.
하지만 이제 막 메이저리그 무대에 접어든 어린애 입장에선 기죽이는 짓, 브라이스 감독은 그 정도 하라고 충고했지만 다카기는 애정이 있어서 그러는 거라고 튕겼다.
“얘는 내가 먼저 찜했거든요? 관심 주지 말고 저리 가세요.”
“와하하 ~ ”
저렇게 말하는데 무슨 말을 하겠나. 코치들도 알아서 퇴장, 그렇게 두 선수는 몇몇 구단 직원의 도움을 받으며 훈련을 이어갔다.
“그렇지, 이제 좀 마음에 드네.”
고메즈는 다카기의 조언대로 타구를 잡아냈다.
하지만 실전에서 수비위치를 조정하는 건 경험이 쌓여야 할 수 있는 일, 스텝과 송구만 바로 잡은 것도 큰 수확이었다.
“넌 태어날 때부터 유격수였다. 앞으로 타격 좋아져도 수비 위치 바꾸지 마라.”
예상 밖의 칭찬에 고메즈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왜 그렇게 수비를 하냐고 한 마디 들었을 땐, 기분 나쁜 건 둘째 치고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학교에서 처음 야구를 배웠을 때 첫째도 둘째도 기본을 중시했던 감독, 하지만 다카기는 그런 건 젖먹이들이 하는 짓이라며 선을 그었다.
“기본은 선수라면 당연히 해야 되는 거고, 너는 앞으로 메이저리거 될 거잖아? 기본에 뭔가를 더 추가해야 특별한 존재가 되지 않겠냐?”
“아 … ”
“기본은 여기 들어오는 놈은 누구나 하는 거야. 기본에 익숙해졌다면 얽매일 필요가 없어. 너만의 스타일을 찾아내, 그걸 빨리 하는 놈이 성공하는 거다. 다른 비결이 있는 게 아니야.”
고메즈는 이후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는 일에 집중했다.
운동신경과 강한 어깨가 내 장점이라면 그 부분을 특화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자신만의 장점에 집중하면서 브라이스 감독의 눈도장을 받았다.
하지만 타격은 아직 고칠 점이 많은 선수, 다카기와 친해진 고메즈는 이런저런 조언을 구했다.
“타격할 때 오른쪽 무릎을 좀 더 굽혀봐.”
이상한 이론에 고메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회전축이 되는 오른쪽 다리가 굽혀지면 상체가 흔들리지 않을까. 하지만 다카기는 들어 올리는 스윙이 되려면 오른 다리가 약간 굽혀져야 한다는 충고를 줬다.
“주저앉는데?”
“땅을 잘 다져야지 인마, 이렇게!! 이렇게!!”
다카기는 배트 박스 흙을 꾹꾹 눌러 밟았다.
무슨 바퀴벌레라도 밟는 것처럼 정열적으로 밟아대는데 고메즈는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중얼거렸다.
“땅이 꺼지는데 다리가 버텨주겠니?”
다카기는 넌 타격에 대한 이해도는 빵점이라고 면박을 줬다.
땅을 힘차게 밟았을 때, 가장 많은 힘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건 과학적으로 증명됐다. 이걸 지면반력이라고 하는데, 배트 박스의 흙이 단단하게 다져져 있지 않으면 땅을 밟았을 때 그만큼 힘이 안 올라온다.
타자들이 타석에 들어서기 전에 땅을 단단히 다지는 건 그냥 하는 짓이 아니라는 뜻, 다카기는 자신만의 논리를 앞세웠다.
“흙은 밟으면 밟을수록 타자에게 힘을 주는 존재야. 그러니까 열심히 밟아주라고”
그제야 고메즈는 뭔가를 깨달았다.
확실히 다리에 실리는 힘이 커지는 느낌, 다리가 단단히 받쳐주면서 무릎을 굽혀도 자세는 일정하게 유지됐다.
다만 문제는 가끔 상체가 홈 플레이트 쪽으로 기운다는 것, 이렇게 되면 변화구에 약점을 보일 수가 있다.
다리를 굽히는 것도 좋지만 너무 굽혀도 안 좋은 법, 다카기는 그 최적점을 찾아내는 건 네 몫이라며 숙제를 남겼다.
‘열심히 하네.’
수더랜드 단장은 훈련에 열중하는 고메즈를 유심히 지켜봤다.
땅 다지랴 스윙 돌리랴 정신이 없는 나날, 열심히 하는 선수도 예쁘지만 자극을 준 선수에게도 따로 감사의 뜻을 전했다.
“내가 단장을 하면서 가장 잘한 일은 자네를 영입한 거야.”
“그럼 돈 좀 더 주시죠.”
다카기는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에이스에 코치 노릇까지 하는데 보너스 좀 줘야하는 것 아닌가. 단장은 못 줄 것 없다며 큰소리를 쳤지만 다카기는 거절했다.
“됐어요. 요즘 구단 사정도 빠듯한데 돈 아껴야죠.”
“이거 왜 이러나? 우리 돈 많다고”
“그렇게 많으면 핵먼 잡지 그러셨어요?”
연봉 4천만 달러가 불러온 후폭풍은 생각보다 거셌다.
올해부터 팀 페이는 2억 6천만 달러로 급증, 구단이 아무리 돈이 많아도 이 이상 지출하기는 부담스럽다.
4천만 달러가 나 혼자 잘하라고 준 돈도 아니고, 어린 선수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줘야겠지.
돈 많이 번다고 매일 외식만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집에서 정성껏 키워 먹어야 하는 반찬도 있는 법, 팀 연봉이 한계까지 오른 보스턴은 이제부터 유망주를 잘 키워야 했다.
* * *
“여 ~ 안녕들 하신가.”
어느새 성큼 다가온 시범경기 일정,
휴스턴으로 유니폼을 갈아입은 J. J. 핵먼은 자연스럽게 보스턴 더그아웃에 접근했다.
환영하는 선수들도 있었지만 다카기는 옛 동료를 남의 집 아들로 취급, 넌 누구냐며 적대감을 드러냈다.
“이거 왜 이래? 우리 작년까지 잘 지냈잖아?”
“내가 언제?”
마지막까지 냉정한 녀석, 핵먼이 너무한 거 아니냐며 돌아서던 그때 다카기는 상대의 캡을 벗겨버렸다.
민둥산 위에 솟아난 풍성한 머리숱, 2억 3천만 달러 벌었다고 바로 응급조치에 나선 건가.
다카기는 튼튼하게 잘 심어졌는지 확인해 보자며 머리털을 움켜쥐려는 자세를 잡았다.
“맙소사!!”
깜짝 놀란 핵먼은 줄행랑, 그렇게 캡을 빼앗긴 채 더그아웃 밖으로 쫓겨났다.
“다시는 친한 척하지 마, 인마!!”
다카기는 어쩔 줄 몰라하는 핵먼에게 캡을 던져 줬다.
휴스턴에서 최고 선수 대접을 받고 있지만 그래봤자 내 앞에선 하룻강아지일 뿐, 앞으로 확실히 밟아 줄 테니 각오하고 있으라는 도발도 덧붙였다.
“자, 다카기 선수가 시즌 첫 시범경기 등판에 나섭니다. 작년 시즌 성적은 21승 1패, 평균자책점 1.48, 234이닝동안 탈삼진 351개를 기록했습니다.”
“작년 시즌은 말 그대로 완벽했죠. 투수 삼관왕에 만테냐 어워드, 리그 MVP, 월드시리즈 우승까지, 남들이 평생 못할 일을 한 시즌에 다 이뤄냈습니다.”
“그리고 올해부터 드디어 7년 2억 8천만 달러 계약이 시작됩니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첫 4천만 달러 연봉을 받는 선수가 된 거죠. 지금까지의 활약만 놓고 보면 그만한 가치가 있는 선수입니다. 올해도 그렇게 될 수 있을지, 지켜보시죠.”
다카기는 초구부터 98마일 빠른 볼을 선보였다.
아직 시범경기 초반이라 구속이 다 올라오지 않았는데도 이 정도, 설마 구위가 더 좋아진 건가. 아니나 다를까 다음 공은 101마일이 찍혔다.
오프 시즌 동안 트레이닝을 바위로 한 건가. 말도 안 되는 구속에 타자는 혀를 내둘렀다.
따악 ~ !
마침 유격수 쪽으로 굴러오는 타구, 스프링캠프에서 다카기에 이런저런 조언을 받은 고메즈는 경쾌한 스텝과 강한 어깨로 깊은 타구를 처리했다.
고교 시절 99마일까지 찍은 강견, 다만 투수를 하기엔 체구가 작아(184cm, 83kg) 유격수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역시 재능은 있는 녀석, 다카기는 글러브를 치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키워서 써먹는 맛도 나쁘지 않군.’
다카기는 이날 변화구는 던지지 않았다.
타격이 되도록 유도, 덕분에 고메즈는 조금 더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