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불경기는 투잡으로 - (1)
[피터 허스트, 오클랜드와 8년 1억 4천만 달러 연장계약 합의]
새해 첫날부터 6연패를 노리는 보스턴의 뒤통수를 때리는 기사가 날아들었다.
보스턴이 J. J. 핵먼을 포기할 수 있었던 건 피터 허스트가 FA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돈 안 쓰기로 유명한 오클랜드가 이런 거액을 제시할 줄이야. 수더랜드 단장은 이거 오보 아니냐며 친분이 있는 기자들을 볶아댔다.
[사실입니다.]
“사실이라고요?”
[예, 조만간 발표가 있을 겁니다.]
그로부터 한 시간 후, 피터 허스트는 SNS에 자신이 영원한 오클랜드 맨으로 남게 됐다는 글을 올렸다.
사실 오클랜드는 2년 전부터 이런 저런 풍파에 시달렸다. 흥행을 위해 오클랜드에서 산호세로 연고지를 옮겼는데, 산호세 팬들은 연고지 팀을 무시하고 샌프란시스코로 몰려갔다.
샌프란시스코는 내셔널리그를 대표하는 명문구단, 거기다 LA와 라이벌 구도를 이루는 팀이라 인지도 면에서 너무 많이 밀렸다.
연고지 이전을 추진했던 메이저리거 사무국도 당황한 결과, 결국 오클랜드라는 팀명으로 돌아갔고 홈경기는 산호세에서 치르는 이상한 꼴이 되고 말았다.
구장 계약 때문에 당장 오클랜드로 돌아가는 건 무리, 홈경기를 치러도 평균 관중은 8천 명에 불과했다.
이런 인지도 없는 팀에서 커리어를 보내는 게 행복할까?
수더랜드 단장은 피터 허스트가 FA를 선언할 거라고 예상했지만, 결과적으로 완전히 빗나간 예측이 됐다.
소속팀에 애정이 있던 허스트는 어떻게든 맞춰주려는 구단의 태도에 마음을 움직였고, 이렇게 수더랜드 단장의 계획은 휴짓조각이 되고 말았다.
“젊은 선수들이 경쟁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정신 승리를 해봤지만 씁쓸한 건 마찬가지, 일본에서 훈련에 열중하고 있던 다카기도 이 소식을 접했다.
‘어쩔 수 없지.’
어떻게 인생이 계획대로만 되겠나, J. J. 핵먼만 놓쳤지 내부 단속은 철저히 한 보스턴, 시간은 충분하니 단장이 알아서 구멍을 메울 거라며 믿었다.
[제가 빈자리 채워드릴까요?]
이때, 다카기의 고교 후배 타키야마 요이치가 구원등판을 자처했다.
작년 시즌, 타키야마는 말 그대로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타율 0.338에 홈런 29개, 92타점을 올리며 베스트 나인에 뽑혔고 연봉도 3억 2천만 엔으로 수직 상승, 그것도 유격수라는 자리에서 이뤄낸 성과다.
일본의 왕으로 만족할 생각이었지만 이제는 다른 쪽 영토에 눈길이 가는 상황, 당신이라고 메이저리거 못 될 거 없다는 아내의 응원도 한 몫 거들었다.
“일본이나 잘 통치해라.”
물론 다카기는 코웃음을 쳤다.
소속팀과 재계약까지 마친 놈이 이제 와서 무슨 해외진출인가, 네가 꼭 필요하다는 말을 꼭 듣고 싶은 모양인데, 고교 시절 타키야마를 마구 굴렸던 악마는 칭찬 따윈 입에 담지 않았다.
[정말 저 필요 없으세요? 아니면 다른 팀 갑니다?]
“그래 가라, 너 일본에 붙잡혀 있어야 하는 거 세상이 다 안다.”
[아 ~ 진짜, 왜 그렇게 고자세로 나오세요? 그러니까 차이셨죠.]
“뭐가 어째?”
타키야마는 무적의 논리를 들이밀었다.
선배님을 사랑했던 사람이 지금 내 곁에 있으니 최후의 승자는 나라는 것, 물론 다카기는 코웃음을 쳤다.
“내가 고백한 것도 아닌데 뭐가 차였다는 거냐? 헛소리 할 거면 끊어.”
틈만 나면 자기 마누라 예쁘다고 자랑하는 얼간이, 이런 녀석과 무슨 대화를 하겠나.
그렇게 한동안 훈련에 열중하던 다카기는 한국에서 넘어온 손님들을 맞이했다.
친척 형 김인호와 그 가족들, 명절 때 얼굴이라도 보기로 한 사이라 자연스러운 대화가 오고 갔다.
“그런데 우리 춘길이는 올해 몇 살이니?”
“춘길이? 그게 누군데요?”
“어? 춘길이 아니야?
이때 6촌 이모라는 분의 예고 없는 공격이 날아들었다.
다카기의 풀 네임은 다카기 하루요시(高木春吉), 음독으로 하면 고목춘길이다.
일부 한국 야구팬들이 재일이라는 이유로 ‘고춘길’이라고 불렀다는데 이게 은근 널리 퍼져서 이제 다카기는 한국에서 춘길이로 통용되고 있다.
할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이라 그렇게 기분 나쁜 건 아닌데 왠지 이상한 어감, 다카기는 그렇게 부르실 거면 집에 가시라며 핀잔을 줬다.
“뭐 어때? 춘길이 괜찮은데”
“형도 한국으로 가실래요?”
김인호는 이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놀림 행렬에 끼어들었다.
만테냐 어워드 5년 연속 수상을 한 사람에게 춘길이가 뭔가, 나에겐 다카기 하루요시라는 이름이 있다며 거부했다.
“너네 이름 할아버지가 지어주신 거 아냐?”
“당연히 알죠. 그런데 왜요?”
“그거 입춘대길에서 따오신 거야.”
기세를 탄 김인호는 동생을 계속 놀려댔다.
입춘대길은 보통 액막이를 목적으로 대문이나 기둥에 달아두는 문구, 지금은 고인이 된 고영길은 첫 손자에게 언제나 행운이 깃들길 바라는 마음으로 입춘대길에서 두 글자를 따와 하루요시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길(吉) 집안 돌림자이니 무조건 써야 했고, 춘(春)은 할아버지가 고민 끝에 선택한 단어, 생전 할아버지를 직접 뵀던 6촌 이모의 증언이라 빼도 박도 못했다.
“이름은 참 잘 지으셨어. 이렇게 일이 술 ~ 술 ~ 잘 풀리니 말이야.”
“하하 ~ 그러게 말입니다.”
“우리 아들이 운은 타고났죠.”
아들 마음은 몰라주고 맞장구를 쳐주는 부모님, 다카기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나름 카리스마 있는 존재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데 놀림감이 됐으니, 뭣보다 이름은 이름일 뿐이다.
입춘대길에서 따왔다고 모든 행운이 내게 쏟아지는 건가. 그동안의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고 있을 뿐, 이름과 성공은 관련 없다고 선을 그었다.
“우웅 ~ ”
“응 ~ 그래”
다카기는 마침 아빠를 찾는 둘째를 품에 안았다.
할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준 녀석, 돌이 지났다고 몇 가지 말도 할 줄 안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크는 자식들, 평소 카리스마를 유지하던 야구 영웅도 그 앞에선 별수 없었다.
“우리 인호도 얼른 장가가야 하는데”
명절만 되면 나오는 단골 멘트, 올해 28살이 된 김인호는 격한 기침을 쏟아냈다.
한 살 어린 동생은 장가가서 아들을 둘이나 봤는데 저 녀석은 뭐 하고 있는 건지, 하지만 이내 관심은 다카기에게 집중됐다.
“그런데 너는 어쩜 그렇게 결혼을 빨리했니?”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비결 좀 알려줘라. 우리 아들도 장가보내게.”
“저도 사냥당한 거라 딱히 비결이 없어요.”
잠자코 있던 키리코는 남편에게 눈치를 줬다.
사냥을 당했다니, 내가 먼저 꼬신 건 맞는데 그런 식으로 표현을 할 건 없지 않은가. 사냥당해서 불만이냐는 잔소리가 날아들었다.
“우리 인호는 언제 사냥당하나 ··· ”
“그러게 말이야. 저 정도면 인물도 괜찮은데 ··· ”
끝없이 이어지는 남자들의 수난, 더는 참기 어려웠는지 두 사람은 다른 방으로 피신했다.
“한국에선 원래 친척들끼리 저런 말 해요?”
“그냥 그러려니 해라, 솔직히 나도 싫어.”
간만에 뜻이 맞은 형제, 그렇게 대화를 이어지던 대화는 야구로 흘러갔다.
“형은 해외진출 생각 없어요?”
“뭐 ··· 지금 당장은 ··· ”
김인호는 얼마 전 소속팀과 4년 86억 계약을 맺었다.
50억도 받기 어려운 FA 한파에서 이 정도면 선방한 편, 해외진출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도전보다 안정을 택했다.
연봉만 400억을 받는 동생에 비하면 초라한 수준이지만 이 정도면 어디에서도 꿀리지 않는 편, 한국에서 선수생활을 마무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1등 지키는 거 힘들지 않냐?”
“뭐가요?”
“매년 이기기만 하는 것도 힘들잖아. 주위 시선도 있고”
김인호는 다소 무거운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5년 연속 월드시리즈 우승에 5년 연속 만테냐 어워드 수상까지 달성한 동생, 최고의 자리를 지키는 건 은근 힘든 일이다.
한국의 왕 노릇하는 것도 녹록치 않은데 그 큰 무대에서 최고 자리를 유지하다니, 대단하다는 생각도 했지만 그 가슴 한 편엔 성적에 대한 부담도 있지 않을까?
다카기는 그런 건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재미있어요.”
“재미있다고?”
“네, 올라오는 놈들 하나씩 밟아주는 거 은근 기분 좋거든요.”
김인호는 동생의 솔직한 마음에 코웃음을 쳤다.
이 자식은 긴장감이라는 게 없는 건가. 아니면 자신의 실력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는 건가. 분명한 건 누구도 범접하기 어려운 경지에 올랐다는 것, 나이는 어려도 저만큼 앞서간 동생이 약간 부러웠다.
“나도 늦기 전에 메이저리그 진출해 봐야겠다.”
“4년 계약 맺었잖아요?”
“간다면 가는 거지 뭐”
“그거 튀는 거 아닌가요? 밥값은 하고 가셔야죠.”
구단에서 계약금만 24억을 줬다는데 포스팅 신청해달라고 하는 건 조금 염치없는 일 아닌가. 하지만 김인호는 성공하려면 너처럼 뻔뻔해져야 한다며 반박했다.
“저는 뻔뻔한 게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것뿐이에요.”
“와 ~ 너는 어떻게 한 마디를 안 지냐?”
“왕 노릇을 너무 오래 해서 그래요. 누구한테 머리를 숙이는 건 이제 익숙하지가 않아요.”
끝까지 건방진 어린 왕, 하지만 상대가 상대라 김인호는 더는 따지고 들지 않았다.
* * *
‘어디 가 보실까.’
해가 바뀐 2월, 다카기는 스프링캠프가 열리는 플로리다로 향했다.
지난 1월, 잭 개리슨이 은퇴를 발표하면서 보스턴의 내야진 구멍은 더 넓어졌다. 그렇다고 모든 전력을 FA 계약으로 채울 순 없는 노릇, 수더랜드 단장은 더 이상의 FA 영입은 없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팜이라면 어느 구단보다 탄탄한 보스턴, 브라이스 감독도 무한 경쟁을 예고하면서 라커룸은 100명이 넘는 선수들로 북적거렸다.
빈자리를 노리는 엉덩이는 수십 개, 물론 대체 불가능한 선수로 자리 잡은 다카기는 A급 선수들이 머무는 라커룸에서 출입구와 가장 먼 자리를 배정받았다.
이제 프로 6년 차라 애송이 취급을 하는 것도 무례한 일, 그래도 다카기는 어린 선수들에게 먼저 다가가 이런저런 말을 건넸다.
“너희들이 제 역할 못 하면 내가 투 잡 뛸 거다.”
“와하하 ~ ”
“웃어? 농담 아니거든?”
다카기는 여차하면 투타겸업도 할 수 있다며 새싹들을 위협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수비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몸, 타격이야 말할 것도 없다. 메이저리그라도 공수를 겸비한 선수는 손에 꼽을 정도, 다카기는 그 기준에 부합하는 재능을 보였다.
실제로 프로 1 ~ 2년 차까지 투타겸업을 했고, 한 시즌에 100타석이 조금 넘는 기회에서 홈런 9개를 기록한 적도 있다.
어지간하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어린 것들이 제 역할을 못하면 내가 나서야지 어쩌겠나.
알아서 잘 하라는 협박에 새싹들은 식은땀을 흘렸다.
“지금 농담하는 거지??”
“아니, 진심일거야.”
질문을 받은 알 디즌은 덤덤한 목소리로 답을 줬다.
지금이야 구단과 10년 계약을 맺고 자리를 잡았지만, 알 디즌은 한때 다카기와 외야에서 포지션 경쟁을 벌였다.
안 뺏기기 위해 죽기 살기로 했는데, 라이벌이 전업 투수가 되면서 막을 내린 경쟁, 그때만큼의 절실함이 내게 남아 있을까.
대형 계약을 맺었지만 확실히 아쉬웠던 작년 시즌, 그에 비해 다카기는 언제나 전쟁 모드로 경기를 치렀고 지금까지 최고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아군이지만 가끔은 두려움을 느낄 정도, 우리가 제 역할을 못하면 저 녀석은 어떻게 행동할까? 알아서 잘 하라는 말이 농담처럼 들리질 않았다.
“쟤 쓰실 거예요?”
아니나 다를까, 다카기는 훈련을 지켜보는 감독에게 한 마디 툭 던지고 지나갔다.
수준 이하의 3루 수비를 보여주는 유망주, 방망이는 어느 정도 쳤다고 들었는데 저런 수비로 메이저리그 타자들의 강한 타구를 처리할 수 있을까.
외야로 돌린다면 모르겠지만 내야는 낙제점, 다카기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브라이스 감독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자네는 너무 직선적인 게 탈이야.”
“독설하는 사람도 있어야죠. 감독님이 매일 칭찬만 하시니까 이러는 거예요.”
브라이스 감독은 입을 다물었다.
6년이나 함께 했다고 내 장단점을 완전히 이해한 건가. 같은 편이라도 이제는 정말 두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