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먹어본 놈이 먹는다 - (16)
“다카기 선수, 오늘 승리 축하드립니다.”
“매일 듣는 말이니까 안 하셔도 됩니다.”
3차전이 끝나고 다카기는 기자접견실에서 인터뷰에 응했다.
올 타임 넘버원이라는 말까지 듣고 있는 선수, 한 기자가 초반부터 거한 질문을 날렸다.
“오늘 피트 오어가 만테냐 어워드를 다카기 어워드로 바꿔야 한다는 말을 했는데 동의하십니까?”
“ ··· 잠깐만요. 뭐라고요?”
다카기는 옆에 있던 통역사와도 대화를 나눴다.
마이너리그 생활을 포함하면 어느덧 미국 생활 6년 차, 영어는 익숙해졌지만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통역을 데리고 다닌다.
혹시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닌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확인해 봤지만 기자가 던진 질문은 분명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만테냐는 야구계의 선구자 같은 존재였죠. 그 선수와 비교되는 건 아직 이릅니다.”
“혹시 또 마음에도 없는 겸손을 떠시는 것 아닙니까?”
“이번만큼은 아닙니다. 진심입니다.”
다카기는 프랜시스 만테냐 만큼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존재라고 선을 그었다.
382패? 그건 긴 세월 동안 마운드를 지킨 훈장이나 다름없다.
당시 야구엔 몸 관리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투수들은 완투를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아픈 몸을 속이기 위해 술, 각성제에 의존하다 이른 나이에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하지만 프랜시스 만테냐는 술, 담배, 각성제는 입에 대지도 않았고, 철저한 몸 관리로 프로 생활을 이어갔다.
“제가 공을 던지는 곳은 마운드뿐입니다.”
“왜죠?”
“이미 많이 던졌으니까요. 25년 동안 한 거라 필요 없습니다.”
말년에 들어서는 이런 포스 넘치는 말도 남겼다.
스프링 캠프 기간 동안 공은 안 던지고 체력훈련만 하기에 이를 이상하게 여긴 기자들이 질문을 던진 것, 하지만 25년 동안 공만 던진 장인에게 연습투구는 필요 없었다.
다만 40이 훌쩍 넘은 나이를 이겨내기 위해 체력 훈련에만 집중, 45세 시즌에 24승, 284이닝을 투구하며 건재함을 과시하기도 했다.
어깨는 던질수록 강해진다는 개소리를 100년 전에 논파한 진정한 투구의 장인, 다카기는 나는 그 선수와 비교되려면 멀었다는 말을 남겼다.
“메이저리그는 역사가 긴 만큼 수많은 영웅들을 남겼습니다. 저는 그들이 닦아놓은 길을 걸어왔을 뿐이죠. 제가 오늘 이렇게 활약을 할 수 있는 것도 그들이 남긴 지식과 노력을 계승한 덕분입니다. 새로운 시대를 열어줬다면 모르겠지만, 저는 아직 그 정도의 거물은 아닙니다.”
다카기는 프랜시스 만테냐를 역대 최고의 투수로 치켜세웠다.
철저한 몸 관리와 프로의식, 실력에 대한 자신감, 구질에 대한 이해까지 뭐 하나 빠질 게 없었던 유일무이한 500승 투수, 앞으로 어떤 투수가 나타나든 그 위상을 넘어서는 건 불가능하다고 못을 박았다.
“월드시리즈 4연패를 이루셨는데, 이 정도면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고 봐도 좋지 않겠습니까?”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는 건 누군가의 앞길을 터줬다는 뜻입니다. 저는 아직 제 욕심을 채워가는 중이라 그런 칭찬을 받기엔 애매합니다.”
다카기는 새로운 시대의 의미도 재해석했다.
지금은 최고로 군림하고 있지만, 언젠간 물러서야 하지 않겠나.
내가 좀 더 거대한 벽이 됐을 때, 누군가가 그 벽을 넘어선다면 더 큰 앞길을 내달릴 수 있겠지, 그것도 나름 멋있는 퇴장 아니겠나. 다카기는 지금은 내가 최고이기 때문에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곤 어렵다고 선을 그었다.
“지금 당신의 벽을 넘을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요. 평생 벽으로 남는 거 아닙니까?”
“뭐 ··· 그렇게 된다면 그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죠.”
능청스러운 표정에 기자들은 헛웃음을 지었다.
앞으로 이 선수를 넘어설 존재가 등장할까?
지금으로선 상상도 하기 힘든 존재, 하지만 다카기는 나는 언제든 이곳에서 최강으로 남아있을 테니, 누구든 도전을 환영한다는 말을 남겼다.
‘그게 너희들은 아닌 것 같다.’
이어지는 4차전, 다카기는 벤치에서 경기를 지켜봤다.
3차전에서 완패를 당한 워싱턴은 한 풀 꺾인 플레이를 펼쳤고, 보스턴 선수단은 5연패 업적에 한걸음 더 다가섰다.
‘우리가 최강이다.’
보스턴 엠블럼이 박힌 유니폼을 입고 있는 것만으로도 왠지 더 강해진 느낌, 특히 피츠버그에서 보스턴으로 갈아 탄 울반스키는 심적으로 더 굳건해졌다.
정말 승자의 기운이라는 게 있는 건가. 약팀에서 커리어를 보내다 보스턴 유니폼을 입었을 뿐인데 벌써 우승 2회, 이제는 3회를 눈앞에 두고 있다.
한 번이 어렵지 일단 해보니 줄줄이 따라오는 우승, 올해도 우리가 최강이라는 믿음은 굳건했다.
따악 ~ !!
“잡아당긴 타구가 내야를 빠져 나갑니다!! 오늘도 출루, 울반스키의 진격은 계속됩니다.”
“이번 월드시리즈에서 타율이 0.571네요. 확실히 우승이 동기 부여가 된 것 같습니다.”
“사실 시즌 MVP도 노려볼 수 있는 성적이죠. 다만 다카기 선수가 워낙 좋은 투구를 했기 때문에 장담은 못 합니다.”
다카기는 올 시즌 32경기에서 21승 1패, 평균자책점 1.48, 234이닝 동안 삼진 351개를 잡아냈다.
울반스키도 정규시즌에서 1루수와 포수를 오가며 타율 0.311, 홈런 32개, 116타점을 기록, 홈런은 커리어 하이가 아니지만 전체적인 밸런스로 따지면 올해가 커리어 하이라고 봐도 좋다.
MVP, 누가 받으면 어떤가. 함께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면 그만, 울반스키는 우승만 보고 내달렸다.
‘나도 그 우승 맛 좀 보자.‘
시애틀에서 보스턴으로 갈아탄 채근성도 마찬가지, 정규시즌 내내 약점으로 지목받은 몸 쪽 공도 거뜬히 걷어내는 놀라운 활약을 선보였다.
이 둘 뿐 아니라 다들 정규시즌보다 한 단계 더 성장한 느낌, 올 시즌부터 주전 마스크를 쓴 호프만이 그 방점을 찍었다.
따아악 ~ !!
“어?!! 이 타구는 계속 뻗어나가는데요?!! 좌측 담장을 그대로 넘어갑니다!!!! 스탠리 호프만의 쓰리 런 홈런!! 보스턴이 6대 2로 앞서 나갑니다!! 추격을 뿌리치는 한 방!! 오늘 경기의 흐름도 보스턴 쪽으로 흘러갑니다!!”
“정규 시즌에서 홈런이 7개 밖에 없었는데 정말 중요한 순간에서 터졌네요. 이런 선수까지 해주면 지는 게 이상한 거죠.”
먼저 홈을 밟은 주자들은 호프만의 헬멧을 마구 구타했다.
오늘만큼은 조연이 아닌 보스턴의 주역, 더그아웃에서도 환영의 의미가 담긴 손찌검은 계속됐다.
“야, 그만 때려라. 올 시즌 끝나면 FA다.”
이때 다카기가 슬쩍 입을 열었다.
다들 한 덩치 하는 자식들인데, 저렇게 계속 때리면 아무리 운동선수라도 충격이 있다.
호프만은 앞으로도 보스턴에 필요한 선수, 단장도 호프만과의 재계약을 필수로 여기고 있으니 이 이상의 구타는 용납하지 않았다.
‘무조건 여기 남는다.’
호프만은 다른 팀으로 가는 건 생각도 안 했다.
유독 빠른 볼 투수가 많은 보스턴, 여기를 떠나서도 내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까. 뭣보다 이기는 경기를 할 수 있다는 건 거부할 수 없는 메리트, 돈도 돈이지만 기간이 보장된 계약을 원했다.
오랫동안 후보로 지냈으니 출장기회 보장이 우선, 아마 많은 팀들은 날 1 ~ 2년짜리 단기계약으로 묶어두려 하겠지.
그런 계약이면 조금 부진하다 싶을 때 바로 버릴 수 있다. 보스턴이 말도 안 되는 계약을 하지 않는 한, 그런 유혹에 휘둘릴 생각은 없었다.
‘저도 여기 있어요. 잡아주세요.’
알 디즌도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노력했다.
돈론이 시카고, 위긴스가 시애틀로 갔으니 이제 3인방 외야수 중 보스턴에 남은 건 디즌 뿐이다.
FA 자격 획득까지 아직 2년이 남았지만 연봉 조정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구단이 먼저 움직일 가능성은 열려 있다.
문제는 계약규모, 보스턴은 올해 연봉 2억 2천만 달러를 찍었다. 돈론을 포기하고 위긴스까지 쳐내면서 팀 페이를 많이 줄였지만 내년부터 다카기에게 연봉 4천만 달러를 지불해야 한다.
다만 J. J. 핵먼이 10년 2억 5천만 달러를 부른 덕분에 이별은 거의 확정적, 핵먼이 빠져나가면 내게 줄 돈이 조금 더 늘지 않을까.
여기서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면 계약 순위에서 또 뒤로 밀릴 뿐, 보스턴에 남기 위한 구애는 계속 됐다.
따아악 ~ !!
“센터 쪽으로 멀리 뻗어나가는 타구!! 중견수!! 중견수가!! 잡아냅니다!! 멋진 수비!! 알 디즌이 장타 하나를 지워냅니다!! 투 아웃!! 1루 주자는 움직이지 못 합니다!!”
“지금은 머리 위로 넘어가는 타구였는데 역시라는 말이 절로 나오네요. 괜히 4년 연속 골든 글러브를 받은 게 아닙니다.”
타구를 잡아낸 알 디즌은 바로 2루로 송구해 1루 주자를 묶어 놨다.
올 시즌 타격은 조금 아쉬웠지만(0.271, 26홈런, 89타점) 그래도 다른 중견수들에 비하면 상위권, 여기에 수비기여도 + 13을 찍는 정신 나간 수비력 덕분에 4년 연속 bWAR 5를 넘겼다.
놓치면 무조건 후회하는 선수, 핵먼을 포기하고 그 대안까지 마련해둔 수더랜드 단장은 이미 넉넉한 총알을 장전해 뒀다.
지금이라도 쏠 수 있는 달러 다발, 아니나 다를까 4차전이 끝나고 디즌의 에이전트가 수더랜드 단장과 접촉했다는 정보가 흘러나왔다.
에이전트도 딱히 부정하지 않는 상황, 하지만 아직 논의가 오간 것뿐이라며 구체적인 언급은 피했다.
‘지금 사인하면 안 되나?’
하지만 알 디즌은 근질거리는 입을 주체하지 못했다.
에이전트 말에 따르면 보스턴이 제시한 금액은 10년 2억 2천 6백만 달러, 연봉조정 기간을 제외하면 8년 2억 달러 계약이다.
하지만 에이전트는 내심 2억 4천만 달러까지 받았으면 하는 마음, 고 자세로 나오다 보스턴 구단의 외면을 받은 J. J. 핵먼의 전례가 있었기에 알 디즌은 약간 불안한 기색을 드러냈다.
“아 ~ 떨어지는 군요. 알 디즌은 첫 타석에서 삼진으로 물러납니다.”
“가끔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스윙을 하는데, 조금 더 집중력을 발휘해 줘야 합니다. 아직 시리즈가 끝난 게 아니거든요.”
돈 때문에 가출한 집중력, 다카기는 터덜터덜 돌아온 애송이의 엉덩이를 한 대 때려줬다.
“우승 한 두 번 해 본 것도 아니고 벌써 이겼다고 착각하냐?”
“아니 ··· 그게 아니라 조금 ··· ”
“착각하지마라. 그 돈 아직 네 꺼 된 거 아니다.”
알 디즌은 흠칫했다.
단장과 에이전트 그리고 나만 알고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자식은 뭔가 알고 이런 소리를 하는 건가.
어디까지 알고 있냐고 심문을 이어갔다.
“보고 들은 것만큼 안다. 그 이상은 묻지 마.”
다카기는 ALDS에서 단장과 은밀히 접촉한 적이 있다.
구단 재편성을 위해 나눈 대화, 그 자리에서 다카기는 단장이 어떤 선수를 버리고 어떤 선수를 잡을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확인했다.
입이 무거워 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다카기는 에이전트가 단장과 접촉한 소문 그리고 평소보다 얼이 빠진 디즌의 얼굴을 보고 뭔가 일이 벌어졌다는 눈치를 챘다.
‘저 자식 계약 제시 받은 거 맞네. 틀림없어.’
억 소리가 나는 계약을 제시 받았다고 이렇게 나사 빠진 모습을 보여줘도 되는 건가. 그건 그렇고 이 중요한 시기에 단장은 왜 에이전트와 접촉했을까? 그 의도를 나름대로 분석했다.
‘그 양반은 그냥 정보를 흘릴 사람이 아니야. 내가 잘 알아.’
아무리 잘 하는 선수도 대형 계약을 제시 받으면 마음이 풀어지고 부진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알 디즌이 훗날 먹튀가 될지 팀의 기둥이 될지는 미지수, 돈 맛을 조금 보여줬다고 흔들리면 앞일이야 뻔한 거 아닌가.
지금 단장은 디즌을 시험하고 있는 중, 그만큼 계약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뜻 아닐까.
그 시험을 통과하는 건 디즌의 몫, 다카기는 이 이상의 힌트는 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