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먹어본 놈이 먹는다 - (14)
“그런 일은 언제나 일어난다. 보스턴이라고 자유로울 수 있을까?”
사인 훔치기 파동으로 얼룩진 MLB, 이때 한 인물이 목소리를 높이면서 여론은 더욱 악화됐다.
한때 MLB의 스타 플레이어로 이름을 날렸던 패트릭 네이도(Nadeau)가 그 주인공, 네이도는 통산 타율 0.282, 홈런 514개를 기록한 전설적인 타자였다.
하지만 본질은 약물 스캔들에 더럽혀진 명예, 지금도 나는 명예의 전당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네이도는 사인 훔치기는 메이저리그에서 언제나 일어나는 일이라며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고, 심지어 피해자인 보스턴도 자유로울 수 없는 일이라며 언론 플레이를 펼쳤다.
“너 같은 쓰레기에겐 일상 같은 일이겠지.”
다카기는 바로 공격에 나섰다.
얌전히 찌그러져 있을 것이지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 나오는 건가. 웃긴 건 이런 인간의 명예의 전당 투표율이 계속 오르고 있다는 것, 작년에 9번 째 도전을 한 네이도는 투표율 24%를 기록했다.
3개월 뒤 열리는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 75%를 찍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지만, 다카기는 거긴 너 같은 놈이 들어갈 곳이 아니라며 확인사살을 날렸다.
“네이도는 스포츠 정신을 망각한 쓰레기다. 약물을 하고도 죄가 없다고 하고, 사인 훔치기가 일상적이라는 말을 하는 인간이 어떻게 명예를 논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그런 인간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다카기는 네이도가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면 명예의 전당 투표 자체를 거부하겠다고 밝혔다.
아직 5시즌 밖에 치르지 않았지만 지금까지의 활약만 놓고 본다면 충분히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 수 있는 선수, 뭣보다 4년 연속 만테냐 어워드 수상은 누구도 당성하지 못한 대기록이다.
월드시리즈 5연패를 앞두고 있다는 것도 플러스 요소, 보스턴 팬들도 이에 동의하면서 네이도를 집중 공격했다.
“네가 명예의 전당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해?”
발끈한 네이도는 다카기를 공격했다.
이제 겨우 5년 차 밖에 안 된 선수가 명예의 전당을 논하다니, 가소롭다며 포문을 열었지만 바로 역공을 맞았다.
“팀에 도움도 안 되는 게 잘난 척은, 그리고 너보다 승리기여도는 더 높다. 까불지 마라”
네이도는 통산 bWAR 34.2를 기록했다.
통산 500홈런을 넘긴 타자가 이렇게 승리 기여도가 낮을 수가 있나. 심지어 2002년엔 40홈런을 넘기고도 승리 기여도 마이너스 1.3을 기록했다.
그해 수비기여도는 마이너스 38, 한마디로 일반적인 선수보다 팀에 38실점을 더 안겨줬다는 뜻이다.
마이너스 9를 찍고 시애틀로 트레이드 된 후안 위긴스를 떠올리면 기가 막힌 기록, 수비가 이 따위니 공격에서 아무리 잘해도 매년 승리기여도 2를 넘기기 어려웠다.
‘500홈런 넘겼어도 입성할 자격이 없어.’
이 지경인데 어떻게 기자들이 표를 주겠나.
지금은 세이버매트릭스 지수가 투표에 많은 영향을 주는 시대, 구시대의 지표를 따졌다면 네이도는 지금보다 더 높은 투표율을 기록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법, 솔직히 미국 현지에서도 24%는 너무 높은 투표율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은퇴 후에도 이런 저런 구설수로 알아서 표를 깎아 먹었는데, 이번엔 사인 훔치기를 한 인디애나를 변호할 줄이야. 몇 몇 기자들은 남아 있던 정도 떨어졌다며 공개적으로 투표를 거부했다.
“지금 당장 투표로 붙어도 다카기가 이긴다.”
한 기자는 대놓고 네이도와 다카기를 비교했다.
다카기는 이제 프로 5년에 접어든 선수지만 통산 승리기여도는 벌써 40을 돌파했다.
여기에 4회 연속 월드시리즈 제패, 만테냐 어워드 4회 연속 수상은 덤, 네이도와 다카기가 명예의 전당 입성을 두고 투표를 치르면 누가 이기겠는가?
한 팬은 본인이 운영하는 사이트에 가상 투표 게시 글을 올렸고. 약 8천 여 명의 팬들이 투표에 참가했다.
[관심이 필요한 것 같은데 불쌍해서 한 표 줄게]
[앞으로 안 봤으면 좋겠다]
[기자들도 생각 있으면 투표 잘 해라. 저런 놈이 24%라는 게 말이 되냐?]
네이도를 향한 팬들의 반응은 싸늘 그 자체, 무려 7972명이 다카기에게 표를 던졌다. 나머지는 그냥 장난으로 던져준 투표, 개망신을 당했지만 네이도는 그래도 계속 짖어댔다.
“다시 말하지만 보스턴도 사인 훔치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 많은 우승을 하면서 사인을 한 번도 안 훔쳤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다카기는 네 논리대로라면 통산 20번 넘게 우승을 한 뉴욕도 사인 훔치기로 이룬 거냐며 코웃음을 쳤다.
잠깐이지만 네이도는 뉴욕에서 커리어 말년을 보낸 적이 있다.
뉴욕 팬들 입장에선 기억하기도 싫었던 영입, 네이도는 뉴욕에서 타율 0.272, 홈런 9개, 28타점을 올리고 은퇴했다.
겉보기엔 대타요원으로 괜찮았던 성적이지만 문제는 뒷배경, 뉴욕은 실력보다 네이도가 베테랑으로서 어린 선수들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길 기대하고 영입했다.
하지만 현실은 기대와 어긋났고, 시즌이 끝나기도 전에 방출됐다.
그게 벌써 약 15년 전 일, 그런데 네이도는 1년도 못되는 커리어를 보낸 뉴욕의 모자를 쓰고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고 싶다는 정신 나간 말로 뉴욕 팬들에게 헛웃음을 선사했다.
그런데 이제는 헛소리로 팀 역사까지 운운하게 만드는 놈, 번번히 월드시리즈 진출을 저지하는 다카기도 미웠지만 네이도는 더 끔찍했다.
[뉴욕의 우승은 실력으로 이룬 거다. 따라서 보스턴의 우승도 존중한다.]
뉴욕의 한 기자는 보스턴이 이룬 업적을 존중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동안 뉴욕과 보스턴이 죽기 살기로 서로를 물고 뜯었던 역사를 떠올리면 놀랄 만한 일, 뉴욕이나 보스턴 유니폼을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구타와 욕설을 당한 사례가 적지 않다.
하지만 뉴욕 팬들은 2004년과 2007년에 보스턴이 거둔 우승은 약쟁이들의 힘을 빌린 것이라며 깎아내렸고, 네이도의 관심 병은 보스턴과 뉴욕의 신경전으로 번졌다.
“이해한다. 그게 2인자들의 비애 아니겠나?”
다카기는 뉴욕까지 깔아뭉갰다.
15년 넘게 월드시리즈 우승을 못 해 본 뉴욕, 명예의 전당 9수를 하면서 투표율이 30%도 안 되는 네이도, 언제나 시골 동네 취급을 받는 인디애나,
다들 1인자의 광명에 밀려난 은메달 리스트 아닌가. 따지고 보면 뉴욕이 2009년에 거둔 우승도 약쟁이들의 향연으로 이룬 결과다. 그런데 뭐가 잘났다고 우리를 욕하는 건지, 누가 더 더러운지 한 번 따져보자는 건가.
귀족이 땅거지에게 놀림 받았다고 흥분해서 같이 똥물을 뒤집어 쓸 필요는 없는 법, 우리와 너희는 다른 길이 다르다며 약을 올렸다.
“너희들의 2024시즌은 끝났어. 뭐라고 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
포스트 시즌에 탈락한 뉴욕과 말싸움을 해 봤자 무의미, 너희들이 할 수 있는 건 우리의 우승을 지켜보는 것뿐이라며 한껏 조롱했다.
그 짧은 시간에 몇 명과 멱살잡이를 한 건지, 보다 못한 선수들도 지원사격에 나섰다.
“한 번 졌다고 해도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우리에겐 그 녀석이 있다.”
특히 울반스키는 절대적인 믿음을 표했다.
포스트 시즌을 치르면서 매번 이기기만 했을까.
포스트 시즌에서의 1패는 그 이상을 의미하는 법, 하지만 다카기가 뒤에 버티고 있기 때문에 보스턴은 언제든 시리즈를 뒤집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앞세웠다.
이번 월드시리즈도 마찬가지, 다카기는 벤치 클리어링 사건 때문에 출장정지를 당했고 월드시리즈 1차전에 등판하지 못했다.
그 사이 보스턴은 홈에서 1승 1패를 기록, 3차전에선 그 녀석이 돌아온다.
홈에서 1패를 허용했다고 기죽을 게 없는 입장, 철벽의 에이스는 귀환만으로 선수단의 사기를 끌어올렸다.
‘귀찮은 놈을 만났군.’
홈에서 보스턴을 맞이한 워싱턴 세네터스도 긴장감을 바짝 끌어올렸다.
보스턴은 월드시리즈 4연패를 거둔 팀, 아직 경험이 부족한 선수들이 많은 워싱턴 선수들이 상대하기엔 조금 벅찬 상대다.
하지만 통산 월드시리즈 2회 우승을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하는 산, 워싱턴 팬들도 각오를 다졌다.
[No Cheat]
한 팬은 정당한 경기를 하자는 문구가 적힌 팻말을 높게 들어올렸다.
야구는 미국인들에게 일상 같은 스포츠, 흥행 부진 - 약물 파동 - 사인 훔치기 등등 이런 저런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100년 넘게 이어져 내려온 건 이유가 있는 거다.
이번 사인 훔치기 사건은 팬까지 얽힌 추태, 선수들에게만 도덕을 강요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승패를 떠나 정정당당한 경기를 하는 게 우선, 보스턴 선수단은 그 뜻을 받아들였다.
“자!! 1회 초 보스턴의 공격으로 월드시리즈 3차전의 막이 오릅니다!! 선두 타자는 채근성 선수, 이번 월드시리즈에서 7타수 3안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몬테로 선수가 그동안 줄곧 리드오프를 책임졌는데, ALCS에서 약간 페이스가 떨어진 모습이거든요. 이제는 채근성 선수가 그 자리를 확실하게 채워주고 있습니다.”
“첫 월드시리즈 무대라 본인도 각오가 대단하겠죠. 마이너리그에서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는 선수가 몇 명이나 있겠습니까? 그 바늘구멍을 통과해도 월드시리즈를 경험하는 선수는 지금 이 자리에 선 52명밖에 안 됩니다. 올 시즌 메이저리그를 거쳐 간 선수의 4%에 불과한 확률이에요.”
“본인도 이 자리에서 올라온 것 자체가 행운이라는 말을 했죠. 그래도 기왕이면 우승을 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1회 초 보스턴의 공격, 한국에서 날아온 중계진은 채근성의 등장에 흥분했다.
최약체 시애틀에서 시즌을 시작한 선수가 월드시리즈 무대까지 밟았으니, 본인도 그렇겠지만 지켜보는 한국 팬들 입장에서도 감개무량, 뭣보다 월드시리즈에 선 첫 한국인 야수라는 점에 의의를 뒀다.
‘이대로는 못 내려가지.’
채근성도 나름대로 각오를 다졌다.
1년 중 이렇게 오래 야구를 해 본 처음, 지치는 게 당연한데 이상할 정도로 몸이 가벼웠다.
미국 생활 9년 만에 밟아본 정상이니 만세 삼창은 해 보고 내려가야 하지 않겠나. 여기서 이대로 내려가면 평생의 후회로 남겠지, 뭣보다 팀의 주전급 전력으로 이 자리에 섰다는 현실에 가슴은 한껏 부풀어 올랐다.
딱 ~
“느린 타구, 유격수가 잡았지만 ··· 1루에서 세이프입니다!!! 내야 안타!! 채근성 선수가 근성으로 안타를 만들어 냅니다!!”
“하하 ~ 역시 이름답게 뭐든 열심히 하는 선수죠. 이런 플레이가 하나 둘 쌓이면서 승리로 이어지는 겁니다. 수더랜드 단장도 그걸 보고 이 선수를 영입한 거겠죠.”
보스턴 선수단은 최선을 다하는 플레이에 박수를 보냈다.
처음엔 저 선수가 오나 안 오나 신경도 안 썼지만 이제는 모두가 인정하는 보스턴의 일원, 불펜에서 몸을 풀던 다카기도 박수를 치며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그래도 아직은 형이라고 불러주기엔 이르지.’
그렇다고 쉽게 마음을 열진 않았다.
분명 열심히 하고 있지만 나보다는 못한 활약, 한 번 형이라고 하면 평생을 형으로 대접해야 하는데, 그런 중대한 일을 안타 몇 개로 결정하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