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먹어본 놈이 먹는다 - (11)
‘너희가 언제부터 우리 이겼다고?’
다카기는 씩씩거리는 모리슨을 향해 비웃음을 날렸다.
최근 몇 년 동안 보스턴은 뉴욕 상대로 진 기억이 별로 없다. 평소 우릴 상대로 접전을 벌였다면 모를까, 흔히 있던 일 아닌가.
지고 있는 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화를 내는 건지, 경기가 끝난 후에도 상대를 자극하는 발언을 이어갔다.
“뉴욕은 지난 15년 동안 월드시리즈에서 우승 한 적 없습니다. 오늘의 패배가 그렇게 열을 낼 일이었는지 모르겠네요.”
누가 봐도 모리슨을 저격하는 발언, 이때 한 기자가 손을 들었다.
“뉴욕은 절대 우승할 수 없다는 겁니까?”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닙니다. 뉴욕은 충분히 우승할 수 있는 전력을 갖춘 팀이죠. 단, 화를 다스릴 줄 모르는 어떤 멍청이가 문제입니다.”
모리슨은 이제 단순한 선수가 아니라 뉴욕을 이끄는 리더이다.
그런데 좀 못했다고 격분하고 배트 격파에 발길질까지 하다니, 리더가 그렇게 나오는데 다른 선수들이 어떻게 냉정함을 유지할 수 있겠나.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겠다는 의욕만 있지 나머지는 낙제점, 다카기는 이런 식이라면 올해도 우승은 우리 차지가 될 거라며 당당히 어깨를 폈다.
“세상은 원래 불공정한 겁니다. 돈을 버는 사람이 계속 돈을 버는 것처럼 우승도 한 팀이 또 하고 또 하는 거죠. 뉴욕도 한 때는 10년 동안 월드시리즈 7회 우승을 한 팀입니다만, 지금은 옛 명성과 거리가 있습니다. 그에 비해 보스턴은 86년 동안 우승을 못했지만 이기는 법을 터득하면서 우승을 쓸어 담고 있죠. 보아하니 이 독주는 당분간 계속될 것 같습니다.”
다카기의 발언에 보스턴 팬들은 열광했다.
뉴욕의 통산 27회 월드시리즈 우승을 따라잡기엔 아직 거리가 멀지만, 보스턴은 최근 13년 동안 월드시리즈 우승 7번을 이뤄졌다.
120년이 넘는 역사에서 14회 우승을 했는데, 이 짧은 기간에 절반을 해버린 것, 뉴욕도 1936년부터 1962년까지 28년 동안 월드시리즈 우승 17회를 달성해 냈다.
원래 먹어본 놈이 또 먹고 다 먹는 게 세상의 이치, 지난 15년 동안 지구 1위도 어려웠던 뉴욕이 보스턴의 아성을 넘을 수 있겠나.
우승보다 현실을 인식하는 게 우선, 하지만 일이 잘 안 풀린다고 성질부터 내는 어느 멍청이 때문에 뉴욕은 분위기 수습에 실패했다.
“평소처럼 하자고, 우리는 늘 그렇게 이겨왔잖아.”
그에 비해 다카기는 2차전에서도 선수단을 잘 이끌었다.
한두 번 먹어본 우승도 아닌데 흥분해서 뭘 어쩌겠나. 고급 요리 앞에서는 품위를 갖춰야 하는 법, 눈으로 먼저 보고 천천히 승리의 맛을 음미했다.
‘나는 아직 부담스럽다고’
하지만 채근성은 이런 분위기가 낯설었다.
메이저리그 승격만 바라보고 달려온 선수 인생, 메이저리그 최하위 권 팀에서 우승권 팀으로 넘어올 줄은 예상도 못했다.
어찌어찌 배만 채워오다 고급 요리를 맛보려니 이게 어디로 넘어가는 지도 모르겠고, 안타 하나에 웃고 우는 관중석 분위기도 어색했다.
위긴스의 자리를 잘 채워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솔직히 밥상 앞에서 체할 판, 컨텐더 팀은 나와 맞지 않는 건가.
우승만 보고 달려가는 보스턴과는 맞지 않는 편, 그래도 내가 언제 또 이런 경험을 해 보겠나.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라는 각오로 정신을 다잡았다.
따악 ~ !!
“잡아당긴 타구가 센터 쪽으로 멀리 ~ !! 아 ~ 약간 부족했군요. 중견수가 잡아냅니다.”
“한국 선수 최초로 포스트 시즌에서 홈런을 치는 선수가 나오나 했는데, 다음 타석을 기대해야겠네요.”
잠시 들썩거린 관중석 분위기는 급격히 가라앉았다.
마치 내가 죄인이 된 것 같은 기분, 채근성은 헬멧을 푹 눌러쓰고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그래가지고 나한테 형 소리 들을 수 있겠어?”
이때 눈치 없이 한소리 하는 녀석, 채근성은 그런 건 이제 잊어버렸다며 고개를 저었다.
“너는 이런 큰 경기가 아무렇지도 않은 거냐?”
“뭐가? 재미있잖아?”
벌써 5번째 치르는 포스트 시즌, 조금만 휘청거려도 흔들리는 구름다리 위를 건넌다고 상상해 보자.
건널 때는 오금이 저리지만 그 다리를 무사히 건너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허세가 절로 튀어나온다. 그리고 다시 구름 위를 걷는 지옥의 도돌이표, 그 희열에 중독된 다카기는 그냥 즐기라며 거드름을 피웠다.
“뭐든 처음이 어색한 거야. 너도 한두 번 맛보면 생각이 달라질걸?”
채근성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나이는 나보다 어려도 경력 면에선 한참 위, 그렇다면 그런 거지 어쩌겠나. 덤덤하게 다음 타석을 준비했다.
“스트라이크 콜, 초구는 지켜봅니다.”
“채근성 선수의 아쉬운 점이 이거죠. 컨택률이 떨어지기 때문에 소극적인 스윙을 하는 건 그렇다고 쳐도 지금 이 공은 놓치면 안 되는 거죠.”
초구를 지켜본 채근성은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변화구에 헛스윙을 돌렸다.
타격감이 안 좋을 때 일어나는 현상, 첫 타석에서 날카로운 타격을 보여준 그 모습은 어디로 간 건가. 2번 째 타석은 삼구 삼진을 당하면서 체면을 구겼다.
그에 비해 잘만 치는 다른 타자들, 어제 4타수 1안타로 그럭저럭 체면만 세운 J. J. 핵먼은 첫 타석 안타에 이어 두 번째 타석에서도 좌중간에 떨어지는 적시타를 때려냈다.
포스트시즌 통산 68번 째 안타, 메이저리그 역대 3위에 이름을 올리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올 시즌 정규시즌 성적은 타율 0.297, 홈런 28개에 그쳤지만 포스트 시즌에서 강하다는 인상은 여전, FA 대박을 노리는 만큼 자기홍보에 집중했다.
주포지션은 2루수지만 유격수에 3루도 볼 수 있기 때문에 활용범위는 넓은 편, 올 시즌이 끝나면 보스턴과 이별하는 건 정해진 수순이라 에이전트도 뒤에서 바쁘게 움직였다.
‘2억 5천만 달러 받는다 두고 봐라.’
핵먼은 잭팟 꿈을 버리지 않았다.
8년 전, 베른트 존스라는 선수가 10년 2억 3천만 달러라는 계약을 받은 전례가 있기 때문, 베른트 존스도 핵먼과 비슷한 유형의 선수였다.
매년 3할 근처에 30홈런 정도 쳐 줄 수 있는 2루수, 2009년 세이버매트릭스에서 마이너스를 찍고도 골드 글러브를 수상해 논란이 일어났지만 2011년에 플러스로 끌어올리면서 공수를 갖춘 2루수로 재평가 받았다.
특히 공격력이 워낙 뛰어난 선수라 FA로 풀렸을 때 많은 관심을 받았고, LA는 베른트 존스에게 9년 2억 달러를 제시했다.
하지만 에이전트가 10년 2억 5천만 달러를 부르면서 협상은 결렬, 그렇게 서로 눈치를 보다 10년 2억 3천만 달러라는 대형 계약이 터졌다.
내가 베른트 존스와 비교해서 떨어질 게 뭐가 있나?
거기다 지금은 그때보다 선수연봉이 상승한 시대, 내가 2억 5천만 달러를 요구하는 게 그렇게 비웃음 당할 일인가.
8년 1억 7천만 달러에서 물러나지 않고 있는 보스턴, 그동안 연봉협상에서 양보만 한 핵먼은 이번만큼은 절대지지 않겠다고 칼을 세웠다.
‘안 줘’
물론 수더랜드 단장은 2억 5천만 달러 협박에 콧방귀를 뀌었다. 핵먼이 지난 5년 동안 기록한 wRC+는 평균 142, 다른 선수들보다 42% 정도 더 효율적인 타격을 했다는 뜻이다.
그럼 당연히 잡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측근들과 회의를 거쳐 핵먼의 부재는 다른 대체 자원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후보 명단에 오른 선수는 오클랜드의 피터 허스트, 올 시즌 성적은 타율 0.293, 14홈런, 72타점으로 화려함은 떨어지지만 wRC+ 는 132를 기록했다.
타율과 출루율은 핵먼과 비슷하고 세이버매트릭스로 평가했을 때 공격 면에서 핵먼과 그렇게 차이가 나지 앉는 전력이다.
거기다 핵먼이 FA로 풀리면 상대적으로 관심에서 멀어질 선수, 당신이 단장이라면 누굴 택하겠는가?
화려함과 스타성, 포스트 시즌에서의 임팩트를 따져보면 핵먼이 한 수 위지만, 수더랜드 단장은 피터 허스트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허스트를 놓쳤을 땐 그 후폭풍을 감수해야 하는 입장, 팀이 포스트 시즌을 치르고 있지만 수더랜드의 시선은 다음 시즌을 내다보고 있었다.
‘너도 꼭 잡는다.’
다음 목표는 호프만 포수, 이런 저런 근거를 바탕으로 주전포수로 기용했지만 이렇게까지 잘 해줄 줄은 예상도 못했다.
다른 투수들도 잘 리드해주지만 다카기와의 궁합은 환상적, 4000만 달러짜리 투수를 5000만 달러로 끌어올렸다.
강속구 투수가 많은 보스턴에서 특히 존재감을 발휘하는 선수, 다른 팀에서 이렇게 효율성을 낼 수 있을까.
특급 불펜 3인방에 쓴 돈은 대략 1억 2천만 달러, 그러고도 구단주가 지원해 준 돈에서 6천만 달러가 남는다.
이 정도면 잡고도 남는 선수, 피터 허스트를 잡는데 약간만 돈을 더 끌어오면 다음 시즌 전력도 탄탄하다.
‘5년 연속 WS 우승? 내 계획대로만 되면 그 이상도 가능하다.’
수더랜드는 통산 월드시리즈 우승을 7번이나 달성한 명 단장, 승리를 향한 열정은 선수들에 뒤지지 않았다.
“됐어!”
2차전도 보스턴의 완승으로 종료, 경기가 끝나자 수더랜드는 측근들과 가벼운 악수를 나눴다.
당연한 결과라고 예상은 했지만 경기는 끝까지 가 봐야 아는 법, 측근들을 물리치고 다카기와 얼굴을 마주했다.
두 사람은 돈론을 내보내고 후지타를 영입한 사건 때문에 잠깐 부딪친 적이 있다. 다카기는 실질적인 팀의 리더이자 중심, 무서울 게 없는 단장도 그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
“핵먼을 내보내고 허스트를 영입할 생각이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아주 좋은 생각이네요. 역시 단장님은 승리를 살 줄 아는 분이군요.”
다카기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솔직히 돈론을 보내고 후지타를 영입했을 땐 이해가 안 됐지만, 사람이 가끔 실수 할 때도 있지 않은가.
후지타가 정말 돈론의 자리를 대체할 만한 전력이었다면 그렇게 서운해 하지도 않았을 거다.
하지만 이번 계획은 나름 근거와 합리성을 갖춘 것, 다카기도 허스트라면 핵먼의 자리를 채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또 잡으셔야 할 선수가 있을 텐데요.”
“호프만 말인가?”
“역시, 저랑 생각이 같으시네요.”
두 사람은 가볍게 주먹을 맞부딪쳤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이 잘 통하는 사이였다니, 왜 미리 대화를 나눠보지 않았을까.
하지만 다른 선수들은 염가 계약으로 대체할 수 있어도, 알 디즌은 반드시 잡아야 하는 전력, 다카기는 그건 어떻게 되고 있냐며 질문을 이어갔다.
“걱정하지 말게. 구단주가 요즘 지갑이 꽤 두둑해졌거든, 우승을 원한다면 내 놔야지 어쩌겠나?”
“훗 ~ 이제 단장님이 완벽한 팀의 실세인 겁니까?”
“그것도 이겨야 가능한 일이지, 지면 나도 월급쟁이에 불과 해”
“그럼 앞으로도 계속 이겨야 겠네요.”
다카기는 앞으로도 걱정하지 말라며 단장을 안심시켰다.
계산이라면 누구보다 밝은 이 사람이 왜 내게 연 평균 4천만 달러짜리 대형 계약을 안겨줬겠나.
그만한 가치가 있는 선수라는 걸 인정한 것, 자신을 인정해 줄 줄 아는 사람을 위해 뛰는 것도 프로의 자세 아니겠나.
우승이라는 공통의 목적을 가진 이상, 두 사람은 파트너 관계를 이어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