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231화 (231/361)

231화. 먹어본 놈이 먹는다 - (7)

시간은 흘러 7월 22일, 순위권 경쟁을 하는 팀들은 바쁜 일정을 보냈지만 경쟁에서 일찌감치 밀려난 자들은 느긋한 나날을 보냈다.

오스틴 텍산스에서 시애틀로 트레이드 된 채근성도 그 중 한 명, 오스틴에서도 그럭저럭 괜찮은 선수였지만 팀 전력이 얄팍한 시애틀에서 주전 자리를 보장 받으면서 성적은 크게 향상됐다.

두드러지는 장점은 없지만 그렇다고 뚜렷한 단점도 없는 선수, 트레이드 시장에서도 가치를 인정받았다.

‘저니맨 신세는 별론데’

하지만 채근성은 다른 팀으로 트레이드 되길 원치 않았다.

한국 나이로 어느덧 29살, 떠돌이 생활보다 정착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시애틀은 한국 교민도 많고 미국 서부 서해안 지역을 대표하는 항구도시라 살기 나쁘지 않다.

단점이라면 시즌 이동거리가 무지막지하게 멀다는 것, 그래도 주전으로 뛸 수 있다면 이 정도는 감수할 수 있었다.

“자, 시애틀의 1회 말 공격, 채근성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올 시즌 성적은 타율 0.276, 11홈런, 41타점, 모든 지표에서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내고 있습니다.”

“올 시즌 3월에 갑작스럽게 트레이드가 되면서 본인도 많이 놀랐다고 했는데, 다행히 잘 적응하고 있죠. 역시 선수에게 맞는 팀이 있는 것 같습니다.”

[따아악 ~ !!]

“말씀 드리는 사이 멀리 가는 타구!! 담장을 넘어 갑니다!!!! 채근성 선수의 시즌 12호 홈런!!!! 시애틀이 선취점을 가져갑니다!!”

“지금은 낮은 공인데 잘 걷어 올렸죠. 공이 배트를 따라가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멋진 스윙이었습니다.”

한 건 해낸 채근성은 더그아웃에서 동료들과 하이파이브를 나눴다.

훗날 나이를 먹고 누군가가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가 어느 때였냐고 묻는다면 바로 지금이라고 답할 수 있을 정도, 그 정도로 이곳의 생활은 만족스러웠다.

포스트 시즌? 그런 건 처음부터 바라지도 않았다.

4년의 마이너리그 시절을 거쳐 메이저리그에 연착륙 한 것만으로도 기적, 트레이드 마감 시한이 이대로 지나가길 바랐다.

“자네, 오늘이 마지막이야.”

하지만 그 바람은 바로 무너졌다.

경기가 끝난 후 사무실로 불려갔더니 더는 볼 일 없다는 말투로 외면하는 감독, 속상한 마음에 어느 팀으로 가게 됐는지 묻지도 않고 사무실을 나왔다.

‘보스턴? 보스턴?? 왜?? 어째서??’

채근성을 영입한 팀은 보스턴이었다.

그것도 후안 위긴스를 내주고 받아낸 트레이드, 위긴스는 그동안 보스턴에서 주포로 활약했지만 올 시즌 성적은 타율 0.231, 홈런 16개로 약간 애매한 시즌을 보내고 있다.

그래도 얼마든지 주전으로 뛸 수 있는 선수, FA자격 획득까지 2년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지만 포스트 시즌과 거리가 있는 시애틀이 영입할 선수가 아니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트레이드, 하지만 일개 선수가 단장들 사이에 오고 간 대화를 어떻게 알겠는가.

어쨌든 이렇게 한국 유일의 야수 메이저리거는 미국 서부 끝에서 미국 동부 끝의 도시로 둥지를 옮겼다.

그 뒤를 잇는 수많은 한국 기자들, 보스턴은 올해 월드시리즈 5연패에 도전하는 팀이다. 그 명문구단에 한국 선수가 발을 들이다니, 한국 본토에서도 일대 사건으로 떠올랐다.

“어서 오게.”

브라이스 감독은 먼 길을 날아온 선수에게 악수를 권했다.

월드시리즈 우승만 6번을 이룬 명장, 이 사람 밑에서 뛰는 날이 올 줄 상상이나 했을까. 채근성은 앞으로 잘 부탁한다며 고개를 숙였다.

“우리 팀에도 자네와 같은 국적의 선수가 있어. 그러니까 앞으로 편하게 지내라고”

이어지는 감독의 말에 채근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스턴에 한국 선수가 또 있었나? 혹시 한국과 일본을 혼동한 건 아닌지, 예상은 적중했다.

“그 선수는 일본인이잖아요.”

“그래도 한국하고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 어쨌든 같은 동양인 아닌가? 잘 지내라고”

브라이스 감독은 어떻게든 이 트레이드를 운명으로 끌고 갔다. 원래 립서비스가 좋은 사람, 채근성은 그러려니 하는 얼굴로 클럽하우스에 들어섰다.

‘누가 또 왔나보네.’

다카기는 자리에 앉아 독서에 열중했다.

매년 이때가 되면 보스턴은 이런 저런 선수가 클럽하우스를 거쳐 간다. 우승권을 노리는 팀이라 당연, 거기다 이번엔 주포인 후안 위긴스가 둥지를 떠났다.

돈론은 작년에 떠났고 J. J. 핵먼도 떠나는 게 거의 기정사실화 된 상황, 이런 팀에서 누가 오고 가는 걸 신경 써야 되나?

다른 선수들의 생각도 마찬가지라 채근성은 약간 당황했다.

성적은 바닥을 기어도 언제나 활기차고 즐거웠던 시애틀 클럽하우스, 그런데 이 놈의 집구석은 왜 이 모양인가.

월드시리즈 4연패를 이뤄냈다는데 다 따로 노는 분위기, 반갑다고 인사를 할 분위기가 아니라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여기 있는 놈들은 거의 다 이름 값 하는 스타들, 이제 막 주전을 꿰 찬 채근성은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시애틀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 하지만 이젠 이곳이 내 집이라 현실을 받아들였다.

“여기 커피는 어디에 있나요?”

“가서 사 오셔야 돼요.”

그나마 말을 받아주는 사람은 클러비 뿐, 커피가 없다는 말에 채근성은 절망했다.

시애틀은 커피에 찌든 도시라고 불릴 정도로 커피 소모량이 엄청나다. 야구 선수라고 다르겠는가, 마침 채근성은 커피 없이는 못 사는 체질, 덕분에 커피가 늘 준비돼 있는 시애틀 클럽하우스에 금세 적응했다.

그런데 이런 것도 이제는 내가 알아서 챙겨야 하다니, 명문구단이고 뭐고 야구할 맛이 안 났다.

동료 간에 애정은 없어도 커피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별 수 없이 평소 함께하는 통역관과 함께 커피 전문점으로 향했다.

“새로운 팀에선 잘 적응하고 계신가요?”

“뭐 ··· 나름 잘 지내고 있습니다.”

눈치 없이 이런 때 인터뷰를 요청하는 한국 기자들, 나쁜 말은 잘 못하는 채근성은 거짓말을 했다.

“다카기 선수와 대화는 많이 해 보셨나요?”

“글쎄요. 의외로 말이 없는 선수라 아직은 ··· ”

한국 기자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보다 인터뷰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선수가 팀 동료와 대화가 거의 없다니, 믿기 힘들었는지 바로 인터뷰를 요청했다.

바로 튀어나온 문제의 인물, 기자들의 질문에 다카기는 당연한 일이라고 답했다.

“원래 이곳 분위기는 다른 선수에게 참견 안 하는 편입니다. 그리고 이건 선수들이 서로 동의한 일이죠. 저도 예전엔 참견도 하고 동료들에게 말을 많이 걸었는데, 이젠 제 할 일만 신경 쓰고 있습니다.”

“그래도 팀 동료인데 조금은 환영해 주셔도 ··· ”

“뭐 ···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이 자리에서 환영의 뜻을 표하겠습니다.”

누가 봐도 진심과 거리가 먼 발언, 원래 이런 선수였나. 어쨌든 이렇게 채근성과 보스턴의 어색한 동거가 시작됐다.

[보스턴은 날 버렸다. 내가 없었으면 우승 할 수 있었겠나?]

이때, 시애틀로 트레이드 된 후안 위긴스가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그동안 보스턴을 위해 친 홈런이 몇 개인가? 포스트시즌에서 쳐낸 홈런만 해도 10개 이상, 그런데 필요 없어졌다고 이렇게 버려도 되는 건가?

미래가 있는 팀에 버렸다면 이렇게까지 서운하진 않았을 텐데, 꿈도 미래도 없는 팀에 버려졌으니 의욕이 나질 않았다.

[이 정도면 좋게 헤어진 거다.]

이때 다카기가 SNS에 카운터를 날렸다.

후안 위긴스가 그동안 보스턴에 지대한 공언을 한 건 누구나 인정한다.

하지만 그건 과거의 일, 위긴스는 예전부터 수준 이하의 수비로 여럿 팬들의 뒷목을 잡게 했다. 그럼 지명타자로 쓰면 되겠지만 그 자리는 장기계약을 맺은 셰퍼드와 울반스키가 돌아가면서 책임지고 있다.

뭣보다 시즌을 거듭할수록 하락세를 타고 있는 위긴스의 방망이, 장타력은 몰라도 올 시즌 타율은 0.231밖에 안 된다.

거기다 2년 후 FA 자격까지 얻는 선수, 팀 입장에선 트레이드 카드로 써먹는 게 낫다.

본인의 가치를 증명하지 못했으면 떠나는 게 맞는 법, 그리고 보스턴에서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 몇 개 챙겼는데 뭐가 아쉽다고 언론 플레이를 하는 건가.

그래도 옛 정이라는 게 남아 있는지, 다카기는 FA 자격 획득까지 2년 남았으니 새로운 팀에 잘 적응해서 연봉 대박 터뜨리라는 충고도 덧붙였다.

‘이 팀은 피도 눈물도 없구나.’

채근성은 그제야 보스턴의 팀 컬러를 이해했다.

동료라기보다는 우승을 위해 협력하는 동업자, 다 따로 놀지만 같은 목표를 두고 있기 때문에 경기에선 무서울 정도로 집중한다.

여기에 쓸모가 없다고 판단되면 가차 없이 잘라내는 단장까지, 우승을 노리는 팀은 원래 이런 건가.

솔직히 이 팀에서 뛰는 게 즐겁진 않지만, 내 생전에 월드시리즈에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언제 또 오겠는가?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 채근성은 그동안 포스트시즌에 욕심은 없었지만 올해가 기회라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았다.

위긴스가 트레이드 된 덕분에 넓어진 외야 구멍, 덕분에 채근성은 트레이드 된지 이틀 만에 주전 우익수로 나서게 됐다.

“우리는 위긴스를 원한다!!”

“너는 시애틀로 돌아가라고!!”

보스턴 팬들은 수더랜드 단장을 겨냥한 시위를 이어갔다.

포스트 시즌에서 홈런 13개를 친 선수를 시애틀로 보내고 받아온 선수가 겨우 저거인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짓, 하지만 수더랜드 단장은 특별석에서 차분한 표정으로 경기를 지켜봤다.

‘당신들이 내 뜻을 어떻게 알겠어?’

채근성은 올 시즌 우익수에서 DRS +2를 기록하고 있다 .

트레이드 된 위긴스는 마이너스 9, 즉 위긴스 때문에 수비에서 9점을 더 실점했다는 뜻이다.

팬들은 그동안 위긴스가 쳐 낸 홈런만 보고 있지만, 사실 수비에서 말아 먹은 실점을 방망이로 만회한 것뿐이다.

그리고 올 시즌만 놓고 보면 채근성의 방망이 생산력은 위긴스에 뒤지지 않는 수준, 철저하게 통계를 기반으로 트레이드를 결정했다.

결과를 내면 팬들은 잠잠해지겠지, 보스턴에서 단장 생활을 10년 동안 하다 보니 어지간한 욕설은 면역이 됐다.

“자, 1회 말 보스턴의 선공으로 경기가 시작됩니다. 선두 타자는 몬테로 선수, 올 시즌 타율 0.267, 홈런 9개, 39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최근 타격감이 아주 좋죠. 후반기 성적만 놓고 보면 0.324입니다.”

작년에 캔자스시티에서 보스턴으로 유니폼을 갈아입은 몬테로는 보스턴과 5년 6000만 달러 계약에 합의했다.

3년 연속 올스타에 출전한 몸이지만 이제는 기량이 많이 떨어진 편, 지금 계약을 안 하면 저니 맨 신세가 될 건 누가 봐도 뻔했다.

5년 6000만 달러도 따지고 보면 그렇게 나쁜 계약은 아니었고, 그렇게 계약이 성사되면서 보스턴은 비교적 싼값으로 주전 유격수를 확보했다.

‘나는 어디서 둥지를 틀지?’

채근성은 타격에 임하는 몬테로를 유심히 살폈다.

선수에겐 안정적인 환경도 무시 못 할 조건, 3년 연속 올스타에 뽑힌 선수가 왜 자존심을 굽혔겠나?

나도 이젠 나이도 있고 둥지를 틀어야 하는데, 이곳에서 원하는 야구를 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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