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먹어본 놈이 먹는다 - (6)
시간은 흘러 7월 4일, 다카기는 전반기 마지막 등판에 나섰다.
상대는 아메리칸리그 중부지구 최하위 디트로이트, 한 마디로 망한 팀이다.
비유하자면 미래가 보이지 않는 중병 환자라고 해야 할까, 우승 한 번 해보겠다고 돈을 퍼부었지만 실패하고 지금은 리빌딩도 어려워 졌다.
■ 조나단 맥픽
= 12년 3억 2천만 달러(잔여계약 4년 1억 2천만 달러)
■ 마티 포드
= 7년 2억 달러(잔여계약 3년 8천 5백 달러)
일단 이 두 선수에게 들어가는 한 해 연봉만 6천만 달러 정도다.
제 역할이라도 해주면 속이 덜 쓰릴 텐데, 조나단 맥픽은 이제 3할 타율은커녕 10홈런도 어려운 똑딱이가 됐다.
선발진의 한 축인 마티 포드가 부상자 명단에 들어가는 건 이제 놀라운 일도 아니고, 설상가상 그동안 팀 투자에 적극적이었던 토드 코스트 구단주까지 팀을 처분하고 떠나면서 투자마저 안 되고 있다.
작년 시즌 성적은 47승 115패, 특히 시즌 마지막 20경기에서 19패를 당하며 메이저리그 역사를 새로 썼다.
더 암울한 건 팀의 미래를 이끌 유망주도 많지 않다는 것, 우승 한 번 해보겠다고 유망주를 퍼주고 즉시 전력선수를 영입하는 짓을 반복하다보니 팜이 초토화 됐다.
잘못된 투자가 불러온 참극, 최근 월드시리즈 우승을 쓸어 담고 있는 보스턴이 주축선수들 재계약에 소극적인 것도 디트로이트의 참극과 무관하지 않았다.
물론 다 잡으면 얼마나 좋겠나. 하지만 보스턴이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이유는 공격적인 투자뿐만 아니라 미래를 위한 팜 구축도 한 몫 했다.
길어봤자 1 ~ 2년 안에 해체될 꿈의 라인업, 특히 핵먼을 잡을 1억 7천만 달러를 불펜에 투자하면서 야수 유망주들이 필요해 졌다.
돈론 - 디즌 - 위긴스가 외야에 제대로 뿌리를 박는 바람에 한동안 승격 자체가 없었던 보스턴,
팬들은 꿈의 라인업이 해체될지도 모른다며 불만을 토해내고 있지만, 수더랜드 단장은 이미 미래를 위한 실험에 나섰다.
‘재미로 긁었다고 생각하자.’
후지타는 오늘 벤치에 앉았다.
2년 1100만 달러면 버려도 큰 부담이 없는 금액, 혹시나 해서 산 복권이 꽝이 나왔지만 억대 돈을 굴리는 단장은 신경 쓰지 않았다.
오늘 좌익수로 출전한 선수는 조시 그레이, 단장의 총애를 받는 선수라 브라이스 감독은 그레이를 2번으로 밀어줬다.
‘원래 저렇게 치나?’
하지만 브라이스의 감독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스탠스를 넓게 쓰는 선수는 스윙을 하다 허리가 세워지는데, 문제는 이때 몸이 지나치게 기울면 안 된다.
그레이는 크지 않은 체구(181cm, 86kg) 때문에 스트라이드를 넓게 써서 파워를 살려주는 스타일, 마이너리그에선 어땠을지 몰라도 저런 자세로 메이저리그의 공을 쳐내는 건 어려웠다.
딱 ~
아니나 다를까 타격 후 1루로 쏠리는 몸, 느리게 굴러간 땅볼은 유격수를 거쳐 1루에 전달됐다.
지금까지의 모습만 보면 장타는 기대하기 어려운 선수, 하지만 그레이는 다음 타석에서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갑자기 좁아진 스탠스, 덕분에 자세를 낮춘 몸이 위로 솟아오르며 1루 쪽으로 기우는 현상도 없어졌다.
따악 ~ !!
“밀어낸 타구가 중견수 옆에 떨어집니다!! 조시 그레이의 메이저리그 통산 첫 번째 안타!! 얼 스나이더에게 뽑아냅니다!!”
“역시 배트 컨트롤이 좋은 선수네요. 마이너리그에서 타이밍이 늦어도 어떻게든 안타를 만들어 내는 모습을 보였는데, 그만큼 손목 힘이 좋다는 뜻이겠죠?”
첫 안타를 뽑아낸 그레이는 1루 코치와 가볍게 하이파이브를 나눴다.
스탠스를 넓게 쓰며 파워 배팅을 하고 싶지만, 내게 지금 그럴 여유가 있을까? 그런 건 장기계약을 맺고 출장기회가 보장된 선수들이나 할 수 있는 일, 당장 결과를 보여줘야 할 유망주가 할 타격이 아니다.
이런 때를 대비해 연습한 2가지 타격 폼,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타고난 재능과 노력까지 겸비한 유망주는 이걸 해냈다.
‘좋은데? 역시 보는 눈이 있어.’
그레이를 지켜본 다카기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공격은 둘째 치고 수비 능력이 돋보이는 선수, 지난 5년 동안 외야수들의 발암 수비를 지켜봤으니 그레이의 안정적인 수비가 눈에 띄는 건 당연했다.
역시 선수를 볼 줄 아는 단장, 그러니까 512만 달러를 써서 날 영입한 게 아니겠나.
돈을 쓸 줄 모르는 게 아니라 효율적으로 쓸 뿐, 그레이가 좋은 활약을 해 준다면 돈론의 빈자리는 채워지겠지, 그 다음은 2루에 구멍이 생기겠지만 단장이 알아서 할 거라고 믿었다.
‘하긴, 내가 돈을 많이 받긴 하지.’
다카기는 미안한 마음을 투구로 씻어냈다.
나한테 매년 4천만 달러를 써야하니 다른 곳에서 절약해야겠지, 그래도 돈 값을 하면 나도 떳떳하고 단장도 흐뭇해 할 거 아닌가.
많이 먹긴 하지만 드러눕거나 의미 없이 싸지르진 않았다.
“스윙!! 삼진입니다!! 바깥쪽 높은 공!! 조나단 맥픽은 2번 째 타석도 삼진으로 물러납니다.”
“빠른 볼만 던져도 대응이 안 되네요. 맥픽은 이제 안 될 것 같습니다.”
한때 3할 30홈런 100타점이 기준이었던 타자가 이렇게 될 줄이야,
맥픽은 지금 은퇴해도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 지지를 받을 선수다. 통산 성적은 타율 0.298 - 467홈런, 하지만 허리 부상을 당하면서 장타력에 배트 스피드까지 죽어버렸다.
디트로이트 팬들은 먹을 만큼 먹었으니 이제 그만 은퇴하라고 압력을 넣는 중, 하지만 맥픽은 욕을 먹고 삼진을 당해도 꿋꿋하게 타석에 들어서 팬들의 혈압을 끌어올렸다.
‘그래, 돈 맛은 먹어본 놈이 아는 거지.’
다카기는 맥픽의 입장을 이해했다.
은퇴만 안 하면 매 주 돈이 착착 들어오는데 누가 옷 벗고 나가겠나. 다카기는 통장 관리를 아내에게 맡겼지만 얼마 들어왔다는 문자를 받을 때마다 희열을 느꼈다.
12년 3억 2천만 달러 계약을 맺은 저 선수라고 다를까.
한 번 맛보면 빠져나올 수 없는 세계, 다카기는 34세에 다시 FA 자격을 얻는다. 나이 때문에 대박은 어렵겠지만 그때까지 쓸 만한 기량을 유지한다면 이 팀 저 팀 옮겨 다니며 알바는 할 수 있겠지, 미래를 위한 투자는 계속됐다.
‘너는 내가 여기 눌러 앉힌다. 단장을 협박해서라도’
스탠리 호프만을 장기계약으로 묶어두는 게 우선,
호프만도 이제 5년 차라 언제 어떻게 떠날지 모른다. 빠른 볼과 슬라이더를 앞세운 투구를 하려면 저 녀석의 수비가 필요, 다른 팀으로 넘어가는 건 사양했다.
“다시 스윙!! 막고 1루로 던집니다!! 다카기는 오늘 탈삼진 10개째!! 시즌 9번 째 두 자릿수 탈삼진을 달성합니다.”
“정말 무서운 기세네요. 지금까지 115이닝을 던지면서 탈삼진이 172개거든요. 통산 4번 째 300탈삼진 시즌도 무난할 것으로 보입니다.”
경기는 어느덧 6회 초, 첫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보낸 다카기는 얼 사우자(Souza)를 상대했다.
오늘 경기에서 유일하게 탈삼진을 잡지 못한 선수, 너도 하나 헌납하라는 압력을 넣었다.
‘사양하겠음’
사우자는 초구를 지켜봤다. 무너져 가는 집안의 유일한 기둥, 올 시즌도 타율 0.282, 홈런 13개를 쳐내며 팀 내 유일한 올스타로 선발됐다.
시즌 내에 트레이드 될 수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지만 어쨌든 지금은 디트로이트 소속, 두들겨 맞는 건 일상이 됐지만 대놓고 살점을 내줄 생각은 없었다.
따악 ~ !!
“밀어 친 타구가!! 파울 라인 밖으로 나갑니다. 따라가긴 하는 군요.”
“타격 재능은 분명 있는 선수입니다. 다만 올 시즌 볼넷이 12개 밖에 안 될 정도로 너무 적극적인 게 문제인데, 이것만 다듬으면 더 좋은 선수가 될 겁니다.”
호프만 포수는 사우자의 공격적인 성향을 이용했다.
타자의 타이밍이 빠른 볼에 타이밍이 맞춰져 있으니 브레이킹 볼을 집어넣으면 흔들 수 있겠지, 하지만 삼진을 잡고 싶은 다카기는 바깥쪽으로 유인하고 몸 쪽으로 결정구를 던지는 패턴을 생각했다.
나쁘지 않은 볼 배합, 호프만은 바깥쪽으로 빠져 앉았다.
따악 ~ !
사우자는 도망치는 공도 엉덩이를 쭉 빼며 때려냈다.
투 스트라이크라 어지간한 공은 때려내야 했는데 그렇다고 쳐도 너무 극단적인 배팅, 어쨌든 호프만은 예정대로 몸쪽 공을 요구했다.
따악 ~ !
“다시 파울입니다!! 끈질긴 승부를 하고 있군요.”
“다카기를 상대로 이 정도 끈질긴 모습을 보여주는 타자는 많지 않습니다. 안타가 되든 안 되든 이런 모습은 높이 평가할 만 하네요.”
사우자는 파울 신공으로 승부를 7구까지 끌고 갔다.
어지간히 안 죽는 자식, 볼 배합은 관두고 힘으로 밀어붙였다.
따악 ~ !!
‘어랍쇼?’
중견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 내가 파워 게임에서 질 줄이야. 약간 자존심이 상한 다카기는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너 반드시 잡아먹는다.’
브라이스 감독은 올스타전도 있으니 무리하지 말라고 권했지만, 다카기는 이후에도 마운드를 지켰다.
올스타전보다 흥미가 있는 상대, 사우자도 교체되지 않고 타석에 섰다. 다카기가 마운드에 오른 뜻을 눈치 챈 것, 올스타전 출전이라는 그럴듯한 이유로 승부를 피하지 않았다.
“스윙!! 크게 휘두릅니다. 101마일!! 8회에도 구위는 건재합니다!!”
“달아올랐네요. 이렇게 되면 누구도 못 말립니다.”
다카기는 2구도 100마일을 박아 넣었다.
그걸 또 죽자고 따라가는 사우자, 승패는 기울었지만 홈 팬들은 사우자의 활약에 응원의 목소리를 보냈다.
“이겼어!! 내가 이겼다고!!”
하지만 마지막 대결은 다카기가 웃었다.
떨어지는 체인지업에 완전히 빼앗긴 타이밍, 목표를 이룬 다카기는 가슴을 치며 자진 강판했다. 정말 지고는 못 사는 선수, 브라이스 감독은 돌아온 에이스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이제야 속이 좀 후련하나?”
“솔직히 조금은 아쉽네요.”
유리한 볼 카운트를 잡고도 5구만에 삼진을 잡은 건 옥의 티, 그렇게도 완벽함을 추구하고 싶은가. 브라이스 감독은 그 정도면 훌륭했다며 달아오른 에이스를 다독였다.
“나중에 한 판 또 붙자고 전해주십쇼.”
분한 건 사우자도 마찬가지, 기자들은 도전장을 보스턴 클럽하우스로 가져왔다.
피할 이유가 없는 승부, 하지만 다카기는 더욱 재미있는 승부를 위해 사우자를 자극했다.
“그 친구는 맘바(Manba) 같군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맘바는 일단 눈에 보이는 건 물고 보지 않습니까? 스트라이크, 볼도 가릴 줄 모르고 달려드는데 솔직히 너무 무모해 보였습니다.”
블랙 맘바는 지구상에서 성질 더럽기로 유명한 뱀,
얼마나 공격성이 심한지 지나가던 차를 공격하거나 심지어 죽은 동물의 사체를 물어뜯는 모습도 포착됐다.
배가 안 고파도 다른 동물을 물어죽일 정도로 흉악한 뱀, 일단 덤비고 보자는 무모함에 날카로운 배팅 실력을 가진 사우자에 딱 어울리는 별명이었다.
“맘바라고요? 나쁘지 않네요.”
사우자는 다카기의 도발을 쿨 하게 받아들였다.
언젠간 널 물어죽일 거라는 도발도 추가, 다카기도 달리는 차에 치여 죽을 준비나 하라고 맞받아치면서 두 선수는 대립 구도를 형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