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먹어본 놈이 먹는다 - (4)
[폴 돈론, 메이저리그 타격 1위 질주]
어느덧 6월에 접어든 시즌, 개인 기록 싸움의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2년 전 AL MVP를 수상하며 각성한 돈론은 3년 연속 AL 타격왕을 향해 질주, 지금까지 49경기에서 89안타, 타율 0.395 기록했다.
볼넷이 14개 밖에 안 될 정도로 공격적인 타격을 하고 있는 탓에, 전문가들은 이 페이스는 조만간 꺾일 거라고 예상했지만, 다카기 귀엔 못 먹는 포도를 향한 험담처럼 들렸다.
“아무리 떨어져도 1위 할 걸?”
다카기는 돈론이 최다 안타 1위를 할 거라고 믿었다.
돈론은 신인 시절부터 컨택률 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2할 후반 대를 칠 때도 컨택률은 92%를 찍었을 정도, 여기에 타구에 힘을 실을 줄 알게 되면서 타율과 장타력 모두 급상승했다.
괜히 파이프라인 유망주 3위에 올랐겠는가, 6년 1억 5천만 달러면 가성비가 좋은 계약, 시카고가 좋은 계약을 했다는 건 인정해야 했다.
그 돈론이 빠져나가면서 명백히 떨어진 보스턴의 공격력, 후지타 겐고로를 영입했지만 돈론의 빈자리를 채우기엔 턱 없이 부족했다.
더 심각한 건 해줘야 할 선수들의 부진,
타율은 떨어져도 장타력은 대단했던 후안 위긴스는 올 시즌 0.229, 홈런 5개에 그치고 있다. 아무리 힘이 좋아도 배트에 뭐가 걸려야 넘어갈 게 아닌가. 여기에 3년 연속 타격 성적이 상승한 알 디즌도 0.261, 홈런 4개에 머물렀다.
불행 중 다행은 백전노장 데이브 셰퍼드가 0.303, 홈런 8개로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스탠리 호프만이 주전 포수로 기용되는 경기가 늘어나면서 수비 부담을 덜게 된 울반스키, J.J. 핵먼이 분전하면서 그나마 체면은 지키고 있다.
그래도 작년에 비해 화력이 떨어진 건 명백, 일각에선 위기론이 흘러나왔지만 다카기는 선을 그었다.
“우승은 해 본 놈들이 하는 겁니다. 올해는 시동이 다소 늦게 걸리고 있지만 언젠간 올라올 선수들이라고 믿습니다.”
다카기는 이례적으로 공식 석상에서 동료들의 체면을 끌어올렸다.
4년 연속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는데 이 정도면 최고의 선수들 아닌가. 언제나 야구가 잘 될 순 없는 법, 다카기도 올 시즌 팔꿈치 부상으로 잠깐 흔들린 적이 있다.
잘 할 때는 더 채찍질 하고 못 할 때는 위로하는 게 다카기의 리더십, 평소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기에 동료들은 당황했다.
“너 진짜 우리가 아는 그 녀석 맞냐?”
“가면 쓰고 있는 거 아니지?”
“손 저리 치워라”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카기는 이거 가면 아니냐고 달려드는 손을 매몰차게 쳐냈다.
동료들은 우리가 알고 있던 그 녀석이 맞다며 안심, 덕분에 보스턴 클럽하우스는 평소처럼 하루를 맞이했다.
오늘 상대 팀은 시카고, 집 나갔던 돈론이 다른 집 옷을 입고 돌아왔다. 보스턴 팬들 입장에선 속이 끓는 경기, 뭣보다 틈만 나면 돈론과 비교 당하는 후지타에겐 좋은 흐름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성적은 타율 0.266, 홈런 2개, 나쁘다고 할 순 없지만 보스턴이 후지타에게 기대한 건 장타력이다.
일본에서 시즌 평균 30홈런을 쳐 줬던 선수, 못해도 15홈런은 쳐 줘야 하는데 지금 페이스면 10개가 고작, 거기다 수비도 안 되는 선수를 좌익수로 쓰고 있으니 조만간 수더랜드 단장이 결단을 내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자, 1회 초 시카고의 공격으로 경기가 시작됩니다. 선두 타자는 폴 돈론, 시즌 타율 0.395, 홈런 4개, 20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4할 시즌에 도전하고 있는데요. 일단 최근 10경기 성적만 놓고 보면 0.463, 어떤 투수를 만나도 안타를 때려내고 있습니다.”
“글쎄요. 그것도 투수 나름이겠죠.”
피트 오어는 은근 슬쩍 돈론을 깎아내렸다.
피트 오어는 뿌리가 깊은 보스턴의 골수 팬, 그렇다고 아무 근거 없이 상대 팀 선수를 깎아내리진 않는다.
보스턴에 다카기라는 철벽이 있는데 그 앞에서 쉽게 안타를 때려낼 수 있을까. 내일이면 확인할 수 있겠지, 일단 지금은 눈앞에 펼쳐지는 경기에 집중했다.
따악 ~ !!
돈론은 바깥쪽으로 들어오는 공을 얄미울 정도로 예쁘게 받아쳤다.
파워 스윙을 하는 선수들은 바깥 쪽 공을 때릴 때 몸이 홈 플레이트 쪽으로 기우는 현상이 벌어지는데, 이러면 밸런스가 무너져 좋은 타구를 만들기가 어렵다.
타자가 이런 증상을 보이면 바로 몸 쪽을 던지는 게 답, 하지만 타격감이 좋은 돈론은 별 다른 약점을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작년이 나았네.’
하지만 돈론을 잘 알고 있는 다카기는 뭔가를 발견했다.
돈론은 지난 2년 동안, 3할 중반의 타율에 20홈런이 넘는 생산력을 보여줬다. 하지만 올해는 어떤가?
극단적인 오프 스탠스는 돈론의 특징, 이것 때문에 한때 바깥쪽 공에 약점을 보인적도 있다. 그러다 중심 발을 홈 플레이트 쪽으로 옮기면서 반등한 장타력, 바깥쪽 공 대응력도 좋아졌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허리를 많이 숙여 바깥쪽 공을 의도적으로 밀어치는 타격을 하고 있는데, 이러면 컨택 범위는 늘어나지만 몸 쪽 공이 들어왔을 때 스윙이 돌아 나올 공간이 좁아진다.
장타력이 줄어든 것도 그런 이유겠지, 지금은 좋은 타격감과 운동능력으로 커버하고 있지만 몸 쪽을 집중공략당하고 페이스가 흐트러지면 어떻게 될까?
돈론이 올해도 타격 1위를 차지할 거라고 믿고 있지만, 상대는 이제 친구가 아니라 적, 철저하게 무너뜨리는 방법을 연구했다.
‘그렇단 말이지?’
공수 교대 때, 다카기는 스탠리 호프만에게 정보를 흘렸다.
함께 5년이 넘는 시간을 보냈는데 나는 왜 깨닫지 못했을까, 일단 조언대로 볼 배합을 몸 쪽으로 집중시켰다.
딱 ~ !
“잡아당긴 타구 2루수가 잡아내지만 던지진 못합니다!! 폴 돈론의 연속 안타!! 두 타석 모두 출루하는 군요.”
“잘 맞은 공이 아니었는데 코스가 좋았죠. 이건 어쩔 수 없습니다.”
안타는 나왔지만 효과는 있었던 작전, 스탠리 호프만은 3번 째 승부에서 바깥쪽을 멀게 던지고 몸 쪽으로 바짝 붙이는 볼 배합으로 돈론을 잡아냈다.
물론 투수의 제구력이 받쳐줬기에 가능했던 일, 그래도 이걸 적극 활용한 건 호프만의 능력이었다.
‘뭔가 냄새가 나는데’
한편, 더그아웃 벤치에 앉은 돈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스턴 더그아웃엔 선수 뒷조사를 취미로 삼는 녀석이 앉아 있다. 갑자기 볼 배합이 바뀐 건 누구의 생각이었을까.
그것보다 내가 몸 쪽 공에 약한 선수였나? 신인 시절 바깥쪽 공에 약점을 보인 적은 있지만 몸 쪽은 상당히 잘 쳤다.
그걸 알고 있는 상대 투수도 몸 쪽 승부는 피하고 있는데, 오늘 여기서 호구가 잡히면 몸 쪽 승부가 집중되겠지. 사구 때문에 2번이나 부상자 명단에 오른 돈론은 그런 시나리오는 바라지 않았다.
그렇게 경기는 계속 돼 3대 1로 앞서 나가고 있는 시카고의 7회 초 공격, 폴 돈론은 4번 째 타석을 맞이했다.
‘힘으로 밀어붙인다.’
브라이스 감독은 하버스태드를 마운드에 올렸다.
최고 98마일의 빠른 볼에 위협구를 활용할 줄 아는 선수, 사구에 트라우마가 있는 돈론이 가장 까다롭게 여길 타입이다.
여기에 스탠리 호프만의 리드가 받쳐준다면 막아낼 수 있겠지, 서로에 대해 잘 아는 만큼 신속한 교체가 이뤄졌다.
‘또 먹히겠지?’
스탠리 호프만은 이번에도 바깥쪽으로 멀게 던지는 작전을 택했지만, 선구안이 좋은 돈론은 낚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몸 쪽으로 붙일 뿐, 하지만 가운데로 몰리고 말았다.
따악 ~ !!
“아 ~ 이 타구는 우중간에 떨어지는군요. 폴 돈론은 오늘 3안타, 시즌 92번째 안타를 기록합니다.”
“그렇게 아프진 않은데 자주 맞으니까 따끔하네요. 아직 이닝이 많이 남았기 때문에 보스턴도 대책을 세워야 할 것 같습니다.”
안타가 나왔지만 호프만은 투수에게 침착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볼 배합은 괜찮았지만 공이 가운데로 몰리면서 맞은 안타, 하버스태드도 본인의 잘못이라고 인정하고 후속타자와의 상대에 집중했다.
호프만은 도루 저지율은 낮아도 강속구나 빠지는 볼에 탁월한 수비를 보여주는 선수, 하버스태드는 자신 있게 빠른 볼을 던졌다.
‘이럴 줄 알았다.’
빠른 볼을 잡아낸 호프만은 바로 2루 송구를 날렸다.
3대 2로 근소하게 앞서나가는 시카고, 어깨가 약한 포수와 발이 빠른 주자, 도루가 나올 절호의 타이밍 아닌가.
마침 약간 높게 들어온 공, 다이렉트 송구가 되면서 돈론은 2루에서 잡히고 말았다.
‘역시 이건 아니지.’
이 장면을 지켜보던 다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발은 빨라도 도루 센스는 좋지 않은 게 돈론의 약점, 우물쭈물 하다 반 박자 정도 늦게 뛴 게 아웃으로 이어졌다.
영입은 했는데 설명서를 제대로 읽지 않고 쓰고 있는 감독, 돈론이 보스턴에서 리드오프로 활약할 수 있었던 건 보스턴의 허리가 워낙 강력했기 때문이다.
겉보기엔 좋은 활약을 하고 있지만 팀에 완전히 녹아들지 못한 모습, 눈에 보이는 성적만큼 견제할 상대는 아니었다.
선두 타자 안타를 내줬지만 하버스태드는 8회 초를 실점 없이 막았고, 보스턴이 8회 말 반격에 나섰다.
따아악 ~ !!
“잡아당긴 타구가!! 좌측 담장!! 높은 곳으로 날아갑니다!!!! J.J. 핵먼의 시즌 9호 홈런!! 승부를 원점으로 돌려놓습니다!!”
“수더랜드 단장은 보고 있나요? 돈론은 놓쳤지만 핵먼은 반드시 잡아야 합니다. 지금 보내는 함성은 팬들의 경고입니다.”
피트 오어의 말대로 중계카메라는 특별석에 앉아 있는 수더랜드 단장의 얼굴을 조명했다.
수비 범위가 넓진 않지만 안정적이고 매년 3할에 25홈런 이상을 때려낼 수 있는 2루수를 어디서 구하나.
뭣보다 중요한 상황에서 터져 나오는 한방이 매력적, 동점으로 방망이를 예열한 핵먼은 10회 말 연장에서 끝내기 홈런까지 쳐내버렸다.
최근 탈모가 급속하게 이뤄지면서 정수리가 훤히 드러났지만, 홈플레이트를 앞둔 핵먼은 자신 있게 헬멧을 투척, 보스턴 선수단은 그런 영웅의 머리를 사정없이 두들기며 환대를 표했다.
“머리는 치지 말라고!!”
“뭐 어때? 연봉 대박 터뜨리고 심으면 되잖아”
오늘따라 더 짓궂은 동료들의 장난, 반면 다카기는 포옹만 주고받을 뿐, 별 다른 짓은 하지 않았다.
‘그래, 내가 쏜다.’
단장과 함께 경기를 지켜본 에디슨 헨리 단장은 지갑을 열어젖혔다.
돈 아끼려다 팬들의 민심까지 잃으면 큰일, 수더랜드 단장 손에 1억 7천만 달러를 쥐어줬다.
이 한도 내에서 핵먼을 잡으라는 건데, 다 주더라도 계약기간을 조금 늘리는 건 어떨지, 일단 핵먼의 에이전트와 접촉했다.
“8년에 1억 7천만 달러 어떻습니까?”
[그건 좀 곤란합니다.]
문제는 핵먼의 에이전트가 악명 높은 론 언더우드라는 것,
돈론이 어떤 대접을 받고 팀을 떠났는지 지켜본 핵먼은 바로 에이전트를 교체했다.
보스턴에 애정이 없는 건 아니지만 프로의 세계는 돈의 논리에 움직이는 법, 뭣보다 보스턴은 최근 구단 가치가 폭등했고 광고나 지역 방송 계약으로 벌어들이는 수익도 만만치 않다.
돈론이 8년 2억 달러를 부르다 시카고로 이적했는데, 핵먼의 가치가 돈론보다 못하다는 건가? 최소 10년에 2억 5천만 달러는 받아야겠다는 발언에 수더랜드 단장은 경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