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볼 것은 다 보았다 - (11)
“우와아 ~ !!”
난투극이 벌어지자 흥분한 관중들도 그라운드로 뛰어들었다.
한두 명에서 시작된 인파는 순식간에 수십 명으로 확산, 경찰이나 구단 경호원들이 곳곳에 배치돼 있었지만 사방에서 몰려가는 인파를 막을 순 없었다.
순식간에 보스턴 홈팬들에게 점령당한 그라운드, 그 중 일부가 LA 더그아웃으로 몰려가면서 혼란은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주심은 일단 문제를 일으킨 주범 선수들을 퇴장 조치, 그 사이 경찰과 구단 경호원들은 그라운드에 난입한 팬들을 검거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양 팀 합쳐 7명이 출장정지 처분을 받은 최악의 난투극, 거기다 MLB 사무국은 보스턴 구단이 관중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300만 달러 가량의 벌금을 부과했다.
[그건 나한테 청구해라]
출장정지 처분을 받은 다카기는 SNS를 통해 구단에 부과된 벌금은 내가 물겠다고 밝혔다.
내가 일으킨 사건이니 내가 갚겠다는 것, 그리고 이번 사건에 대해 사과할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가끔은 주먹을 들어야 하는 싸움도 있는 법이다. 겨우 벌금에 출장정지 처분 받았다고 보스턴 선수단과 팬들은 기죽지 않는다. 내가 없어도 보스턴은 남은 경기에서 우승을 확정지을 수 있다. 사무국의 출장정지 처분 따윈 아무렇지도 않다.]
이 발언은 보스턴 팬들의 열화와 같은 지지를 끌어냈다.
팬들은 벌금은 당신이 아니라 우리가 내겠다고 나섰고, 실제로 모금 운동을 벌인 570여 명의 팬들이 구단에 200만 달러를 내겠다는 뜻을 전해오기도 했다.
[X까!! 버드 에릭슨!!]
[우리는 네 제제 따위 겁나지 않아!!]
[다카기는 무죄다!!]
4차전을 앞두고 극성팬들은 커미셔너를 겨냥한 피켓을 들어올렸다.
이젠 선수와 팬 사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관계, 그만큼 다카기를 향한 보스턴 팬들의 지지는 절대적이었다.
“다카기가 우리에게 있는 한, 너희들은 절대 우승 못 해!!”
“누가 너 같은 놈한테 2천만 달러를 주냐!! 돈 낭비지!!”
“돈 먹고 X이나 싸는 XX들!!”
LA 선수단은 경기 내내 홈팬들의 폭언과 야유에 시달렸다.
출장정지를 받았지만 지금도 그 자식이 벤치에 앉아 있는 기분, 뭣보다 시리즈 전적에서 3대 0으로 밀리고 있는 상황이라 심적인 여유가 없었다.
따악 ~ !!
“이 타구는 좌중간을 가릅니다!! 몬테로는 2루를 돌아 홈으로!! 들어옵니다!! 추가점!! 보스턴이 월드시리즈 4연패에 한 걸음 더 다가섭니다!!”
“분위기에서 완전히 밀리고 있네요. 지난 난투극에서 주전급 선수들이출장정지를 당한 게 뼈아픕니다.”
보스턴은 다카기를 잃었지만 사실 시리즈에 큰 영향은 없는 수준이다.
하지만 다카기 손에 멱살을 잡혀 난투극에 휘말린 LA 선수들은 당장 실전에 필요한 전력, 개싸움에 휘말려 피를 본 카일 험멜 감독의 얼굴엔 패배자 특유의 칙칙한 그늘이 졌다.
단장이 출장정지 처분에 항의하고 있지만, 일단 오늘 경기는 이겨야 뭐든 될 게 아닌가.
초반부터 끌려가는 경기,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4차전의 승자는 보스턴, 3년 전에 당한 치욕을 그대로 재현한 LA 선수단은 온갖 조롱을 받으며 월드시리즈 무대를 마쳤다.
[이길 수 없는 상대가 있다는 걸 깨닫는 것도 성장이다. 애송이들아]
집에서 팀의 우승을 지켜본 다카기는 LA 선수단을 계속 조롱했다.
월드시리즈를 앞두고 3년 전 설욕을 다짐했던 LA, 그런데 결과가 이게 뭔가. 실력은 물론 정신력에서도 깨끗이 밀렸으니 너희들의 실력부터 냉정히 살펴보라는 충고를 날렸다.
그리고 공언대로 팀에 부과된 벌금은 본인이 지불, 사무국은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다카기는 수더랜드 단장에게 벌금은 내 연봉에서 까라고 통보했다.
“아니 ···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는데 ··· ”
[저는 한 입으로 두말 하는 사람 아닙니다. 그렇게 알아 두십쇼.]
그깟 3백만 달러 우리가 못 내주겠나. 수더랜드 단장은 자네는 할 일을 했을 뿐이라며 치켜세워줬고, 팬들도 팀의 4연패를 이끈 에이스가 벌금을 내는 건 옳지 않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3백만 달러는 수더랜드 단장이 지불, 이어지는 카퍼레이드에서 보스턴 선수단은 팬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그 선봉에 선 다카기는 왕적인 존재로 떠받들어졌고, 가는 곳마다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여러분들에게 묻겠습니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강한 팀은 어느 팀입니까?!!”
“보스턴!!!!”
“다시 묻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열정적인 팬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보스턴!!!!”
“XX!! 그런데 어떻게 질 수가 있겠어!! 어떤 놈이든 덤벼보라고 해!!!! 다 쓰레기처럼 짓밟아 주겠어!!!!”
마이크를 잡은 다카기는 팬들의 광기를 더욱 끌어올렸다.
이젠 거의 종교집회 수준, 행사에 참여한 에디슨 헨리 구단주와 수더랜드 단장도 기가 막힌다는 반응을 보였다.
‘나중에 트레이드 한다고 하면 날 죽일 분위기군.’
에디슨 헨리 구단주는 사실 다카기와 맺은 7년 2억 8천만 달러 연장계약을 전부 지불할 마음이 없었다. 적당한 타이밍에 트레이드 하려고 했는데 잘못하면 팬들의 원성에 짓밟힐 지경, 좋든 싫든 같이 가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통산 4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을 달성한 다카기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일본으로 귀국, 수많은 취재진이 그 앞에 진을 쳤다.
“다카기 선수, 우승 축하드립니다.”
“그 말은 많이 들었으니까 안 하셔도 됩니다.”
기자들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진짜 우승에 익숙한 자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과 말투, 앞으로의 일정은 어떻게 되냐는 질문이 이어졌다.
“일단 할아버지의 유해가 모셔진 신사에 참배를 갈 생각입니다. 좋은 일은 가서 보고를 드려야죠.”
본인은 생전 볼 건 다 보았다는 유언을 남겼지만 정말 미련이 없었을까. 손자로서 집안에 일어난 크고 작은 사건을 알려 드려야겠지, 다카기는 예고대로 입국 다음 날 신사를 찾았다.
동생과 얼마 전 태어난 둘째 아들도 아내의 품에 안겨 동행, 코하루는 할아버지의 위패 앞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할아버지, 저 이번에 시험 100점 받았어요. 못 보고 가서 후회되죠?”
여전히 서운함이 묻어 있는 목소리, 다카기는 그런 동생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또 할아버지한테 보고할 거 있어?”
“오빠는 어른인데 싸웠데 ~ 요 ~ ”
치사하게 그런 걸 일러바치다니, 그래도 동생에겐 너그러운 오빠는 피식 웃고 말았다.
“또 보고 할 거 없어?”
“으음 ··· 없는데?”
“있잖아.”
“뭐가?”
“코하루 예전보다 더 예뻐졌다고 말해야지.”
부끄러운지 코하루는 얼굴을 붉혔다.
세상에 예뻐졌다는 말 듣고 싫어할 여자가 있을까. 나이는 아직 어려도 여자는 여자, 그렇다고 다카기는 빈말 따윈 하지 않았다.
머리카락에 윤기가 흐르고 이목구비도 제법 뚜렷해진 동생, 이제 마냥 어린애라고 할 수도 없다.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손녀 모습을 보았다면 할아버지도 기뻐하셨겠지, 오빠가 슬쩍 밀어주자 코하루는 다시 눈을 감았다.
“오빠가 저 많이 예뻐졌데요. 앞으로도 더 예쁘고 착하게 자랄 게요.”
“그래, 그래야지. 할아버지가 앞으로도 지켜보실 거야.”
동생이 합장을 마치자 다카기는 얼마 전 태어난 둘째 아들을 앞세웠다.
할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딴 녀석, 잘 키울 테니 앞으로도 지켜봐주시길 바란다는 말을 남겼다.
* * *
[안녕하세요. 저 누군지 아시겠어요?]
“아 ··· 그게 ··· 대략은 ··· ”
다카기가 귀국하고 사흘 후, 한국에서 급한 전화가 날아들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다카기의 어머니, 자세히는 몰라도 한국에 어느 친척이 있는지 대략은 알고 있었다.
발신인의 목소리는 김인호, 다카기보다 한 살 많은 친척 형이다. 청소년 야구대회에서 얼굴을 마주한 적이 있지만 서로 면식이 없어 모르고 지나갔던 게 사실, 김인호는 너무 오랜만에 전화를 드려 죄송하다는 말로 어색한 분위기를 풀었다.
[죄송해요. 돌아가셨을 때 한 번 찾아뵀어야 했는데 ··· ]
“아니에요. 다 서로 바쁘게 살다보니 그렇게 된 거죠.”
[그래서 말인데 한번 찾아봬도 실례가 안 될 까요? 제가 이번엔 시간이 될 것 같은데 ··· ]
김인호는 참배를 하고 싶다는 뜻을 전해 왔다.
조상 묘가 딸린 땅 가지고 장난질을 쳤던 한국의 못난 친척들, 그것 때문에 얼마나 속을 썩였던 고인인가.
김인호와 그 부모님은 지난 사건에 직접적인 개입은 되지 않았지만, 소송 전까지 가는 집안싸움에 마음이 불편했다.
고인도 한국에 있는 친척들과 연을 끊었지만 마음은 그게 아니었겠지, 서로 가끔 교류도 하고 친하게 지내길 바라는 게 본심 아니었을까.
예상도 못한 손님의 방문, 다카기는 얼른 오시라며 친척 형의 방문을 반겼다.
“아니, 제 형이셨어요?”
“뭐 ··· 나도 어른들한테 말만 들었지 자세히는 ··· ”
다카기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8년 전 청소년 야구대회에서 만났던 사람이 내 친척 형이었다니, 할아버지도 그걸 알고 계셨을까.
며칠 전 참배했던 신사지만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할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분명 기뻐하셨을 거예요.”
“우리가 잘못한 거지, 돌아가시기 전에 찾아뵙고 용서를 빌었어야 했는데 ··· ”
“형이 잘못한 것도 아니잖아요. 이렇게 찾아오신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다음엔 제가 갈게요.”
다카기는 한국 방문을 약속했다.
막장 짓을 벌인 친척들은 꼴 보기도 싫지만 그래도 제정신이 박힌 사람이 있다는 건 환영할 일, 자연스럽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런데 너 한국말 의외로 잘 한다? 어디서 배웠어?”
“할아버지한테 배웠죠. 저하고 둘만 있을 때는 가끔씩 한국어로 대화하고 그러셨거든요.”
“아하 ~ 그랬구나. 그런데 그때 왜 그렇게 매정했냐?”
김인호는 냉정한 친척동생을 질책했다.
8년 전 열린 청소년 야구 대회, 당시 다카기는 일본 대표팀 1루수로 나섰고, 안타를 치고 나간 친척 형을 강한 태그로 견제했다.
생각할수록 서운한 일, 하지만 다카기는 그런 일이 있었냐며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형은 한국에서 뭐 하세요? 지금도 야구 하세요?”
“어, 선수로 뛰고 있지.”
김인호는 고급정보를 흘렸다.
이번 2025 WBC에서 한국대표팀에 승선할지도 모른다는데 사실이라면 집안의 경사, 다카기는 꼭 그렇게 될 거라며 응원을 해줬다.
“그런데 너는 어떠냐?”
“뭐가요?”
“WBC 안 나가냐고”
“저는 몸값이 있잖아요. 그런데서 몸 굴릴 입장이 못 돼요.”
“그럼 난 몸값이 싸서 거기 나가냐?”
“아니 ··· 딱히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은 아닌데 ··· 그렇게 되네요?”
김인호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8년 전이나 지금이나 뻔뻔한 녀석, 하지만 연봉만 수백억이 왔다 갔다 하는 선수 아닌가. 나와는 스케일이 다른 입장이라 더는 권하지 않았다.
“다음에 시간 나면 꼭 와라. 너 오면 좋아할 사람들 많을 거다.”
“네, 꼭 갈게요.”
다카기는 공항까지 나가 친척 형을 떠나보냈다.
오늘 따라 유독 그리워지는 할아버지, 살아계셨다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사람은 오래 살아야 좋은 일도 많이 보는 법, 아직 볼 게 많은 다카기는 앞으로도 열심히 살아가야겠다는 각오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