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볼 것은 다 보았다 - (10)
“아들, 잘 잤어?”
원정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다카기는 품에 안은 둘째 아들에게 말을 걸었다.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한 달이나 일찍 나온 녀석, 그래도 별 이상 없이 태어난 녀석을 빤히 쳐다봤다.
이름은 나가요시(永吉), 얼마 전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이름 ‘영길’을 그대로 따왔다.
생명이란 언젠간 사라지지만 이렇게 대를 이어 이어져 내려오는 것, 할아버지의 이름을 붙여준 녀석이라 품에 안으면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꺄아 ~ ”
“기분 좋은가 봐. 어제는 막 울었는데”
“그래? 우리 아들 왜 울었지?”
키리코는 남편 품에 안긴 둘째를 향해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는 정신없이 울어서 걱정을 시키더니, 아빠가 오자마자 이렇게 태세를 전환해도 되는 건가. 하지만 아기가 운다는 건 건강하다는 신호, 섭섭한 마음은 접어뒀다.
‘나도 아빠랑 놀고 싶은데’
첫째 타다요시는 동생을 품에 안은 아빠의 눈치를 살폈다.
또래에 비해 어른스러워도 아직은 부모님의 사랑이 필요한 나이, 동생만 붙잡고 있는 눈치 없는 아빠에게 조금 서운한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표현하지 않으면 알아주지 않는 법, 타다요시는 소파에 올라가 아빠 등에 몸을 눕혔다. 놀아달라는 신호, 애교는 별로 없어도 눈치는 있는 아빠는 둘째를 아내 품에 넘기고 첫째를 상대했다.
“아빠랑 뭐 하고 싶어?”
“그냥 이러고 있어도 좋아요.”
다카기는 코웃음을 쳤다.
첫째는 소녀 같은 이미지에 성격도 유순한 편, 굳이 따지면 엄마를 많이 닮았다. 딸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남자로 태어난 이상 사내답게 키우겠다는 욕구를 불태웠다.
“저기서 달려와 봐. 아빠가 받아줄게”
“아빠 ··· 그러다 다치면 어떻게 해요?”
“아빠는 너보다 훨씬 덩치 큰 녀석들하고 부딪치며 살아, 괜찮아”
타다요시는 아빠 말대로 적당한 거리에 자리를 잡았다.
막 달려와 아빠 품에 뛰어들고 싶은데 솔직히 겁이 나는 게 사실, 아빠보다 내가 다치는 게 더 무서웠다.
총총 걸음으로 달려왔지만 아빠의 판단은 NG, 첫째 성격을 잘 알고 있는 키리코는 아들 괴롭히지 말라고 타박을 줬지만 다카기는 자신만의 교육방침을 밀고 나갔다.
“자, 아빠 여기 있으니까 자신 있게 뛰어들어, 막 달려와도 괜찮아”
아빠가 양 팔을 넓게 벌리자 타다요시는 긴장했는지 혀를 날름거렸다.
왠지 거대한 산을 마주하는 기분, 평소에도 아빠를 거대한 존재로 여겼지만 오늘따라 유독 커보였다.
“잠깐만요. 후우 ~ ”
타다요시는 투구를 앞둔 투수처럼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빠가 받아준다고 했는데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지, 설마 받아주는 척 하다가 피하는 거 아닐까. 두려운 마음에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왜? 못하겠어?”
“네 ··· ”
“이런 ··· 이거 곤란한데”
평소에도 종종 걸음으로 달려오는 아들, 조금 더 씩씩했으면 좋겠는데 무리인 걸까. 교육열에 불타오른 아빠는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그럼 쉬운 것부터 시작하자. 공은 던질 수 있지?”
“네”
다카기는 아들을 집밖 정원으로 이끌었다.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도록 새로 마련한 집, 누구의 방해도 없이 두 부자는 놀이에 집중했다.
“에잇 ~ !!”
타다요시는 힘껏 공을 던졌지만 아빠 근처에도 못 가고 추락했다. 공 던지기는 게 원래 이렇게 힘든 거였나. 몇 번이나 도전했지만 실패, 손에서 빠진 공이 바닥에 떨어지기도 했다.
‘그래, 호랑이 밑에서 강아지가 태어날 리 없지.’
다카기는 씩씩 거리는 아들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봤다.
처음 보는 흥분한 아들의 얼굴, 마운드에서 평정심은 필수지만 그 전에 두려움이나 망설임을 없애야 한다. 아들은 지금 그 기초적인 단계를 밟아가는 중, 괜찮으니까 또 던져보라며 격려했다.
“그렇지, 잘 하는데?”
드디어 아빠 근처로 날아간 공, 자신감이 붙은 타다요시는 계속 공을 던졌다. 점점 뛰어오르는 가슴, 나도 아빠처럼 던질 수 있을까? TV에서 본 아빠의 투구 습관을 흉내 냈다.
다카기는 공을 던지기 전, 시선을 잠깐 아래로 하는 버릇이 있다.
그걸 잘도 잡아낸 녀석, 아빠는 아들이 생각보다 눈썰미가 좋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또 아빠 흉내 내 봐”
“으음 ··· 아!! 이것도 있다.”
타다요시는 돌연 입을 비쭉 내밀었다.
오리주둥이처럼 툭 튀어나온 입술, 내가 저랬단 말인가. 다카기는 그거 아빠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타다요시는 맞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빠 분명히 이랬어요. 쭈우 ~ 하고”
“안 했다니까 그러네”
“아 ~ 했다니까요!! 진짜에요!!”
“얘가 왜 화를 내? 그냥 좋게 말하면 되잖아.”
아빠의 지적에 당황한 타다요시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가끔씩 욱 하는 것도 분명 나를 빼닮은 녀석, 아들이 무안해하지 않도록 입을 비쭉 내밀었다.
“어때? 이 표정이야?”
무안한지 피식 웃고 마는 녀석, 어쨌든 그렇게 부자간의 스킨십은 계속됐다. 어떻게 던져도 다 받아주는 아빠, 덕분에 타다요시는 머리 털 나고 처음으로 땀에 젖을 만큼 몸을 움직였다.
왠지 시원 상쾌한 기분, 드넓은 정원을 두고도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는데 오늘에야 운동의 즐거움을 알게 됐다.
“어때? 이제는 아빠 품에 뛰어들 자신이 생겼어?”
“네”
“좋아, 그럼 와 봐.”
이제는 집에 들어갈 시간, 어디 덤벼 보라는 신호에 타다요시는 있는 힘껏 내달렸다.
나름 애를 써 봤지만 힘도 많이 빠졌고 아빠에게 타격을 주기엔 너무 가냘픈 몸, 그래도 직접 부딪치며 느끼는 사나이의 정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 * *
“자, 이곳은 월드시리즈 3차전이 열리는 백 베이 파크입니다. 2대 0으로 앞서나가고 있는 보스턴, LA는 원정 3연전에 나서는 부담을 안고 있습니다.”
“손가락 부상을 당했던 돈론이 돌아오면서 보스턴은 타선의 무게감이 더 커졌거든요. LA는 이번 원정에서 최소 2승 1패는 해야 희망이 있는데, 솔직히 어려워 보입니다.”
3차전을 앞두고 보스턴 중계진은 LA 팬들을 향해 비관적인 전망을 쏟아냈다.
다카기 말대로 4대 0이 안 되면 다행, 보스턴 팬들도 포기하면 편해진다며 초대 손님들을 도발했다.
그 위세에 눌린 LA는 1회 초 공격에서 이렇다 할 반격을 하지 못했고, 보스턴이 1회 말 공세에 나섰다.
비싼 값을 치르고 데려온 몬테로는 첫 타석부터 안타를 치며 존재감을 과시, 대기 타석에서 몸을 풀던 돈론은 천천히 타석에 들어섰다.
ALCS에서 손가락 부상을 당할 줄이야,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었지만 FA를 앞둔 몸이라 사소한 부상도 크게 느껴졌다.
‘엇?!’
초구부터 몸 쪽 깊숙이 날아오는 공, 스윙을 하던 돈론은 급히 몸을 틀었지만 배트 손잡이에 맞은 공은 파울 라인 너머로 굴러갔다.
가뜩이나 손가락이 신경 쓰이는데 초구부터 이렇다니, 그래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타격에 집중했다.
“오 ~ 다시 깊숙하게 들어옵니다.”
“돈론 선수가 굉장히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데요. 부상에서 돌아온 첫 경기라 당연합니다.”
벤치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다카기는 LA가 돈론을 자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돈론은 선수단에서 성격이 가장 유순한 편, 2대 0으로 몰린데다 원정 3연전을 치러야 하는 LA는 분위기 전환이 필요한 입장이다.
컨디션이 한창 좋을 때 3번도 쳤던 돈론, 이 녀석의 기를 꺾으면 뭔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일단 지켜봤다.
딱 ~
계속 되는 몸 쪽 승부에 돈론은 땅볼을 때렸다. 몸 쪽에 강했던 선수가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손가락 부상을 신경 쓰는 게 눈에 보였다.
그럼 강하게 어필을 해 볼 것이지 이도 저도 아닌 항의, 순간 어제 놀아준 아들이 떠올랐지만 저 녀석은 다 큰 어른 아닌가.
쓸데없는 참견은 하지 않았다.
1 - 2차전과 달리 팽팽하게 흘러가는 경기, 3회 말 보스턴은 돈론 앞에 주자 두 명이 차려지는 기회를 잡았다.
이번에도 몸 쪽을 찌르는 패턴, 노리고 있던 돈론은 힘껏 배트를 휘둘렀다.
따악 ~ !!
“당긴 타구가!! 1루수 정면으로 갑니다!! 아 ~ 이렇게 두 개의 아웃 카운트가 올라나는군요.”
“아쉽네요. 지금은 잘 맞은 타구였는데 방향이 좋지 않았어요.”
움찔했던 2루 주자를 제외하면 모두 전멸, 경기가 뜻대로 풀리지 않자 더그아웃에 돌아온 돈론은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왜 이렇게 입이 근질거리는 건지, 다카기는 평소 돈론을 자주 구박했지만 상황을 봐 가면서 말을 했다.
지금 잔소리를 하면 싸우자는 꼴, 하지만 주전이라는 놈이 저러고 있는데 다른 선수들이 영향을 안 받겠나.
언제까지 팽팽한 경기를 할 생각이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따악 ~ !!
“이 타구는 내야를 빠져 나갑니다!! 2루 주자는 3루를 돌아 홈으로!! 들어옵니다!! 데이브 셰퍼드의 적시타!! 오늘의 선취점도 보스턴의 몫입니다!!”
“돈론의 병살타가 나왔을 때만해도 팽팽하게 가나 싶었는데, 역시 흐름은 보스턴 쪽이네요.”
적시타를 날린 셰퍼드는 더그아웃을 향해 손가락 세리머니를 날렸다.
에이스의 노여움을 가라앉히는 한 방, 만족한 다카기는 박수를 치며 선수단의 전투력을 끌어올렸다.
“좀 더 밀어 붙여!! 여기서 한 점 더 내라고!!”
4번 타자 울반스키는 좌중간으로 가는 깊숙한 타구를 날렸다.
2아웃이라 망설일 게 없는 상황, 빠른 스타트를 끊은 셰퍼드는 2루 - 3루를 지나 홈으로 파고들었다.
완벽한 보스턴의 분위기, LA는 이제 궁지에 몰린 쥐 신세가 됐다.
이대로 무너질 것인가 아니면 죽기 전에 고양이 발이라도 물어볼 것인가. 감독의 지시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선수들끼리 입을 모아 희생양을 정했다.
“엇?!!”
가장 만만한 돈론이 이번에도 타깃이 됐다.
6회 말, 5대 0으로 보스턴이 앞서고 있는 상황에서 나온 몸에 맞는 볼,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돈론은 꾹 참고 1루로 걸어갔지만 관중들의 야유는 계속됐다.
“야 이 XX들아!! 건드릴 게 없어서 아픈 선수를 건드리냐?!!”
이때, 다카기가 참고 참았던 분노를 뿜어냈다.
누가 봐도 만만한 선수를 노린 빈볼, 성이 난 관중들도 한 몫 거들면서 분위기는 점점 달아올랐다.
‘불만 있으면 올라오던가.’
빈볼을 던진 제프 크레이븐은 다카기를 향해 조롱의 손짓을 했다.
1차전 인터뷰도 그렇고 LA 선수단도 다카기에게 불만이 쌓인 상황, 불만 있으면 한 판 하자는 손짓에 다카기는 마운드로 뛰쳐나갔다.
“잡아!! 잡아!!”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 당황한 브라이스 감독이 목소리를 높이자 다른 선수들도 그라운드로 뛰쳐나갔다.
하지만 이미 한 발 늦은 상황, 다카기가 적진을 향해 돌격하면서 그라운드는 난장판이 됐다.
“우와아 ~ !! 으아 ~ !! 어어 ~ ?!!”
집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타다요시는 경악했다.
저렇게 미쳐 날뛰는 아빠는 처음, 깜짝 놀린 키리코는 TV를 꺼버렸지만 타다요시는 이런 만행이 어디 있느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엄마!! 얼른 켜요!!”
“얘가 ··· 저런 거 보면 안 돼”
“아이 ~ 참!! 얼른 켜요!! 얼른!!”
아들의 독촉에 밀린 키리코는 별 수 없이 TV를 틀었다.
꽤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격렬한 혈투가 벌어지는 현장, 타다요시는 두 사람의 멱살을 잡고 있는 아빠의 모습에 희열을 느꼈다.
혼자서 두 명을 상대하다니, 공을 던지는 폼도 멋졌지만 솔직히 지금이 더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