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볼 것은 다 보았다 - (9)
딱 ~ !
“느린 타구!! 2루수가 잡아 2루에 송구!! 1루에는 던지지 못합니다!! 그 사이 3루 주자는 홈으로!! 보스턴이 선취점을 올립니다!! 먼저 미끄러지는 쪽은 포사이스군요!!”
“디즌이 번트를 댈 때까지만 해도 이게 무슨 작전인가 했는데, 결과적으로 득점이 나긴 했네요.”
3루 주자가 홈을 밟으면서 LA 팬들의 분위기는 가라앉았다.
알 디즌에게 번트를 지시하는 이런 바보 같은 작전에 선취점을 내주다니, 뭣보다 에이스 간의 팽팽한 맞대결에 먼저 한 점을 내줬다는 게 불길했다.
다행히 후속 타자를 잘 처리하면서 이닝이 마무리 됐지만 찝찝한 결과, 포사이스는 고개를 저으며 더그아웃에 입성했다.
“볼 ~ ”
이어지는 LA의 2회 말 공격, 다카기는 공격적인 투구를 이어갔지만 첫 단추를 잘못 낀 영향이 볼넷으로 이어졌다.
올 시즌 211이닝을 소화하며 20개의 볼넷도 주지 않은 선수가 볼넷이라니, 보스턴 선수단은 당황했지만 다카기는 개의치 않고 투구를 이어갔다.
1점 차라도 리드는 리드, 심리적 압박을 받는 건 LA였다.
‘이번 볼 배합은 이렇게’
다음 타자가 타격을 준비하는 사이, 울반스키 포수는 벤치 사인을 확인했다.
보스턴은 볼 배합을 배터리에게 위임하는 편이지만, 중요한 경기일수록 작전과 볼 배합 등을 서로 협의해서 결정한다.
수 백 억이 왔다 갔다 하는 경기, 당연히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이기려는 편법이 일어난다. 당연히 사인도 훨씬 복잡해지고 선수들이 숙지해야 할 사항도 늘어나기 마련, 하지만 다카기는 벤치 사인을 무시하고 자기 고집을 앞세웠다.
‘그래, 누가 널 이기겠냐.’
울반스키는 다카기의 뜻대로 해줬다.
감독의 지시까지 무시할 수 있는 권력을 지닌 녀석, 그리고 세상은 울반스키를 명포수라고 치켜세워주고 있는데, 사실 볼 배합의 권한은 거의 에이스가 쥐고 있다.
가끔 포수의 의견도 따라주긴 하지만 그건 어쩌다 가끔 일어나는 일, 투수가 결정권을 쥐면서 투구는 더 빨라졌다.
딱 ~ !!
“강한 타구가 유격수 정면으로!! 2루에서 아웃!! 다시 1루에서 아웃입니다!! 더블 플레이!! 다카기가 병살타로 위기를 넘어갑니다!!”
“지금은 변화구로 스윙을 유도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냥 힘으로 밀어 붙이네요. 역시 구위가 있는 선수입니다.”
해설위원들은 다카기의 배짱을 칭찬했지만 정작 본인은 마음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결과는 좋았지만 사실 몰렸던 공, 이런 공이 다시 나왔을 때 승리를 장담할 수 있을까.
볼넷이 나왔을 때부터 뭔가 불안했던 컨트롤, 하지만 의식적으로 바로잡진 않았다. 투구 폼이나 타격 기술은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것, 그런 걸 실전에서 일일이 다 의식할 순 없다.
폼을 기억하고 있는 건 머리가 아니라 몸, 공 하나 하나에 집중하면서 컨디션을 재정비 했다.
‘그래, 이거였지’
다행히 영점이 잡힌 빠른 볼, 다카기는 빠른 볼만 4개를 던져 후속타자를 잡아냈다.
빠른 볼만 제대로 던져도 어지간한 타자들은 잡을 수 있는 구위, 복잡한 볼 배합보다 몸 쪽을 적극 찌르는 공격적인 투구를 택한 게 먹혀들었다.
선두타자 볼넷에 잠깐 환호했던 LA 팬들은 다시 침묵 모드, 보스턴의 3회 초 공격이 시작됐다.
“자, 다카기 선수가 오늘 첫 타석을 맞이합니다. 통산 타격 성적은 타율 0.294, 홈런 14개, 29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때 투타겸업도 했던 선수거든요. 기록으로 보면 알겠지만, 절대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닙니다.”
해설위원의 염려와 달리 LA 배터리는 공격적인 투구를 택했다.
홈런 몇 개를 쳤든 다 과거의 일, 2년 동안 거의 배트를 잡지 못한 선수가 제대로 된 타격을 할 수 있을까. 번트라도 잘 대면 다행, 특별히 경계하진 않았다.
“스트라이크!!”
다카기는 94마일 바른 볼을 지켜봤다.
타격보다는 투구에 집중할 때, 무리한 스윙보다는 가볍게 치는 게 좋지 않을까. 빠른 볼에 달려들다 보면 어깨가 일찍 열리기 마련, 우중간으로 타구를 보낸다는 느낌으로 스윙을 돌렸다.
따아악 ~ !!
“어?!! 멀리 가는 타구!! 센터 쪽으로 갑니다!! 우중간으로!! 우중간으로!!!! ··· 넘어 ~ 갔습니다!!!! 믿을 수 없는 그 상상이 현실로 이뤄졌습니다!!!!”
“점수는 둘 째 치고 포사이스 입장에선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는 장면이네요. 지금도 94마일 빠른 볼인데 약간 높았거든요. LA 입장에선 최악의 시나리오가 나왔습니다.”
타구가 담장을 넘어가는 순간 보스턴 진영은 발칵 뒤집어 졌다.
지금이야 외야진이 정리됐지만 위긴스 - 디즌 - 돈론은 다카기와 외야의 한 자리를 두고 경쟁을 벌인 적이 있다.
세 사람은 모두 지금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올스타 외야수로 성장, 이런 선수들과 포지션 경쟁을 했던 게 다카기다.
2년 동안 배트를 놨다고 우리는 저 자식의 배팅 능력을 얕잡아 봤던 건 아닐까. 그건 상대팀도 마찬가지겠지, 제대로 데인 포사이스는 고개를 떨궜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포사이스는 흥분했는지 흔들리기 시작했고, 보스턴은 이 틈에 1점을 추가하며 스코어를 3대 0으로 벌렸다.
보스턴으로 완전히 넘어간 분위기, LA 감독 카일 험멜은 오늘 경기는 어렵겠다는 패배감에 사로잡혔다.
아직 경기는 초반이지만 3년 전 보스턴에게 당한 참패는 지금도 LA 선수단의 가슴 속에 깊은 상처로 남아 있다.
그 보스턴의 선봉으로 나섰던 선수가 다카기, 그 장면이 오늘도 반복 될 줄이야, LA 프런트도 5년 전 일을 두고 후회를 거듭했다.
다카기에게 490만 달러를 배팅했는데 512만 달러를 쓴 보스턴에게 패배, 겨우 22만 달러를 덜 쓴 결과가 이런 나비효과를 불러와도 되는 건가.
지난 10년 동안 포스트 시즌 진출 9회, 월드시리즈 진출만 3번, 여기서도 무너진다면 팬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80억 달러짜리 중계권 계약을 맺으면 뭘 하나, 우승이 아니면 의미가 없는 지난 10년간의 공격적인 투자, 주주들도 어두운 얼굴로 경기를 지켜봤다.
따악 ~ !!
“다시 내야를 빠져 나갑니다!! J. J. 핵먼의 안타!! 1루 주자 몬테로는 3루까지 진출합니다!!”
“다카기의 홈런부터 3연속 안타거든요. 지금은 포사이스 개인의 위신을 생각할 때가 아닙니다.”
카일 험멜 감독은 직접 마운드에 올라 공을 넘겨받았다.
지난 경기에서 포스트 시즌 부진을 겨우 만회한 포사이스는 월드시리즈에서 다시 침몰, 홈 팬들의 야유를 받으며 퇴장하는 신세가 됐다.
그 사이 보스턴은 다시 한 점을 추가, 스코어가 4대 0으로 벌어지자 LA 현지 중계석도 부정적인 전망을 내놨다.
다카기도 만만치 않지만 이 선수를 끌어내려도 루카스 - 하버스태드 - 포데스와로 이어지는 보스턴의 불펜 진이 버티고 있다.
4점 차를 뒤집는 건 어려운 일, 쫓아가는 입장이 된 LA 타자들은 성급한 타격으로 아웃카운트를 헌납했다.
경기는 어느 덧 5회 초, 2번 째 타석을 맞이한 다카기는 표정 없는 얼굴로 초구를 맞이했다.
“몸 쪽, 들어옵니다. 저희가 생각했던 볼 배합이 아닌데요.”
“앞 선 타석의 홈런을 의식하고 있는 거겠죠. 그리고 1 - 2루 상황이라 여기서 또 한 점을 내주면 오늘 경기는 정말 어려워집니다.”
다음 공은 바깥쪽으로 빠지는 볼, 다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몸쪽을 연달아 던질 수 있는 투수는 많지 않다. 특히 지금처럼 주자가 득점권에 있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렇겠지.
다음 공도 바깥쪽에 초점을 맞췄다.
따아악 ~ !!
“어?!!”
“설마?!!”
다시 한 번 울려 퍼지는 경쾌한 파열음, 보호 펜스 뒤에 붙어 있던 보스턴 선수들은 일제히 그라운드로 튀어 나왔다.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연타석 홈런, 다카기는 덤덤히 베이스를 돌았지만 먼저 홈을 밟은 주자들은 펄쩍 펄쩍 뛰며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순식간에 스코어는 7대 0, 투수에게만 4타점을 헌납한 LA 벤치는 불쾌할 정도의 침묵에 휩싸였다.
“야!! 너 이러다 노 히트까지 하는 거 아냐?!!”
“뭐? ··· 아 ··· 그랬었지.”
한편, 동료의 말에 다카기는 전광판을 확인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볼넷 하나 내줬을 뿐, 안타는 하나도 맞지 않았다.
투수가 월드시리즈에서 연타석 홈런에 4타점을 올린 것도 대단한데, 노 히트까지 기록한다면 역사에 남을 사건, 하지만 본인은 별 일 아니라는 반응을 보였다.
스코어가 7대 0인데, 무리하게 완투를 할 이유도 없거니와 즐거운 타격을 한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이날 다카기는 LA 타선을 1볼넷, 무안타, 6탈삼진(6이닝)으로 봉인, 마운드를 이어받은 카일 하버스태드, 알렉스 스피어, 게리 젠슨이 깔끔한 피칭을 보여주면서 보스턴은 합작 노 히트 노런을 달성했다.
다카기가 볼넷 하나만 내주지 않았어도 팀 퍼펙트를 달성했을 경기, 하지만 노히트 노런도 역사에 남을 만큼 충분히 대단했다.
뭣보다 월드시리즈에서 투수가 멀티 홈런을 때린 건 1947년 이후 처음, 다카기는 기자들 앞에서 간략한 소감을 밝혔다.
“타격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놀이입니다. 오랜만에 즐거운 경기를 해서 기쁩니다.”
기자들은 기가 막힌다는 반응을 보였다.
월드시리즈 1차전도 이 선수에겐 놀이터에 불과한가. 승리를 위해 발악한 LA 선수단을 바보로 만들어 버리는 발언, 약간 발끈했는지 LA 지역 기자가 민감한 질문을 던졌다.
“그건 오늘 최선을 다한 상대 팀 선수들에 대한 모독이 아닐까요?”
“글쎄요. 뭐가 모독인지 이해가 안 되는데요.”
LA 선수단은 4회가 끝나기도 전에 이미 분위기에서 밀리고 있었다.
정말 최선을 다했다면 마지막까지 따라 붙겠다는 의지를 보여줬어야 했는데, 제 풀에 무너진 선수들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
뭣보다 다카기는 립 서비스에 인색한 성격이라 거침없는 발언을 이어갔다.
“제가 배려해야 할 상대는 상대 팀 선수들이 아니라 팬입니다. 그리고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프로가 패배를 했다는 건 팬들에게 죄를 짓는 일이죠. 지금 누구보다 큰 모독을 당한 건 LA 팬들입니다. 오늘 경기를 위해 비싼 티켓을 지불하셨을 텐데 결과는 8대 0 참패였죠. 당신이 LA의 패배에 실망한 건 이해하지만 그 화를 내게 푸는 건 웃기는 일입니다.”
한 방 먹은 기자는 침묵 모드, 발언권은 다른 기자에게 넘어갔다.
“3년 전 LA를 상대로 4대 0 완승을 거두셨는데, 이번 시리즈는 어떻게 예상하십니까?”
“4대 0만 안 됐으면 좋겠군요. 솔직히 세인트루이스의 도허티와 놀아주는 게 더 재미있었습니다. 지금의 LA는 재미가 없네요.”
6년 연속 NL 서부지구 1위를 기록한 LA를 이렇게 얕잡아 봐도 되는 건가.
자존심이 완전히 갈려나간 발언이지만 LA 팬들은 다카기를 비난하지 않았다.
진짜 화가 나는 건 형편없는 경기력을 보여준 LA 선수들, 부끄럽지도 않느냐는 팬들의 원성에 선수단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단장이 직접 나서서 사죄를 하고 다음 경기의 필승을 다짐했지만, 팬들은 그런 말은 지난 10년 동안 지겹게 들었다며 반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