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볼 것은 다 보았다 - (8)
[세기의 맞대결 드디어 성사]
[다카기 VS 포사이스]
10월 24일, 세계 야구팬들의 이목을 끄는 매치 업이 성사됐다.
MLB 시장 최대 흥행판도를 달리고 있는 LA와 보스턴의 맞대결, 특히 올 시즌 양대 리그 최고의 투수들이 1차전에 맞붙으면서 도박사들은 함부로 승리를 점치지 못했다.
3년 전, 보스턴과 LA는 우승을 두고 맞붙은 적이 있다.
결과는 보스턴의 4대 0 일방적인 승리, 이번에도 그렇게 될까. 생애 첫 월드시리즈를 앞둔 포사이스는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때는 제가 없었으니까 그렇게 된 겁니다. 이번에는 다를 겁니다.”
LA 기자들은 다카기가 포사이스의 도전장에 뭔가 호응을 해 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조용한 상대편 진영, 보스턴 선수단을 태운 비행기가 LA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이렇다 할 반응은 없었다.
“이 봐, 왜 그렇게 가만히 있어?”
“무슨 말이라고 하라고”
이제는 보스턴 선수단이 에이스를 닦달하기 시작했다.
뭔가 멘트를 날려줘야 우리도 불타오를 것 아닌가, 하지만 다카기는 피식 웃으며 돌아섰다.
“대답은 방망이로 충분해.”
다카기는 통산 월드시리즈에서 8경기 등판, 당연히 내셔널리그 룰로 치러지는 경기에서 타격도 제법 많이 했다.
지금까지 월드시리즈 성적은 14타수 5안타, 홈런은 못 쳤지만 3할을 훌쩍 넘는 타율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건방진 도전자는 배트로 패야 의미가 있는 법, 그 전까지 쓸데없는 여론전을 하고 싶진 않다고 선을 그었다.
그제야 에이스의 뜻을 이해한 보스턴 선수단은 입을 다물었고, 클럽하우스 입구도 철저히 통제됐다.
“자, 오늘 LA의 선발은 포사이스입니다. 올 시즌 35경기 등판, 23승 4패, 평균자책점 2.32, 234와 1/3이닝 동안 볼넷 52개, 탈삼진은 252개를 기록했습니다.”
“올 시즌 제법 많은 이닝을 던졌고, 포스트 시즌 들어서도 조금 무리한 감이 없지 않은데, 철저히 관리를 받은 다카기를 상대로 어떤 활약을 할지 모르겠네요.”
경기를 앞두고 LA 현지 여론은 밑밥 깔기에 나섰다.
포사이스는 올 시즌 MLB 선발 중 가장 많은 이닝을 소화했다. 포스트 시즌까지 합치면 260이닝 이상을 소화, 하지만 매년 큰 행사를 치른 다카기도 이 정도 투구는 했다.
그런데도 패배를 의식해 밑밥을 깔다니, 상대가 월드시리즈 3연패를 이끈 일세출의 에이스라 살짝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반면, 월드시리즈 3연패를 달성한 보스턴 선수단은 여유만만, 다카기도 불펜에서 몸을 풀며 차례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자, 보스턴의 선공으로 경기가 시작됩니다. 선두 타자는 저스틴 몬테로, 올 시즌 타율 0.287, 홈런 16개, 69타점을 기록했습니다.”
“부상이 있었지만 보스턴 이적 후에도 나름대로 제 역할을 해줬죠. 특히 ALDS 4차전에선 승리를 결정짓는 홈런을 때려내기도 했습니다.”
포사이스는 경쾌한 스텝으로 초구를 찔러 넣었다.
다카기만큼 빠른 공을 던지는 건 아니지만 최고 97마일의 묵직한 투구로 타자를 몰아세우는 스타일, 초구를 지켜본 몬테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배트를 고쳐 잡았다.
따악 ~ !!
“잡아당긴 타구가!! 내야를 빠져 나갑니다!! 선두 타자 몬테로의 안타!! 보스턴이 기분 좋은 출발을 하고 있습니다. 피트 오어 씨?”
“네”
“일각에선 포사이스가 구위 위주의 투구를 하기 때문에 포스트 시즌 들어 부진을 거듭하고 있다고 하는데, 당신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헛소리입니다. 들을 가치도 논할 의미도 없습니다.”
한편, 선두 타자 출루에 고무된 보스턴 중계석에선 이런 저런 말이 오갔다.
포사이스는 정규시즌에서 분명 대단한 투수였지만, 포스트 시즌 들어서는 2승 2패, 평균자책점 3.57로 살짝 아쉬운 모습을 보여줬다.
시즌도 막바지인데 구위로 상대를 찍어 누르는 투수가 안 지칠 수가 있겠나. 하지만 피트 오어는 LA 지역 기자들의 주장에 코웃음을 쳤다.
그렇게 따지면 다카기는 뭔가. 평균 97마일 빠른 볼과 체인지업만으로 상대를 찍어 누르는 투구를 하고 있는데, 이것도 관리를 받은 결과인가?
잠자코 있던 피트 오어는 포사이스는 과대평가 된 선수라며 독설을 퍼부었다.
“포사이스는 구위가 좋은 투수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올 시즌 포심 평균 회전수는 대략 2200회 정도죠. 분명 좋은 수치지만 다카기에 비하면 떨어지는 수준입니다. 대신 다양한 변화구로 떨어지는 구위를 만회하고 있죠.”
“아 ··· 그러면 다카기와 비슷한 스타일이라고 볼 수가 없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구종은 단순해도 압도적인 구위로 포스트 시즌을 제패한 투수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다카기가 바로 그 예죠. 포사이스는 다카기가 될 수 없습니다.”
다카기는 지난 4년 동안 포심 구종가치에서 압도적인 1위를 유지했다.
어정쩡한 위치에 머문 선수 구위로 비교하는 건 실례, 피트 오어의 말대로 빠른 볼이 안타로 이어지자 포사이스는 변화구로 타자를 상대하는 패턴으로 전환했다.
사실 다카기에 비해 떨어질 뿐이지 포사이스의 구위도 나쁜 편은 아니다. 다만 본인의 공에 대한 믿음이 살짝 부족한 편, 특히 팀의 우승이 걸린 포스트 시즌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이자 신중함은 소심함으로 변해버렸다.
“이번에는 다를 겁니다.”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 것도 불안함을 떨쳐내기 위한 자기최면이었다.
그리고 안타 한방에 풀려버린 마법, 변화구 위주의 피칭이 되면서 투구 수는 늘어났고 이를 지켜보는 홈팬들의 눈빛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음 ··· 볼입니다. 카운트는 투 볼 투 스트라이크”
“글쎄요. 지금은 들어가 보는 게 어떨까 했는데, 샌더스 선수의 리드도 너무 소극적이네요.”
LA 배터리는 후속 타자 J. J. 핵먼을 상대로 풀 카운트까지 가는 접전을 벌였다.
어찌어찌 중견수 플라이로 잡아내긴 했지만 경쾌하지 못한 투구, 포사이스도 자신을 바라보는 주변 시선을 의식했는지 데이브 셰퍼드를 상대로 빠른 볼 승부를 걸었다.
“스윙!! 크게 휘두릅니다.”
“그래요. 이렇게 던지면 되는 겁니다. 올 시즌 다카기 못지않은 성적을 올렸기 때문에, 조금은 더 자신감을 가져도 됩니다.”
투 스트라이크를 잡아낸 포사이스는 홈팬들의 압도적인 지지와 환호 속에 셰퍼드를 삼진 처리했다.
이제야 굳었던 몸이 조금 풀리는 기분, 다음 타자 울반스키도 유격수 땅볼로 처리하며 1회를 마무리 했다.
‘진짜 구위가 뭔지 보여주마.’
이어지는 LA의 1회 말 공격, 마운드에 오른 다카기는 바깥쪽 빠른 볼로 카운트를 잡았다.
이미 세 번이나 밟아본 무대, 상대가 누구라도 두려움은 전혀 없었다.
딱 ~
“배트 부러졌고!! 2루수가 잡아서 1루로 송구합니다!! 원 아웃, 지금은 좀 아찔 했는데요.”
“다카기 선수가 바깥쪽 빠른 볼을 잘 던지기 때문에 배트가 부러지는 일도 많이 일어나거든요. 지금은 맞을 뻔 했는데 잘 피했습니다.”
부러진 배트를 수습하기 위해 달려온 배트 보이, 다카기는 부러진 잔해물을 파울 라인 너머로 던져줬다.
이 정도에 겁을 먹으면 어떻게 투수를 하겠나, 다음 공도 바깥쪽 빠른 볼로 정했다.
딱 ~ !
끝에 걸린 배트는 또 둔탁한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산산조각은 나지 않고 겨우 서로 붙어있는 꼴, 하지만 방망이 주인이 바닥에 내팽개치면서 형태가 무너졌다.
2연속 배트 파손은 좀처럼 보기 힘든 장면, 다카기의 구위를 눈으로 확인한 LA 팬들은 입을 다물었다.
이게 진짜 구위라는 건가, 불펜에서 몸을 풀던 포사이스도 약간 자극을 받았는지 다음 이닝은 좀 더 적극적으로 가겠다고 마음을 정했다.
‘또 쳐 봐라. 배상은 못해준다.’
그 사이, 다카기는 바깥쪽 빠른 볼을 던져 후속 타자를 땅볼 처리했다.
공 6개로 1회 삭제, 진짜 구위를 보여준 철벽의 에이스는 위풍당당한 발걸음으로 더그아웃에 입성했다.
똑같은 무실점이라도 임팩트에서 차이를 보여준 1회 투구, 보스턴 선수단은 다카기가 마운드를 지키는 한 질 리가 없다는 신뢰를 품고 2회 초를 맞이했다.
“자, 2회 초 보스턴의 공격으로 이어집니다. 선두 타자는 후안 위긴스, 올 시즌 타율 0.254, 홈런 33개, 83타점을 기록했습니다.”
“작년에 정확도에서 비약적인 성장을 보여줬는데, 올 시즌은 옛 수준으로 돌아와 버렸죠. 그래도 위협적인 선수라는 건 사실입니다.”
LA 현지 해설위원들은 위긴스를 잔뜩 경계했다.
포스트 시즌만 되면 불타오르는 선수, 위긴스는 통산 포스트 시즌에서 타율 0.294, 13홈런, 29타점을 퍼부었다.
올해도 타율은 약간 낮지만(0.250) 홈런을 3개나 기록, 그 중엔 ALCS에서 날린 만루 홈런도 있다.
위긴스 뿐만 아니라, 올 시즌도 20홈런 타자를 6명이나 배출한 보스턴, 폴 돈론이 ALCS 2차전에서 슬라이딩 중 손가락 부상을 당하면서 전력에서 이탈해 있지만 보스턴이 MLB 최강의 타선을 보유하고 있다는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도 간다.’
그래도 포사이스는 빠른 볼을 집어넣었다.
기싸움에서 밀리면 나만 손해, 뭣보다 변화구 위주의 투구가 투구 수를 잡아먹는다는 건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었다.
따악 ~ !!
“잡아당긴 타구가!! 베이스 라인 안쪽에 떨어집니다!! 펜스까지 굴러가는 타구!! 위긴스는 천천히 2루까지 들어갑니다!! 선두 타자 2루타!! 보스턴이 1회에 이어 2회에도 좋은 기회를 잡습니다!!”
“지금은 93마일 빠른 볼이 약간 가운데로 몰렸죠. 이 정도 구위로 위긴스를 억누르긴 어렵습니다.”
첩첩산중에 늘어나는 투구 수와 한숨, 타선이 비교적 약한 NL 서부지구에서 놀다가 AL 동부지구의 화력과 마주한 포사이스는 식은땀을 훔쳐냈다.
이제 타석에는 알 디즌, 디즌은 올 시즌 타율 0.277 - 홈런 35개 - 82타점으로 커리어 하이를 새로 썼다.
여기에 팀 내 최다 볼넷(93개)은 덤, 6번 타자의 존재감이 이 정도다.
다음 타자 개리슨도 만만하지 않은 존재감(타율 0.272, 15홈런), 하지만 이 고비만 넘기면 다음은 만만한 선수들이라 포사이스는 흔들리는 정신력을 바로 세웠다.
딱 ~ !
“오?!! 번트를 댔어요?!! 2루 주자는 3루까지!! 타자 주자만 1루에서 아웃됩니다. 피트 오어 씨,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글쎄요. 한 점을 쥐어짜내겠다는 작전인데 ··· 브라이스 감독이 여기서 번트를 지시할 사람은 아니거든요.”
피트 오어의 생각과 달리 이번 번트는 브라이스 감독의 지시가 맞았다.
에이스 간의 맞대결은 누가 먼저 한 점을 내느냐에 따라 분위기가 갈린다.
디즌에게 번트를 시키는 건 누가 봐도 손해를 보는 작전이지만, 지금은 내야 땅볼로도 득점을 낼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글쎄 ··· 이게 맞는 건가?’
작전을 완수한 알 디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월드시리즈 3연패를 이끈 감독의 판단, 선수를 못 믿는 사람은 아니라 이번 작전은 좀 의외였지만 벤치에 앉아 결과를 기다렸다.
‘이렇게 되면 무리하게 승부 볼 이유 없지.’
LA 배터리는 개리슨을 거르고 후속 타자 에드먼드 스키퍼를 상대했다.
땅볼 하나면 병살로 이닝 마무리, 하지만 내야진이 전진수비를 펼치면서 2루 쪽 구멍이 넓어졌다.
LA 배터리도 이를 의식하는 게 사실, 밀어치는 타격이 되지 않도록 몸 쪽 승부를 택했다.
“볼 ~ ”
하지만 잡아주지 않는 주심, 3루에 주자가 있기 때문에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공을 던지기도 어렵다.
힘으로 승부를 봐야 하는 상황, 배터리는 승부를 택했고 이 공을 기다린 스키퍼는 배트를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