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218화 (218/361)

218화. 볼 것은 다 보았다 - (5)

“안 봐도 되니?”

“네에 ~ ”

이곳은 다카기의 친가, 휴일을 맞아 간만에 일찍 귀가한 무네요시는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나오는 막내딸을 유혹했다.

오빠 경기는 매번 챙겨보는 녀석, 옆에 앉혀두고 스킨십 좀 하려고 했는데 오빠를 향한 동생의 믿음은 확고했다.

‘오빠는 잘 하고 있어. 나는 내가 할 일 해야지.’

코하루는 공부에 집중했다.

나는 아직 보여드릴 게 많았는데, 볼 건 다 봤다며 훌쩍 떠나버린 할아버지, 약 올릴 방법이 뭐가 있을까.

할아버지가 미처 보지 못한 일을 만들면 그만,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점수를 받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아이고 ··· ”

“어휴 ~ 다 와서 이게 무슨 일이야.”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잠깐 쉬러 나왔더니 나란히 앉은 아빠 엄마의 탄식이 들려왔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한 코하루는 거실로 이동, TV를 보자마자 머리를 감싸 쥐었다.

퍼펙트게임 달성까지 2아웃을 남겨두고 맞은 홈런, 코하루는 세상 잃은 얼굴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믿음이 컸던 만큼 실망스러운 결과, 아쉬운 건 엄마도 마찬가지지만 절망에 빠진 딸을 다독였다.

“오빠가 홈런 맞은 게 그렇게 충격이니?”

“후우 ~ 할아버지한테 들려드릴 이야기가 하나 없어졌어요.”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니?”

“앞으로 일어나는 즐거운 이야기는 할아버지한테 들려드리기로 오빠하고 약속했거든요.”

조금 있으면 고인의 49제가 열린다.

다카기는 바쁜 일정 때문에 참가할 수 없지만, 코하루는 할아버지의 유해가 봉납된 신사에 그동안 일어난 일을 주절주절 보고할 생각이었다.

오빠가 한 시즌에 퍼펙트게임을 2번 달성하는 건 할아버지도 예상 못하셨겠지, 그런데 오빠가 대기록을 앞두고 이렇게 배신을 할 줄은 몰랐다.

“아잉 ~ !! 진짜 뭐야!! 오빠 믿었는데!!”

펄펄 뛰는 막내딸 덕분에 아버지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어린 녀석이 그렇게 기특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나라도 잘 해야겠다며 방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동생 화 많이 났다. 위로 좀 해 줘라]

아버지의 문자를 받은 다카기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할아버지가 미처 보고 가지 못한 이야기를 많이 만들기로 했는데, 오빠라는 놈이 약속을 깨버렸으니, 무슨 변명이 필요하겠나.

동생에게 다음 경기에선 실수하지 않겠다는 문자를 보냈다.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는 독촉에 약이 오른 오빠는 그럼 넌 할아버지에게 들려드릴 무슨 이야기를 만들었냐며 역공에 나섰다.

‘딱히 없는데’

코하루는 침묵을 지켰다.

이야기를 만들려고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거 아닌가. 그 머리 위에 올라 있는 다카기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건 그렇고 아쉽긴 하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눈앞에서 놓친 대기록을 두고 속을 다스렸다.

150년 메이저리그 역사 상, 퍼펙트게임을 2번 달성한 선수는 단 한 명뿐이다. 만테냐 어워드의 창시자 프랜시스 만테냐가 그 주인공, 아웃카운트 2개만 더 잡았다면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다.

아니, 한 시즌에 퍼펙트게임을 2회 달성한 선수는 제로, 정말 그렇게 됐다면 만테냐를 제치고 역대 최고의 투수라는 타이틀을 확정지었을 거다.

아쉬워 해봤자 이미 지나간 일, 스토리를 쓸 기회는 앞으로도 있으니 잊어버리기로 했다.

어쨌든 탬파베이의 추격을 뿌리친 보스턴은 2위와 4경기 차로 AL 동부지구 1위를 유지, 월드시리즈 4연패를 향한 순항을 계속했다.

메이저리그 역사 상 뉴욕와 오클랜드만이 달성한 대기록, 다카기는 기자회견에서 개인 기록은 놓쳤지만 팀의 역사까지 망치진 않겠다는 뜻을 드러냈다.

* * *

“갑자기 나오거나 그러진 않겠지?”

“응, 걱정하지 마.”

시간은 흘러 어느덧 9월, 다카기는 배가 제법 부른 아내를 두고 출근길에 올랐다.

첫째가 태어날 때도 볼티모어로 가다가 갑자기 진통이 와서 보스턴으로 돌아왔는데, 이번에도 그렇게 되는 건 아닌지, 차에 오르면서도 계속 뒤를 돌아봤다.

“아빠아 ~ 다녀오세요 ~ ”

“응, 무슨 일 있으면 아빠한테 전화해라.”

“네에 ~ 두 번째로 할 게요.”

똑똑한 타다요시는 엄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첫 번째로 전화해야 할 사람은 보험회사 관계자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야 엄마가 안전하게 병원으로 갈 거 아닌가.

아빠는 그 다음, 언제 아빠라고 불러주나 닦달했는데 이제는 일의 순서까지 계산하는 아들, 덕분에 다카기는 안심하고 출근길에 올랐다.

“윽!!”

남편을 보내고 얼마나 지났을까. 키리코는 격한 진통을 느꼈다.

출산일까지 아직 시간이 있어서 엄마도 안 불렀는데, 그래도 똑똑한 아들은 당황하지 않고 휴대폰에 저장된 번호를 눌렀다.

‘뭔가 잊어버린 것 같은데’

10분 만에 도착한 보험회사 직원들, 엄마를 따라 병원으로 향하던 타다요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지금은 고통스러워하는 엄마 곁을 지켜주는 게 우선, 다른 건 잊어버렸다.

“자, 다카기 하루요시가 시즌 29번째 등판에 나섭니다. 올 시즌 28경기 등판, 18승 무패 평균자책점 1.83, 196이닝 동안 볼넷 12개, 탈삼진은 262개를 잡아내고 있습니다.”

“앞으로 2 ~ 3경기는 더 등판하겠죠. 300탈삼진이 약간 불안하긴 한데, 그래도 해낼 거라고 믿습니다.”

이런 사정을 알 리 없는 다카기는 마운드에서 연습투구로 몸을 풀었다.

똑똑한 아들이 옆에 있는데 뭐가 걱정인가. 시원하게 뚫린 두 눈엔 포수 미트 밖에 보이지 않았다.

“초구는 들어옵니다. 역시 빠른 볼이군요.”

“빠른 볼과 체인지업을 주무기로 쓰면서 빠른 볼 피안타율이 조금 높아졌다는 분석도 있거든요. 하지만 제가 볼 땐 큰 의미가 없는 분석입니다.”

피트 오어는 일각에서 들려오는 위기설을 일축했다.

다카기가 구종을 단순화 하면서 빠른 볼 피안타율이 높아진 건 사실, 하지만 유의미한 변화는 아니다(0.242 -> 0.255).

OPS도 0.691에서 0.709로 올랐지만 큰 의미는 없는 수준, 빠른 볼과 체인지업만으로도 타자들을 요리하는데 뭐가 불만인가.

다만 단순한 볼 배합에 타자들이 조금씩 적응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사실, 본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텐데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피트 오어는 그 점에 주목해야 한다는 코멘트를 남겼다.

‘일단 그냥 간다.’

다카기는 초반은 평소처럼 투구를 했다.

볼 배합이 단순해도 좌우를 찌르는 제구로 커버해 왔는데 이제는 약발이 조금 떨어진 느낌, 역시 구종을 하나 더 추가해야 하나.

추가할 구종이라고 해봤자 투심 - 슬라이더 - 커브 정도, 사실 커브도 슬라이더를 개량한 구종이라 커브로 분류하긴 어렵다.

주무기인 체인지업을 살려주면서 타자들을 농락할 무기가 뭐가 있을까. 4회부터 이런 저런 구종을 던져보며 테스트에 나섰다.

“슬라이더가 더 나은 것 같은데.”

“그래? 투심이 아니라?”

“어”

울반스키의 조언에 다카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투심과 체인지업은 얼핏 닮았지만 마지막에 변화는 궤적이 전혀 다른 구종, 다카기는 투심을 활용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지만 울반스키의 의견은 조금 달랐다.

극단적인 오버핸드가 아니라면 슬라이더는 어느 정도 떨어지는 궤적을 보이기 마련, 다카기도 약간 낮은 쓰리 쿼터라 슬라이더가 슬러브처럼 떨어진다.

뭣보다 역회전이 걸리는 투심보다 다루기 쉽다는 게 장점, 하지만 체인지업과 얼마나 공존할 수 있을까.

약간 애매했지만 울반스키의 조언대로 슬라이더를 주무기로 앞세웠다.

“스윙!! 삼진입니다!! 지금 공은 날카롭게 떨어지는데요. 혹시 포크 볼 아닌가요?”

“제가 보기엔 슬라이더입니다.”

쭉 뻗어나가다 갑자기 떨어지는 공, 엄청난 마구에 해설위원들은 경악했다.

한 해설위원은 일본 투수들이 가끔 던지는 포크볼을 주장했지만, 피트 오어는 슬라이더라고 확신했다.

포크 볼은 회전을 죽여서 떨어뜨리는 구질이지만, 슬라이더는 회전을 줘서 휘어지게 하는 공이다. 즉, 포크 볼은 떨어지는 공이고 슬라이더는 휘어지는 구종, 겉보기에 비슷해도 그립이나 구속에서 확연한 차이가 났다.

‘이게 낫네, 그동안 이걸 왜 안 썼지?’

울반스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체인지업도 옆으로 흘러나가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떨어지는 움직임에 초점을 맞춘 구종이다.

다카기의 체인지업은 올 시즌 48%라는 경이적인 헛스윙률을 기록했지만, 옆으로 도망가는 움직임이 적어 조금이라도 덜 떨어지면 위험하다.

그에 비해 슬라이더는 옆으로도 확실히 도망가는 구종, 이 구종을 지난 경기에서 써 먹었다면 퍼펙트게임 2회 달성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할수록 아쉬웠다.

‘체인지업 안 던져도 된다.’

울반스키는 체인지업은 버리고 슬라이더를 유도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꾸준히 익힌 구종이라 체인지업에 애착이 있는데, 하지만 다카기는 지금 내가 뭘 던져야 하는지 가슴이 아니라 머리로 이해했다.

“다시 흘러 나갑니다!! 삼진!! 엄청난 슬라이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희가 이 구종을 잠시 잊고 있었네요. 다카기 선수가 1 ~ 2년 차까지 슬라이더를 주무기로 쓰지 않았습니까? 체인지업이 완전히 손에 익으면서 잠시 사라졌는데 ··· 잠자는 사자를 깨워버렸네요.”

피트 오어는 자칭 전문가들이 입을 놀린 대가를 치를 때가 왔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냥 체인지업을 던져줄 때 가만히 있을 것이지, 쓸데없는 위기론을 주장했다가 진짜 무서운 놈을 깨워버렸다.

구위가 엄청난 만큼 부상을 당할 위험도 크다는 게 문제지만, 94마일 짜리 하드 슬라이더는 확실하게 타자들을 몰아세웠다.

체인지업보다 빠르고 더 날카롭게 휘어지는 궤적, 그만큼 폭투가 됐을 때 위험한 구종이지만 울반스키는 몸을 날려 폭투를 막아냈다.

스핀이 걸린 만큼 바닥에 처박혔을 때 높게 튀어 오르는 슬라이더, 이 구종을 주무기로 쓰려면 포수의 희생이 필요했다.

“다시 헛스윙!! 공이 튀었지만 잡아서 1루로 던집니다. 투 아웃”

“울반스키가 피츠버그 시절과는 확실히 달라졌네요. 그때는 리드도 단조롭고 몸을 날리는 모습도 보기 힘들었는데, 역시 환경이 사람을 바꾼 것 같습니다.”

“작년에 월드시리즈 우승도 했고, 올 시즌이 끝나면 FA 자격을 얻지 않습니까? 없던 의욕도 생길 수밖에 없죠.”

울반스키의 활약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5회 말, 좌중간 담장을 넘어가는 시즌 26호 쓰리 런 홈런을 작렬, 102타점으로 팀 내 타점 1위로 올라섰다.

43홈런을 때린 작년에 비해 장타력은 조금 떨어졌지만, 정확도가 상승하면서 시즌 타율은 0.281를 기록 중, 뭣보다 득점권에서 0.333나 되는 집중력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도 고무적이었다.

삼진도 줄고 전체적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기량, 특별석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수더랜드 단장은 결단을 내렸다.

[울반스키, 보스턴과 5년 연장계약 합의]

[1억 1천 8백만 달러, 역대 포수 FA 기록 경신]

다음 날, 보스턴 일대는 연장계약 소식에 흔들렸다.

보스턴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스타 선수들도 많은데, 이적생이 먼저 대형계약을 체결할 줄이야.

하지만 수더랜드는 출신보다 능력을 우선하는 스타일, 이번 계약으로 사치세 부담은 더욱 높아졌지만, 돈줄이 튼튼한 보스턴은 능력만 있다면 누구라도 우리의 일원이 될 자격이 있다는 걸 확실히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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