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볼 것은 다 보았다 - (4)
‘아직은 더 지켜봐야겠군.’
브라이스 감독은 1회를 무실점으로 막고 내려온 해리스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해리스는 대학야구 통산 33승을 거두며 갖가지 상을 휩쓴 유망주, 특히 대학교 3학년 시즌 때 12승 2패 평균자책점 1.45, 탈삼진 201개를 기록했다.
단일시즌 기준으로 역대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던 활약, 하지만 9이닝 당 5개가 안 되는 피안타율에 비해 높은 볼넷(9이닝 당 3.4개)이 발목을 잡았다.
대학에선 최고의 선수였지만 제구가 중요한 메이저리그에서 살아남을 지는 미지수, 이런 약점 때문에 애틀랜타의 지명을 받고도 정작 사인은 보스턴과 했다.
올 시즌은 더블 A와 트리플 A를 오가며 8승 3패 평균자책점 3.02를 기록, 특히 투수들의 지옥이라 불리는 이스트 리그(평균자책점4.94)에서 평균자책점 2.45를 기록하며 두각을 드러냈다.
제구만 유지한다면 다카기, 클레이튼과 함께 선발진을 책임져 줄 선수, 안타를 맞고도 과감한 몸 쪽 승부로 카운트를 잡아내는 배짱도 눈에 띄었다.
‘저건 아닌데’
그러나 해리스는 3회부터 제구에 문제점을 드러냈다.
문제는 투구 폼, 앞다리는 몸이 회전할 때까지 상체를 받쳐줘야 한다.
그런데 해리스는 다리가 주저앉는 편, 릴리스 포인트를 너무 앞으로 끌고 나올 때 생기는 현상이다.
무리하게 팔을 끌고 나올 바엔 다리를 고정시키는 게 좋을 텐데, 로버트 클레이튼도 비슷한 문제점이 있었지만 코치의 조언을 받아들여 제구를 잡았다.
잘못된 투구를 계속하는 건 경험이 아니라 폼을 망가뜨릴 뿐, 브라이스 감독은 마운드에 올라 교체를 권했다.
‘내가 왜?’
유망주는 교체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대학 시절부터 승부욕 하나는 알아줬던 해리스, 납득할 수 없는 제안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반숙이 아니라 날달걀이었네.’
다카기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구단에서 나름 기대하고 있는 유망주, 그래서 나름대로 관심을 줬는데 이런 결과가 나올 줄이야.
정신적 문제는 둘째 치고 기술적인 부분도 손 댈 곳 투성이, 당장 써먹는 건 무리라는 결론을 내렸다.
어쨌든 고집을 부린 해리스는 결국 마운드에 남았고, 예상대로의 투구를 이어갔다.
“자 ··· 다시 볼입니다. 카운트는 투 볼 노 스트라이크”
“릴리스 포인트를 조금 높게 유지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공이 계속 바운드 볼에 가깝게 들어오고 있는데 ··· 생각을 좀 해야 합니다.”
결국 볼넷, 1사 주자 1루에서 A. J. 브라운이 타석에 들어섰다.
오늘 첫 타석에서 안타를 때린 선수, 울반스키 포수는 변화구를 요구했다. 빠른 볼은 몰라도 변화구 컨트롤은 어느 정도 되는 편, 하지만 날달걀은 빠른 볼을 고집하다 베테랑 포수의 심기를 건드렸다.
‘네가 다카기인 줄 아냐?’
감독이 이미 마운드를 방문한 상황이라 울반스키는 제자리를 지켰다.
좋은 투수는 좋은 포수의 리드 속에 성장하는 법, 물론 울반스키는 피츠버그 시절 좋은 포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명포수였던 브라이스 감독의 지도를 받으며 지금은 한 단계 더 성장, 젊은 투수들을 잘 이끌어 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데 저 녀석은 형편없는 투구를 하는 주제에 고집만 센 편, 다카기 정도의 빠른 볼을 던진다면 고집을 피워도 뭐라 할 자격은 없지만, 이건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변화구야. 내 말 대로 해.’
울반스키는 기싸움 끝에 변화구 사인을 이끌어 냈다.
빠른 볼은 너무 앞에서 던지고 있지만 변화구는 그럭저럭 괜찮은 릴리스 포인트에서 놔주는 편,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체인지업으로 유격수 땅볼을 이끌어 냈다(병살타 이닝 종료).
“앞으로 내가 시키기는 대로 해. 알았어?”
더그아웃에 입성한 울반스키는 해리스를 붙잡고 일침을 쏟아냈다.
본인이 뭘 잘못했는지 알고 있는 날달걀은 말없이 먼 곳을 응시, 다카기는 둘의 대화에 일절 참견하지 않았다.
지금 해리스를 바로 잡아야 할 사람이 누구인가. 자신의 영역이 아니라 쓸데없이 끼어들지 않았다.
변화구를 던지며 감을 잡은 해리스는 다행히 4회부터 안정된 제구를 선보였고, 한때 교체를 결심했던 브라이스 감독은 말없이 경기를 지켜봤다.
“다시 몸 쪽입니다. 96마일, 확실히 해리스의 구위는 좋은 편이네요.”
“그래도 지켜봐야 합니다. 올 시즌 더블 A에서 77과 1/3이닝동안 볼넷을 39개나 내 줄 정도로 심각한 모습을 보였다가 트리플 A에서 겨우 제구가 잡혔거든요. 오늘도 잠깐 불안한 모습을 보였는데, 좀 더 제구를 잡아야 됩니다.”
빠른 볼 비중을 높이자 다시 높아지는 볼 비율, 브라이스 감독은 이번만큼은 교체를 밀어붙였다.
해리스의 메이저리그 데뷔전 성적은 4와 1/3이닝, 3피안타, 3볼넷, 2탈삼진, 가능성은 보여줬지만 많은 숙제를 떠안고 하루를 마무리 했다.
이날 보스턴은 4대 3 신승을 거두며 전날 패배를 설욕, 다음 날 경기에서 탬파베이의 추격을 확실히 따돌리기 위해 에이스를 앞세웠다.
딱 ~ !
“몸 쪽, 파울입니다.”
“확실히 해리스와는 차원이 다른 제구를 보여주고 있죠. 역대 700이닝 이상을 소화한 투수 중, 가장 적은 볼넷을 내 준 선수가 브런들인데 다카기도 그에 못지않은, 아니 정정하겠습니다. 그 이상의 능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카기는 이날도 볼넷을 잊은 투구를 선보였다.
앞다리가 살짝 굽어져 있지만 이건 원활한 몸의 회전을 위한 것, 기계처럼 찍어내는 동작과 일정한 릴리스 포인트는 역대 급 컨트롤로 이어졌다.
브런들의 35이닝 연속 무 볼넷 기록은 이미 돌파, 이제는 41이닝 연속 기록을 눈앞에 뒀다.
9이닝을 완투했다고 쳐도 4경기 넘게 볼넷을 안 줬다는 건데, 이게 말이 되는 투구인가. 어제 들쭉날쭉한 제구 때문에 4이닝을 겨우 넘긴 해리스는 다카기의 투구에 혀를 내둘렀다.
‘저 정도는 돼야 고집을 부릴 수 있는 건가.’
2년 전, 다카기는 인터뷰에서 때론 팀보다 위대한 선수도 있는 법이라며 콧대를 세웠다.
그 때는 비웃은 사람도 있겠지만 지금은 누가 입꼬리를 들썩일 수 있을까. 선수들이 맞춰줄 수밖에 없는 실력자, 해리스는 나는 아직 저 레벨이 아니라는 걸 실감했다.
“이번에는 바깥쪽!! 들어왔다는 판정입니다.”
“스트라이크 존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네요. 이렇게 좌우로 흔들어 버리면 타자는 타이밍을 잡는데 애를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10경기에서 5할이 넘는 타율을 선보인 A. J. 브라운도 다카기 앞에선 한없이 작아졌다.
상대는 빠른 볼 평속이 97마일이나 되는 투수, 의식을 하다보면 마음이 급해지고 그만큼 어깨가 빨리 열리게 된다.
배트가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하는 범위는 그만큼 좁아지기 마련, 가장 위력적인 볼은 제구가 잡힌 빠른 볼이라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바깥쪽으로 멀어지는 공에 흔들리는 타이밍, 보스턴 배터리는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떨어집니다!! 삼진!! A. J. 브라운은 오늘 두 타석 모두 범타로 물러납니다.”
“체인지업이죠. 알고 당하는 그 치욕은 당해본 사람만이 압니다.”
삼진을 당한 A. J. 브라운은 배트를 그라운드에 내리찍었다.
지난 25타석에서 한 번도 안 당한 삼진, 잠시 잊고 있었던 치욕에 브라운은 몸까지 부들부들 떨었다.
‘안 봐도 보이는데 뭐’
브라이스 감독은 세상 편한 자세로 경기를 관람했다.
보스턴은 올 시즌 다카기가 등판한 19경기에서 전승을 기록했다. 오늘도 이길 거라는 믿음은 절대적, 다만 투구 수가 100개를 넘기지 않도록 중간 중간 체크하는 일은 잊지 않았다.
딱 ~ !
“초구 타격, 2루수가 잡아 1루에 송구합니다. 원 아웃, 16타자를 연속으로 범타 처리하고 있습니다.”
“역대 어느 선수도 단일 시즌에 퍼펙트게임을 2번 달성한 적은 없거든요. 다카기가 올 시즌 개막전에서 퍼펙트게임을 달성했는데, 혹시 오늘은 이곳에서 달성할지도 모르겠군요.”
“해야죠. 일본 팬들에게만 그런 서비스를 베푸는 건 불공평합니다.”
퍼펙트게임에 대한 기대로 점 점 달아오르는 관중석,
다카기도 팬들이 지금 원하는 게 뭔지 알고 있었지만 일단 타자를 상대하는데 집중했다.
기록을 의식하는 건 울반스키도 마찬가지, 철저하게 삼진 위주의 볼 배합을 앞세웠고, 경기가 중반에 들어서자 바깥 쪽 높은 빠른 볼로 헛스윙을 끌어내는 패턴을 추가했다.
다카기의 빠른 볼 헛스윙 비율은 평균 12% 정도, 그런데 바깥쪽 높은 곳은 18%까지 올라간다. 눈높이와 가깝지만 시선에서 멀어지는 궤적을 그리기 때문에 헛스윙을 이끌어내기 쉬운 것, 다카기도 울반스키의 리드대로 투구를 이어갔다.
“높은 볼!! 따라 나옵니다!! 오늘 경기 10번째 삼진!! 4경기 연속 두 자릿수 탈삼진을 달성합니다!!”
“탬파베이 선수들은 지금 환영을 따라다니는 기분이겠네요. 스윙을 해도 배트에 걸리질 않습니다.”
“지금 자리에 앉아 있는 팬들은 아무도 없거든요. 저도 잠깐 일어나야겠습니다.”
보스턴 지역 방송 해설위원 피트 오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직접 뛰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가슴이 뛰는 건지, 관중들처럼 박수를 치면서 흥분을 조금 가라앉혔다.
“와아아 ~ !!”
7회까지 퍼펙트로 마무리한 다카기는 팬들의 환대를 받으며 더그아웃에 입성했다.
‘투구 수? 이젠 의미 없지.’
브라이스 감독은 기록지를 집어던졌다.
명포수로 이름을 날렸지만 커리어 내내 한 번도 리드하지 못했던 퍼펙트게임, 그에 비해 지금 포수 마스크를 쓰고 있는 울반스키는 얼마나 행운아인가.
지금이라도 내가 포수마스크를 쓰고 싶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자, 이제 경기는 8회 초로 접어듭니다. 보시다시피 저희들의 기록지는 깨끗합니다.”
“마지막까지 깨끗했으면 좋겠네요. 아니, 그렇게 돼야 합니다.”
특별석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수더랜드 단장까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는 앉아 있는 사람이 이상하게 보일 정도, 팬들의 육성 응원까지 더해지면서 백 베이 파크는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들썩거렸다.
‘이건 또 뭐야?’
헛스윙을 돌린 랜디 바우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카기는 이제 메이저리그 경력 4년 차에 접어든 선수, 당연히 투구 패턴은 어느 정도 파악이 됐다.
그런데 지금은 체인지업도 투심도 아닌 해괴한 공이 들어왔고, 주심에게 이게 무슨 공이냐고 물어봤다.
“나도 몰라. 이 친구에게 물어보라고”
주심은 책임을 울반스키에게 떠넘겼다.
11년 경력 동안 이런 공은 처음, 빠른 볼보다 약간 느리게 날아오면서 포물선을 그리면서 떨어지는데, 슬라이더도 아니고 투심도 아닌 특이한 궤적을 그렸다.
솔직히 말하면 체인지업을 던지려다 회전축이 약간 틀어진 게 원인, 다카기도 사람이라 이런 실수는 가끔 일어났다.
‘이번엔 또 슬라이더처럼 들어가네.’
2구를 던진 다카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잘 들어가다 갑자기 흔들리는 체인지업 제구, 그런데 이게 의외로 먹히면서 헛스윙을 끌어내고 있다.
회전축이 약간 틀어진 게 효과를 보고 있는 건가. 하지만 의도한 게 아니라 바로 잡기 위해 노력했다.
“다시 낮게!! 떨어집니다!! 삼진!! 변화구 3개로 랜디 바우어를 돌려세웁니다!!”
“이제야 제대로 떨어지네요. 잠깐 제구가 흔들린 것 같은데, 그걸 또 바로 잡아냅니다.”
잠깐 위기가 왔지만 다카기는 8회도 문제없이 마무리했다.
이제 대기록까지 남은 아웃카운트는 3개 뿐, 9회에도 마운드에 올라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