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볼 것은 다 보았다 - (3)
“다카기 선수, 시즌 13승 달성 축하드립니다.”
“네”
경기가 끝난 후, 다카기는 기자들과 얼굴을 마주했다.
할아버지를 떠나보내고 치르는 첫 공식 일정, 일본에서 날아온 기자들의 취재 열기는 뜨거웠다.
“오늘의 영광을 고인이 되신 분께 돌리실 겁니까?”
“아니요. 할아버지는 이 세상에 미련도 윈망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뭣보다 볼 것은 다 보셨다는 유언을 남기셨죠. 오늘의 영광을 돌릴 이유는 없습니다.”
볼 거 다 봤다는 분 께 영광을 돌려 뭘 할 건가.
뭣보다 다카기는 저승의 존재를 믿지 않는 쪽, 할아버지가 별 다른 고통없이 아무 걱정없이 영면하셨다는 것에 의의를 뒀다.
하지만 저는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있고 보지 못한 것도 많습니다. 할아버지를 떠나 보낸 건 섭섭한 일이지만 앞으로도 전력을 다해 보고 싶고 이루고 싶은 것들을 이 눈으로 확인할 생각입니다.
단호하면서도 결의에 찬 목소리, 질문을 던진 기자는 고개를 끄덕일 뿐 별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메이저리그 역대 최고 승률에 도전하고 계신데요. 신기록 달성 자신하십니까?”
“글쎄요. 제가 보고 싶은 건 그게 아닙니다.”
다카기는 시즌 최고 승률에 큰 의미는 두지 않았다.
투수의 승패는 본인의 능력보다 외부 요인에 좌우되는 기록, 1실점을 해도 패전하고 10실점을 해도 이기는 투수들이 있다.
왜 투수가 승패의 낙인을 감수해야 하는지 이해 불명, 차라리 승패를 없애고 이닝과 삼진에 가치를 두는 게 낫다.
실제로 최근 만테냐 어워드 수상 기준을 살펴보면 승리보다 이닝, 탈삼진에서 점수를 받은 흐름, 현실이 이런데 승패를 따질 이유가 있을까.
정말 중요한 건 팀승률, 다카기는 팀의 우승이 보고 싶을 뿐 다른 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혔다.
“몬테로 선수가 오늘 보스턴에 합류했는데 이 트레이드가 보스턴의 4연패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그건 몬테로가 하기 나름이겠죠.”
계속되는 질문, 다카기는 립 서비스 따원 하지 않았다.
몬테로는 올 시즌 명성에 걸맞는 활약을 못하고 있다. 그라운드는 이름값이 아니라 실력으로 살아남는 무대, 올스타 3회 선발이라는 옛 명성보다 앞으로가 더 중요하다는 코멘트를 남겼다.
* * *
“자, 2대 1로 뒤진 탬파베이의 2회 말 공격입니다. 선두 타자는 A. J. 브라운, 오늘 첫 타석은 유격수 땅볼로 물러났습니다.”
“최근 32타석에서 16안타를 기록할 정도로 페이스가 좋거든요. 첫 타석은 잡아냈지만 주의해야 합니다.”
8월에 접어들면서 점 점 더 달아오르는 순위권 경쟁, 아웃사이더로 밀려 있던 탬파베이는 최근 14경기에서 12승을 거두며 뉴욕을 제치고 아메리칸 리그 동부지구 2위로 등극했다.
3경기 앞선 보스턴 입장에서도 껄끄러운 상대, 선발진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필 듀보스(Dubose)는 책임감을 안고 투구에 임했다.
따악 ~ !
“낮게 뜬 타구가 ··· 유격수 키를 넘어갑니다!! A. J. 브라운이 오늘 안타로 21경기 연속 안타 행진을 이어가는 군요.”
“브라운 선수는 최근 정말 무섭네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트레이드 소문이 있었는데, 결국 이렇게 남아 팀 승리를 이끌어 주고 있습니다.”
간발의 차로 타구를 놓친 몬테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솔직히 지금은 땅볼이 나올 가능성을 높게 보고 전진 수비를 했다.
제 자리에 있었다면 잡을 수도 있었는데 판단 미스가 안타를 만들어낸 꼴, 마음을 다잡고 다음 플레이에 집중했다.
‘내가 저 녀석이 될 수도 있었는데’
하지만 몬테로는 A. J. 브라운이 내심 신경 쓰였다.
무수한 트레이드 소식에도 끝내 살아남아 팀의 상승세를 이끌고 있는 브라운, 내가 저 입장이 될 순 없었을까. 보스턴 유니폼을 입고 있지만 캔자스시티에 미련이 남아 있는 건 사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날 버린 건 캔자스시티, 몬테로는 캔자스시티의 영웅이 될 순 없었다.
이어지는 볼넷과 진루타로 1사에 주자 2 - 3루, 위기에 몰린 보스턴은 중심타자 폴 앤더슨을 거르고 리온 머스그레이브를 상대했다.
따악 ~ !
애매한 코스로 가는 타구,
좌익수 후안 위긴스는 맹렬한 기세로 달려오는 유격수 몬테로의 기세에 위축됐다. 이런 타구는 좌익수가 잡아야 후속 플레이가 원활하게 이뤄지는 편, 내가 잡겠다고 콜을 보냈지만 몬테로는 멈추지 않았다.
“와아아 ~ !!”
머리 위로 넘어가는 타구를 멋지게 캐치한 몬테로, 관중들은 환호를 보냈지만 그 외침은 얼마 가지 못했다.
“3루 주자가!! 홈으로!! ··· 들어오는 군요. 아 ~ 그런데 이게 뭡니까!! 어처구니없는 송구!! 2사에 주자는 2, 3루가 됩니다.”
“아 ~ 이건 아니죠!! 왜 여기서 송구를 하는 겁니까?!!”
보스턴 중계석은 탄식에 빠졌다.
몬테로가 몸을 날려 타구를 잡아내자 3루 주자 A. J. 브라운은 리터치를 한 다음 홈으로 질주했다.
처음부터 유격수가 타구를 잡으면 홈으로 뛰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뜻, 깜짝 놀란 몬테로는 중심이 무너진 자세에서 어이없는 송구를 하고 말았다.
그 사이 1, 2루 주자는 한 베이스 씩 더 진루, 안 해도 될 송구를 하면서 다시 대량실점 위기가 오고 말았다.
‘뭐 하는 거야 지금?’
벤치에 앉아 있는 다카기는 얼굴을 구겼다.
며칠 전부터 뭔가 나사가 빠져 있는 몬테로의 플레이, 저게 정말 올스타 선발 3회에 빛나는 스타인가.
지금까지의 활약만 놓고 보면 실망스러운 수준, 남은 주자들이 싹쓸이 안타로 홈을 밟으면서 보스턴은 4대 2로 끌려가는 신세가 됐다.
수비가 안 좋은 내야진을 보강하기 위해 데려온 선수가 이런 짓을 하고 있으니, 트레이드를 추진한 수더랜드 단장도 기가 막힌다는 반응, 경기가 끝날 때까지 얼굴을 덮은 그늘은 걷히지 않았다.
그렇다고 공격이 좋으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다.
몬테로는 지금 폴 돈론을 대신해 리드 오프를 맡고 있다. 작년 시즌 MVP까지 차지하며 기량이 만개한 폴 돈론, 올 시즌도 타율 0.321, 홈런 21개를 기록하며 팀의 주축으로 자리를 굳혔다.
좀 더 많은 타점 기회를 주기 위해 3번으로 타선을 조정하고 빠른 발과 출루율, 타격 능력을 겸비한 몬테로를 1번으로 삼았는데, 결과는 좋지 않은 편,
탬파베이가 2경기 차로 바짝 따라 붙자 수더랜드 단장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내일부터는 하위 타선으로 옮기는 게 어떤가.]
“글쎄요. 저는 조금 더 지켜봤으면 하는데 ··· ”
브라이스 감독은 타순 조정에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잘하다가도 못하는 게 야구, 뭣보다 새로운 팀에 적응하는 게 쉬운 일인가. 클럽하우스를 장악하고 있는 다카기는 훌륭한 리더지만 부드러운 리더십은 부족한 편, 사람 좋은 브라이스 감독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
“자네, 나랑 얘기 좀 하지”
다음 날, 몬테로는 감독사무실로 불려왔다.
넌 트레이드 됐다는 조 웨스트(캔자스시티) 감독의 목소리가 지금도 귓가를 맴도는데, 또 감독에게 불려올 줄이야.
왠지 문제아가 된 기분, 브라이스 감독 앞에서 얼굴도 들지 못했다.
“왜 그렇게 풀이 죽어 있나? 첫 날은 그렇게 떠들썩하게 행동하더니 ··· ”그게 ··· 아무렇지도 않은 척 연기한 겁니다.”
몬테로는 속마음을 털어놨다. 클럽하우스 입성 첫날부터 오버한 건 트레이드 당한 충격을 잊기 위한 연기였을 뿐, 보스턴 유니폼을 입고 첫 안타를 친 뒤 웃어 보인 것도 자기 위안의 연장이었다.
더 자존심 상하는 건 내가 나간 뒤 캔자스시티가 상승세를 타고 있다는 것, 결국 나는 필요 없는 선수였던 건가.
거기다 자신과 비슷한 입장이었던 A. J. 브라운이 팀의 상승세를 이끌고 있으니 더 비교되는 신세, 보스턴에서도 스타 선수들에 가려 큰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올스타 3회 출전이라는 경력도 초라해지는 현실, 고개를 끄덕이던 브라이스 감독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결국 자신이 주역이 되지 못한 게 불만 아닌가?”
“뭐 ··· 냉정하게 말하면 그렇다고 할 수 있겠죠.”
“자네는 뭔가 착각하고 있어. 얼마 전 다카기가 인터뷰에서 한 말을 떠올려 봐.”
다카기는 13승을 거둔 그날, 내가 보고 싶은 건 개인 타이틀이 아니라 팀의 우승이라고 선을 그었다.
메이저리그 최고 투수이자 보스턴의 클럽하우스를 장악한 선수도 그런 마음가짐으로 경기를 하는데, 몬테로는 지금 어떤 정신상태로 경기에 임하고 있나.
하지만 선수 개인의 자존심을 살려주는 것도 감독의 역할, 브라이스 감독은 몬테로의 자존심까지 짓밟진 않았다.
“사실 어제 단장이 자네를 하위 타선으로 조정하라고 했어.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 자네는 충분히 팀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선수고 단장도 그렇게 생각을 하고 영입을 했겠지, 마음 다잡고 해 봐. 여기서 자네가 영웅이 못 된다는 법도 없으니까.”
“알겠습니다.”
면담을 마친 몬테로는 클럽하우스로 돌아왔다.
여전히 외로운 늑대처럼 따로 노는 녀석들, 정말 이게 동료라고 할 수 있는 걸까. 사소한 일도 웃고 떠들던 캔자스시티 클럽하우스에 비하면 완전 다른 분위기, 하지만 보스턴 선수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오늘은 반드시 이긴다.’
‘연패 따윈 용납 못해.’
지난 3년 동안 보스턴은 패배에 익숙하지 않은 세월을 보냈다.
패배를 당하면 그 분노가 다음 날에도 이어질 정도, 하루가 지나면 잊어버리는 다른 팀들과 전혀 다르다.
프로가 졌는데 어떻게 하하 호호 거릴 수 있나, 웃으면 정신병자 취급받는 곳, 그 중심엔 다카기가 있었다.
“실력으로 잡아낼 자신이 없으면 위협구라도 던져”
“아니야. 잡아낼 수 있어.”
다카기는 얼마 전 콜 업 된 댄 해리스를 붙잡고 정신교육을 시켰다.
상대가 얼마나 강하든 내가 강하면 위협구 없이도 쓰러뜨릴 수 있다. 그러나 이제 막 콜 업 된 댄 해리스에게 탬파베이는 부담스러운 상대, 하지만 겁 없는 루키 해리스는 걱정하지 말라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진짜 악마구나.’
몬테로는 그 모습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녀석들, 특히 다카기는 대놓고 빈볼을 던졌던 녀석이다.
물론 실력에 자신이 있으니 상대를 다치게 할 목적으로 빈볼을 던진 건 아니다.
우리 팀 선수가 빈볼을 맞거나 불합리한 상황이 오면 바로 날아가는 총알,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클럽하우스 생활을 함께 하다 보니 저 녀석이 얼마나 독한 놈인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됐다.
그런데 왜 어제 실책을 저지른 나에겐 아무 말도 안 하는 걸까. 괜히 신경이 쓰였다.
“나한테 무슨 할 말 있냐?”
“아니”
몬테로는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는지 바로 돌아보는 녀석, 거기다 않은 자세 그대로 목을 뒤로 꺾는데 공포영화의 한 장면처럼 등골이 서늘해 졌다.
정신을 재무장한 보스턴은 어제의 설욕을 갚아주기 위해 출전, 선발로 나서는 해리스는 A. J. 브라운 앞에서도 위축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따악 ~ !!
‘엇?!’
하지만 첫 맞대결은 안타, 자존심이 상한 해리스는 얼굴을 구겼다.
‘실력으로 잡아낼 자신이 없으면 위협구라도 던져’
이때 에이스의 충고가 머릿속을 관통했다.
처음부터 내 실력으론 브라운을 잡아낼 수 없다고 판단했던 건가, 하지만 이 말을 잘 음미해보면 상대를 맞추라는 뜻이 아니다.
안타를 맞아도 절대 기죽지 말라는 뜻, 안타 맞았다고 바깥쪽으로 도망치는 투수들이 있는데 그럴수록 더 몸 쪽을 찔러야 한다.
그만한 배짱을 보여야 타자들도 부담을 느끼는 법, 하다가 정 안 되면 진짜 맞추겠다는 각오로 투구에 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