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볼 것은 다 보았다 - (2)
[다카기 시즌 13승 도전]
[무패기록 이어갈지]
할아버지를 떠나보냈지만 다카기는 묵묵히 자기 길을 걸어갔다.
올 시즌 도전 목표는 메이저리그 역대 최고 승률, 머이저리그 150년 역사상, 정규 이닝을 채운 투수 중 무패를 기록한 투수는 한 명도 없다.
최고 승률은 1959년 필라델피아의 존 반더풀이 세운 18승 1패, 이것도 선발이 아니라 불펜으로 뛰며 기록했다.
이런 세계에서 지난 4년 동안 70승 9패라는 압도적인 승률을 올린 다카기, mlb 사무국은 새로운 영웅 만들기에 나섰다.
mlb의 수익곡선은 매년 상승세를 타고 있지만 평균 관중은 그렇지 못한게 사실, 그에 반해 보스턴은 270경기 연속 홈경기 매진이라는 기록을 이어가고 있다.
흥행부진도 피해간 보스턴의 야구열기, 그 중심에 다카기가 있다는 건 일목요연하다. 역대 최고 승률, 더 나아가 무 패 시즌을 만들어 낸다면 좋은 홍보가 되겠지.
전국방송 중계권을 쥔 사무국은 다카기가 등판하는 날에, 보스턴 게임을 집중 편성하기로 했다.
“왜 우리가 보스턴 중계를 봐야 하는 건데?”
하지만 팬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야구는 전국구 스타보다 지역 팬들의 사랑을 받는 선수들이 많은 편, 그래서 팀을 옮길 때도 신중해 질 수 밖에 없다.
돈을 택했다가 배신자로 찍히는 건 당연하고 새로운 팀에서 제 역할을 못하면 말 그대로 고립무원, 그래서 전 소속팀의 라이벌 팀은 되도록 피해 이적하는 일도 드물지 않다.
그만큼 지역 팀에 대한 팬들의 사랑은 각별한데, 우리가 왜 남의 팀 중계를 봐야 하나. 팬들은 전국 방송을 보느니 비싸더라도 케이블 tv를 보는 게 낫다며 항의를 거듭했다.
“우리는 나쁠 게 없는데”
하지만 자금 사정이 좋지 않은 구단은 사무국의 결정을 은근히 반겼다.
전국방송은 메이저리그 사무국 운영비를 제외한 수익금을 30개 구단에 균등하게 배분하는 구조, 당연히 시청률이 잘 나올수록 구단 수익에 좋다.
la처럼 80억 달러 짜리 케이블 방송 계약을 맺는 건 정말 드문 경우, 아직도 많은 구단이 1억 달러 미만의 케이블 방송을 맺고 있다.
전국방송이 살아야 우리에게 떨어지는 콩고물도 커지겠지, 애틀랜타 주는 보스턴 중계를 홍보하는 광고를 내보냈다가 팬들의 분노를 유발했다.
[그렇게 다카기가 좋으면 돈을 주고 사와라]
[돈 때문에 자존심을 팔다니, 내셔널리그 연속우승을 기록한 팀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한 푼이라도 더 벌고 싶으면 이기는 경기를 해라. 사무국이 털어주는 돈 받아먹을 생각뿐이니]
이런저런 논란 속에서도 강행된 경기 중계, 보스턴은 종이호랑이로 전락한 캔자스시티를 상대로 시즌 4연승 사냥에 나섰다.
‘올해는 누굴 데려오려나.’
내일 선발등판 일정이 잡힌 다카기는 벤치에서 경기를 지켜보며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겼다.
트레이드 기한까지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 있다.
캔자스시티는 노골적인 탱킹으로 전력을 재정비하는 중, 간판스타 몬테로도 유력한 트레이드 카드로 떠오르고 있지만, 야수진이 꽉 찬 보스턴이 유망주를 내주면서 데려올 선수는 아니다.
노릴만한 선수라면 올 시즌 6승 5패 평균자책점 3.40을 기록하고 있는 사무엘 로드리게즈, 하지만 나이도 젊고 캔자스시티 리빌딩의 한 축을 책임지는 선수라 이 팀은 별 볼 일이 없다고 봤다.
“바이엘이면 충분하나?”
[좋네]
하지만 그 예상은 빗나갔다.
수더랜드 단장은 도널드 바이엘과 유망주 2명을 캔자스시티에 내보내고 몬테로를 영입했다.
3루수 잭 개리슨이 확연한 노쇠화를 보이고 있는데다, 올 시즌 풀타임 유격수로 낙점 받은 스티븐스도 기대에 못 미치는 중, 3루와 유격수를 동시에 볼 수 있는 몬테로는 먹음직스러운 미끼였다.
거기다 몬테로는 올 시즌, 개막전에서 다카기의 볼을 치려다 발목이 뒤틀리는 부상을 당하면서 2달 정도를 결장했다.
FA를 눈앞에 두고 있지만 지금 페이스면 대박은 어려운 상황, 수더랜드 단장은 1+1계약을 제시하면 몬테로를 합리적인 가격에 써먹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거기다 보스턴은 최근 지역 케이블 방송과 2039년까지 40억 달러 규모의 연장계약을 맺은 상황, 돈이 나올 구멍도 충분하니 이 정도 투자는 가뿐했다.
[몬테로, 보스턴으로 전격 트레이드]
이 소식은 캔자스시티 일대를 뒤흔들었다.
설마 했는데 몬테로까지 팔아먹을 줄이야, 거기다 지금 보스턴과의 시리즈가 한창 진행 중 아닌가.
하루아침에 유니폼을 갈아입은 프랜차이즈 스타를 봐야 하다니, 캔자스시티 팬들은 이럴 바엔 보스턴을 응원하는 게 낫겠다는 시위를 벌였다.
“빠바밤 ~ 누가 왔게 ~ ?!!”
다음 날, 몬테로는 한껏 들뜬 얼굴로 보스턴 클럽하우스에 발을 들였다. 본인이 무슨 깜짝 선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호들갑, 하지만 다카기의 지시대로 보스턴 선수단은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봐? 다들 왜 그래? 나 몬테로야!! 올스타에 3번이나 뽑힌 선수라고!! 내가 온 게 기쁘지 않아?”
“저기 올스타 9번 뽑힌 녀석도 있어.”
다카기는 눈빛으로 데이브 셰퍼드를 가리켰다.
셰퍼드는 올 시즌 작년만큼의 장타력은 보여주지 못하고 있지만 타율 0.322, 19홈런, 78타점이라는 균형 잡힌 스탯으로 통산 10번째 올스타 선발 출장 영광을 얻었다.
몬테로는 그에 비해 어린애 수준, 뭣보다 보스턴은 메이저리그에서도 내로라하는 스타들이 모인 곳이라 몬테로는 명함도 내밀기 어려웠다.
“그건 그렇고 넌 아무렇지도 않냐?”
“뭐가?”
“6년 동안 몸담은 팀을 떠났잖아. 아무렇지도 않다고 할 수 있어?”
“괜찮아. 내가 스스로 나온 것도 아닌데 뭐”
몬테로는 오히려 잘 됐다는 반응을 보였다.
뱀의 머리가 되느니 용의 꼬리가 되는 게 낫다는 말이 괜히 있겠나, 보스턴은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잘 나가는 구단 중 하나, 올 시즌 좋은 활약하고 내친 김에 장기계약까지 맺겠다는 포부를 드러냈다.
“장기계약은 내가 먼저다. 새치기 하면 재미없어.”
이때 울반스키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울반스키도 피츠버그에서 넘어온 이주민으로 올 시즌이 끝나면 FA 자격을 얻는다.
작년엔 타율이 낮았지만 43홈런을 치며 존재감을 알렸고, 올 시즌도 30홈런은 너끈히 기록할 페이스, 여기에 MLB 최고 수준 수비 능력을 지녔으니 장기계약은 당연했다.
“너는 잘 쳐봤자 여기서 2년 머물고 떠날 신세야. 그러니까 괜한 욕심 가지지 말라고”
“다들 왜 이래? 원래 이렇게 서로 물어뜯는 관계야?”
몬테로는 푸대접에 당황했다.
지금껏 팀에서 최고 대우만 받고 지냈으니 당연, 하지만 울반스키는 이게 보스턴 클럽하우스의 룰이라며 충고했다.
“살아남고 싶으면 알아서 살아남아, 여긴 누굴 격려해주는 분위기가 아니니까.”
“주모자가 누구야? 이런 살벌한 분위기를 주도하는 녀석이 있을 거 아냐?”
선수들의 눈은 일제히 다카기를 향했다.
따뜻한 위로보다 독설이 먼저 날아가는 녀석, 물론 철벽의 에이스는 그딴 건 가볍게 튕겨내고 독서삼매경에 빠졌다.
“시간 됐어.”
“응”
그렇게 자기만의 시간을 즐기던 에이스는 경기 시작 1시간을 앞두고 불펜으로 자리를 옮겼다.
몸 풀기 훈련량은 선수들마다 다르지만 다카기는 대략 30 ~ 40개를 던지고 올라가는 편, 이날도 팀의 1회 초 공격 페이스에 맞춰 30개 정도만 던지기로 했다.
“자, 오늘은 몬테로 선수가 리드오프로 나서는군요. 올 시즌 성적은 타율 0.274, 홈런 9개, 30타점, 도루 11개, 어제까지 캔자스시티 유니폼을 입고 있었던 선수입니다.”
“팬들은 지금 기분이 어떨까요. 몬테로 선수가 데뷔했을 때 캔자스시티가 월드시리즈 우승도 노려보던 팀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됐으니 ··· 몬테로 선수도 마음이 편친 않을 겁니다.”
해설위원의 염려와 달리, 초구를 받아쳐 안타를 날린 몬테로는 밝은 미소를 지었다.
알아서 살아남는 게 보스턴의 규칙이라고 하지 않는가.
개막전 부상으로 많은 경기를 날려먹고 올스타전 선발도 무산된 올 시즌, 그래도 반전을 만들기엔 아직 늦지 않았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몬테로의 안타에 힘입은 보스턴은 가볍게 선취 득점에 성공, 불펜에서 몸을 풀던 다카기는 천천히 마운드로 향했다.
“자, 다카기 선수가 일주일 만에 선발등판을 치릅니다. 올 시즌 18경기 등판, 12승 무패 평균자책점 1.85, 126이닝 동안 볼넷 9개, 탈삼진은 169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볼넷이 승리보다 적다는 게 놀랍죠. 2경기 당 1개꼴로 볼넷을 내준다는 건데, 이게 말이 됩니까?”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일각에선 왜 우리가 보스턴 경기를 봐야 하느냐는 말이 있는데, 지금 이 선수의 투구는 150년 역사상 전례가 없는 수준입니다. 지켜볼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방에서 캔자스시티 팬들의 환호가 쏟아져 나왔다.
다카기를 응원하는 게 아니라 몬테로까지 팔아먹은 캔자스시티 구단을 향한 팬들의 원성, 그걸 잘 알고 있는 다카기는 이빨에 발톱까지 팔아먹은 호랑이를 마음껏 농락했다.
‘몬테로도 없으면 너희들은 ··· 아니다, 잘 먹을게’
시시한 사냥감이라도 사냥에 실패하면 맹수의 프라이드에 흠집을 남기는 법, 다카기는 평소처럼 평속 97마일이 넘는 빠른 볼과 체인지업을 앞세워 공 9개로 1회를 넘겼다.
어디에서도 못 볼 공격적인 투구와 구위, 답답한 경기에 익숙해져 있던 캔자스시티 팬들은 그 위용에 조금씩 빠져들었다.
“떨어집니다!! 삼진!! 어제 본 영화를 오늘 또 보고 있는 것 같군요.”
“저 체인지업은 배트가 안 나갈 수가 없습니다. 결국 빠른 볼을 공략해야 하는데, 그러다 보니 스윙이 급해지고 같은 패턴이 반복되고 있는 거죠.”
“명작은 몇 번을 봐도 안 질리는 법이죠. 다카기는 지금 투구의 정석을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몬테로는 멍한 얼굴로 3루를 지켰다.
우타자가 많은 야구, 이 방향으로 타구가 안 오는 경기는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런데 지금 다카기는 컨택도 허용하지 않는 상황, 이젠 돌아갈 수 없는 둥지가 됐지만 망가져가는 캔자스시티를 바라보는 것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따악 ~ !
“내가 잡을 거야!!”
마침 파울 존으로 날아오는 타구, 몬테로는 근성을 발휘해 담장 근처에서 타구를 낚아챘다. 몸이 펜스 너머로 넘어갈 뻔 했지만, 관중들이 잡아준 덕분에 무사했다.
“난 이곳에서 우승하고 싶었어요.”
몬테로는 팬에게 솔직한 심정을 털어놨다.
보스턴 클럽하우스에서 쓸데없이 들 뜬 표정을 지은 것도 사실은 아쉬움을 숨기기 위한 연기였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됐으니 어쩌겠나, 팬들과 작별 인사를 나눈 몬테로는 터벅터벅 3루로 돌아왔다.
‘알아서 살아남을 것, 나는 몰라.’
다카기는 3루 쪽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몬테로는 지금 위태로운 입장, 올스타 선발 3회도 옛 일이지 올 시즌 성적은 누가 봐도 어정쩡하다.
후반기에 뭔가 보여주지 못하면 FA 시장을 떠돌다 저니맨 신세로 전락할 수도 있는 커리어, 본인이 이겨내야 하는 운명이라 쓸데없는 정은 베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