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볼 것은 다 보았다 - (1)
“기분은 좀 어떠십니까?”
이곳은 키리코의 아버지가 원장으로 있는 병원,
의사의 물음에 환자는 말없이 눈만 깜빡거렸다. 급성심장마비라는 위기도 넘어선 일본 재계의 거물 고영길, 하지만 거목도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인생의 마지막을 준비했다.
“어떻게 방법이 없는 겁니까?”
“그게 ··· 이 증상은 노환으로 인한 겁니다.”
무네요시는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방법을 찾아봤지만 소용없었다. 노화로 인한 심장 판막질환, 편안하게 보내드리는 게 최선이라는 답에 무네요시는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혹시 건강하셨을 때 남기신 말은 없었나?”
“그렇잖아도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무네요시는 평소 아버지를 모시던 변호사와 얼굴을 마주했다.
워낙 꼼꼼하셨던 분이니 이런 경우도 대비해 두셨겠지. 아니나 다를까 변호사는 녹음테이프를 내놓았다.
[내 가족들은 들어라 너희들이 이걸 들을 즈음이면 나는 죽음을 앞두고 있겠구나.
나는 80평생 동안 남들이 누리지 못할 부와 명성을 누렸다. 그리고 귀여운 손자 손녀, 증손주까지 보았지,
이런 내가 무슨 미련이 있겠느냐. 나는 이 세상에서 볼 것은 다 보았다. 슬퍼할 것도 없고 세상에 남길 원망도 없지만 한 가지 부탁을 하고자 한다.]
고영길은 10년전 세상을 떠난 아내 곁에 묻히길 원했다. 그리고 본인의 명의로 된 재산은 자손들에게 균등하게 배분하라는 말 뿐, 아버지다운 유언이라 무네요시도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이제 문제는 뒤처리, 해외에 있는 가족들에게도 이 소식을 알렸다.
‘볼 것은 다 보았다 ··· 멋진 말이네’
다카기는 할아버지의 마지막에 눈물 따윈 짓지 않았다. 볼 것은 다 보았다니, 후회 없는 인생을 산 자만이 남길 수 있는 유언 아닌가.
나는 지금 눈을 감아도 그런 말을 남길 수 있을까.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았으니 그건 무리, 나는 앞으로 남은 인생에서 무엇을 볼 것인가. 지금 당장 일본으로 달려가 임종을 지켜보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오빠 언제 와?]
“응, 금방 갈 거야.”
[할아버지 많이 아프데, 빨리 와]
“응 ~ 알았어. 빨리 갈 게”
동생의 독촉 전화가 날아들었지만 일단 다독였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목소리, 얼른 가서 안아주고 싶었지만 마운드에서 뭔가 풀고 가지 않으면 가슴이 진정되질 않을 것 같았다.
“일단 귀국하는 게 좋지 않겠나?”
“아니요. 괜찮습니다.”
감독이 귀국을 권했지만 다카기는 거부했다. 여기서 등을 돌리면 마음이 약해질 뿐, 예정대로 출장을 강행했다.
“자, 다카기 선수가 시즌 17번 째 등판을 치릅니다. 올 시즌 11승 무패 평균자책점 1.91, 113이닝 동안 볼넷 7개, 탈삼진은 152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경기가 끝나면 바로 귀국할 예정이라고 하는데요. 일단 겉모습은 덤덤해 보입니다.”
다카기는 이날 볼로 스타트를 끊었다.
자신 있게 스트라이크를 박아 넣던 평소와는 다른 모습, 역시 가족에게 일어난 일이 심리적인 영향을 준 걸까. 철벽의 에이스라 불리고 있지만 그래도 심장이 뛰는 인간, 팬들은 이해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정신 차리자.’
다카기는 98마일 빠른 볼로 카운트를 만회했다.
나는 왜 할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는 것도 미루고 이 자리에 섰는가. 눈물을 흘릴 여유도 남기지 않도록 몸을 혹사시키기 위해? 잘 생각해보면 그게 아니다.
볼 것은 다 보았다는 유언, 나는 앞으로 이 마운드에서 무엇을 이루고 볼 것인가. 그걸 확인하기 위해 선 자리, 볼 질이나 하는 미래 따윈 보고 싶지 않았다.
‘이거 왜 이래?’
3구는 101마일 빠른 볼, 헛스윙을 돌린 채근성(오스틴 텍산스)는 혀를 내둘렀다.
원래 빠른 볼을 던지는 자식이지만 지금 공은 커트할 엄두도 안 났다.
할아버지가 임종을 앞두고 있다고 하는데, 저 녀석은 정말 눈물 한 방울 없는 기계인간인가. 타자를 씹어 먹겠다는 눈빛은 여전, 아직 카운트가 남아있는데도 삼진을 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스윙!! 삼진입니다!! 빠른 볼 4개로 첫 타자를 돌려세우는 군요.”
“역시 저희가 알고 있는 그 선수가 맞네요. 괜한 걱정이었습니다.”
다카기는 이후에도 보란 듯이 역투를 펼쳤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철벽, 상대선수들에겐 공포 그 자체였지만 팬들에겐 이보다 더 든든한 방패 막은 없었다.
* * *
“할아버지, 오빠 또 이겼어요.”
“ ········· ”
면회시간이 허락된 중환자실, 코하루는 눈만 깜빡거리는 할아버지 귀에 오빠의 승전보를 전했다.
웃고 싶지만 웃을 수 없는 이 답답함이란, 죽음을 앞두고 있지만 고영길은 마음속으로나마 미소를 지었다.
‘그 녀석은 앞으로도 잘 해낼 거야. 안 봐도 알 수 있어.’
사실은 손자의 활약을 조금 더 보고 저승으로 가고 싶었다. 10년이나 앞서 간 아내에게 들려줄 이야기는 충분히 많지만 그래도 조금 더, 조금 더 하다 보니 어느덧 여기까지 살아버렸다.
마지막까지 훈훈한 소식을 들려주는 녀석, 환자가 잠시 잠에 빠지자 키리코의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면회 시간이 끝났다는 사인을 줬다.
“앞으로 얼마나 버티실 수 있을까요?”
“글쎄요 ··· 이르면 오늘 밤, 늦어도 내일을 넘기긴 어려우실 겁니다.”
사돈의 진단에 무네요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각오는 했지만 막상 이 날이 오니 가슴이 뛰고 어질해지는 정신, 정신 차리라는 아내의 말에 겨우 마음을 다스렸다.
“아이 ~ 참!! 오빠는 빨리 온다고 해놓고!!”
“괜찮아, 오빠 올 거야. 언니랑 조용히 기다리자”
미사키는 펄펄 뛰는 막내를 다독였다. 늦어도 내일 아침에는 도착하겠지, 예상대로 다카기는 구단주가 내준 전용기를 타고 예상보다 일찍 공항에 발을 들였다.
택시를 타고 정신없이 내달려 병원에 도착, 조금 먼저 도착한 고모와 조카들이 먼저 보였다.
“하루 왔니?”
“네.”
“아이고 어떻게 하니 ~ 네 할아버지 정말 가시나 보다.”
다카기는 어쩔 줄 몰라 하는 고모를 다독여드렸다. 사람은 언젠간 죽는 법, 중요한 건 세상에 뭘 남기느냐 아니겠나. 볼 것은 다 보았다는 유언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스렸다.
“너희들 많이 컸구나. 오빠 영어발음 예전에 비해 많이 좋아졌지?”
“나 참 ··· 오빠는 이 상황에서 농담이 나와요?”
조카들은 붉게 달아오른 눈을 훔치며 돌아섰다. 뭐가 슬프다고 저렇게 훌쩍거리는 건지, 다카기는 그럴 필요 없다고 단언했다.
“할아버지는 이 세상에 미련도 원망도 없다고 하셨어. 가족들 중 누가 걱정된다는 말도 안 하셨고, 너희들이 훌륭하게 자랐으니까 편안하게 가실 수 있는 거야. 당당하게 가슴 펴고 들어가.”
한껏 여유를 부린 허세는 여기까지, 다카기는 가족들과 함께 병실에 발을 들였다.
왔다 갔다 하던 의식은 이제 거의 없는 편, 할아버지의 마음은 다 알고 있는데 무슨 말을 더 하겠나. 적막 속에 들리는 건 아직 숨이 붙어 있다는 걸 알리는 기계음 뿐, 다카기는 훌쩍거리는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7월 24일 오후 8시 13분 ··· 운명하셨습니다.”
키리코의 아버지는 착잡한 얼굴로 유족들에게 환자의 마지막을 알렸다.
지금껏 수없이 지켜본 환자의 운명, 익숙함이라는 무감정에 유족들의 슬픔을 너무 형식적으로 대했던 건 아닐까. 하지만 이번 일은 내 가족이 당한 일, 많은 것을 깨달은 하루였다.
“어떻게 하시기로 했어요?”
“조용하게 했으면 좋겠다. 네 할아버지 뜻도 그렇고 ··· ”
다카기는 아버지의 뜻대로 장례식은 가족장으로 하기로 했다.
생전 얼마나 많은 인맥을 쌓은 할아버지인가. 부고를 알리면 찾아올 사람들이 줄을 잇겠지만, 고인은 유언장에 그런 건 다 필요 없다는 뜻을 남겼다.
괜히 가족들만 피곤해지는 일, 저승 가는 길은 가족들만의 배웅으로 충분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고인의 뜻대로 진행된 장례식, 취재열기에 불타는 기자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었지만, 눈을 부릅 뜬 경호원들의 저지에 막혀 유족들에겐 접근도 하지 못했다.
다만 검은 양복을 입은 유족들을 먼 곳에서 사진으로 담아낼 뿐, 장례가 끝나고 유해는 신사에 봉납됐다. 무서울 정도로 침착하게 진행된 장례식, 거사를 마친 가족들은 변호사 앞에 다시 모여들었다.
“회장님 뜻대로 남은 유산은 가족들에게 균등하게 배분하기로 했습니다. 다시 한 번 확인해 보시죠.”
“아니요. 저는 됐습니다. 아버지에게 그동안 받은 재산도 많아요.”
다카기의 고모는 상속을 거부했다.
사실 누구보다 많이 아버지의 속을 썩였던 딸,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결혼했다가 4년 만에 이혼했다.
잘 나가는 사업가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냥 사기꾼, 두 딸을 키울 양육비도 지급해 주질 않았다.
‘아버지에게 손 벌릴 순 없지. 그렇게 말리셨는데’
그래도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미국에서 두 딸을 키워냈고,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고영길은 생전에 7억 달러가 넘는 재산을 장녀에게 넘겨줬다.
제 멋대로 살았지만 그래도 자기 밥벌이는 했던 큰 딸, 다 큰 자식 때려서 가르칠 수도 없고 어쩌겠나.
다카기의 고모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재산을 불려 미혼모를 지원하거나 이런 저런 봉사활동에 투자, 덕분에 미국에서 나름 알아주는 사회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렇게 속을 썩이고도 재산이라면 염치없을 정도로 많이 받았는데 어떻게 또 상속을 받나, 내 지분은 하루에게 물려주라며 발을 뺐다.
사실 고영길은 임종 1년 전, 자신의 재산 90% 이상을 아들과 자손들 명의로 넘겼다.
마지막까지 손에 쥐고 있던 재산도 일반인이 들으면 ‘헉’소리가 날 정도로 대단하지만, 자손들의 눈엔 그렇게 큰 떡으로 보이지 않았다.
“고모, 전 앞으로 구단에서 받을 돈이 3억 5천 만 달러나 되요. 할아버지한테 물려받은 빌딩도 2개나 있고요.”
“그래도 그게 아니야. 네가 받아야지 누가 받니?”
“아니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힘은 나눠봤자 좋을 게 없어요.”
다카기는 얼마 남지 않은 유산도 누나에게 넘길 것을 권했다.
이미 미사키는 그룹을 잇는 후계자 수업을 받고 있다. 누나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할 때를 대비해 조금 더 힘을 실어줘야겠지, 하지만 미사키가 거부하면서 남은 재산은 코하루와 타다요시 앞으로 돌아갔다.
아직 어리지만 언젠가는 그룹을 위해 일해야 하는 아이들, 그렇게 유산 분배까지 마무리하고 유족들은 신사를 떠났다.
“할아버지 안녕 ~ 훌쩍 ~ ”
“울지 마. 할아버지 앞에선 웃어야지.”
코하루는 오빠의 위로를 받으며 문턱을 넘었다.
머리털 나고 가족의 죽음을 경험한 건 이번이 처음, 솔직히 지금까진 죽음이라는 것에 대한 개념도 없었다. 강아지가 죽는 것도 못 봤는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어린 마음에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까.
하지만 코하루는 이번 일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소중한 사람도 언젠가는 떠나가는 법, 지금 옆에 있는 가족들을 더 각별하게 여기게 됐다.
“오빠야 ~ 야구 여기서 안 돼?”
“여기는 미국만큼 돈을 안 줘”
솔직한 답에 유족들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여기선 아무리 열심히 해봤자 그만한 돈은 못 벌겠지, 하지만 코하루는 돈이라면 내 재산 다 줄 테니까 여기서 야구하라며 고집을 부렸다.
“너 진짜 재산 다 줄 거야?”
“응!! 다 가져가!!”
“음 ··· 알았어. 생각 좀 해 볼게.”
말만 그렇게 했지, 다카기는 동생이 방심한 틈을 타 미국으로 날아갔다.
오빠라는 놈이 어떻게 동생 재산을 받나. 돈이라면 내 손으로 벌면 그만, 얼른 돌아오라는 독촉문자는 가볍게 무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