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위대한 건 나다. 너희들이 아니야 - (13)
“예, 참석하겠습니다.”
메이저리그 올스타전을 사흘 앞두고 앤디 프론스키는 사무국의 초청을 받았다.
불의의 사고로 은퇴한지 어느덧 2년, 이제는 훌훌 털어버리고 그라운드에 복귀할 때가 되지 않았나. 일단 특별 해설위원으로 시동을 걸었다.
“우와!!”
덕분에 프론스키의 주니어도 특별한 선물을 받았다. 아버지의 쾌유와 복귀를 기원하는 선수들의 메시지가 담긴 온갖 물품들, 미래의 메이저리거를 꿈꾸는 소년에게 이보다 가슴 뛰는 일은 없었다.
“뭐야. 이 사람도 보냈네요?”
“그렇겠지.”
프론스키는 아들의 시큰둥한 반응에 미소를 지었다.
다카기는 아버지와 자주 연락을 주고 받는 선수,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투수지만 접근성이 가까운 사람이라 다른 선수들의 메시지만큼 감동을 받진 않았다.
“너 그거 알고 있냐?”
“뭐가요?”
“보스턴 팬들 중 그 녀석에게 사인 못받은 사람은 없어. 너도 그 중 한 명이고”
아들과 달리 프론스키는 다카기의 메시지를 특별하게 받아들였다. 다른 선수들은 행사 때문에 형식적으로 보낸 거지만 다카기는 이전부터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다.
특별한 친절함보다는 익숙함에 진심이 담겨있는 법. 다카기에게 사인 한 번 받았다고 또 사인 받기 싫어하는 팬들이 있을까.
친절함은 자연스럽게 배어나오는 것, 보스턴 팬들이 다카기에게 열광하는 이유는 실력뿐만이 아니라, 다른 요인도 크게 적용했다.
너도 메이저리거가 되고 싶다면 이런 친절함이 자연스럽게 배어나와야 된다. 의무로 해주는 서비스와 마음에서 우러나는 서비스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고개를 끄덕이던 주니어는 다카기의 사인과 메시지가 적힌 공을 방으로 가져왔다.
이미 장식장에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는 사인 볼, 새로 온 녀석을 그 옆에 두고 뭔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음 ··· 한 번 시험해 봐야지.”
아버지 말대로 친절함이 자연스럽게 배어나오는 사람이라면 또 해주지 않을까. 그렇게 미션을 품에 안고 아버지를 따라 시카고로 향했다.
* * *
[히잉 ~ 나는 못 가]
올스타전을 앞두고 다카기는 여동생의 푸념에 시달렸다.
이제 소학생이 된 코하루, 방학이 7월 말이라 7월 중순에 시작되는 올스타전은 참가할 수 없게 됐다. 딸이 없는 다카기는 여동생을 친딸처럼 여기는 편, 가능하면 데려가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하는 게 안타까웠다.
[오빠가 7월 말로 연기하라고 하면 안 돼?]
“그게 말이 되니, 오빠는 그런 힘이 없어”
[칫 ~ 치사하다. 왜 이렇게 일찍 하는 거야?]
코하루는 오빠를 따라 올스타전에 2번이나 참석했다. 축제 분위기를 다시 한 번 느끼고 싶었지만 이젠 불가능한 일, 그래도 오빠를 응원하는 말은 잊지 않았다.
“방학하면 놀러 와, 오빠가 많이 놀아줄게”
[으응 ~ 사랑해요 ~ ♡]
동생의 애교에 다카기는 아빠 미소를 지었다.
딸 노릇을 대신해주는 동생, 곁에 있었다면 깨물어주고 싶었지만 ‘나도’라는 말로 아쉬움을 다스렸다.
그리고 다음 날 카퍼레이드에 참석, 요즘 머리털이 부쩍 올라온 아들을 품에 안고 팬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너도 손 흔들어야지.”
다카기는 멍 하니 있는 아들에게 손을 흔들라고 했지만, 타다요시는 고개를 저었다.
“저 사람들은 아빠를 좋아하는 거잖아요. 제가 손 흔들어도 돼요?”
아들의 반격에 다카기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3살 밖에 안 된 녀석이 언제 이렇게 머리가 트인 건지, 손 흔들어도 뭐라고 할 사람 없다며 영업용 미소를 권했다.
낯을 많이 가리는 아들이라 이런 자리에 자주 데려와야 차츰 나아지겠지, 그렇게 타다요시는 행사장 입구로 갈 때까지 팬들을 향해 손을 흔드는 행동을 반복했다.
“여러분들!!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가 오고 있습니다!!”
행사장 입구에 진을 치고 있던 리포터는 다카기의 등장에 목소리를 높였다. 다들 동의하는지 환호성으로 답해주는 팬들, 차에서 내린 다카기는 자연스럽게 리포터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카고에 오신 소감은 어떤가요?”
“아주 평온한 곳이네요. 아니면 여기만 그런 건가요?”
의미심장한 질문에 리포터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시카고는 마피아로 유명한 주, 다른 곳은 갱단이 우후죽순 난립하고 있지만 시카고는 통일된 조직이 군림하고 있다.
총기 문제도 심각한 편, 오죽하면 기관단총을 ‘타자기’라고 부를까. 그만큼 총기가 익숙한 동네, 마피아와 정계의 연계도 심각해 얼마 전 주지사와 그 측근들이 줄줄이 FBI에 체포되기도 했다.
그래도 시카고 파이어스의 홈구장 레이트 스테이트 필드 일대의 치안은 안전한 편, 뒷조사가 취미인 다카기는 그런 사정쯤은 알고 있었다.
“한마디만 하고 들어가도 될까요?”
“네.”
“No Guns!! No Guns(총기 반대)!!”
느닷없는 총기 반대 시위에 팬들은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한해에 시카고에서 총기로 죽는 사람은 수백 명, 미국 대통령도 이번 사태를 계기로 시카고 치안을 잡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주민들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도 통치자의 의무, 반복되는 총기사고에 질린 시카고 팬들은 총기반대 시위에 힘을 보탰다.
“마음대로 쏴!! 불바다를 만들라고!!”
하지만 홈런더비에선 허용 돼야 하는 화력무기, 다카기는 총은 필요 없으니 대포를 쏘라며 선수들을 압박했다.
하지만 오늘 따라 시원치가 않은 타자들의 방망이, 다카기는 차라리 내가 치는 게 낫겠다며 타박을 늘어놨다.
“그럼 진짜 네가 해 보던가.”
“그렇잖아도 그렇게 하려고”
라운드가 정리되는 틈을 타, 다카기는 직접 배트를 잡았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깜짝 이벤트, 행사를 총괄하는 요원들은 순간 당황했지만 막간 이벤트라 이 정도의 돌발행동은 인정했다.
다만 공을 던져 줄 사람이 없다는 게 문제, 마침 그라운드로 돌아온 프론스키를 떠올렸다.
“내려오라고 해요. 지금 중계석에 있을 거 아닙니까?”
모든 게 예상 외로 진행되는 시나리오, 다카기의 콜을 받은 프론스키는 양복을 벗고 그토록 그리워하던 마운드에 올랐다.
원래는 내일 올스타전에서 시구를 할 예정이었는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그래도 어색한 표정 따윈 짓지 않았다.
한때 마운드 위의 포커페이스라고 불렸던 몸, 뇌좌상으로 운동능력은 많이 상실했지만 공을 던지는데 문제는 없었다.
“여기라고 여기, 아직 감이 덜 잡힌 거야?”
초구는 히팅 범위를 한참 벗어났다. 다카기는 아직 감이 덜 잡혔냐며 프론스키를 도발, 발끈한 포커페이스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안 봐준다.’
이번엔 칠만하게 들어온 공, 다카기는 온 힘을 다해 배트를 휘둘렀지만 타구는 펜스 근처를 기웃거리는 어린아이의 글러브에 들어갔다.
망신은 당했지만 그래도 기왕 나왔으니 하나는 치고 들어가야겠지. 다음 공을 요구했다.
따아악 ~ !!
“오 ~ ”
이번엔 제대로 걸린 타구, 좌측 상단 스탠스에 큼지막한 타구를 박아 넣은 다카기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팬들에게 즐거움을 준 돌발 이벤트, 쏟아지는 환호에 감사를 표한 다카기는 마운드와 타석의 중간 즈음에서 프론스키와 포옹을 나눴다.
“돌아온 걸 환영한다.”
“그래, 불러줘서 고마워”
포커페이스는 참고 참았던 눈물을 찔끔 흘렸다. 날 잊지 않고 기억해주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지 않은가. 불의의 사고로 커리어를 마무리 했지만 이제 아쉬움 따윈 없었다.
“봤지? 오빠 약속 지켰다.”
다카기는 중계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3년 전, 다카기는 동생에게 언젠간 홈런더비에 출전해 홈런을 치겠다고 약속했다. 직접 봤다면 더 좋았을 텐데, 올해는 일본에 남을 수밖에 없었던 동생, 그래도 묵혀뒀던 숙제를 해결한 다카기는 후련한 미소를 지었다.
여러모로 화제를 끌고 다니는 선수, 중계석으로 돌아온 프론스키는 해설위원들의 질문에 시달렸다.
“원래 이거 계획된 일이었습니까?”
“아니요. 전혀요. 솔직히 저도 놀랐습니다.”
프론스키는 뒷담화를 쏟아냈다.
이럴 거면 응원의 메시지를 보낼 때 눈치라도 줄 것이지, 몸도 제대로 못 풀고 마운드로 소환된 탓에 공을 제대로 던져주질 못했다.
하지만 깜짝 이벤트 덕분에 감동이 컸던 것도 사실, 이어지는 질문에 답을 이어갔다.
“다카기는 실제로 어떤 선수입니까? 클럽하우스 생활을 함께 한 만큼 잘 알고 계실 것 같은데요.”
“생긴 것보다 따뜻한 선수입니다. 지금 이 중계를 듣고 계신 분이 있다면 망설이지 않고 다가가십쇼. 분명 친절하게 응해줄 겁니다.”
다카기는 잘 생긴 얼굴을 하고 있지만 날카로운 눈매나 꾹 닫은 입술 때문에 언뜻 보면 살가운 인상은 아니다.
그래도 주변 사람들을 잘 챙기는 성격, 마음에 들진 않지만 가까이 지낼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렇게 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기고 막을 내린 올스타 전야제, 선수들은 내일의 본무대를 기약하며 각자의 자리로 흩어졌다.
다카기도 그 중 한 명, 가족과 함께 호텔로 돌아가던 중 반가운 얼굴을 마주했다. 앤디 프론스키와 그의 주니어, 프론스키는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했지만 다카기는 감사는 한 번이면 족하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저 사인 해주세요.”
이때, 프론스키의 주니어가 마음 속에 담아두고 있던 미션을 꺼냈다.
이 사람은 이번에도 친절하게 사인에 응해 줄 것인가, 은근 미션 실패를 기대했지만 다카기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펜을 집어 들었다.
“왜 그렇게 실망한 표정을 짓냐? 필요 없어?”
“솔직히 필요 없어요. 집에 2개나 있거든요.”
솔직 담백한 말에 다카기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 반응도 마찬가지, 하지만 다카기는 기어이 사인 볼을 손에 쥐어줬다.
“너는 필요 없어도 주위에 필요한 사람이 있을 거야. 선물로 줘.”
“알았어요.”
주니어는 완패를 시인했다.
정말로 친절함이 몸에 밴 사람, 나도 최고의 선수가 되려면 이런 마음자세는 가지고 있어야겠지, 품에서 뭔가를 주섬거렸다.
“이거 선물로 드릴게요.”
“뭐니?”
“제 사인 볼이요. 나중에 저도 메이저리그 될 거니까 답례로 미리 드리는 거예요.”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다카기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네가 도전할 만큼 메이저리그는 만만치 않다며 면박을 준 기억이 있는데, 이렇게 선물까지 챙겨줄 줄이야. 고맙다며 악수를 나눴다.
“제가 메이저리거 될 때까지 절대 은퇴하면 안 돼요. 아저씨랑 한 판 붙는 게 제 목표니까요.”
“그래, 언제든지 기다려 줄게.”
또 다른 라이벌의 도전을 받은 다카기는 다음 날 경기에서 위력투를 선보였다.
내 목을 노리는 놈들이 사방에 깔린 건 환영할 일이지만, 막상 도전을 받고 나니 이 자리를 지켜야겠다는 의욕이 끓어올랐다.
‘위대한 건 나다, 너희들이 아니라고’
다카기는 내셔널리그의 1회 말 공격을 삼진 2개 포함 땅볼 하나로 틀어막았다.
최고의 타자들이 모였지만 그래도 치기 어려운 공, 너희들은 아직 멀었다며 한 수 가르쳐 줬다.
이어지는 2회도 상황은 마찬가지, 3타자를 연속 삼진 처리하며 팬들의 환호를 독식했다.